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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할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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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6, 2021 23:10에 작성됨.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모든 걸 게워내고 싶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전부 비워버리고 싶었다.

출근한다는 생각 같은 것도 못할 정도로 화장실에서 계속해서 속을 비워냈다.

지쳐 쓰러질 때쯤 난 대충 입을 닦아내면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 한심하다 정말로 한심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손글씨가 적힌 포스트잇 하나.

난 그걸 읽지도 않고 꾸겨버렸다. 

휴대폰을 열고 치히로 씨에게 일 못 나간다고 단순한 문자를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 일을 쉬게 되었다.




이틀 정도 지나 나는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치히로 씨는 걱정하며 무슨 일 있었냐고 추궁했지만

단순한 피로가 쌓인 것뿐이었다며 되받아쳤다.

평소처럼 아이돌들을 데려다주고 이야기하고 일을 한다.

사무소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K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거두고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K씨,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통화를 하고."



"뒤풀이 끝나고 난 후 전화는 안 받더니 이제야 받네요?"



"아... 죄송해요 그때는 정신없이 자버리는 바람에 그만."



전화했었구나 눈치채지 못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때 난 기절해있었으니까.

그리고 핸드폰 같은 거 이틀 동안 계속 쳐다보지도 않았고.



"피곤했었군요? 이해해요. 

저도 그때 얼마나 피곤했는지 돌아오자마자 침대로 누웠으니까요."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참, 로케 일정은 어떻게 돼가나요?"



"잘 돼가고 있어요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이 있어버려서."



"무슨 일 있나요?"



"치아키 씨가 뒤풀이 때 만날 수도 있다는 말 했었잖아요?

그런데 오늘 문자로 사정 때문에 거기에 못 가게 되었다고 해서요.

조금 아쉽다고 할까 그래도 치아키 씨는 바쁜 사람이니까 이해는 가요."



K씨의 실망한 목소리와 한숨이 들려왔다.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 것 같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치아키 씨에게 전화해 봐도 전부 받질 않아서요.

제가 뭔가 미운 받을 짓이라도 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ㅊ, 치아키가 바빠서 그런 걸 거예요."



"그렇겠죠..?"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내 양해로 통화가 종료됐다.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에 저장돼있던 K씨의 무대 영상과 사진들을 순서대로 삭제하기 시작했다.

K씨의 목소리와 웃는 사진들이 지금은 어딘가로 치워버리고 싶다.

분명 난 K씨의 모든 것을 좋아했을 텐데.

아까 했던 대화들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내가 K씨를 위해 했던 짓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실망해버리는 K씨가 짜증 난다.



"다 없앴다..."



텅 빈 갤러리를 보며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난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남과 동시에 온몸이 경련하듯 아파졌다.

아야야.. 생각보다 오래가는구나.

애초에 치아키가 전무님에게 제안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 따위 벌어지지 않았겠지?

차츰차츰 분노가 쌓여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K씨가 치아키의 팬이 아니었더라면.

애초에 치아키가 K씨를 몰랐더라면.

애초에 K씨가 치아키의 노래를 듣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내가 치아키를 아이돌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내가, 내가 프로듀서가 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었을 텐데!

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세게 던져버렸다.



"크윽...!"



액정이 깨진 화면에 보이는 난 눈물투성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해서 소리 없이 울어댔다.

퇴사하자. 이사도 해버리자.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리는 거야.

프로듀서와 상관없는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나는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짐했다.

처음 346에 합격했을 때 가족들이 정말로 좋아했었지.

대기업에 입사해서 선물들도 받았었고.

대기업 따위 알까보냐. 두 번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야.




마음을 잡은 뒤로 난 퇴사를 목표로 마지막 불꽃처럼 일했다.

아이돌의 관계는 최대한 완만하게, 일은 되도록이면 열심히.

바보처럼 웃어대고 둔감하게 행동해나갔다.

몸의 아픔도 자국도 없어져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싫어진 이유가 늘어난 것뿐이야.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생긴 것뿐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어댔다.

악몽을 꾸고 밤을 새는 것 빼고는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자 나는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띠링하며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다. 

난 이사비용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는 몸이 얼어붙었다.



『30분뒤 데리러 갈게』 쿠로카와 치아키



어째서? 데리러 온다고? 뭐 하러 오는 거야.

생리적 혐오감과 동시에 그때 일이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용무는 없지 않았어? 한 번뿐이라고 했잖아.

이 집에 있으면 위험하다. 어디로든 나가야.

사람이 많은 곳, 그래 애들이 있는 기숙사.

난 짐을 대충 쑤셔대면서 방을 나온 순간.


띵동.


뭐...? 아직 10분 채도 안됐잖아.

현관문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프로듀서, 안에 있어? 문자 봤으면 알고 있지? 열어줄래?"



치아키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난 혹시라도 소리가 세어 나갈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초인종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대고 있었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태연하게 찾아오다니 무슨 생각이야.



"...."



계속해서 울려댔던 종소리가 멎었다.

밖에서는 치아키가 아직 있었지만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는 들리지 않아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통화가 끝난 소리가 들리자 밖은 조용해졌다.

그래도 치아키가 떠났는지 않은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몇 분 후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누구지? 치아킨가? 아니면 다른 사람?

여기서 전화를 받게 된다면 내가 여기 있다고 결정 나게 돼버려.

무시하자. 여기선 받지 않고 무시해버려.

그냥 휴대폰을 내버려 두고 어디 가버렸다고 착각시키게 만들어버리자.

전화벨이 2,3번 울려대더니 이내 뚝 끊겼다.

좋아. 포기한 것 같아 이제 치아키가 여기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끝나는 거야.

갑작스레 현관문이 찰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전화했었는데 어디 간 줄 알았잖아요 프로듀서."



치히로 씨? 어째서 치히로 씨가 내 집에.

내가 치히로 씨랑 만나자는 약속은 한 적 없었은데?

끼익 현관문이 열리면서 치히로 씨와 또 한 명이 문 앞에 서있었다.



"치아키가 말이죠 프로듀서와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글쎄 전화를 해도 안 받지 집으로 와도 문을 안 열어주니까 저한테 도움을 요청했어요."



"아..."



"있으면 있다고 전화 좀 받아주지 그랬어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집에 있는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나오세요."



아까 했던 전화... 그게 이거였구나.

치히로 씨는 내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에요. 전 약속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돌아가달라고 해주세요."



"그런거 치고는 옷도 입고 있고 짐도 다 챙겨져 있잖아요.

기다리고 있다고요 치아키가."



"저, 저 컨디션이 나쁜 거 같으니까 돌아가달라고 해주세요."



"프로듀서.. 치아키가 얼마나 걱정했으면 저한테 연락을 했을까요."



아냐.



"일부러 차까지 끌고 왔던데 기분 전환할 겸 갔다 오세요."



"ㅈ, 정말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그냥 나중에 오라고 하세요."



"아이돌이 프로듀서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건 뭔가 상담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프로듀서는?"



그만해. 그게 아니란 말이야.



"치, 치히로 씨. 제발 부탁이에요 치아키는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치히로 씨가 정색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프로듀서. 그냥 갔다 오세요.

그리고 나중에 아이돌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한 마디 할 테니까 그리 알아두세요."



치히로 씨는 차갑게 돌아서더니 현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치아키에게 돌아갔다.

믿고 있었다. 치히로 씨라면 내 사정에 대해서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며.

밖에서 치히로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프로듀서가 나올 거예요."



"괜히 실례를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다음에 올까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전 이만 가볼 테니 둘이 알아서 하세요."



"네,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치히로 씨."



터벅터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치아키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난 거기에 움찔거리며 마음속으로 혐오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치아키가 저번처럼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나갈까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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