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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거리 티타임)1. 피곤한 몸, 피로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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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9, 2022 13:23에 작성됨.

오전 11시 35분, 드디어 저에게 맡겨진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끄~으~으~!!! 이제야 끝이다~!!!"


기지개 한번 요란하게 펴봅니다. 요새 꿈자리가 뒤숭숭한데다 일도 적지 않아서 어깨가 뻐근하네요.

요새는 회사의 여러 가지 사정과 방침 때문에 오전 업무만 하는 날의 연속입니다. 나 원 참, 이래서야 무슨 아이돌 프로듀싱을 한다고…. 차라리 아이돌들도 오전 업무만 시켜주던지. 어차피 아이돌들 스케줄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오전 오후 꽉 차 있잖아요. 이 무슨 불공평한 처사야.


어찌 됐든, 일도 끝났으니 이제 집에 돌아갈까 해서 책상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오바 씨, 이제 퇴근하겠습니다."


"네! 수고 많으셨어요, 프로듀서님!"


극장 담당 사무원이신 아오바 씨와 퇴근 인사를 주고받은 뒤, 사무소를 나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습니다.

지금 너무 피곤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평소 같았으면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처리할 일을 오전에 전부 몰았으니, 몸이 오버클록을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언젠가 쓰러져버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산재가 인정되려나?


-띠잉-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고, 넓은 로비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로 걸어오는 한 분의 아이돌. 저를 알아보았는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프로듀서님!"


"안녕하세요, 후카 씨."


저에게 말을 걸어와 주신 이 분, 제 담당 아이돌이신 토요카와 후카 씨입니다. 상냥하고, 포용력 있고, 푸른 단발의 웨이브 머리가 무척 인상적인 분.

저는 회사에 처음 입사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당 아이돌이 추가되거나 줄어들지 않고, 오로지 후카 씨만을 프로듀스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세요, 프로듀서님."


"아 네. 감사합니다. 후카 씨."


저는 개인적으로 후카 씨를 좋아해요. 물론 Love가 아니라 Like의 개념이지만 말이지만요.

후카 씨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세상 모든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후카 씨를 담당한 적 없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알지 못할 그 느낌….


"후카 씨는 오늘 스케줄 없으신가요?"


"아까 아침에 잡지 인터뷰 다녀왔던 것,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그러고 보니, 아까 리포터를 만나서 여러 가지 Q&A를 했었는데, 순간적으로 기억이 안 났네요. 역시 피곤하고 고된 일에 찌들어 살다 보면 10분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을 못 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그랬었죠.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평소에 어느 정도 주무시는 건가요?"


"업무가 많으면 많이 자도 서너 시간 정도였죠. 그래도 요즘은 오전 업무만 있어서 전보다 더 길게 잠들 수 있어서 기쁘지만…. 요새 꿈자리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자도 잔 느낌이 아니에요."


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후카 씨는 전직 간호사이시니만큼,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책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요새 몸에 여유가 없으신 것 같네요. 프로듀서님,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앗, 네. 이제 프리입니다."


"그럼…. 오늘은 저랑 같이 차라도 한잔하지 않으시겠어요? 차 중에서는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들도 있다고 하니까요! 저도 이제 스케줄이 없으니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티타임 신청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되네요. 제가 여기서 놀랐다는 게 드러나기라도 하면, 후카 씨께 조금 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차 한 잔인가요? 좋습니다. 후카 씨와 함께하는 티타임은 기분전환이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어디서 차를 마시는 게 좋을까요? 이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으려나? 카페는 어떤가요?"


"카페는 너무 북적거려서 프로듀서님과의 대화가 잘 안 들릴 것 같아요. 반대로 저희가 너무 크게 말하기라도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폐가 될 테고."


그래도, 요즘 카페는 비교적 조용한 편입니다. 물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없진 않지만요. 아마 후카 씨는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면 회사 탕비실은 어떨까요?"


"지금까지 프로듀서님은 회사 안에 계시면서 업무 때문에 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어요. 게다가 회사 탕비실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다소 부적합한 장소인걸요."


확실히. 탕비실은 좀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마치 초등학교 다닐 적에 급식 다 먹고 급식차 옮길 때의 복도 같은 냄새예요. 어째서 탕비실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탕비실에는 의자라든가 앉을 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차만 타는 공간`이라 티타임을 갖기에는 부적합하죠.

또한 후카 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회사 내에서 지루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당장이라도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어요.


"그러면…."


사실, 이렇게 되면 저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또 있는데 극한의 피로로 인해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는지도 모르죠.


"저희 집에 가서 차를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니, 후카 씨께서 적잖이 놀라셨습니다.


"네에?! ㅍ, 프로듀서님 댁에서요?!"


"싫으신 건가요?"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닌데, 무척 의외의 선택지라서요! 일반적으로 프로듀서님은 아이돌들을 자택에 들이지 않으려 하는 편이잖아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긴 합니다. 그런 게 포착되면 스캔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아이돌 중에서는 스캔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프로듀서들은 그걸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스캔들이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아이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캔들의 여파는 아래가 아니라 위로 올라갑니다. 아이돌, 프로듀서, 그리고 회사의 명예 실추로 이어지는 셈이죠. 그러므로 프로듀서들은 아이돌의 스캔들에 대해 기를 쓰고 막으려 하며, 아이돌들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들은 최대한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후카 씨를 저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스캔들이라는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다른 아이돌들도 같이 온다면 스캔들이 일어날 확률은 낮아지겠지만, 지금은 저를 제외한다면 후카 씨뿐입니다. 다른 돌파구도 없습니다.


"괜찮아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차를 드시러 오시는 것뿐이니."


"그….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질게요."


이제 저는 다짐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일로 스캔들이 일어날 리 없지만, 혹여 일어나더라도, 내가 책임지겠다.`


하여, 후카 씨를 이끌고 저희 집으로 향했습니다. 통근의 용이함을 위해 회사 근처에 집을 잡았기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보로만 대략 5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 얼마나 가까운지, 회사 사무소 창문으로 바깥을 보면 저희 집이 바로 보입니다. 그만큼 가까워서, 후카 씨 스케줄 데려다 드릴 때 이외에는 자가용 차도 잘 쓰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예정에 없었던 동행자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건널목을 건너고, 골목길 어귀를 두어 번 지나니, 금세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고 계시네요, 프로듀서님."


"아, 네. 출퇴근 문제 때문에요. 여긴 그래도 다른 길들에 비해 덜 막히기도 하고, 또 회사와도 가까우니까요."


사실 이 길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 막히는 건 아닙니다. 출근 시간이 되면 아까 건넌 건널목이 있는 차로에는 자동차들이 거북이 운전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제에 신호등은 정말 느리게 바뀌죠. 그래도 지옥철이나 만원 버스로 인한 불편함에 비하면 이건 선녀입니다. 게다가 차가 막히는 것도 운전하는 사람에게나 지옥 같은 일이지, 저처럼 걸어서 출퇴근하는 뚜벅이 직장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어락을 풀어 문을 열고, 신발을 벗은 뒤, 함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집 현관에 저의 것이 아닌 신발이 놓인 것은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아닌 사람의 신발이 놓인 건 처음이고요.

후카 씨께서 저희 집에 들어오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인 걸까요? 택배도 항상 문 앞에 놓아달라고 말하는 저인데, 이렇게 타인을 집 안으로 들인다는 게,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주제에 아까는 잘도 후카 씨를 초대했구나, 나.


"후카 씨, 차를 내올게요. 앉아 계세요."


"아니에요! 오늘 저는 프로듀서님의 긴장을 풀어드리려고 온 거예요. 그러니 제가 할게요!"


"후카 씨는 손님이세요. 손님께 이런 일까지 시킬 수는 없어요."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작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저는 못 이긴 척 자리에 돌아가 앉았습니다.

사실 제가 차를 타겠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손님 대접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후카 씨의 방문으로 인해 쿵쾅거리는 제 심장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서였죠. 차를 타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진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후카 씨는 그런 저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저를 걱정해주시면서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걱정해주시고 위해주시는 것은 정말로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 배려가 저를 더 긴장되게 만들고 있어요. 후카 씨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저는 심장이 너무 떨려서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것 같네요. 분명 제가 저의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떨리는 건 처음입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사이, 후카 씨께서 손수 우린 차를 가지고 저에게로 오셨습니다.


"기다리셨죠, 프로듀서님. 여기, 제가 우린 차예요."


"아, 감사합니다. 후카 씨."


후카 씨께서 주신 찻잔을 받아서 들고, 잘 마시겠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린 뒤, 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음?"


낯선 맛입니다. 우리 집에 이런 맛이 나는 차가 있었던가?


"맛이 어떠신가요, 프로듀서님?"


"제가 먹어본 적이 없는 맛의 차예요. 이건 도대체…?"


"이건 제가 사 온 자색옥수수차예요. 최근에 백화점에서 샀었는데, 바쁜 시간 탓에 손대질 못하다가, 오늘 이렇게 마시게 되었네요."

"자색옥수수차에는 안구 망막 내의 로돕신 색소를 재결합시켜 눈 건강을 도와주는 안토시아닌이 함유되어 있답니다. 프로듀서님께서는 노트북 보며 일하랴, 번쩍이는 조명 밑에서 일하랴, 눈에 많은 무리를 받으시며 일하시곤 하세요."

"조금 전에 프로듀서님께서 말씀하신, 자도 잔 느낌이 아니라는 건, 눈의 피로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눈의 피로를 해소한다면, 프로듀서님의 수면 효과는 전보다 더 좋아질 거예요."

"또한 이 자색옥수수차는 피로를 풀어주는 효능도 갖고 있다고 해요. 그야말로 프로듀서님께 안성맞춤이죠."


후카 씨의 이야기를 듣자, 정말로 몸의 피로가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최면일 수도,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감각에 몸을 맡기고 싶네요.


"후카 씨께서 제게 주신 차의 효능인 걸까요? 몸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후훗, 그러신가요? 차의 효능이 듣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너무 감사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까까지는 만감이 교차하면서 각자의 감정이 제 안에서 아우성을 쳤는데, 차 한 잔으로 그 모든 소리가 가라앉고,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혹시 괜찮다면, 프로듀서님께서 느끼셨던 감정에 대해 듣고 싶어요."


"제가 느꼈던 감정인가요…."


처음에는 말하기를 좀 망설였습니다.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후카 씨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이왕 물어봐 주셨으니,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무척 긴장되고 두려웠어요."


"긴장과 두려움인가요? 어떠한 이유인가요?"


"음…. 사실 후카 씨는 가족을 제외하면 저희 집에 들어오신 첫 번째 분이에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적이 없었죠."

"사실 제가 대인기피증이나 사회공포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제가 후카 씨나 다른 분들을 대할 때 긴장하거나 떨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단지 저희 집에 초대한다는 것만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만으로 심하게 긴장이 되고 만 거예요."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까지 긴장할 만한 일도 아니고, 후카 씨께서 나쁜 짓을 하실 분도 아닌데."

"게다가 후카 씨께서 먼저 오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고, 제가 초대한 건데, 이렇게 긴장하며 떨고 있으니,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때 얼마나 긴장했었는지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긴장이 풀리고 혀가 자유로워진 지금도, 그때의 긴장을 표현하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어떻게 설명해드리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무척 어려운 감정이에요."


"..."

"'그대여.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해줄 차 한잔을 내게 준다면, 내가 당신의 사정을 더 잘 이해할 텐데.'"


"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가 남긴 말이랍니다."


말씀하시며, 후카 씨께서는 저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셨습니다.


" 차 한 잔 더 드세요, 그러면, 프로듀서님의 머릿속이 정리될지도 몰라요."


"감사합니다, 후카 씨."


후카 씨께서 주시는 차를 받아,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사실 한 번 더 마신다고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조금 전보다도 더 유창하게 제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겠고요. 게다가, 제가 아까 어째서 그토록 긴장하고 두려워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은 아까보다도 더 편안한 기분입니다. 비록 완벽하게 말하진 못하겠지만, 조금은 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차가 남은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하아…"


"어떤가요, 프로듀서님? 생각이 정리되셨나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긴장은 사라진 것 같네요."


"후훗, 그것만으로도 다행인걸요."


"후카 씨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머릿속도 정리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아까 긴장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조차도 잊게 될 것 같네요."


"잊고 싶으신가요?"


"원인을 알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잊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제 마음과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잊어버리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정 알고 싶다면, 후카 씨가 집으로 돌아가신 뒤에 다시 생각해봐도 늦지 않아요.


"..."


"...후카 씨께서 처음 아이돌을 지원하셨을 때 말씀하셨었죠.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아, 네! 그렇게 말씀드렸었죠."


"...요즘 아이돌 활동은 좀 어떠신가요? 후카 씨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계시는가요?"


"음…. 그러네요. 처음엔 그런 정통파 청순 노선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상은 저의 몸에 주목해 섹시 계열의 의상과 일을 요구했고, 저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이를 모두 받아들였죠. 처음에 거절했었더라면, 제가 섹시 노선으로 탈선하지 않았을 텐데…."


"아아, 확실히…."


제 진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후카 씨에게 섹시 계열의 일을 의뢰하는 사람을 전부 쳐죽여버리고 싶습니다. 후카 씨 본인이 원하는 노선도 아니고, 또 몸매에 눈이 뒤집혀서 5류 아이돌이나 할법한 저질스러운 일감을 내미는 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이란 말입니까? 더러운 쓰레기 같은 놈들.

한편으로는, 제가 그것을 막지 못해 무척 죄책감이 듭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개입해서 그 일들을 저지했다면, 아마 후카 씨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던 청순 계열 노선을 막힘없이 걸어가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제 잘못이기도 해요. 제 잘못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프로듀서님?"


"저는 후카 씨의 프로듀서예요. 프로듀서 된 사람으로서, 담당 아이돌이 엇나간 길을 가는 걸 막고 바로잡아야 했어요."

"제가 개입해야 했었는데, 제가 막았어야 했는데…."


순간 울컥했습니다. 눈물이 차올랐어요.

눈물 맺힌 눈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울먹거리는 저의 얼굴을, 후카 씨께서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후카 씨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요.


"프로듀서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너무 약해서, 거절을 못 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 거예요."


"후카 씨께서 여린 성격이시고, 거절을 잘하지 못하신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더, 제가 더…. 붙잡아드렸어야 했는데…."


"...그러면 이제부터는, 저를 붙잡아주시겠어요?"


"네?"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흐르려던 눈물도 쏙 들어갔을 정도로, 의외의 대답이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고개를 들고 후카 씨를 바라보았을 땐, 후카 씨께서는 슬픔과 애수가 한데 섞인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프로듀서님께서는, 저를 지켜주지 못하신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계세요. 물론 죄책감이야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그것에 너무 매이시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그리고 저의 아이돌 인생은 아직 무한히 남았어요. 과거는 과거로 밀어두고,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주세요. 그것이, 프로듀서님께서 제게 해주실 일이라고 생각해요."


후카 씨의 이 말씀은 부드러웠고, 동시에 강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제가 앞으로 가야 할 프로듀싱의 방향을 말해주는 것 같았죠.


"그렇구나…."


제가 해야 할 일은, 후카 씨께서 꿈꾸어 오셨던 그 길을, 아무런 걱정과 위협 없이 가실 수 있게 호위해드리는 가디언입니다.

발밑에서 더러운 자들의 손이 뻗어온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것들을 쳐내고 잘라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고, 후카 씨의 안전입니다.


"장황한 대답이 필요할까요, 제가 후카 씨께 마땅히 해드려야 하는 일인걸요. 제가 담당하는 아이돌이시고, 제게 소중하신 분이니까요."


"소중하기까지...정말로 감사드려요, 프로듀서님."


그렇게 결심을 다진 뒤, 차를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분명 아까와 같은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묘하게 맛이 다른 것 같네요.


"차가 식은 건가..."


"더 따라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비록 차가 조금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것대로 매력적인 맛이 나고 있어요."


"따뜻한 차를 드시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


"네, 감사드려요. 후카 씨."


지금 이렇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다소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있으니, 아까의 긴장은 간데없고 어느새 편안해졌습니다. 역시 차는 긴장을 풀어준다고 하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제가 아까 했던 말마따나, 제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긴장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


"..."


한동안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대화 주제가 다 떨어진 모양이에요. 어쩌면 이런 침묵이 티타임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기에, 이를 쉽게 깨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정도는….


결국 침묵 속에서 차 한 잔을 비웠습니다. 너무 조용하니 자꾸 목이 타네요. 특별히 나쁜 분위기가 조성되지도 않았고, 서로 걸릴 것도 없는데.

팔을 뻗어 주전자를 가져와 찻잔에 따랐습니다. 다시 한번 따뜻한 김을 내뿜는 차가 저의 잔을 가득 채웁니다.


"벌써 다 드셨나요?"


"이 적막이 목을 타게 하네요. 뭐라도 말씀드리고 싶은데,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요."


"그렇군요. 그럼 이번엔 제가 대화 주제를 꺼내도 괜찮을까요?"


"저야 환영이에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그, 제가 프로듀서님의 댁에 갔다는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자칫하면 스캔들로 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그걸 걱정하고 있었는데, 후카 씨 또한 그 사실을 알고 계셨었구나.


"그런데도 프로듀서님께서는 저를 프로듀서님의 집으로 데려와 주셨죠."


"...괜찮을 거예요."


후카 씨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습니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회사에서 `스캔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다짐했었는데, 이제 와 `스캔들 일어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괜찮을 거예요, 후카 씨."


"어째서인가요?"


이유를 물어보시는 후카 씨께, 저는 회사에서 했었던 다짐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스캔들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같은 집에 들어가는 장면이 목격된다면 분명 특종에 배고픈 파파라치나 악성 기자가 가만둘 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까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결심했습니다. 그런 스캔들이 일어난다 해도 제가 책임지겠다고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러니 후카 씨, 저를 믿어주세요. 후카 씨의 삶 속에서 스캔들이 존재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감사드려요, 프로듀서님. 하지만 그 다짐, 어쩌면 너무 섣부른 만용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후카 씨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책임지겠다. 스캔들로부터 후카 씨를 지켜드리겠다`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못 할것 같아요. 잘못될 경우, 스캔들을 막기는커녕 저와 후카 씨, 그리고 사무소의 운명만 망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만용일지도 몰라요. 후카 씨를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을 넘어 도쿄 타워 같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니까요. 죄송해요."

"하지만, 조금 정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도 좋아요."


"긍정적인 방향인가요? 예를 들면 어떤 것인가요?"


"지금 문제가 되는 논제는 `스캔들이 일어날 경우`를 전제로 하는데, 만약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연예계에서 스캔들은 치명적인 맹독과 같지만, 사실 스캔들이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게다가 스캔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가 받쳐줘야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죠."

"저희는 단지 함께 집에 들어갔고, 그 뿐이에요. 저희가 집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자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음, 캐나다의 작가 어니 젤린스키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저희의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면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게 하면 돼요. 혹은 별것 아닌 일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죠. 혹은 일어났을 때 대처할 수 있다면 잘 대처하면 돼요."

"또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괜한 걱정이죠. 그리고 설령 스캔들이 일어나 저희가 해결하지 못한다 해도 상부에서 처리해줄 거예요. 저희에게 불이익이 주어진대도 기껏해야 감봉이나 반성문 쓰는 정도겠죠."

"그러니까, 괜찮아요.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어떻게든 후카 씨를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후카 씨만큼은 아닐지라도, 저 또한 스캔들에 대해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후카 씨께서는 제 말을 이해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특별히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안도하신 듯 표정이 밝아지셨기 때문에 걱정을 한시름 더셨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어요.


"..."


"..."


또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도 말을 못 했던가.


"아, 그러고 보니, 그것을 좀 여쭤보고 싶어요."


"무엇인가요, 프로듀서님?"


"후카 씨께서는 청순 계열 노선으로 걷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네. 예전부터 그 길을 원했어요."


"청순 계열 일거리도 종류가 있죠. 어떤 종류의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제가 질문하면서도 살짝 이상하게 느꼈습니다. 이거 이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차라리 종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여쭤봤다면 조금 더 나았을 것을. 역시 제 빈약한 어휘력은 어디 안 가나 봐요.


"종류인가요? 음….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에 출연해보고 싶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흔히들 말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이라든가, 혹은 순정드라마의 주연."


다행히 후카 씨께서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신 듯합니다.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이해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후카 씨 특유의 나긋나긋함이라면 분명 청순 계열 주연배우 역할도 잘 소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런 모습도 보고 싶네요. 주인공 역할도 좋지만, 악녀나 빌런을 연기하시는 후카 씨의 모습도 보고 싶어요."


"빌런인가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 슈퍼 비치발리볼에서 킹의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죠."


"네, 네. 킹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빌런 역할을 맡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역할이 좋다고 보시나요?"


"음, 후카 씨께서 전직 간호사셨잖아요? 그것을 살려서 매드 닥터를 연기하시는 것도 보고 싶어요."


"그건 청순보다는 파워풀의 이미지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하핫!"

"어쨌든, 악당 중에서도 청순한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배역이 있을 거예요. 저는 후카 씨께서 그런 역할을 담당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확실히 그런 느낌의 배역이 있죠.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에서도 볼 수 있고요. 그 배역을 가져와 주시는 게 프로듀서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순간 정곡을 찔렸습니다. 그러네요. 그걸 가져오는 게 제 일이었어요.


"아하하, 그러네요. 제가 그걸 가져와 드려야 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져와 드릴 테니까요!"


"후훗, 기대하고 있을게요. 프로듀서님."

"비록 제가 청순 계열 노선을 희망하고 있지만, 저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할 테니까요."


함께 미소를 지으며 웃었습니다. 후카 씨께서 행복하게 아이돌을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하고, 또 발에 불나도록 뛰어야겠어요.


웃음이 끝나고, 또 한순간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이젠 익숙해요. 더 이상 당황스럽지도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특별히 떠오르는 주제가 없을지라도, 이렇게 있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주제를 주고받는 저희의 모습을 볼 수가 있을 테니까요.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후카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후카 씨는 정말로 예쁘고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특히 웃음 지으실 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죠. 흔히 초승달웃음이라고 하던가요? 그 초승달웃음의 정수를 갖고 계세요.


제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후카 씨께서는 그저 차를 음미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더 이상의 감정은 접고 다시 차에 집중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차를 음미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후카 씨께서 고개를 들고 다시금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님께서는 처음 입사하신 이래로 쭉 저만을 프로듀스하고 계시죠."


"그렇죠. 제 담당 아이돌분은 후카 씨 한 분뿐이에요."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거지만요. 다른 아이들도 담당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상당히 의외의 질문이었습니다. 담당을 더 늘릴 생각이 없냐니.

일반적으로 아이돌은 다른 담당 아이돌과 어지간히 친하지 않은 이상, 자기 프로듀서에게 담당이 자기 한 명뿐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후카 씨는 자신만을 담당으로 두라고 하시기는커녕 외려 한 명 더 늘릴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어요. 무척이나 예상 외의 질문이었던 데다가, 일반적인 아이돌들의 생각과도 달라서 무척 놀랐습니다.


"글쎄요, 저는 후카 씨 외에는 다른 아이돌들을 프로듀스할 생각이 없답니다. 그들은 그들을 빛나게 해 줄 적격의 프로듀서가 있을 테니까요."


"프로듀서님께서 담당 아이돌을 더 늘리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후카 씨에게 반했으니까요."


이렇게 대답하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프로듀서라면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더 늘리면 너무 바빠질 것이다' 정도로 대답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틀린 말도 아니니 별다른 책망을 받지도 않을 테고요.

하지만 저는 즉답했습니다. 후카 씨에게 반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건 고백 같은 게 아닙니다. 후카 씨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죠.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후카 씨의 초승달웃음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저의 심장을 때려요. 제가 후카 씨에게 반했던 것은 그 점입니다.


"후카 씨가 아닌 다른 아이돌은 제게 필요하지 않아요. 저에겐 후카 씨만 계시면 돼요."


"바...반했다니...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프로듀서님?"


"제가 후카 씨께 반했다고 하는 건, 후카 씨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거나, 사랑 고백 같은 내용이 아니에요. 다만 매력 포인트에 이끌리는 쪽에 가깝죠."


"저의 매력 포인트…///"

"어떤 부분에서 가장 끌리셨나요?"


"후카 씨의 미소, 그 미소가 제일 매력적이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후카 씨께서는 웃으실 때 초승달웃음을 짓고는 하세요. 그 점이 가장 매력 포인트로 다가왔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후카 씨께서는 붉어진 뺨을 감싸며 부끄러운 듯 웃고 계셨습니다.


"저…. 정말, 프로듀서님도 참…."


저 모습을 보세요. 또다시 초승달웃음을 짓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게 바로 후카 씨의 최대 매력 포인트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담당 아이돌은 후카 씨 한 분뿐이었죠. 그리고 앞으로도 후카 씨 이외의 아이돌을 담당하지 않을 거예요. 제겐 후카 씨 한 분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알았어요…! 너무 그렇게 띄워주시지는 마세요! 부끄럽다구요…."


아아, 부끄러워하시는 저 모습마저도 너무 아름답고 예뻐요. 저 미소를 본 이후로부터 단 한 번도 후카 씨의 담당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후카 씨께서는 제게 그런 질문을 던지신 걸까요?

사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이돌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식의 질문을 던져서, 나오는 대답에 따라 프로듀서들의 생각을 검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만족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를 알아낸다는 것이죠.

하지만 후카 씨께서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저는 후카 씨께서 그런 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실 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후카 씨께서는 제가 다른 아이돌도 담당하기를 원하시나요?"


"외람되지만, 프로듀서님께서 한두 명 정도 더 담당하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요."


"제가 후카 씨 외에 다른 아이돌들까지 담당하게 된다면, 저는 여러 가지 늘어난 업무 때문에 바빠져서 후카 씨께 드릴 수 있는 관심과 기력이 줄어들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오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고 몸이 상하겠죠. 그리고 결국엔 쓰러지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건 싫어요. 후카 씨를 제대로 볼 수 없다니, 후카 씨께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다니. 프로듀서 된 사람으로서 안 될 일이에요."


제가 과로로 인해 쓰러져 버린다면, 후카 씨께서 저를 간호해주실 수도 있기는 해요. 담당 아이돌에게 간호받는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기쁘고 행복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후카 씨는 전직 간호사이기 이전에 현직 아이돌입니다. 저만 붙잡고 간호해주실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간호받기에는 저로서도 너무 죄송한 일이고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마치 제가 정말로 과로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운명을 직격으로 맞은 듯, 순간 눈물이 날 뻔했죠.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후카 씨께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후카 씨만을 프로듀스하겠습니다. 후카 씨를 위해, 그리고 제 건강을 위해."


마지막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제 건강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프로듀서님께서 저를 이렇게나 생각해주신다는 걸 알 수 있어서 기뻐요."


"기쁘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말한 뒤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차오르던 눈물을 가까스로 숨겼습니다. 그리고 살짝 졸린 척하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음, 잘 닦인 것 같네요. 후카 씨께서 저의 이 나약한 눈물을 보지 못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는 건 나약한 게 아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찻주전자가 모두 비워지는 순간이 오고 말았습니다. 처음 잔을 따랐을 땐 주전자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온기가 담긴 한 잔마저 비우니, 그때에야 주전자는 더 이상 따뜻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차를 다 마셨네요. 이제 차가 없어요."


"그러네요. 이제 가보아야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후카 씨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후카 씨?"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흘렀으니까요. 벌써 5시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 말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조금 안 되었는데,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벌써 5시간 가까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피곤하실 텐데..."


"후카 씨께서 타 주신 자색옥수수차 덕분에 피로가 가셨어요. 운전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조금만이라도 후카 씨와 더 같이 있고 싶네요."


"그러면, 무사시닛타역까지만 데려다주시겠어요?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갈게요."


"무사시닛타역인가요. 알겠습니다."


코트를 다시 걸쳐 입고, 차 키를 챙긴 뒤, 후카 씨를 이끌고 자가용 차가 주차된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는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조금 흐려졌습니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동시에 '오늘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지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세심하게 눈여겨볼 걸 그랬어.


조수석 문을 열어 후카 씨를 태워드린 뒤, 저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켠 후 자동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차가 달려가는 동안, 차내 라디오에서는 실없이 축 처지는, 제목도 알 수 없는 멜로디만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꺼도 될까요, 후카 씨?"


"예, 부탁드릴게요. 멜로디가 너무 단조롭고 처지네요."


후카 씨의 허락을 받고 차내 라디오를 껐습니다. 라디오를 끄고 나니, 더욱 적막이 흐르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무엇이 말씀이신가요?"


"지금의 분위기 말이죠. 저는 사실 후카 씨와 같이 있으면 여러 가지 주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했었고요."

"하지만 막상 후카 씨와 같이 있으니까,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오늘도 차를 마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후카 씨, 한 가지만 대답해주세요. 오늘 저와의 시간이 즐거우셨나요?"


그렇게 질문하면서, 동시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만약 후카 씨께서 즐거우셨다고 대답하신다면 저로서는 무척 감사하고 영광이지만, 설령 아니라고 하신다 해도 저로서는 할 말이 없어요. 제 어휘력 부족이 가져온 결과니까요.


저의 이 질문에, 후카 씨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즐거웠다기보다는, 프로듀서님의 진심어린 마음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프로듀서님께서 언제나 저를 위해주시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저 스스로는 행복했어요."

"동시에, 아까 프로듀스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 남몰래 눈물이 차오르시는 걸 보며, 그러면서도 제게 걱정과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듯한 표정을 보며, 프로듀서님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마음이 여린 분이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 말에, 저는 순간 매우 놀라며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 그걸 보셨어요?!"


"눈가가 촉촉하시던데요? 그리고 눈도 다소 붉어지셨고요."


저는 최대한 숨기겠다고 숨긴 건데, 후카 씨께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후카 씨…. 눈치가 무척 빠르시네요."


"후훗, 제가 괜히 전직 간호사겠어요? 간호사는 재빠르게 주사와 약물들을 파악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고요."


나 원 참, 저는 도저히 후카 씨를 이길 수가 없겠네요. 제가 졌습니다!


다시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자동차는 달려갔고, 잠시 후 무사시닛타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했어요. 무사시닛타역이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드려요, 프로듀서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후카 씨. 문을 열어드릴게요."


말한 뒤, 차에서 나와 후카 씨가 계신 조수석의 문을 열어드렸습니다. 후카 씨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리셨어요.


"감사드려요, 프로듀서님~."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래야겠죠. 집에 도착하면 저녁쯤 될 것 같아요."


"안전에 유의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후카 씨를 직접 댁까지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후카 씨께서 무사시닛타역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셨으니까…."


"저를 위해주시는 그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돌아갈 때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할게요."


말씀하신 뒤, 발걸음을 떼셨습니다. 이제 정말로 떠나는 시간이 온 거예요.

다섯 발자국 정도 걸어가시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저를 보셨죠.


"후카 씨?"


"프로듀서님,"

"오늘, 프로듀서님과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어 정말 행복했어요."

"제가 프로듀서님께 도움이 되고, 프로듀서님께서 제게 행복이 되어주셔서, 무척이나 기쁘고, 감사했어요."

"다음에 또 기회가 닿는다면, 프로듀서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짧은 시간 속에서라도 프로듀서님과 다시 한번 티타임을 갖고 싶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후카 씨와 함께 오늘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된다면 후카 씨와 함께 다시 한번 티타임을 갖고 싶어요. 짧은 시간이라도 괜찮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저에게 있어서 영원과도 같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네요.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그만큼 깊은 곳에 숨겨놓는다더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말, 가장 해야 할 말은 제 목 깊은 곳에 숨어 나오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말,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후카 씨께서 걸음을 돌려 갈 길을 가시며, 저 멀리 사라지실 때까지, 본심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후카 씨를 보내고, 저는 차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운전대가 잡히질 않네요. 


"난 정말 바보야…."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말하지 못했던 걸까. 대체 왜, 대체 무엇 때문에, 대체 뭐가 문제야? 아까 그때가 제일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어째서 속절없이 그냥 보내버린 걸까. 이렇게 보내버렸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 진심은 언제쯤 말해야 하는 걸까.


"신이시여…."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고 싶은 정도로 마음 한쪽이 공허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미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색옥수수차로도 미처 씻어내지 못한 피로감에 아까 말하지 못한 본심이 남긴 미련이 합쳐져 그저 누워만 있었어요.


"하아…."


한숨밖에 안 나오네요.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심란한 마음에 하염없이 누워만 있는데,


띠링,


문득 핸드폰의 알람 벨이 울렸습니다. 핸드폰을 켜니, 후카 씨께서 보내신 문자가 화면에 올라와 있네요.


[안녕하세요, 프로듀서님. 후카예요. 저 집에 도착했어요. 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다시 기운찬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문자를 보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이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지금을 놓치면 영영 말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마음을 따라, 핸드폰을 잡고 자판을 두들겼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던 본심을 한 자 한 자 입력해나갔습니다.


[안녕하세요, 후카 씨. 오늘 티타임 정말 즐거웠어요. 그리고 행복했어요.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한번 티타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후카 씨와 함께하는 시간이, 저에게 있어서는 가장 영원했으면 하는 때이니까요.]


진심 메시지를 모두 입력한 뒤 전송 버튼을 누르니,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리고 기력이 빠져나갔습니다.


"드디어…. 말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까 몇 줄 되지도 않는 내용인데, 어째서 저는 그렇게도 말하기를 주저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뭐가 문제였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띠링,


생각보다 빠르게 답장이 왔습니다. 알림음이 들렸을 때, 제 심장도 터져나가는 줄 알았어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그런 기분이었죠.

핸드폰을 켜고 후카 씨의 답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프로듀서님께서도 즐거우셨다니 다행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내일도 같이 차 한잔 하지 않으시겠어요? 내일은 차만 마시지 말고, 식사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지금 타조 떼가 제 가슴 위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무척 기뻤습니다. 후카 씨께서 먼저 이야기해주시다니, 아마 저라면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사리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좋아요. 후카 씨와 함께하는 티타임을 또다시 가질 수 있다니, 무척 기쁜걸요.]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스캔들 걱정해서 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스캔들 같은 건 아무 걱정도 되지 않네요. 뭐가 어떻든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아까 제가 후카 씨께도 말씀드렸듯, 설령 스캔들이 일어나서 저희가 처리하지 못한대도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겁니다. 감봉이나 반성문 몇 장 정도야 저희의 기쁨에 비하면 싼값이죠.


[감사드려요! 그럼, 내일 다시 뵈어요! 내일은 우시면 안 돼요!]


[아하핫! 제가 오늘은 좀 눈물 흘렸지만, 내일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오늘의 저와 내일의 저는 다를 테니까요!]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은 뒤, 메신저를 마치고 핸드폰을 껐습니다.


이 모든 게 끝난 순간, 모든 게 해결된 순간, 제 마음속에 있던 모든 긴장과 두려움, 미련과 쓰라림은 한순간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더는 괴롭지도, 힘들지도 않아요. 제가 어째서 그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저는 지금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기에, 무척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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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았습니다.

이 글은 Weissmann항께서 만드신 스레드 '티타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티타임의 주인공은 토요카와 후카입니다. 그리고 카테고리는 '자택'+'대화'입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아이디어도 없고 시간도 여의찮아서 계속 미루다가 이번에야 쓰게 되었네요. 사실 이번이라고 해도 쓰는데 일주일 가까이 소요되었지만 말이죠.

나름 분량을 채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A4용지 15장 정도 분량만 써보자` 싶은 마음으로 썼는데, 왠지 안 될 것 같아 `10장만 좀 넘기자`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15장 분량으로 쓰는 데 성공했네요.

원래 '한입거리 티타임'이라는 이 제목은 정식 제목이 아니라 가제였습니다. 근데 딱히 괜찮은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서 그냥 그대로 간 거고요.

미나미도령 앞으로도 간바리마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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