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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할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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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0, 2021 03:14에 작성됨.

*프로듀서 성별은 여성입니다.

*강제적인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서 들어와."



난 뒤따라 들어오면서 안을 흝어보았다.

안쪽은 부엌, 방은 두 개.

생각보다 안은 좁았으나 사람 한 명이 살기에는 적절한 공간이었다.

현관문은 잠기지 않았어. 신발은 바로 신을 수 있는 방향으로.

오한이 들 정도로 인기척이 없는 집이었다.



치아키는 여기서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 문지방보다 조금 뒤쪽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와서 적당히 앉아."



치아키는 책상에 가까이 있던 의자에 앉아있었다.

난 치아키의 말을 흘려보내고 현관부터 여기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현관까지 장애물은 없어.

자동차의 열쇠를 뺏고 녹음기를 회수하러 달려가 도망만 잘 친다면.



다시 방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치아키는 핸드백 속에서 노트북을 꺼낸 뒤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없어. 자동차 열쇠는 어디 있는 거지?

책상 위에는 노트북밖에 없어.

치아키가 입고 있는 코트 주머니? 아니면 핸드백 속?

계속 눈을 굴리던 중 벽장 쪽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보란 듯 이불이 가지런히 쌓여있고 벽장문은 열려있었다.

웃기지 마. 아까 그런 목적 없다고 계속해서 말해놓고는.

이러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속셈이었나?



"프로듀서."



치아키가 날 부르더니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치아키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모든 게 이해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꺼림직한 건지.

왜 이 아이가 날 여기까지 불러온 건지.

그날 이후 내 무의식에 계속 담겨있었던 답답한 불안.

의식이 없는 동안 이 아이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기분 나빠서, 괜히 불안하고 불안해서.

그 불안을 떨치고 싶어서.



"이거야. 잘 봐줘."



치아키는 계속해서 노트북 키보드를 달칵거렸다.

그리고 내 망막에 새겨지는 이미지들.

내 불안감이 기분 나쁘게 모든 사실을 적중시키고 있었다.

찰칵찰칵, 계속해서 노트북에 이미지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치아키는 그 이미지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밤의 추억들이야. 내 인생의 보물들."



그것들은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악의적이었으며

악의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했다.

기절해버린 나를 이용한 온갖 추태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거기에 찍혀있는 게 나라는 게 참기 힘든 장면들이.

무의식적으로 난 방 안으로 들어와 노트북을 있는 힘껏 닫아버렸다.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치아키가 내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아까 말했던 1M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프로듀서 정말로 기뻐."



"아냐.. 그게 아냐!"



벽장 속에 이불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계속 이러고 싶었어."



"이거 놔..!"



싫어! 이제 더는 싫어!

난 억지로 안겨져 있던 팔을 풀어버리고 현관문까지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프로듀서!"



무시해. 여기서 도망가는 거야. 여기서 더 있다가는..

5M밖에 되지 않았을 거리였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면서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녹음기는 괜찮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이 내몰아쉬며 뇌가 돌아가고 있다.

맞다. 녹음기.



"돌아가려는 거잖아? 혼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바닥에 울려 퍼졌다.

난 거기에 움찔하고 무엇인지 살펴보니 자동차 열쇠였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계속해서 들려왔다.



"바래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열쇠는 쓰고 난 뒤 대충 바닥에 내려놔도 괜찮아."



녹음기는 회수할 수 있어.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겠지만."



하지만 사진은?



"사진 전부 지워."



말하고 있는 중에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치아키가 구두 약속으로 지울리가 없어.



"전부 지워줘."



"... 프로듀서에게 보여준 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우리 둘의 추억인데 프로듀서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난 필사적으로 뭘 어떻게 하면 치아키가 사진을 지워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답은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보여줬던 치아키의 모습, 여 봐란 듯 깔린 이불.

다시 나는 강제로 선택당해야 했다.

하나는 이대로 여기서 나와 집에 가서 

저 끔찍한 사진을 치아키가 가지고 있는 세계.

또 다른 하나는...

그래도 만약 저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버린다면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프로듀서는 내가 이걸 나쁜 일에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거야."



헛된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절망이 내려왔다.



"약속할게. 우리 둘만의 소중한 추억인걸."



약속? 여기에 와서 또 약속?

처음부터 치아키는 약속을 지킨다는 말을 계속해서 강요해왔다.

그 약속을 휘두르면서 도망칠 수 없는 구석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게 치아키의 방식이었다.

항상 선택은 이쪽에서 맡기고 직접 말하게 하려 하는.



"만약... 내가 그때처럼 같이 잔다면 지워줄래..?"



저 사진들이 평생 있는 것은 절대로 싫어.

내가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짜낸 말에 치아키는 동조할 거라고 믿었다.



"그건 무리야. 내 인생의 보물이라고 말했잖아.

이 사진들을 볼 때마다 난 활력이 샘솟는 것 같아."



내 머릿속에 모든 감정들이 폭발하면서 마구잡이 뒤섞이고 있었다.



"자존감, 자존심, 내 모든 감정. 이걸 보면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

절대로 썩지 않는 얻기 어려운 추억.

그걸 겨우 잔다는 걸로 맞바꿀 수는 없어."



치아키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요점은 저걸 사용한다는 거다.

또 다른 선택지. 저 사진이 설령 약속대로 협박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끔찍한 사진을 인생의 보물이라고 내뱉는 인간과 이어진 인생.

앞으로 혹시라도 나에게 행복한 순간이 찾아와도,

그 순간에도 어디서 치아키가 저 사진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상상을 할 수밖에 없는 인생.



여기를 나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없었다.

만약 본의 아니게 치아키와 잤다는 사실이 나에겐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

치아키를 때리고 노트북을 뺐을까? 

혹시 백업을 미리 했다면 뺏을 가치가 없어. 다른 방법은? 다른 선택지는?

발이 움직이지 않아. 출구는 눈앞에 바로 있는데.



"프로듀서."



어느새 다가온 치아키가 굳어있는 날 끌어안았다.

치아키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한숨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 

내년에 나와 다른 아이돌들끼리 미국으로 가는 대형 프로젝트가 있어.

프로듀서가 사퇴했을 때는 이미 난 미국에 있을 거야.

그리고 추측하는데 프로듀서의 퇴사까지 앞으로 4개월 정도.

일요일만 나의 연인이 되어주지 않을래?

일요일마다 만남을 가지고 인생의 보물이 변할 정도로

추억을 많이 쌓아준다면 사진 같은 건 잃어도 상관없어."



"...."



"그리고 퇴사 날에 프로듀서 눈앞에서 사진들을 모두 빠짐없이 처분해 줄게.

물론 다른 요일에는 절대로 연락하지 않을 거야.

일요일만 나와 프로듀서가 만난다는 조건 어때?"



연인, 만남, 즉 잔다는 것.



"나는 약속은 절대로 지킨다는 거 알고 있지?"



퇴사까지 4개월. 그 사이에 일요일은 몇 번 있었지?

어림잡아 16? 17? 18? 4개월.

그 기간만 견뎌낸다면.



"그중에 사진이나 녹음 그리고 영상을 찍지 않는다고 약속 안 하겠다면 안 해."



"아... 물론이야..!"



치아키가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진다. 환희의 숨결.



"약속할게. 이제 두 번 다시 찍지 않을게."



"..!"



안고 있던 치아키의 손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내가 입고 있는 겉옷 단추들을 천천히 풀고 있었다.



"ㅇ, 아까 사진 파일을 따로 저장해뒀다면 그것도 지워."



"그런 거 애초에 없었어."



몸이 공포감에 떨려왔지만 치아키는 그걸 아랑곳하지 않았다.

겉옷은 모두 벗겨져 바닥에 스르륵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혐오감이 차오른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 아니야. 백업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런 보험을 든다니 거추장스럽잖아."




"자국, 없어져 버렸네."



"... 누가 보면 이상하게 여기니까 하지 마."



나를 내려다보는 치아키는 내 목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난 멍하니 천장에 있는 불이 꺼진 형광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아키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안 보이는 곳에 남겨줘야겠네."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고 침대에 들어간 그때가 그나마 나았어.

그 아픔. 꿈속에서도 나오는 기분 나쁜 감촉.

그것들이 정말로 나에게 덮쳐오는 공포.

부드러운 혀의 감촉은 마치 지네가 기어다는 것 같아서.

고통을 알고 있는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온몸으로 이 행위를 거절하지만 치아키는 개의치 않았다.



"프로듀서... 아.. 역시 당신은 아름다워. 정말로 사랑해."



오래된 목조건물의 작은방.

누가 가져다주고 썼는지 모를 이 작은 베개가 유일한 내 편이었다.




"그럼 다음 주 일요일에 먼저 연락할 테니까. 그때 봐 프로듀서."



치아키가 내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녹음기를 주고 떠났다.

오른손에 녹음기를 들고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거실에 있었다.

만약 치히로 씨가 여기 있었더라면.

자기가 으름장까지 써서 보낸 사람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돌아온다면

멍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조금 흥미가 있었다.

치히로 씨가 있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음 놓고 울부짖을 수가 있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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