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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거리 티타임)4. 날개가 부러진 흑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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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2, 2022 10:31에 작성됨.

"나 왔어, 히오리."


"어서 오세요, 프로듀서.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히오리가 입원해있는 병실에 들어섰다.

현재 히오리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린 상태다. 언제 걸린 건지도, 무엇 때문에 발병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과도 격리되어 독방에 입원해 있다. 오죽하면 의사도 '의료인 인생 30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듣기로 이 의사는 히오리의 질병을 연구해서 눈물을 쓸 거라는데, 그리고 이 병 이름을 카자노 증후군이라고 명명할 거라는데, 나도 그렇고 히오리 입장에서는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히오리가 유명해진다면 아이돌로서 유명해져야지, 아무 정보도 없는 희소 질환의 투병자로서 유명해지는 건 절대 원하지 않는다.



히오리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는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비록 이렇게 안부를 묻기는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네, 이제는 더 아프지도 않아요."


그 의미는 히오리의 몸을 갉아 먹는 질병의 고통이 너무 일상적인 나머지 이제 무감각해졌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말하는 히오리의 얼굴에는, 너무나도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크서클이 정말 많이 내려왔네, 잠을 못 잔 거야?"


"사실 밤이 되면 너무 아파요. 여기 가슴 부근도 뜨겁고, 몸 여기저기를 찌르는 듯이 아파져요."

"그럴 때마다 여기 이 진통제를 먹고는 있지만, 너무 자주 먹다 보면 중독이 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통증이 때에 맞춰서 오는 것도 아니고."


히오리의 병 증상은, 몸 곳곳에서 통증과 고열을 일으키는 동시에 불면증을 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피부가 심하게 갈라지게 만든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죽지는 않겠지만 언제 끝날지도 불명인 질병'이라고 한다. 그것은 히오리, 그리고 나에게 있어 지옥의 판결과도 같았다. 차라리 완화 주기가 있기라도 했다면 조금은 안심하며 그때를 기다릴 텐데, 그런 시기조차 없이 아픔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히오리에게 주어진 시련이자 고난이었고, 슬픔이었다.


"프로듀서."


"왜 그래, 히오리?"


"...저는 언제까지 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나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알고 싶다. 히오리가 언제까지 이 아픔 속에 갇혀있어야 하는 건지.


"죽을 때까지 아파야만 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몰라."


비통하게도, 히오리는(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죽을 때까지 약도 없이, 원인도 모른 채 아파야만 한다.

적어도 이 병이 죽을병이기라도 했으면 조금이나마 나으련만, 이 병은 히오리를 절대 죽일 수 없다. 아니, 죽이지 않는다.

잔혹하게도, 가장 놓고 싶은 것을 놓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대체 왜….'


만약 이 질병이 전염되는 병이라면, 나는 기꺼이 전염되어 히오리의 고통을 나눠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질병은 전염도 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투병자 한 명의 삶을 부수고 짓밟아 평생 되돌아오지 못할 곳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프로듀서."


"응, 히오리."


"마노와 메구루,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만나지 못하게 된 지 좀 된 것 같아요."


"마노와 메구루…. 잘 지내고 있어. 요즘 솔로 활동 때문에 분주하더라."


나만큼이나 마노와 메구루도 히오리를 무척 걱정하고 있다. 자기들도 히오리의 병문안을 가겠다고 계속 나서고 있지만, 회사 차원에서 계속 막히는 상태다. 왜 막히냐고?

지금 히오리는, 대외적으로는 학업에 집중한다는 명목하에 일시적 휴양 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 희소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담당 프로듀서인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문병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 없다.

그냥 차라리 질병에 걸렸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 일인데, 왜 굳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해야만 하는 걸까.


"마노와 메구루랑은 연락해봤어?"


"자주 통화해요. 통화할 때마다 제가 보고 싶다고 울곤 하죠."

"...저도 울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히오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째서 283 프로덕션에서는 친구들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



나도 알고 싶다.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외적으로 나쁜 것도 아닌데,

어쩌면 지금 히오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질병의 증상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못함으로써 생겨나는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나라도 왔으니 잘 된 거라는 말은 구차한 변명거리, 나뿐만이 아니라 히오리의 친구들 또한 이곳에 와있어야 한다. 히오리는 나만큼이나 마노와 메구루를 보고 싶어 하니까.


"..."



"..."



"...무슨 말씀이든 해주세요, 프로듀서."



"...할 말은 무척 많은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라서, 하고 싶은 말들을 녹이고 한데 뒤섞어. 결국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게 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라도 해주시겠어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



가슴 속에서 울컥울컥 차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삭힌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을, 반쯤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비참해. 정말 비참해."



"비참…. 하다고요?"



"히오리 네 잘못도 아닌데, 원인도, 치료법도, 전례도 없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질병에 걸려서 오랜 시간 고통받아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아파야만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런데 어떻게 비참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저를 동정하시는 건가요?"



"동정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어. 히오리는 그런 게 싫으려나?"



"자기를 동정하지 말라는 말이,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어요. 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지금 제가 이렇게 된 데다, 프로듀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 전 여러모로 비참한 상황에 놓였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동정받으면 왠지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에요."



"...알았어. 동정은 하지 않을게. 히오리가 싫어한다면, 원하지 않는다면.“

"..."

"조금만 울어도 될까?"


"예, 원하시는 대로 해주세요. 가슴 속이 시원하실 때까지 우셔도 괜찮아요."

"프로듀서도, 저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시는군요."


그렇게까지 말을 들으니,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고개 숙여 눈물 흘려 울었다. 아니,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히오리를 이 지옥 같은 질병의 구렁텅이 속에서 도저히 꺼내줄 수가 없음에, 그 안에 히오리를 홀로 두어야만 하는 무력함에, 이 모든 걸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 저주스러운 두 눈의 존재에, 나는 억장이 무너지고 또 무너져 내렸다.


"히오리…. 히오리…!"

"대체 왜…. 왜 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거야!!! 왜!!!"


악을 쓰며 울었다. 비록 히오리는 지금 개인실에 있어서 주변엔 다른 환자가 없지만, 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면 다른 병실에 내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히오리도, 악을 쓰며 큰 소리로 우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어루만져주었다. 아무래도 말려봐야 별로 소용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고,


"저기…."


말을 걸어왔다.


"히오리인가…? 히오리야…?"


"아, 아니요. 간호사님이세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그때 간호사분께서는 내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속으로 기겁하셨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일이시죠…?"


"그, 카자노 히오리 씨 보호자 되시죠? 지금 면회 시간이 다 끝나셔서요."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고통받는 히오리의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 정신없이 울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이제 가볼게, 히오리. 잘 있어…."


다 운 줄 알았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은 듯 목소리가 떨렸다.


"네, 프로듀서.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만약 내일 시간이 난다면, 와도 괜찮을까?"


"언제든 괜찮아요. 저는 그저 프로듀서가 와주시기만 해도 기쁜걸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잘 있어."


간호사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그렇게 나가는 도중에도, 몇 번씩이나 뒤돌아 히오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본 히오리도,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히오리를 버려둘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도 반드시 시간을 내어 병문안을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집에 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담당 아이돌이 아픔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내가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그렇게 마음 아파하며 자리에 제대로 눕지도 못할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히오리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마노와 메구루처럼 진실을 아는 동료들 또한 눈물을 삼키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몰래라도 마노와 메구루를 병문안에 데려가고 싶지만, 설령 발각되기라도 하면 나는 물론이고 마노와 메구루도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어떤 책임을 어떻게 물게 될지 좀체 예상되질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오리 본인부터 병마가 가져오는 고통과 함께 외로움이 더해진 나날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원인도 알 수 없는 병은 너무 고통스럽지, 그렇다고 치료법이나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병원 내에서도 화장실 아니면 담당의의 진찰실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히오리의 고통에 대해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히오리 곁에서 간호도 해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은데, 불행하게도 현생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출근해서 일해 돈도 벌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거기다가 병원은 병문안 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24시간 내내 히오리를 간병해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마음은 히오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몸은 그럴 수가 없다.


신이시여,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히오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녀는 평생을 선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주어지는 일들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했고, 또 비록 커뮤니케이션은 조금 서투를지언정 최선을 다해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히오리가 이러한 고통 속에 빠져야만 하는 겁니까?

물론 살면서 죄를 한두 가지 정도는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 죄가 얼마나 크기에 히오리가 이런 병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겁니까? 당신의 그 넓다는 아량으로 그녀를 용서해주실 수는 없었던 겁니까?

신이시여, 제발 그녀를 구해주소서. 그녀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히오리를 살려주시옵소서….





절박하게 기도하다가 어느새 잠들었던 건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햇빛 쨍쨍한 아침이 되어 있었다.



"벌써 아침...? 몇 시지...?“


시계를 확인해보니, 바늘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말은, 지금 출발해도 지각이라는 뜻이다.


"젠장!!! 젠장!!! 벌써 8시 30분이야?! 오랜만에 하즈키 씨한테 혼 좀 나겠네!!!"


헐레벌떡 옷만 갖춰 입은 뒤, 다른 짐들을 대략 챙겨 차에 타 페달을 밟아 프로덕션으로 달렸다. 화장 같은 건 신호 걸릴 때를 틈타 잠깐 잠깐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린 끝에 프로덕션에 도착했고, 기적적으로 데드라인에 걸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인사고과에서 평점이 깎일 뻔했어.


덜컥,


문을 열고 허겁지겁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님."


"예, 예! 좋은 아침이에요, 하즈키 씨!"


"오늘은 왠지 늦게 오셨네요. 평소에는 일찍 오셔서 모든 준비를 다 마치셨었는데."


"아, 네! 하필이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사실은 히오리가 겪는 병마가 너무 슬퍼서 울다가 잠들었는데 하필이면 깨어난 시간이 늦었을 뿐이지만,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님, 평소에 무척이나 일을 많이 하시긴 했죠. 그게 무리가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조정해드릴게요."


...

사실 업무량을 줄이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지각 직전의 세이프에 대한 변명을 한 것뿐인데, 의도치 않게 업무량이 조정되었으니 나로서는 행운이다. 그리고 업무량이 조정되었다는 것은 조금 더 일찍 퇴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이고, 이는 히오리에게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라 주체할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히오리. 곧 갈게.


"그나저나, 프로듀서님."


"무슨 일이신가요, 하즈키 씨?"


"...히오리 쨩은, 어떤가요?"


이렇게 묻는 하즈키 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마치 누군가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여전히 아파하고 있어요. 나아질 차도도, 치료법도 없는 상태예요."


말하면서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색은 안 하지만 하즈키 씨도 나와 같은 감정이리라.


"히오리도 그렇고, 마노와 메구루도 굉장히 보고 싶어 해요."


"...프로듀서 씨."


"네…."


"정말로, 알고 싶어요. 어째서 우리는, 히오리를 보러 갈 수 없는 거죠?"


"..."


"히오리는 우리 사무소 소속이고, 저희는 히오리의 동료인데, 어째서 동료가 동료를 만나면 안 되는 거죠?"

"사장님은 어째서, 그런 명을 내리신 거죠? 어째서 저희는, 히오리와의 유대를 강제로 끊어내야만 하는 건가요?"


내가 더 알고 싶다. 어째서 히오리는 동료들을 한 명도 만날 수 없어야만 하는 건가? 내가 본 히오리는, 볼 때마다 병마와 함께 외로움을 끌어안은 채 상처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회오리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마노와 메구루조차도 전화 통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만약 동료들이 히오리를 볼 수 있다면, 히오리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병마는 몰라도 외로움만큼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히오리를 보고 싶어 하고, 히오리 또한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알고 싶다. 도대체 사장님은 무엇을 그리도 숨기고 싶었던 걸까? 히오리가 전례 없는 불치병에 걸린 것은 나로서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프로덕션의 모든 인원을 통제하고, 세상이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건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 사장님께 사유를 여쭤보았었다. 어째서 히오리를 만나면 안 되느냐고,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해야만 하느냐고. 그럴 때마다 아마이 사장님은 '회사의 유지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283 프로덕션은 소속 아이돌 한 명이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 흔들릴 회사였던가?

사실 외부에 발설되지 않았을 뿐, 283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들은 이미 알고 있다. 히오리가 전례가 없던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아마이 사장님은 그것을 공공연한 '비밀'로 만들어버렸고, 이에 실망한 아이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마노와 메구루는 말할 것도 없고, 사장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쉬즈의 니치카마저도 사장님의 이런 행보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곤 했다. 그러나 사장님 또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고, 혹 누구라도 이 사실에 대해 외부에 발설한다면, 그는 형사고발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나는 알고 싶다. 아무리 아이돌이 회사의 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사장님에게 있어 히오리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말 그대로 고장 나버린 불량품인 걸까? 고장 나버렸다는 사실을 감추어야만 하는 존재인 걸까? 그런 사실이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기에 모두를 입막음해야만 하는 걸까? 정말로 이것이, 옳은 걸까?



그 의문 속에서 일하고, 업무를 보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시간이네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그럼 이제 점심을 먹도록 하죠."


"그러죠. 어디서 먹는 게 좋으려나…."


"밖에서 식사하시려고요?"


"늦잠을 자는 바람에 도시락을 못 싸 왔으니까요."


말한 뒤, 일어나 프로덕션 밖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긴 하지만, 사실 별로 입맛이 없다. 지금도 병마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히오리가 생각나서일까, 아니면 업무 중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 딱히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만약 내가 지금 뭔가를 먹게 된다면, 그건 점심시간이라는 시간에 대한 의무로서지, 정말 배가 고파서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의무감으로 식사를 하기에도 특별히 먹을 만한 음식이 없고.


"...히오리가 보고 싶다,"


지금 당장 업무를 때려치우고서라도.


"히오리, 잘 있으려나…."


분명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겠지.


"...나는 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걸까."


히오리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곁에 있는 것뿐, 히오리의 아픔을 같이 겪는다거나 할 수는 없다.

어쩌면 히오리는, 내가 자신과 같은 괴로움을 겪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히오리의 아픔을 함께 알지 못하는 게 더욱 괴롭다. 그 느낌을 안다면 히오리를 더욱 깊이 위로해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히오리는 내가 아픈 걸 절대 원치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히오리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 '히오리를 위한 일'이라고 포장하는 것조차 히오리에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히오리 앞에서는 그녀의 아픔을 나눠가지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



먹은 것도 없이 사무소로 돌아오니, 어째서인지 다들 퇴근하려는 분위기다. 시계를 보니 아직 1시 반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에? 벌써 퇴근하시는 건가요?"


"아, 네. 오늘은 오전 업무만 있는 날이잖아요. 모르시나요?"


"오전 업무? 그게 무ㅅ…. 아."


생각해보니 오늘 토요일이다. 주말엔 자율적인 출근이 보장되는 터라, 오지 않아도 되었지. 근데 나는 왜 온 걸까.

아무래도 히오리의 투병 생활 시작 이후로 날짜 감각마저 잃어버리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히오리가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뒤로부터, 나는 일이 끝나면 하루가 멀다고 히오리가 입원한 병실을 방문해 병문안을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병문안을 왔던 때가 무슨 요일인지, 오늘은 또 무슨 요일인지, 내일은 무슨 요일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날짜 감각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될 주말에, 지각 1초 전이라는 추태를 부려가면서까지 회사에 오고 말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난 날짜 감각이나 시간 감각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이제 히오리를 보러 갈 수 있다는 희망뿐이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본다면, 분명 말할 것이다. 히오리에게 완전히 빠졌다고. 히오리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난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도 내가 히오리에게 빠져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어째서냐고? 내가 283 프로덕션에 처음 입사했을 때 맡았던, 처음이자 유일한 담당 아이돌이니까.

그런 히오리가, 지금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담당 프로듀서 된 사람으로서, 히오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을 챙겨 사무소를 나서려는데,


"저기, 프로듀서님…!"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히오리의 동료 아이돌인 마노와 메구루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도, 히오리 병문안 가는 거야?"


"아, 응. 가야지. 히오리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주말인데도 여기 왔네?"


"저희는 아침에 라디오 수록 스케줄이 있었거든요. 끝내고 돌아오니까 이 시간이 되었어요."


"그나저나 프로듀서! 히오리 병문안 간다고 했었지?"


"그렇지. 히오리에게 둘의 안부 전해줄게."


"그, 프로듀서. 그러니까…."


운을 떼자, 갑자기 메구루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도, 데려가 주면 안 돼?"


"...병원으로?"


"제발 부탁드려요, 프로듀서님. 히오리가 너무 보고 싶어요. 제발 한 번만…. 데려다 주세요."


"에…."


미리 말하지만, 마노와 메구루는 담당 프로듀서가 따로 있다. 나는 히오리만 담당한다.


"너희 프로듀서가 알면 뭐라 할 것 같은데."


"저희 프로듀서님께는 집에 간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진작에 퇴근했지. 우리보다 더 빨리 가버렸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하아…."


나도 마음 같아서는 마노와 메구루를 데려가고 싶다. 히오리도 마노와 메구루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기에, 오늘 데려간다면 셋은 극적인 상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 특히 아마이 사장님의 시선이다. 사실 사장님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하즈키 씨가 했던 말과 같은 의견이고, 모두가 히오리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장님은 이 회사의 머리이자 수뇌부. 아무리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도 사장님이 반대하면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 히오리의 프로듀서인 나를 제외한 우리 중 누구라도 히오리를 만났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는 사장님에 의해 고발당하게 될 것이다.


"...괜찮을까?"


"무엇이 말이야?"


"너희도 알고 있잖아. 우리 중 누구라도 히오리를 만났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사장님께 고발당할 거라는 걸."


"...상관없어요. 고발할 테면 하라죠. 오히려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만든 게 더 나쁜 거예요."


"아이돌이 되어서 히오리를 못 만나느니, 차라리 일반인이 되어서 히오리를 마음 편하게 만날 거야."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각오는 다 되어있다고(는걸요)."


"...좋아. 알았어. 가자."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로서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다.

한편, 설령 마노와 메구루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때엔 내가 책임지고 막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둘은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돌. 그런 마노와 메구루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아이돌을 그만두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무엇인가요, 프로듀서님?"



"오늘 있는 일,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물론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발각되면 안 되니까. 미리 변장용 도구도 챙겨왔어."



"어느새 거기까지…."



이렇게 보니까, 마노와 메구루의 제안은 오늘 갑작스럽게 던져진 게 아닌 것 같다. 마치 예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듯한 느낌.



마노와 메구루를 태운 차는 30분 정도가 지난 후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는 25분 정도면 되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차가 막혀서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었다.

겨우겨우 병원에 도착해 차를 대었고, 그 사이 마노와 메구루는 변장을 마쳤다. 얼마나 철저하게 변장했는지, 룸미러로 흘끗 봤는데,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마노와 메구루는 어디 가고 영 딴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야.


"자, 병원에 도착했어. 준비는 다 된 거야?"


"네. 준비 다 됐어요."


"좋아, 가자!"


차에서 내려 다같이 병원에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서자, 항상 하던 것처럼 병문안 방명록을 작성했다.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마노와 메구루의 이름도 적어야 했는데, 본명을 그대로 적지 않았다. 당연하잖아. 본명을 그대로 적었다가는 자칫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걸.

하여 마노의 이름은 '오우코 신다이', 메구루의 이름은 '야츠이에 메루'로 바꾸어 적었다.


"예, 감사합니다. 카자노 히오리 씨의 병실은 403호입니다."


레지던트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로 올라가는 '신다이''메루'의 표정은 무척 오묘했는데, 마치 기쁨에 찬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기도 하였다.


403호 앞에 도착하였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깨어있는 모양이다. 불면증이니 잠드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


"들어갈게, 히오리."


내가 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있는 히오리를 보았을 때, 그녀의 안색은 어제보다도 더욱 나빠져 있었다. 다크서클은 더 내려와 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또한 한눈에 봐도 심각할 정도로 피부가 갈라져 있었고, 그 틈에서 진물이 흐르기까지 했다.


"아아..."



너무나 참혹해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있었느냐고, 오늘은 손님이 찾아왔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정말 이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빨리 망가질 수가 있단 말인가? 며칠도 아니고, 불과 하루만에 히오리의 몸은 더욱 갈가리 찢겼다. 어떻게 이럴 수가...대체 어째서...



"...괜찮으신가요, 프로듀서?"



"히오리...히오리..."



"...프로듀서, 제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프로듀서님의 뒤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말에,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손님이 왔는데 들이지 않을 수 없기에.



"아, 응. 히오리, 오늘은 손님이 찾아왔어. 아마 너도 잘 아는 사람일 거야."



말한 뒤, 옆으로 비켜 마노와 메구루를 들여보냈다.



"히오리...!"



"히오리!"



"이 목소리는...마노? 메구루? 정말로 너희야?"



"우리야! 히오리의 친구 마노와메구루라고!"



"정말로 보고 싶었어, 히오리...!"


그 말을 끝으로, 셋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동안 울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정말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와줘서 너무 고마워..."


마노와 메구루, 히오리의 입장에서는 입원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화 통화를 통해 느끼는 감정과, 눈앞에서 만날 때의 감정은 필시 다르리라.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 히오리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와도, 괜찮았던 거야? 내가 듣기로는, 프로듀서 외의 사람이 오면 안 된다던데."


"맞아. 사장님이 그러셨어. 프로듀서님 외의 누구든 히오리 병문안 오면 고발한다고."


"그런데도 온 거야? 고발당하면 더 이상 아이돌을 못 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고발할 테면 하라지. 아이돌이 되어서 히오리를 만나지 못하느니 차라리 일반인으로 살면서 마음 편하게 히오리를 만나는 게 백 번 나아."


"...응..."


히오리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대답일 것이다. 해고와 고발이라는 패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찾아와준 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인기보다도 자신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해준 것에, 히오리는 감사하고 있다.


"히오리, 몸은 좀 어때? 아직도 아파?"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 괜찮다는 말이, 지금 정말로 몸이 괜찮아졌기에 하는 것인지, 혹은 마노와 메구루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하얀 거짓말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지, 결국 난 또 다시 슬퍼지고 말 것만 같으니까.



마노와 메구루, 그리고 히오리는 그 자리에 앉아 며칠, 몇 달에 걸친 회포를 풀었다. 서로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요새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활동은 잘하고 있는지.

10대 소녀들의 이 대화를 보면서, 한 가지를 강하게 느꼈다. 아까도 말했듯 지금 히오리의 모습은 무척 처참하다. 피부는 갈라지고, 불면증 때문에 잠을 못 자 다크서클은 진하게 내려왔다. 내가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처참해서, 마치 히오리의 고통이 내 고통 같이 느껴져서.

그런데, 마노와 메구루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히오리의 그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전혀 안타깝게 여긴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짙은 다크서클, 붉어진 눈, 갈라지다 못해 찢어진 피부는 그녀들에게 전혀 거리낌이 되지 않았다. 그녀들이 보고 있는 히오리는, 여전히 함께 일루미네이션 스타즈로 활동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히오리와 마노, 메구루의 대화는 긴 시간 계속되었다. 만약 병문안 담당 간호사가 올라와서 '시간이 다 되었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녀들은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 못해 여기서 자고 가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고 싶어."



"잘 있어, 히오리. 몸이 조금이라도 더 나았으면 좋겠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게."



"응, 잘 가. 마노, 메구루. 나중에 다시 만나자."



"나도 이제 갈게. 마노와 메구루를 데려다 주어야 해."

"...오늘 밤은 부디 히오리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했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프로듀서. 저도 오늘 밤은 편안히 넘겼으면 싶네요."



이 말을 끝으로 히오리는 다시 침대에 누웠고, 나는 마노와 메구루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었다.

비록 나는 이번 병문안 시간에 히오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마노와 메구루 덕분에 히오리가 오랜만에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그러니 오늘 밤은,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마노와 메구루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 안에는, 아까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옷들이 무척 꼴사나울 정도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엄청 급했었구나, 나. 이렇게까지 옷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을 정도로. 사실 출근 안 해도 되는 날이었는데."



자조가 섞인 푸념을 던진 뒤, 옷가지들을 주워 정리했다. 회사에 입고 갈 양복은 단정히 개어놓았고, 집에서 입을 잠옷은 침대 위에 올려두었으며, 세탁할 옷들은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대략적인 방 청소를 끝낸 뒤, 화장실 욕조에 잠겨 목욕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히오리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게 된 지 벌써 5달 하고도 반이 넘어간다. 즉 1년의 반을 강제로 '휴양기'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히오리의 병마는 계속 진행되어 고통을 안겨주고 있고, 회사에서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의 사실을 쉬쉬하려고만 할 뿐이다. 히오리가 입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수준이니 말 다했지.

다행히 히오리가 처음 아이돌이 될 때 들어놓은 보험이 있어 치료비는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고 있지만, 사실 히오리피셜에 의하면 치료라고 해도 딱히 하는 건 없고, 그저 정기적으로 하는 검사와 3시간마다 링거액 교체, 식후 30분 약 복용 등 입원 환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들 뿐이라고 한다. 사실 히오리의 질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니 할 수 있는 게 그뿐이긴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그저 마음 아프다 못해 쓰라릴 뿐이야.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어째서 아픔을 겪는 게 하필 히오리인지. 왜 내가 아닌지.

만약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면, 지금 병원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히오리가 아니라 나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옛날부터 삶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도 없었고,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게 의욕도 없이 살아가던 중 283 프로덕션에 입사해 히오리를 만났고, 이때부터 나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 그런데 지금, 그 빛이 꺼져가고 있다. 가련하게 스러지려 하고 있다. 이 빛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도, 더 이상의 희망도 없을 것이다.

왜 병마에 고통받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필 히오리인가. 히오리는 283 프로덕션의 간판 아이돌 유닛의 멤버이자, 전국을 넘어서 이젠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아이돌이다. 만약 질병에 걸린 것이 나라서 히오리의 담당 프로듀서가(임시일지라도) 바뀌게 된다면, 분명 내가 했었던 것보다도 더욱 나은 프로듀스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분명 지금보다도 더욱 유명해지고, 인기 있게 되고, 영광의 끝까지 막힘없이 걸어갈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대성한 히오리의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잠들 수 있다면, 내 인생 최후의 희망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히오리의 길은 막혀버렸고,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괴로움, 히오리의 아픔, 진실을 막으려는 사장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별일 없이 돌아가는 세상, 이 모든 것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며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비틀리고 망가진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주어진 업무를 하고 있었다. 비록 히오리가 입원해서 회사 밖으로 나갈 일은 별로 없다고 해도 회사 안에서 할 일은 아직 남아있으니, 그것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법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하즈키 씨로부터 전언이 왔다.


"저기, 프로듀서님."


"아, 예. 하즈키 씨. 무슨 일이신가요?"


"그, 사장님께서 부르셨어요."



갑자기 무슨 일이지? 뭔가 새로운 일을 받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게나."



문을 열고 들어오니, 그곳엔 짐짓 심각해 보이는 듯한 표정의 사장님이 앉아있었다.


"우선 앉게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자네, 요즘도 카자노 양의 병문안을 다니고 있나?"


"그렇습니다. 제가 카자노 히오리의 담당 프로듀서니까요."


"그렇지. 자네가 담당 프로듀서지. 오직 자네만이 카자노 양을 담당할 수 있지…."

"그러면 혼자 다녀오면 될 것을. 어째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데리고 갔나?"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마노와 메구루가 문병갔던 걸 들켰구나.


"그, 최근에 말이지. 어떤 팬의 SNS로부터 이런 사진이 올라왔어. 한 번 보게나."


사장님이 보여준 사진에는, 마노와 메구루, 아니지, '신다이''메루'가 나를 따라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분명 그때 보았을 땐 꽤 치밀한 변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허술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네.


"여기, 이 둘. 자네 뒤를 따라가는 이 둘은 분명히 사쿠라기 양과 하치미야 양이네. 그 둘이 자네와 같이 있다는 것은 우연일 수가 없어. 자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카자노 양이 입원한 병원과 병실을 알지 못하니까."

"내가 여기서 묻겠네. 자네가 데려온 것이 맞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숨기랴.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네. 제가 데려갔습니다. 사쿠라기 마노와 하치미야 메구루로 하여금, 카자노 히오리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어째서인가!!!"


아마이 사장님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강하게 내리쳤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않나, 자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카자노 양을 만나거나, 혹은 그 관련된 정보를 외부에 발설한다면 고발하겠다고! 그리고 해고하겠다고! 분명 자네도 이를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런데도! 어째서! 사쿠라기 양과 하치미야 양을 데려간 건가!"


"...어째서냐고요? 그건 제가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왜 저들이 히오리를 만나면 안 됩니까?"

"히오리는 여기 283 프로덕션의 소속 아이돌이고, 다른 아이돌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동료들이며, 저에게는 둘도 없는 담당입니다. 그리고 하즈키 씨도 히오리를 무척 아끼고 있습니다. 히오리는 회사 안에서도, 회사 밖에서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왜 아무도 히오리를 만날 수 없는 겁니까? 아니, 왜 만나선 안 되는 겁니까? 히오리가 앓고 있는 질병이, 사장님께는 그렇게도 수치스러우십니까? 회사의 아이돌이 불치병을 앓고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히오리는 원해서 그 병을 앓고 있는 줄 아십니까? 사장님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히오리를 만나러, 문병 가신 적 있으십니까?"

"저 때 마노와 메구루가 병문안 왔을 때, 히오리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고, 지금껏 해본 적 없던 수다도 떨었으며, 그녀 인생에 길이 남을 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장님께서는 히오리의 기쁨을, 이유도 알 수 없는 통제 때문에 막아버리실 생각이십니까?"

"도대체 아마이 사장님, 당신이란 사람은! 카자노 히오리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히오리는 프로덕션의 상품인 아이돌을 넘어서, 하나의 인격체고, 한 명의 사람입니다. 단지 불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병원에 버려질, 그런 불량품이 아니란 말입니다!"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이런 사람한테는 오히려 말을 참는 게 손해다. 고발을 당하건 말건 할 말을 모두 쏟아냈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지금 이 시간에도 홀로 투병중인 히오리를, 더 많은 사람이 매일 찾아가도 모자랄 판에 저 빼고 아무도 못 가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합니다! 사장님이야말로, 정말 이러실 건가요?!"


사장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그 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정도면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짐작이 안 가네. 그렇다고 나도 물러날 생각은 없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가까스로 화를 억누른 사장님이 말을 꺼냈다.


"자네…. 내가 말했지. 자네 외의 다른 사람이 카자노 양의 병원에 가게 된다면, 그는 고발 처리를 할 거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규정대로라면 분명 내가 자네를 고발해야 하지만, 평소 자네가 보여준 걸출한 프로듀싱 실력과 사내 평가를 보아서 고발은 하지 않겠네. 지금이라도 사죄한다면, 없던 일로 하도록 하지."


이 말에, 난 마지막 남은 어이까지 전부 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사죄해야 한단 말인가? 왜 내가 용서받는 위치가 되어야 하는 건가?


"하지 않는다면요?"


"자네는 해고일세. 알고 있잖은가."


결국, 마지막까지 꾹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해고하십시오. 소속 아이돌을 발끝만큼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아이돌의 주변 인간관계를 다 끊어버리려 하고, 그러면서 진실은 진실대로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는 이런 회사, 더 이상은 다닐 수 없습니다. 다니고 싶지도 않고요."


말한 뒤, 품 속에서 직장인의 무기라고 부르는 사직서를 꺼내어, 집어던지듯 제출하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보게나! 자네! 자네!"


뒤에서 아마이 사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내 책상에 앉아 짐을 전부 챙기기 시작했다. 워낙 거친 손짓과 분노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했기에, 놀란 하즈키 씨가 내게 물었다.


"프, 프로듀서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갑자기 짐을 다 챙기시는…."


내가 대답한 것은 짐을 다 정리한 뒤, A4용지에 아마이 사장을 고발하는 내용을 빽빽하게 적고 그것을 봉투 안에 넣어 봉한 뒤의 일이었다. 그 대답도 아까 하즈키 씨가 했던 질문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았지만.

짐을 모두 챙기고 사무소를 나서기 전, 하즈키 씨에게 그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하즈키 씨, 이 봉투를 받으세요."

"훗날 세상이 다시 한번 히오리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열고 읽어주세요."

"지금까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훗날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말하고, 정식으로 사무소, 그리고 283 프로덕션을 나섰다.

조금 전 하즈키 씨에게 말했던 대로, 이제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는다. 비록 해고가 아닌 일방적인 퇴사지만, 상관없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챙긴 짐을 모두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차를 움직여 히오리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어차피 들를 예정이기도 했고, 일을 그만뒀다는 것도 보고해야지.



병원에 도착했다. 언제나 하던 대로 익숙하게 주차한 뒤, 문병 방명록을 쓰고, 늘 하던 대로 403호로 올라가 히오리를 만났다.


"나 왔어, 히오리."


"어서 오세요, 프로듀서.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응. 그렇게 됐어. 그래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더 일찍 히오리를 볼 수 있게 됐으니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계속 떨렸다. 히오리는 또다시 몸이, 그리고 안색이 나빠져 있었고, 이제는 흘러나오는 진물을 막기 위해 팔과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히오리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


히오리는 계속 죽어가는데,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나조차도, 히오리를 도와줄 수가 없어.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프로듀서, 오늘도 이야기를 해주세요. 프로듀서와 나누는 대화는 즐거우니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히오리가 나와의 대화를 즐거워했구나. 난 워낙 딱딱하고, 커뮤력도 퍼펙트를 잘 못 띄우는 스타일이어서 히오리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좋아. 나도 히오리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워."

"..."

"히오리, 히오리는 나를 프로듀서라고 불러주지."


"네. 저의 담당 프로듀서이시니까요."


"이젠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퇴사했어. 이제 프로듀서도 아니야."

"히오리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283 프로덕션을, 더는 다닐 수 없어서, 다니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퇴사했어."

"아이돌이 되어서 히오리를 못 만나느니, 차라리 일반인이 되어서 히오리를 마음 편하게 만나겠다던 마노와 메구루의 말이 생각나. 정말 현명한 말이었어. 정말로 퇴사해서 히오리를 만나는 게 옳았어."


"...그래도, 계속 프로듀서라고 부르고 싶은걸요."


"그래…?"


"퇴사하셨지만, 그 역시 저를 위해, 저와 함께하기 위해 하신 거잖아요."

"정말,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시네요. 프로듀서다우세요."



히오리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까, 역시 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내가 그 중소 악덕 기업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정식 프로듀서의 명함은 지킬 수 있어도 히오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못했을 거야.


"...히오리."



"네, 프로듀서."



"뭐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먹고 싶은 건 많지만,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요. 요즘 따라 소화도 잘 안되기도 하고, 병원에서 주는 것 이외의 음식은 못 먹으니까."



"낫게 된다면, 뭘 먹고 싶어?"



"'낫게 된다면' 이라…. 만약 정말 나아서 이 병원을 나갈 수 있다면…. 엄마·아빠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싶어요. 엄마·아빠도,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만약에 나아서 퇴원하게 된다면, 맛있는 밥을 해주겠다고.“


"집밥이구나. 집밥이 먹고 싶구나..."


그러고 보면 나도 집밥을 못 먹어본 지 꽤 된 것 같다. 언제쯤 다시 먹어볼 수 있으려나. 언제 다시 가족을 만나볼 수 있을까.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내가 물어보고도 '참 늦게도 물어보네' 싶었다.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일인데.


"...지금도 아파요. 찢어진 피부가 계속 따갑고, 자고 싶어도 잠들 수가 없고, 몸은 계속 후끈거려요."


"아아..."


그저 말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어요."

"옛날에는 제가 이런 불치병에 걸렸다는 게 실감 나질 않았어요. 초기이기도 하고,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계속 이런 느낌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더해지고, 증상도 심해지고, 하루에 한 통 정도 쓰던 진통제가 2통, 3통, 계속 늘어가요."

"결국 저는 진통제 없이는 단 한시도 통증 때문에 몸부림치지 않는 때가 없게 되죠. 지금도 진통제에 의지하고 있기에, 이렇게라도 정신을 붙잡으며 프로듀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히오리가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듣고 있는데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외적인 면을 보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 히오리의 상황이 무척 심각하다고 느꼈는데, 당사자인 히오리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왜 히오리가 이런 병마를 겪어야 하는 건지 싶은, 예전부터도 생각해왔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 히오리의 질병에 차도가 없는 한 앞으로도 하게 될 생각이 떠올랐다.


"대체 왜…. 히오리…. 네가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야만 하는 건데…."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니, 설령 죄를 지었대도, 이건 너무나 무거운 벌이야….“


그렇게 말하며, 히오리가 누운 침대의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울고 있는 나를, 히오리가 감싸 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나 저를 위해서 웃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 또 저를 위해 울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를 감싸는 히오리의 팔에, 그리고 손에 내 손을 포개었다.


"아니야, 히오리….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오히려 히오리, 네가 나를 만나주고, 내 아이돌이 되어준 것에, 내가 더 감사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히오리의 체온을 느꼈다. 비록 히오리의 몸은 여기저기 찢겼고, 흘러나온 진물이 말라붙었지만, 그럼에도 그 체온은 아직 따뜻했다. 몸의 고열 때문이 아니었다. 뜨거움 속에 숨은 따뜻함이, 내 손에서 느껴졌다. 이 따뜻함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시간은 냉정하게 흘러갔고, 간호사가 들어와 내가 퇴실해야 함을 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간이 너무 빨라."


"프로듀서, 내일도 와주실 건가요?"


"아, 응. 히오리만 괜찮다면."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와주시기만 해도 감사드리는걸요."


"알았어. 그럼, 내일 만나자."

"아, 맞다. 히오리."


"네, 프로듀서."


"그, 여기에서 차를 마셔도 괜찮으려나? 다음에 올 때는 뭐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네, 괜찮을 거예요. 실제로 사람들이 병문안 올 때 주스 같은 거 갖고 오잖아요."


"괜찮은가요, 간호사님?"


"예, 괜찮습니다. 다만 흘리지는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갈게, 히오리. 오늘 밤은, 부디 평안하기를…."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최대한 안 아파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모두는 각자의 길로 갔다. 히오리는 침대에 누웠고, 간호사는 다른 환자를 보러 갔으며, 나는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가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가 '283 프로덕션 소속 프로듀서'로서 히오리를 문병 온 마지막 날이다. 더 이상 내겐 프로듀서라는 직책도, 명함도 없다.

다만 히오리에겐, 나는 아직 프로듀서다. 그러니 나도, 아직은 히오리만의 프로듀서로서 있고 싶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히오리를 찾아갔다. 본래 병원 로비에서 근무하는 문병 담당 레지던트분들은 요일마다 바뀌지만, 그 모두가 나를 알아보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딱히 그분들과 안면을 트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어느새 그분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로 통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전에는 문병 방명록을 작성하면 '카자노 히오리 씨의 병실은 403호입니다'라고 안내받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안내조차 받지 않게 되었다. 안내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찾아올 때마다, 히오리는 나날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비록 밝음을 잃지 않았고, 내게 언제나 사랑스러웠던 히오리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쓰라렸다. 더는 그녀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아. 못 보겠어. 대체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야. 어째서,



그날도 히오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면, 히오리는 밤에 아플 때마다 어떻게 해?"


"일반적으로는 너스콜을 누르곤 해요. 그러면 간호사분께서 오셔서 제게 진통제를 넣어주시곤 하죠."


"진통제를 여러 통 쓴다고 했던가? 그러면 진통제를 쓰는 주기는 어느 정도 돼?"


"때에 따라 달라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평균적으로 2시간 정도마다 진통제를 교체해요."


"통증이 가라앉고 난 뒤에도 잠을 잘 자지 못할 텐데, 외롭지 않아?"


"외롭죠. 그렇다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다들 자니까."


"나한테 전화 줘도 괜찮을 텐데."


"에? 하지만, 프로듀서도 주무셔야 하잖아요. 다음날 출근도 하셔야 하고."


"난 히오리가 아파하는 모습이 너무 걱정되어서 잠을 이루질 못해."

"그리고, 이젠 회사도 안 나가니 밤새도 괜찮고."


"그러면, 오늘 밤 외롭거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면, 염치 불고하고 프로듀서한테 연락을 드릴게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 혹여 자고 있었어도, 히오리가 전화해주면 다시 깨어날 거야."


"아, 아니요….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돼요."


"괜찮아. 히오리의 프로듀서인걸."



사실 나도 어두운 밤이 되고 모두가 잠들었을 때, 히오리가 아직 괜찮은지 알고 싶다.오늘 밤을 고통 없이 넘길 수 있을지, 혹은 여전히 병마와 싸워야만 하는 건지.

만약 히오리가 오늘 밤을 평안히 넘길 수 있다면, 나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여 히오리가 병마와 또다시 싸워야 한다면, 나는 히오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리라. 그것이 히오리의 프로듀서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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