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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프로듀서 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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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6, 2021 04:04에 작성됨.

사랑. 산화하지 않은 사랑. 나는 꿈 속에서 몇 번이고 등장한 두 소녀를 생각했다. 붉은 실의 소녀와 파란 실의 소녀를 생각했다. 아니, 모든 것은 꿈의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이 실존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다.


「전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군.」


「무슨...」


「자네, 하야미 카나데의 프로듀서였던 것은 맞나?」


「예, 맞습니다.」


어째서일까. 부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긍정이라는 발을 달고 꾸물거리며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뇌에서 심장으로, 팔로, 온 몸으로, 그리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과거의 편린들. 어쩌면 나는 한 발 더 물러서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서 결국 흔적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아, 순순히 인정해주니 다행이군. 하야미 군 측에서는 이것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했는데,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하야미 군이요? 사장님, 하야미 카나데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모른다면 자네의 일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지 않겠지. 물론 그 이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네.」


「그럼 사쿠마 마유에 대한 것도 알고 계십니까?」


한 번 터져버린 말문은 닫힐 줄을 몰랐고, 급기야 내 입에서는 한 이름을 내뱉고야 말았다. 사쿠마 마유. 나의 더러운 혀와 의미없는 입술로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일까. 새삼스럽게도 나는 모든 일의 시작점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말했잖나. 자네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하야미 카나데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자네, 너무 거짓말을 못 하는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사장님의 눈에서 파란 안광이 나온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보고 10년 전의 소녀를 생각했다. 언제나 나와 가까이 있었던 소녀를 보곤 스스럼없이 나에게 다가온 소녀.


「조금 실망했네. 여기서까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말하자면 자네는 이미 거짓말에 잡아먹힌 괴물이 되었다는거야. 이것 참,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 지 모르겠군. 거짓말쟁이에게 진실된 이야기는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건 무슨...」


사장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내뱉어진 말. 그 말에 사장님은 정말로 실망했다는 듯이 나를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신걸까. 하지만 지금까지 하신 말씀들의 저의는 알 수 있다. 예컨대 사장님께서는...


「으음, 어찌하면 좋을까.... 아, 그렇지.」


복잡한 나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다는 듯이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사장님의 손에는 전화가 들리고, 번호를 힘있게 누르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걸까. 나는 불현듯 카나데의 번호가 떠올랐다. 단 한 명의 증인. 단 한 명의 피고.


「그래, 대화 중일세. 들어서 알고 있지만 꽤나 완고한 사람이군. 그런가, 자네도 이미 알고 있었는가. 그래, 알겠네.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지. 다만 시간은 많이 줄 수 없어. 나도 언제까지 자네들의 사정을 봐 줄 수는 없으니까. 부탁하지. 그럼 끊겠네.」


전화가 끊기고 사장님의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나를 향해 보인다. 나보고 보라는 듯한 미소였다. 대체 뭘까. 대체 나에게 왜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일까.


「뭐, 오늘은 이만 하는 편이 좋겠군. 자네는 돌아가서 다시 일해주길 바라네.」


「...끝입니까?」


「그래. 이 이상은 대화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테니 말이야.」


선문답같은 사장님의 대답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건네고 사장실을 나왔다. 머리가 복잡하다. 사장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나를 죄인으로 인식하고 계시지 않다. 게다가 마지막의 전화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건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단 한 명. 나의 겉과 속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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