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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프로듀서 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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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8, 2021 12:43에 작성됨.

「아, 돌아왔나.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과장님...」


자리로 돌아오자 과장님이 아는 체를 하며 나에게 이것저것을 캐묻는다. 하지만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나는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돌려보냈다. 쓰던 보고서는 아직 화면을 가득 채운 채다.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야 내가 월급을 받는 이유이니까. 십 년 동안이나 이 회사에서 버텨온 이유이니까.


그 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몇 편의 보고서를 더 쓰고 평범하게 야근을 했을 뿐이다. 아니, 운이 좋으냐 좋지 않느냐를 굳이 고르자면 좋은 축일 것이다. 오늘은 최소한 막차를 타지는 않았으니까. 칼같은 퇴근은 아니라도 적당한 시간에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올 수 있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휴식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철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음?」


그 순간 점멸하는 나의 휴대전화.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기를 쳐다보니 전에 교환해 두었던 카오루의 전화번호가 밝게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일까, 오래된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예상 외의 목소리였다.


「당신, 정말 이럴 거야?」


「카나데?」


카오루의 전화번호에서 들려오는 카나데의 목소리. 내가 전화번호를 잘못 저장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을텐데. 나는 어리둥절함을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내려고 노력하며 전화를 받는다. 전화 건너편의 소녀는, 아니, 이제는 그 누구라도 본받고 싶어할 숙녀는 변하지 않은 목소리로 나를 힐난한다.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그래도 둘 중에 누가 잘못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내 쪽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잘못할 일은 없고, 반대로 나는 그녀에게 지금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무슨 일이야, 이런 시간에. 게다가 전화번호도 카오루의 것이고...」


「프로듀서 씨,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오늘 일이야.」


「오늘 일?」


카나데의 말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나. 오늘 일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가지 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이란 일상 속에 있었던 비일상은 그 일 하나밖에 없으니까.


「역시 사장님과 전화했던 사람이 카나데였구나.」


카나데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카나데.」


다시 한 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작게나마 불러보았다. 


「...」


하지만 전화기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고, 곧 카오루의 이름으로 카나데와 한 전화는 끊겼다.


「뭐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품 속에 넣었다. 왜 카나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걸까. 왜 카오루의 전화로 전화를 걸었을까. 그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역의 계단을 오른다. 올라서 역으로 들어오는 전차를 탄다. 한 번 환승해야 하는 행선지.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오롯이 나를 위해 남겨진 자리에 착석했다.


자리에 앉아 가다가 환승역에서 일어나 갈아타는 일상. 매일매일과 똑같은 일상. 십 년 간 지속한 일상. 그 일상 속에서 나는 살아 걸어다닌다. 아니,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마유가 죽었을 때에는 그렇게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 때는 그랬는데.


「음...?」


집으로 가는 길. 검은 문과 하얀 침대의 방으로 가는 길. 그 길에 평소와는 다른 누군가가 보인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분명히 혼자여야 하는 길. 가로등만이 겨우 비추는 길. 어두운 길. 그 길.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프로듀서 씨.」


「카나데...?」


그 길의 끝에 서 있는 소녀. 10년 전의 소녀. 파란 머리칼의 소녀. 잊을 수 없는 소녀. 


「네가 어째서 여기에....」


「설명은 나중에 할께. 일단 들어가자구. 오래 서 있어서 다리 아파. 아니면 뭐야, 나를 내팽개칠 셈이야?」


「오래 서 있었다니, 그건 또 무슨...」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자구.」


카나데의 손길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나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은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보드랍고 향기나는 손. 그 손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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