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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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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7, 2014 00:44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 반다이 남코 게임스 / A-1 Pictures

그 날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평 소처럼 TV방송국 회의가 있어 외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사무소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지라 사무소 근처 역에서 전철을 타 3정거장을 지나 바로 내리면 방송국 근처에 도착한다. 나는 역에서 내려 도로 옆 길가를 걷고 있었다.

그 날 회의 내용은 히비키의 출연 시간에 대한 체크였다. 히비키도 같이 갔으면 좋았겠지만 레슨이 있었는지라 나 혼자 프로덕션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히비키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히비키가 충격을 받으면 큰일이었을 테니까. 그늘에서 일하는 프로듀서인 나와 양지에 나와서 팬들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아이돌은 엄연히 다른 존재니까.

아무튼 그 날은 그렇게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길 저 건너편에서 어떤 모자가 걷는 게 보였다. 어머니 쪽이 은근슬쩍 아즈사 씨를 닮았는지라 시선이 끌렸다. 어머니는 근처 슈퍼의 세일 전단지를 보며 걷고 있었고 아이는 자기 머리보다 더 큰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는 공을 바닥에 튕기고 튕겨나간 공을 다시 줍고 다시 튕기길 반복했다.

길가에서 저러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이가 튕긴 공이 도로로 굴러갔다.

아이가 공을 따라 도로로 뛰어들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여전히 전단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아이가 공을 잡았다. 그리고‥‥‥.
아이의 정면으로 화물트럭이 달려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몸이 움직인 뒤였다. 숨이 찼는지 안찼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그대로 전력을 다해 아이에게 뛰어가 아이를 두 팔로 밀쳤다. 아이가 뒤로 넘어지는 게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고, 그것과 같은 속도로 내 시야가 천천히 뒤집어졌다.

몸이 붕 뜨는 기분 나쁜 부유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 부유감은 이내 무거운 압박감으로 변질되어 내 머리를 눌렀고 압박감에 짓눌린 내 의식은 슬로 모션보다 더 아주 천천히 어두워졌다.

정 신을 차리고 보니 희뿌연 안개처럼 시야가 흐리게 보였다. 온통 하얗고 흐린 기이한 세상에 둘러싸인 것 같은 느낌이다. 또한 시야 뿐 아니라 온 몸의 감각이 애매하다. 마치 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무거웠으며 정신도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몽롱하다. 온통 하얗고 뿌연 바탕에 겨우 사람 형상처럼 보이는 걸 포착했다. 흐릿한 그림자가 둘이었는데 하나는 여자였고 하나는 남자였다.

둘 다 배경과 똑같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집중해서 눈을 부라리니 그 옷이 의사복과 간호사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유키호가 찍은 의료관련 캠페인 CM에서 지겹게 본 의상이니까 틀림없다.
그렇다면 여긴 병원인가‥‥‥.

그러고 보니 트럭에 치였는데‥‥‥. 우선 목숨은 건졌나.

“정신이 드셨나보군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남자 쪽이었다.
“여긴‥‥‥. 병원인가요‥‥‥.”
목소리가 갈라진다. 남에게 들려주기 싫을 정도로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네, 병원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네에‥‥‥. 저‥‥‥. 사고가 난 후로 얼마나 지난 거죠? 지금 몸이 묘하게 무거운 게‥‥‥.”

나 는 시험 삼아 몸에 힘을 줘봤다. 그러자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걸 시작으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그 힘이 팔꿈치, 어깨, 가슴을 지나 허리를 통해 하반신까지 뻗어나갔다. 마치 동상에 걸린 몸을 급하게 뜨거운 물에 담근 것 같은 그런 요상한 감각이 전신을 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치 다리만 꽁꽁 언 것처럼 뜨뜻한 기운이 돌지 않는다. 그것뿐이 아니다. 이 느낌은‥‥‥.
마치‥‥‥.

“수술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건‥‥‥.
“사고가 나서 4일이 지났습니다.”
“아‥‥‥. 잠깐만요. 지금 몸이‥‥‥. 좀 이상한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다리를 들어봤다. 다리를 덮은 이불천이 스르륵거리며 무릎에 걸렸다. 본래라면 좀 더 넓은 각을 이루어야하는 이불이 무릎에서 가파르게 꺾였다. 직각에 가까운 그런 각을 이루었다.

머 릿속이 차가워졌다. 등에 소름이 끼칠만한 그런 상황이지만 애석하게도 감각이 무디어진 몸은 소름마저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몸에 돌던 뜨뜻한 기운이 순식간에 얼어붙듯 식었다. 하지만 한기는 들지 않았다. 그저 몸이 목탁처럼 무생물적인 그런 물질이 된 것 같았다.

잠깐만‥‥‥. 이거 설마‥‥‥. 설마‥‥‥.

의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진지한 어투로 말하려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목숨은 건지셨지만‥‥‥. 애석하게도‥‥‥.”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습니다.”
-

그로부터 4달이 지났다.

오 늘도 나는 재활실에서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힘겹다. 오른다리를 대신해 장착한 앙상한 의족이 어떻게든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잘린 무릎아래를 은색의 금속 막대기가 대신하고 있다. 없는 것보단 훨씬 낫지만 걷기가 힘들다.

의족을 처음 달았던 날 나는 병실에서 혼자 숨을 죽이며 흐느꼈다. 다리를 절단했다는 사실을 안 날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이 나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다리를 잘랐다는 실감이 나를 집어삼켰다. 속이 쓰린 느낌이 가슴까지 퍼져 내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남들보다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내 다리를, 피와 살과 뼈로 구성된 내 다리대신 저런 차갑고 무기질적인 금속 막대기에 의존을 해야 한다니 설움이 몰려왔다.
지금도 그 설움은 내 마음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의족으로 땅을 밟을 때마다 마치 초인종을 누르는 양 그 날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계속 불러온다.

트럭에 부딪쳐 하늘을 날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직전에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었던 다리의 생생한 감각.

지금도 미련이 남아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건 사고였다. 그 누가 멀쩡한 다리를 내버릴 생각을 하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우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마 이 우울함은 앞으로 수십 년은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나 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 말고도 또 있다. 내가 구한 그 아이의 부모는 사고가 난 직후 허겁지겁 그 자리에서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구급차를 부른 건 사고를 목격한 도로 옆 철물점 주인 아저씨였다.

삭막한 세상이구나. 결국 그 모자는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다리는 사고를 당한 후로 하나로 줄어들었지만 땅을 짚고 다니는 축은 세 개로 늘어났다. 왼발과 볼품없는 오른 금속의족, 그리고 오른 겨드랑이에 낀 목발.

의사 말로는 재활에 익숙해지면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걸을 때마다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휩싼다. 그리고 그 감정은 육체를 눌러 육체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워킹라인의 끝을 밟았다. 오늘의 재활이 끝났다. 순식간에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휠체어에 걸어둔 수건으로 얼굴과 목 근처의 땀을 닦고 휠체어에 쓰러지듯 앉았다.

내 가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몸을 축 늘어트리자 재활실의 문을 열고 미키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키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다소곳한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 같았으면 발랄한 발놀림으로 리듬을 실어 걸어왔을 텐데‥‥‥.

“허니, 수고했어.”
“고마워. 미키.”
미키가 문을 열고 휠체어를 끌어줬다.

미 키를 포함한 765프로덕션의 아이돌 아이들은 이렇게 시간이 날 때마다 병문안을 와준다. 그래도 요즘에는 바쁜 모양인지라 처음만큼 자주 찾아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이 우선인 게 당연하니까. 그게 당연하다. 나는 어디까지나 그녀들을 그림자에서 밀어주는 존재였고, 그녀들은 양지에서 활동해야하는 존재니까.

이런 일로 쉬어선 안 된다.

“미키. 요즘 어때?”
“응?”
“새로 온 그 프로듀서.”

내 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 얼마 후에 사무소에 프리랜서 프로듀서가 임시로 들어왔다고 한다. 일이 바쁜 모양이라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아니 애초에 그 사람이 여기 병문안을 오는 것도 이상하다. 아무튼 실력은 꽤 괜찮다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라면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 받아 패닉을 일으킬 법한 상황일 테지만 스케줄 조정도 능숙하게 해내어 일을 척척 해결했다니까.

미키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허니보단 아니야. 역시 미키의 프로듀서는 허니인걸!”
나는 그게 미키가 나를 배려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미키의 성격이라면 솔직하게 말을 했겠지만‥‥‥. 내가 사고를 당하고 나선 이렇게 둘러대거나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래도 다행이야. 나 때문에 사무소 업무가 마비되면 안 되니까. 리츠코한테만 맡겨둘 수도 없는 모양이고.”
“허니‥‥‥.”
“신경 쓸 것 없어.”
미키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시선은 저 멀리 가져갔을 테지.

괜히 꺼낸 이야기다. 하지만 일부러 꺼낸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미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필요 없냐고 일부러 물어보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성격으로 변한 걸까‥‥‥. 사고를 당하기 전의 나는 적어도 빈말삼아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격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뭔가. 사고를 핑계 삼아 미키의 마음을 짓밟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나 자신에게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그렇게 안심하고 싶을 뿐이다.
“허니, 힘들수록 미키한테 의지해줬으면 해.”
“미키‥‥‥.”
“허니, 맨날 그랬잖아? 무슨 일 있으면 자기한테 맡기라고. 이번에는 미키 차례야!”
“고마워‥‥‥.”
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었지.

“765 프로덕션의 사훈을 잘 생각해봐.”
“단결‥‥‥. 말이지?”
단결, 765 프로덕션의 사훈이다. 나는 그 사훈을 밑바탕으로 아이돌 아이들과 열심히 업계에서 활약했다. 무명시절은 물론이고 아이돌 아이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지금에도 단결이라는 단어는 아이돌 아이들의 활동에 중요한 지표다.
단결이라‥‥‥.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굉장히 먼 곳에 있는 단어다.

“하지만 미키, 그건 적어도 한 사람 몫을 해야‥‥‥. 할 수 있는 말이야.”
“허니‥‥‥.”
“아니, 미안해. 괜한 말을 했어.”
병실에 도착하자 손님이 와 있었다. 다른 환자일 리가 없다. 1인용 병실이니까. 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그 1인용 병실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쿠로이 사장이 창가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쿠로이 사장을 보고 흠칫했는지 휠체어를 밀던 미키의 다리가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휠체어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고 쿠로이 사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상태는 좀 어떤가.”
“그저 그렇습니다. 똑같아요. 아, 미키 괜찮아. 혼자서 할 수 있어.”
나는 혼자서 힘겹게 침대 위에 올라탔다. 딱딱한 병원용 침대 시트가 삐걱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미 키의 얼굴 표정이 다소 굳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쿠로이 사장은 765프로덕션에 있어서는 라이벌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대 입장이다. 쿠로이 사장의 961프로덕션이 765프로덕션에 수놓은 각종 함정과 방해공작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오히려 긴장만 할 게 아니라 대놓고 으르렁거려도 될 만한 사이다. 그쪽과 우리는.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쿠로이 사장은 나의 은인이다.
내가 사고를 당한 날, 사고 소식을 들은 쿠로이 사장이 내가 최고의 환경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줬고 그 외에도 편의를 봐줬다고 한다. 내가 이런 개인병실에서 지낼 수 있는 것도 쿠로이 사장 덕분이다.

솔직히 놀랐다. 쿠로이 사장이 나를 위해서 힘을 써줬다는 게.

내가 쿠로이 사장에게 물으니 쿠로이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쓰레기 같은 765 프로덕션이지만 나름 라이벌이다. 라이벌이 빌빌대는 꼴은 볼 수가 없지.”
그의 평소 언행을 보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냥 믿기로 했다. 실제로 도움을 받았기도 했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얻는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써먹을 수 없는 몸뚱이로 전락한 나를 도와줘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765 프로덕션에 빚을 하나 만들어둔다고 생각해도‥‥‥. 수지가 안 맞는다.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쿠로이 사장이 말하는 이유가 맞는 것. 자존심이 강한 쿠로이 사장이 여태까지 자기와 대치해온 765프로덕션이 주춤거리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거다.

이 러니저러니 해도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이건 큰 호의다. 쿠로이 사장에게 큰 빚을 졌다. 쿠로이 사장이 수염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깨끗한 턱을 쓰다듬으며 신음했다. 쿠로이 사장이 천천히 나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꺼림직 했지만 나는 우선 가만히 있었다. 은인에게 실례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중에 다시 오지.”
“어? 가시는 겁니까?”
“바쁘다.”
쿠로이 사장은 그렇게 멋대로 내뱉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병실에서 나갔다. 미키가 조심스럽게 내 상체를 침대에 눕혔다. 미키는 쿠로이 사장이 앉아 있던 자리를 흘겨보곤 내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허니, 신경 쓰지 마.”
사고를 당하기 전 나는 평소의 미키에게 의외로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겼었는데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그래, 아마 내가 미키를 올려다보는 위치로 내려왔으니 더욱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

미키가 돌아간 건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아직은 저녁 직전의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내일 스케줄도 있으니 일찍 돌아가야 하니까.
미키가 나가고 나서 병실에는 적막만이 나와 함께했다.


오 늘은 오랜만에 미키와 하루카가 같이 버라이어티 쇼에 나가는 날이었다. 한창 바빠지기 전에는 둘이 방송에 같이 나가는 일이 많았지만 미키와 하루카 각각 인기가 늘어나 각자 바빠져서 둘이 같이 방송에 나오는 일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지만 서로 다른 방송국과 다른 프로그램에서 경쟁을 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미키와 하루카 뿐 아니라 다른 아이돌도 마찬가지. 다소 아쉽지만 각각 인기가 있다는 건 좋은 현상이다. 배부른 푸념이다. 예전에는 둘 중 하나라도 짧게나마 방송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으니까. 이게 모두 아이돌 아이들이 노력한 결과다. 무명시절부터 조금씩 쌓아올린 노력의 결과가 곧 팬들의 인지도가 되어 이젠 765 프로덕션도 유명 소속사다.

소속사가 유명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진 사무소건물을 옮기진 않았다. 너무 바쁘다보니 그럴 경황이 없는 게 그 이유지만 아무래도 사무소 직원과 아이돌 모두가 장소에 정이 들었다는 이유도 있는 모양이다.

나는 책상 위에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카와 미키는 이미 문 앞에서 대기 중이다.
“응? 너희들 왜 그래?”

미 키와 하루카가 말없이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분위기에 내가 주눅이 들 정도였다. 둘의 눈은 마치 심연 저 너머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보는 것처럼 텅 빈 듯이 공허해보였다. 그 둘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춰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당황하는 얼굴이 둘의 눈동자에서 또렷하게 상을 맺으며 모습을 빗어내고 있는데도 불과하고‥‥‥. 나는 그 눈빛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하루카가 말했다. 줄이 나간 피아노 음색 같은 목소리였다.

“방송국에‥‥‥.”
“그 다리로요?”
어?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내 시야가 단번에 추락했다. 나는 바닥을 기며 하루카와 미키를 올려보았다. 둘은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내 시야는 좀처럼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하루카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하루카가 가리킨 건 내 다리였다.

무릎아래가 절단되어서 바지가 헐렁한 오른쪽 다리였다.

“이제 작별이네요.”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곤 뒤를 휙 돌아 사무실에서 나갔다.
잠깐 기다려!

“잠깐! 미, 미키!”
나 는 필사적으로 기어가 미키의 발목을 잡았다. 미키가 벌레 보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미키의 다른 발이 내 손을 짓밟았다. 그 탓에 내가 손을 놓자 미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내 심장 한 구석을 서늘하게 얼렸다.

“달라붙는 남자는 싫어.”
부츠를 또각이는 소리만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미키가 나간 후 나는 멍하니 둘이 나간 흔적만을 쫓았다. 그리고 그 흔적을 더듬는 발걸음 몇 개가 내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곤란해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리츠코가 나갔다.
“오빠, 꼴사나워.”
아미가 정말 딱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는 뒤도 안돌아보고 나갔다.
“웃우-! 프로듀서 씨는 여기에 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야요이‥‥‥.
“귀하, 나가는데 거치적거립니다.”
타카네가 지나간다.
“오빠 이제 볼 일 없겠네.”
마미‥‥‥.
“프로듀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히비키‥‥‥!
“미안하지만 그 꼴을 보니까 우리 집에서도 고용해주진 못하겠네.”
이오리‥‥‥.
“그 꼴로는 구멍 파는 것도 힘들어 보이네요.”
유키호‥‥‥.
“프로듀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젠 여긴 신경 쓰지 마세요. 프로듀서가 없어도 잘 해낼 수 있으니까요.”
마코토‥‥‥.
“프로듀서 씨는 제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나보네요.”
아즈사 씨!
“프로듀서 씨, 괜찮아요. 세상에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코토리 씨마저‥‥‥.

코 토리 씨 다음으로 타카기 사장님이 내 옆에 섰다. 사장님은 평소와 같은 온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온화하며 따스한 시선 안에 든 따가운 위화감을 감지했다. 사장님에게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불편한 시선이었다.

“자네‥‥‥. 여태까지 수고가 많았다네. 우리 765 프로덕션도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허나‥‥‥. 그것도 오늘까지일세.”
사장님은 쭈그려 앉아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건 선고였다.
“이제 집에서 푹 쉬게.”

아 이돌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들었지만 사장이 말하는 무게는 다르다. 회사의 주인이, 나의 고용주가 나에게 말한 것이다. 이제 나는 필요 없다고. 나는 이제 765 프로덕션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사장님의 말이 아이돌 아이들이 내 가슴에 낸 상처를 후벼 파고 아예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무겁고 차가운 것이 내 가슴을 짓누른다. 이건 일종의 절망감이리라. 내가 여태까지
살 아오면서 느낀 적 없는‥‥‥. 그 무엇보다도 더 치명적이며 그 무엇보다도 더 잔인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압사를 당할 것 같다. 심장 부근부터 사고를 하는 뇌까지 무거운 쇠 추로 짓누르는 끔찍한 느낌이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켰다.

조그마한 구둣발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내 얼굴 바로 옆에 섰다. 누구 발인지는 올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런 발 사이즈의 주인에 사무소에서 남은 사람하면 한 명밖에 없으니까.

나는 치하야의 말을 기다렸다. 치하야 너도야?
하지만‥‥‥.
치하야는 나에게 말조차 걸지 않고 나갔다.

그 리고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나를 짓누르기만 하던 그 무거운 감정이 드디어 내 몸과 마음을 으깼다. 사정없이 으깼다. 마치 두부를 방망이로 두들기듯이, 물에 젖어 질척질척한 찰흙을 손으로 짜내듯이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점점 분해되며 심연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일어나보니 온몸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깜깜하다. 창가에는 바깥에서 밀려든 가로등 불빛만이 인공적인 빛을 짜내고 있었다.

벽걸이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새벽 3시임을 가리켰다.
꿈이었다. 꿈이었다. 악몽이었다. 그저‥‥‥. 악몽이었다.

토하고 싶어졌다.

이 시간에 뱃속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겠건만 속 안에 있는 걸 모두 까뒤집어서 배출해버리고 싶어졌다. 입 안에서 쓴 맛이 감돈다.
그 쓴 맛이 내가 토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토를 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토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갔다간 눈에 띄기 때문이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책상 서랍을 뒤졌다. 건강과 재활에 대한 잡지를 거칠게
던져버리고 좀 더 깊숙한 곳을 뒤져 약봉지를 꺼냈다. 책상에 올린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나는 약봉지를 찢어 입에 털어 넣고 곧바로 물을 마셔 약을 목구멍에 넘겼다.

효과가 나오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위액이 넘어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았다.
“우‥‥‥우으으으으으으‥‥‥.”

나는 굶주린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신음을 했다.
내가 먹은 약의 정체는 우울증 약이다.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나처럼 우울증 치료도 같이 병행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약을 먹어도 방금 전에 꾼 악몽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일까‥‥‥.

사무소 일원들에게 버림을 받는 꿈이라니‥‥‥.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공포가 꿈이라는 형태가 되어 나타나는 것일지 모른다.
꿈‥‥‥.
그게 단지 꿈일까.
악몽을 꾸고 나면 이런 생각이 꼭 든다.
그게 그냥 그저 꿈이었을까.
어쩌면‥‥‥. 예지몽 같은 게 아닐까.
구토감이 가라앉았다.


쿠 로이 사장에게 전화가 온 건 오늘의 재활을 마치고 나서였다. 재활실에서부터 혼자 휠체어의 바퀴를 밀며 병실로 돌아오니 마침 담당 간호사가 내게 전화가 왔다고 알려줬다. 병원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나를 찾는 전화가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나는 병실 옆의 간호 데스크에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나다.
“쿠로이 사장님이시군요. 무슨 일이신지‥‥‥.”
-짧게 말하지. 너 외출할 수 있나?
외출?
“일단 허가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마침 병원에서도 산책 겸 바깥바람을 쐬고 오는 걸 권장하고 있었다. 보호자 대동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보호자 역도 어차피 내가 하겠다. 내일 나가지.
쿠로이 사장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한가. 여기는 쿠로이 사장이 소개해준 병원이니까. 그나저나 도통 무슨 일인지 감이 안 잡혔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나가자니‥‥‥.

-내기를 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럼 내일 보는 걸로 하겠다. 이 이야기는 765 프로덕션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간호사에게 수화기를 돌려주고 휠체어 바퀴를 굴려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나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움직여 높이를 낮춘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나는 손잡이를 당겨 다시 침대를 높였다.
어 제는 바쁘다고 그냥 돌아간 주제에 갑자기 내일 만나자니‥‥‥. 쿠로이 사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쿠로이 사장은 나에게 있어 은인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라 내일 쿠로이 사장의 외출에 따라가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지만 마음 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765 프로덕션 쪽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 혹시 프로듀스 업무에 대해 나를 이용해 무언가 정보를 캐내려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내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났으니 그렇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쿠로이 사장이 내 은인이라 한들 그런 정보를 줄 생각은 없지만.

다음 날 나는 쿠로이 사장이 직접 운전하는 검정 아우디 A7에 몸을 맡겼다. 나는 몸 상태가 몸 상태인지라 뒷좌석에 편하게 앉았다.

쿠로이 사장이 직접 운전하는 차라‥‥‥. 쿠로이 사장쯤 되는 지위와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따로 운전기사를 고용할 텐데. 전에도 뒷좌석에 앉아서 가는 걸 봤고‥‥‥.
“직접 운전하시네요?”
“오늘은 직접 운전하고 싶어졌다.”
역시 평소에는 운전사가 운전하나‥‥‥.
그러나 쿠로이 사장은 제법 매끄러운 솜씨로 도로를 누비고 있었다.

고급 승용차라서 주변에 다른 차들이 아예 접근을 안 하는 탓도 있지만.

나 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경치를 바라봤다. 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조금씩 외진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깥 풍경도 회색 투성이 도심에서 슬슬 녹색 빛이 도는 산길로 변해갔는데, 딱 봐도 점점 시골 쪽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목적지는 아직 쿠로이 사장에게 듣지 못했다.

내가 만약 다리가 멀쩡한 상태였고,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던 시절이었다면 쿠로이 사장의 의도를 수상하게 여겨 긴장을 했겠지만‥‥‥. 어제 생각한 것과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에 나는 다소 편안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또 생각났다.
지금의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그 로부터 20분 쯤 더 가서 산을 타고 나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시골 마을의 뒷산. 아스팔트가 전혀 깔려있지 않은 곳이었다. 바위나 돌덩이가 없이 정돈된 곳이었지만 곳곳에 종아리까지 오는 풀이 무성했다. 차는 적당히 언덕 근처에 세워놓았고 나와 쿠로이 사장은 차 바로 옆에서 언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로이 사장 말로는 이 언덕 자체가 오늘의 목적지라고 한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거죠?”
“네 녀석과 내기를 하러 온 거다.”
내기라‥‥‥. 전화로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쿠로이 사장에게 물었다.
“내기요?”
“그래, 네 녀석에게는 찬스가 될 내기다. 그 썩어빠진 근성을 버릴 좋은 기회지.”
“썩어빠진 근성이라니 좀 심하시네요‥‥‥. 사람을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은인이라고 해도 왠지 열이 받는다. 방금 내가 한 말은 가슴 속에서 확 끓어오른 무언가가 단숨에 튀어나간 결과다. 평소 때의 나라면 이런 건 마음속으로 삭혔겠지만‥‥‥. 정신력이 약해진 지금에는 이런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거다. 너는 다리가 멀쩡했었을 때와 비교해서 형편없을 정도로 정신이 썩어빠졌지.”
순간 나는 신음을 흘렸다.
쿠 로이 사장은 나에 대해 전부 간파하고 있었다.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나는 깨닫고 이를 악 물었다. 쿠로이 사장이 새삼스럽게 대단해서 내 상태를 알아본 게 아니다. 바로 방금 전처럼‥‥‥. 내가 그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쿠로이 사장이 내 상태를 알아본 것이다.

즉 그저께부터‥‥‥. 병실에서 바쁘다며 나간 순간부터 쿠로이 사장은 내 상태를 알아본 것이리라.
그리고 쿠로이 사장이 알아봤다면 아마 미키도‥‥‥. 병문안을 와준 다른 아이돌 아이들도‥‥‥.
자기혐오감이 서서히 의식 위로 떠오른다.
쓸모없어진 주제에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쓸모없어진 주제에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 는 한 손으로 쿠로이 사장의 멱살을 쥐었다.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 근처에서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당장에 나를 뜯어말렸을 테지. 의족과 목발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지만 한 대 정도는 충분히 칠 수 있다. 그러나 쿠로이 사장은 눈썹 하나 깜짝이지 않고 멱살을 쥐인 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신이 불안정해진 것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네 다리로는 영업을 뛰기는커녕 출퇴근하기도 힘들 테니 은퇴하는 게 당연하겠지.”
정곡을 찔렀다.
내 가 꿈에서 몇 번이나 겪고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번이나 계속 생각하고 있던 두려움을 쿠로이 사장이 말로 형태를 빗어 내게 들이대었다. 쿠로이 사장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힘 빠진 뱀처럼 스르륵 풀렸다. 쿠로이 사장은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네가 프로듀스하는 아이돌 뿐 아니라 회사 자체에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다. 내 말이 틀리나? 너는 다시 한 번 내 멱살을 쥐면서 그 몸으로 프로듀스 업에 다시 완벽하게 복귀할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절망했다. 나 스스로가 프로듀스 업에 복귀를 할 수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그래서 너에게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왔다.”
쿠로이 사장은 언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너는 이 언덕 같은 고비가 눈앞에 있는 상태지.”
나는 쿠로이 사장을 따라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파른 언덕은 아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가뿐히 걸어갈 정도의 경사이리라. 하지만 내가 걷기에는 좀 힘들어 보인다.

“제 안하겠다. 너와 나 둘 중에서 먼저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를 하지 않겠나? 네 녀석이 언덕을 먼저 오른다면, 네가 프로듀스 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겠다. 우리 961 프로덕션의 힘을 모두 쏟아 부어 네가 아픈 몸을 이끌고 발로 영업을 뛰지 않을 정도로 일을 편하게 만들어주겠다. 너희 765 프로덕션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우리 961
프로덕션에서는 가능하다.”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쿠로이 사장이 한 말을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귀에 담고 있다가 하나 씩 머릿속에서 맞추었다.

아, 그러니까‥‥‥.
961사장은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기에서 이기면 내가 다시 프로듀서가 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내가 다시?
“정말‥‥‥. 입니까?”

믿 기 힘든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961 프로덕션은 765 프로덕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업계의 큰 손이라 전제조건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 961 프로덕션의 저력은 직접 경쟁에 뛰어든 내 스스로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결코 허풍이 아니다. 961 프로덕션이 손을 쓰기만 한다면 앞으로 방송사나 영화 제작사가 무조건 내 쪽으로 일방통행으로 접촉을 해 올 것이다.

그럼 쿠로이 사장이 내기에서 졌을 때 약속을 지킬 거라는 보장은? 그건 쿠로이 사장이 여태까지 날 돌봐준 걸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이 사람은 비겁한 수를 쓰는 부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상대방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말은 꼭 지키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아마 내가 이기면 약속을 지킬 테지.

정말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긴다면.

“걱정마라. 당연히 핸디캡을 붙일 거다. 나는 천천히 걷기만 할 거다. 결코 뛰거나 빠른 걸음으로 속도를 올리지 않겠다. 나는 일정한 속도로만 걷도록 하지.”
쿠로이 사장은 느긋하게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떼면서 걷는 시늉을 했다.
핸디캡‥‥‥!
쿠로이 사장은 이것도 지킬 것이다.
쿠로이 사장의 핸디캡대로라면 나도 승산이 있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만약 진다면‥‥‥.”
만약 내가 진다면? 이건 내기다. 쿠로이 사장이 이긴다면 쿠로이 사장이 내건 조건을 따라야한다.
“프로듀스 업을 완전히 그만둬라. 업계에서 은퇴해라. 완전히.”
완전 은퇴‥‥‥.
쿠로이 사장의 말투는 완고했다. 미련도 갖지 말라는 건가.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이 몸으로는 프로듀스 업에 복귀할 수 없다. 내게 있어서는 지든 이기든 패널티는 전혀 없는 내기다. 허나 패널티가 없다고 하더라도 져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이겨야한다. 이겨야 프로듀스 업에 복귀할 수 있다.

이겨야 해‥‥‥. 이겨야 한다!

나는 쿠로이 사장과 언덕 앞에 나란히 섰다. 쿠로이 사장이 금테 시계를 슬쩍 보더니 손가락 검지 중지 약지를 펴고 하나씩 접었다.
쿠로이 사장의 손이 완전히 주먹이 되었을 때 우리들은 첫 걸음을 내딛었다. 쿠로이 사장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아까 보여준 속도와 엇비슷한 속도였다. 나도 목발과 왼발을 순서대로 띈 다음 오른발의 의족을 내딛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경사진 곳은 이번에 처음 오르는 것인데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 수월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 언덕은 어디까지 이어진 겁니까?”
“상당히 이어져있다. 뭐 산길에 난 언덕이니까. 아마 일반인이 평소대로 걸어 올라간다면 1시간은 걸리겠지.”
1시간! 일반인이 1시간 걸리는 언덕, 이건 언덕이라기 보단 그냥 산길이 아닌가‥‥‥.

그래도 시작한 이상 올라야만 한다.

다 행히 언덕길은 언덕 아래처럼 돌 같은 것은 전부 치워져 걷기가 수월했다. 우선 10분이 지났다. 나와 쿠로이 사장은 마치 서로 페이스를 맞춘 양 나란히 언덕을 오르고 있다. 정확히는 내가 쿠로이 사장의 페이스에 맞춘 것이다. 이건 마라톤이랑 똑같다.
초반부터 너무 빨리 가서 나중에 힘을 빼면 안 된다. 내게 있어서는 이건 장기전이다.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쿠로이 사장보다 늦게 출발하면 나중에 따라잡기가 힘들어진다. 이대로  좀 더 쿠로이 사장과 걸음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실은 여기에 핸디캡이 하나 있는데 나는 이 언덕이 정확히 어느 정도 되는 거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시점에서 쿠로이 사장보다 더 앞서나갈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애초에 쿠로이 사장이야 일정한 속도로 걷는다고 했으니 딱히 유리한 점은 없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의 걸음걸이를 예를 들어 거리를 예상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 쯤 얼마나 더 앞에 갈지 이런 식으로‥‥‥.
그렇게 걸은 지 15분이 지났다. 15분이 지나자 나는 깨달았다.

이 걸‥‥‥. 내가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 인간이 언덕을 오를 때 얼마나 많은 근육을 사용하는지, 무의식중에 두 다리가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리가 이렇게 된 후에도 진정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재활실에서는 평지만 걸었다. 경사진 코스가 있긴 했지만 이런 언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재활실의 경사코스는 실내골프장 코스 정도의 장난스런 경사였다. 하지만 이 언덕은 다르다.

겨 드랑이에 낀 목발이 언덕을 오를 때마다 내 겨드랑이를 짓누른다. 지금은 견딜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아픔이 겨드랑이 감각을 지배할 거다. 오른 다리도 그렇다. 절단면에서 조금씩 열이 오르고 있다. 겨드랑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민감한 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계속 언덕을 올랐다.

지금 와서 그만둘 수도 없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프로듀스 업에 복귀할 거다! 다시 아이돌 아이들과 765 프로덕션에서! 그 아이들을 최고로 만들 거다! 이대로 은퇴하기 싫어!

조 금 초조해졌다. 아마 쿠로이 사장은 내 상태를 읽었겠지‥‥‥. 방금 쿠로이 사장이 나를 슬쩍 흘겨봤다.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 와서 내 심리를 숨긴다고 해도 소용없지만 나는 최대한 동요하는 걸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제 와서 동요해봤자 뒤로 물러설 수 없다.

나는 계속 걸었다. 30분 뒤, 마음의 동요는 가라앉았지만
육 체적인 피로가 나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운동을 격렬하게 했을 때의 감각과는 다르다. 다리가 하나 없지만 나는 내 자신이 체력이 딸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재활훈련도 계속 했고,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건 육체가 마모되어 가는 고통이다. 겨드랑이와 다리의 절단면이 깎여나가는 고통이 점점 더 진해지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 때마다 이를 악 물었다. 이가 맞물리며 잇몸을 건드리는 감각에 집중하면 고통이 적게 느껴진다.

쿠로이 사장은 여전히 같은 페이스로 걷고 있다.

“앞으로 40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이다.”
쿠로이 사장이 마치 책을 읽듯이 넌지시 말했다. 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일부러 알려준 건가‥‥‥. 나를 배려한 걸까?
아니, 배려가 아니다. 쿠로이 사장은 내가 이기지 못한다고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태연하게 말한 것이다.

평 점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니까! 실제로 내 몸 상태는 지금 좋지 않다. 쿠로이 사장이 저렇게 방심하는 건 좋은 상황이지만‥‥‥. 계속 일정한 걸음속도를 유지하는 규칙 때문에 내게 큰 메리트가 없다. 나는 그저 내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계속 언덕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쿠로이 사장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쿠로이 사장이 태연하게 말했다.
“핸디캡이다.”
핸디캡.
쿠로이 사장은 지금 나를 봐주고 있는 거다.
“5
분간만 서있도록 하지. 그 동안 발버둥 쳐봐라.”나는 가슴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을 억눌렀다. 이것 또한 기회다. 하하, 웃기네.
이런 비굴한 모습이 어디 또 있을까‥‥‥. 쿠로이 사장은 아마 동정의 여지로 말한 게 아닐 것이다. 5분 핸디캡을 가지더라도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는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에게 저런 도발을 건 것이다.

나는 이를 갈며 앞을 향했다.
시 야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서두르려고 하는 탓에 자세가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체력소모는 심해진다. 초조함이 내 발걸음을 몰아세우고 있다. 머리로는 침착하게 페이스대로 움직여야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몸이 거부를 한다. 뒤에서 언제 쿠로이 사장이 다시 따라올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습해오는 공포. 등 뒤의 쿠로이 사장은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나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다.
쿠로이 사장이 날 쫓아온다는 두려움‥‥‥. 즉, 내가 프로듀스 업을 그만둔다는 두려움이다.
애초에 내게는 디메리트가 없는 승부였지만, 이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진다는 건 굉장히 차이가 크다. 한줌의 희망이 무너지려는 순간 그 순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공포가 되는가‥‥‥.

나는 아이돌 업계에 머무르면서 그걸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수없이 봐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막연히 느꼈던 감정들이 지금은 현실감을 입고 되살아나 나에게 들러붙었다.

5분이 지났다. 시야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호흡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그저 더 많은 산소를 폐에 보내려고 크게 들이쉬고 들이쉬는 것만을 반복했다.

쿠로이 사장이 내 뒤에 있다. 온다.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더 커져온다. 인간 하나의 존재감이 점점 내 뒤를 쫓아 내 옆에 섰다.
나는 필사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지만‥‥‥. 속도가 줄었다. 너무 초조하게 군 나머지 페이스를 잃었다. 쿠로이 사장은 조금씩 내게서 멀어갔고 이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다다르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과한 호흡 때문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잡으며 부득부득 이를 악물었다. 이미 입가는 침 범벅이 되었고 식은땀이 온 몸을 푹 적셨다. 몸이 뜨겁다.
불타버릴 것 같다. 온 몸의 관절이 엉망진창이 된 태엽톱니바퀴처럼 제각기 삐거덕거리며 충돌한다.
아프다‥‥‥. 아프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멈추면 안 된다고!
빌어먹을 몸뚱이야 제발 움직여! 여기서 지면 안 돼! 난 약속했단 말이야! 그 아이들을‥‥‥. 미키를 톱 아이돌로 만들어준다고 약속했어! 여기서 내가 사라지면‥‥‥.

잠깐,
내가 사라지면‥‥‥. 뭐?
내가 없어지면 그 아이들에게 무슨 영향이 가나?
생각해봐. 머리를 식혀보라고.

그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프로듀서가 붙었어. 지금의 765 프로덕션이 내가 입사했을 때랑 똑같은 무명 프로덕션인 줄 알아? 천만에!
765 프로덕션은 이제 약소 사무소가 아니라고! 유명한 사무소란 말이야! 봐봐, 미키, 하루카, 치하야, 이오리, 아즈사 씨, 타카네, 히비키, 아미, 마미, 유키호, 마토코, 야요이‥‥‥. 무명인 애가 있냐? 아니 오히려 한 명 한 명이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아서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아는 애들이야.
아무 때나 TV를 틀면 저 중 한 명이 방송에 나온다고!

대 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없으면 저 아이들이 톱 아이돌이 되지 못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 아이들은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어! 지금 765 프로덕션이라면 나보다 더 실력 있는 프로듀서를 충분히 고용할 수 있다. 애초에 나는 뭐였지? 그냥 땜빵 아니었어?
타카기 사장님이 그냥 길거리에서 주워온 초짜 프로듀서였잖아. 내가 없어도 어차피 나보다 더 뛰어난 인재는 이 바닥에 많아. 아이돌의 재능을 가진 그 아이들을 대신할 사람은 없지만, 나는 다르단 말이야.

영업? 지금도 실수투성이잖아. 레슨? 레슨에 관한 건 트레이너가 따로 있잖아.

어차피 내가 없어도 사무소는 잘 굴러가. 지금 아이돌 아이들 활동에 별다른 지장이 없는 게 그 증거다.
이봐, 인정해. 나는 아이돌 아이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난 아이돌 아이들한테 버림받는 걸 무서워하는 거잖아? 내가 꾸는 악몽은 다 아이돌 아이들한테 버림받는 악몽이잖아. 내가 계속 마음속으로 무서워하는 게 꿈으로 나온 거라고.

왜 아이돌 아이들의 미래를 걸고 넘어지냐? 그냥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게 무서운 거면서.

남 탓 하지 마.
남을 걸고 넘어지지 마.
남의 미래를 망치지 마.
걸림돌이잖아.

그 애들에게 얼마나 더 걱정을 끼칠 셈이야?
그 애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문병 오잖아. 감동적이지? 기특하지?

근 데 그래서? 그 애들이 문병을 올 때마다 그 애들의 시간을 깎아먹는다고. 그 애들이 걱정을 할 때 마다 마음 구석에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쌓이겠지. 근데 그게 그 애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까? 계속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는 거라고.
한심하지 않아?

정말 이기적이야. 난 이기적이다. 아이돌 애들 볼 면목이 없잖아. 애들 얼굴 볼 면목이 없다.
기둥서방이라도 될 생각이야?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 내가 그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건‥‥‥. 없잖아? 그래, 없어.

슬슬 그만하자. 더 이상 그 아이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어. 나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버림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그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건 그만하자.

그 아이들은 내가 없어도 정상에 설 수 있어. 내가 바라던 게 그거잖아. 그 아이들이 정상에 서는 걸 바랐었잖아. 괜찮아. 난 여태까지 잘해왔어. 비록 불우한 사고가 있었지만 여기까지 한 거면 충분해. 그 아이들에게 충분히 발판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난 필요 없어.
그렇지?

나 는 떨리는 팔로 목발을 겨우 집었다. 목발이 지면을 눌러 축이 되자 왼발을 디디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왼발의 힘이 빠졌다. 마치 거꾸로 뒤집어 순식간에 물이 빠진 페트병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아, 그래 몸이 붕 뜬 거구나. 시야가 뒤로 넘어간다. 점점 뒤로 넘어간다. 하하, 바보 같다. 졌네. 졌어. 이대로 넘어지면 나는 어디까지 굴러 떨어질까. 잃어버린 건 오른다리로 충분하다. 다른 부분을 또 잃는 건 싫은데‥‥‥.

그러나 나는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 내 시야가 하늘과 언덕의 경계 부근에 고정되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날 받쳐줬다.
“허니‥‥‥!”
“미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미키가 뒤에서 나를 강하게 안았다.
“허니‥‥‥.”
“어째서 여기에 네가‥‥‥.”
그러나 미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강하게 안을 뿐이었다. 그러길 잠시 미키의 팔에 힘이 빠져 느슨해졌다. 미키가 내 귀에 속삭였다.
“허니‥‥‥. 이제 진정됐어?”
그 소리는 내 마음 속에 봄을 일깨웠다.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미키의 목소리는 마치 눈을 녹이는 봄의 햇살처럼‥‥‥. 아주 부드럽고 따스하게 들렸다. 미키의 말대로
심란했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곧바로 진정이 되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정이 되었건만 내가 할 말은 정해져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어.”
미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마 나와 쿠로이 사장의 뒤를 밟은 것 같은데‥‥‥. 솔직히 그거 이외에는 생각하기 힘들고, 아니 그것보다 지금‥‥‥. 지금 쿠로이 사장은 어디쯤에 있지? 많이 뒤쳐졌다. 따라가야 해!
나는 미키의 팔을 풀었다. 허리를 다시 앞으로 숙이고 몸의 중심을 목발에 실었다.

“미키,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어라?
미키가 내 옆으로 와서‥‥‥. 허리에 손을 감았다. 마치 나를 부축해주려는 것처럼 어깨를 내 겨드랑이에 파고들었다.
부축해주려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부축하려는 거다.

순간 내 머릿속에 마치 섬광 같은 한 줄기의 전류가 흘렀다. 쿠로이 사장의 음산한 목소리가 지금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어제 전화로 들었던 단 한 마디가 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765 프로덕션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만약 미키가 여기 있다는 걸 쿠로이 사장이 알게 된다면‥‥‥.
이 내기는 무효가 된다. 내가 패배하게 될 게 뻔하다.
나는 미키의 어깨에서 내 겨드랑이를 뺐다.

“미안.”
나는 미키를 뿌리치듯이 서둘러 발걸음을 내딛었다. 근데‥‥‥. 근데‥‥‥.
이 말부터 하겠다. 꼴사납다. 정말 꼴사납고 한심하다.

나 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하하하, 웃기네. 근데 웃음이 나오질 않아. 그래 애초에 내가 뒤로 자빠질 뻔 했던 것도 힘이 빠져서 그랬던 거였지. 그러니까 나 혼자 언덕을 오를 체력이 아니라는 건가‥‥‥. 결국 나는 이 언덕을 오를 수 없는 건가.
이까짓 언덕에 패배한 거야? 졌다. 졌어. 쿠로이 사장한테 졌어.

나는 더 이상 업계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이게 오히려 잘된 거지. 이런 언덕도 오르지 못하는 나는 더 이상 아이돌 아이들의 프로듀서가 될 자격 따윈 없으니까.

프 로듀서란 언제나 아이돌 뒤에서 아이돌을 지탱해줘야 하는 존재. 그러나 나는 아이돌을 지탱하기는커녕, 자기 한 명의 균형을 잡기도 힘겨워하는 그런 가엾은 처지다. 이제 아이돌 아이들과 나란히 설 수도 없다. 모두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점점 뒤쳐져 끝내는 잊히게 될 처지다.
나는 지면에 입술을 댄 채로 시야를 흐렸다. 눈에 힘이 빠졌다. 정신이 아찔하다. 흐려진 눈이 시려온다. 코가 맵다.
울고 싶다. 울까. 미키 앞이지만‥‥‥.

진흙탕에 굴러서 진흙을 맛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입술에는 마른 흙 맛만 느껴지지만.

뭐야 대체‥‥‥. 너무 한심하잖아.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미키‥‥‥. 너도 내가 한심해보이지? 날 비웃어. 날 비웃어줘.
비난해. 힐난해줘. 미키가 날 부정해주면 나도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우지 않을 거야. 그래 끝내자. 이제 깨끗하게 끝내자. 내가
너희들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되니까 내 미련을 끊어줘.

그러나 미키는,

“허니‥‥‥.”
내 등을 부드럽게,

“미키는 언제나‥‥‥.”
쓰다듬어줬다.

“허니와 함께야.”
“나는 너희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야.”
“허니, 허니는 미키가 방해된다고 생각한 적 있어?”
나는 침묵했다.
그런 적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아핫!”

미키가 평소처럼 웃었다. 그러나 평소 같은 웃음소리에는 촉촉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 꼴이야. 이 언덕조차 제대로 오르지 못 해.”
“어째서 혼자서 오르려고 하는데?”
“혼자서 제몫을 해내야‥‥‥. 너를 지탱할 수 있으니까.”
“허니 적당히 하지 않으면 화낼 거야?”
“미키‥‥‥.”
“어떤 언덕이든 혼자서 걷는 것보다 둘이 걷는 게 미키적으로는 마음이 편하다고 느끼는데?”
“하지만‥‥‥.”
“혼자서 걸을 수 없는 곳이라면 당연히 둘이서 걸으면 되는 거잖아. 허니.”
그건‥‥‥.
“그건 이기적인 발상이야! 그렇게 손을 벌리다니 그건‥‥‥!”
“이기적? 이기적‥‥‥. 허니, 허니는 그걸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흠‥‥‥.”
미키는 천천히 내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1초에 2, 3mm씩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곤두선 감각이 미끼를 따라가는 물고기처럼 미키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러다 미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럼 이건 미키의 이기적인 마음이야. 미키는 허니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 허니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어. 미키가 허니의 다리가 되어주고 싶어. 그래서 함께 정상에 서고 싶어!”
미키의 손이 등을 타고 어깨로 넘어왔다.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감쌌다.

“허니, 미키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거야?”
나는 미키의 손길에 저절로 이끌려 상반신을 일으켰다. 미키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미키의 맑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울기 직전의 한심한 얼굴이다. 눈은 붉게 충혈 되었으며 뺨도 마찬가지로 새빨갛고 흙투성이가 되어 지저분해보였다.
미키 눈동자 속의 내 눈에서 물방울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목이 메어서 소리를 내기 힘들다. 소리를 뱉을 때마다 같은 비중의 무언가가 목구멍을 파고들어 목청을 뒤흔든다. 그런 고통을 안으면서‥‥‥. 나는 말을 계속했다. 어떤 고통이 따르든‥‥‥. 미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난 이기적이야. 그래도‥‥‥. 그래도‥‥‥.

“미키‥‥‥. 너와‥‥‥.”
함께 있어도 될까?
“나란히 서도 될까?”
미키가 나를 껴안았다.
“물론이야 허니.”
나는 미키의 부축을 받아 완전히 일어났다.

그 후로 우리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다리와 겨드랑이를 괴롭히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고통 때문에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쓰러지지 않으니까. 옆에서 미키가 지탱해주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쓰러지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미키가 내 무게를 덜어준다.
미키의 존재감이 내 옆에 바로 서있다. 나는 지금 미키를 다리삼아 걷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얼마가 되었을지 모르는 시간동안 언덕을 올랐다. 시간을 가늠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팔에서 흐르는 피의 흐름을 시간의 지표삼아 걸었다.

정 상이 보인다. 나는 쇠 냄새가 진동하는 숨을 내쉬며 정상 바로 아래에서 날 내려다보는 쿠로이 사장과 눈을 마주쳤다. 쿠로이 사장은 적당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아직 정상에 오른 건 아니다.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쿠로이 사장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미키가 날 부축해주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다. 하지만 쿠로이 사장은 놀란 기색하나도 없이 그저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쿠로이 사장과 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는 쿠로이 사장을 지나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 발을 내딛자 쿠로이 사장이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쿠로이 사장이 말을 한 다음에는 내가 말해야겠지. 굉장히 뻔뻔하면서 이기적인 말을 말이다.

“끝까지 올랐군.”
“내기는 제가 부정행위를 했으므로 무효가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저의 패배지만‥‥‥. 저는 업계를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부정행위라‥‥‥.”
쿠로이 사장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큼지막한 발걸음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하듯이 말했다. 평소 쿠로이 사장이 지독하게도 입에 달고 사는 말인지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이 업계는 결과가 전부다. 이 내기에서는 네 녀석이 이겼어. 그 뿐이다.”
어차피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알고 있었다. 처음에 쿠로이 사장이 나와 미키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쿠로이 사장은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쿠로이 사장님께는 이번에 폐를 많이 끼쳤네요.”

미 키가 내 팔을 꼭 안았다. 미키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어째서 미키가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금방 풀렸다. 미키는 쿠로이 사장이 부른 거다. 처음에는 미키가 우리를 미행을 해서 따라왔나 싶었지만 쿠로이 사장을 본 순간에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미키는 내가 언덕을 오르는 걸 보고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언덕을 오르느냐고 단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왜 도움 없이 혼자서 오르느냐고 물어봤지만 무슨 일 때문에 오르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물론 미행을 해서 나와 쿠로이 사장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까 나와 쿠로이 사장이 대화를 나눈 장소에서는 대화를
엿들을 정도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수 없었다. 바위나 돌덩이가 없이 정돈된 곳, 풀이 무성했지만 사람이 몸을 숨길 정도로 자라지 않은 곳.
즉 미키는 나와 쿠로이 사장의 내기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거다. 쿠로이 사장이 미키를 보고 별다른 반응을 안 한 걸로 봐선 쿠로이 사장이 미키를 부른 게 뻔하다.

“쿠로이 사장님은 연출을 잘하시네요.”
“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지.”
뭐,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니까 쿠로이 사장 말대로 당연한 일인가‥‥‥.
모두 다 쿠로이 사장이 꾸민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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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 때문인지 글이 잘리네요.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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