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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사라기 치하야 「이상한 꿈을 보았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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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1, 2021 21:12에 작성됨.

-0.1-

공허



“치하야~! 일어나렴~! 벌써 9시야~!”

“으음...”


  아주 살짝 눈을 뜨자, 눈꺼풀의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셨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왠지 기분이 좋아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요리조리 뒹굴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앞치마 차림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키사라기 치하야, 9시 30분이야!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아침은 제 시간에 먹어야지?”

“조금만 더 있을게요... 후와암...”

“너...”

“꺄악?! 아야, 아파요! 그만...! 꺄아악!”

“이래도 안 일어날 거야? 이래도?”


  어머니는 침대로 다가와 이불을 뺏고는 내 양 볼을 잡고 쭉 늘렸다. 나는 저항을 시도하며 다시 이불을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빠르게 저지당했다. 결국 상체를 일으켜 앉자, 왠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프다니까요...”

“그러니까, 한 번 부를 때 일어나란 말이야.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9시 반이야. 9시 반.”

“으으... 벌써...?”


  헝클어진 머리를 적당히 쓸어 넘긴 뒤, 눈을 비비고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이제 막 7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9시 반 아니잖아요!”

“빨리 나와. 밥 식겠어.”

“으으으으으으.....!”


  당했구나, 싶어서 억울해진 나는 다시 뒤로 드러누워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잠에서 깨버린 뒤라 머리가 맑아져 있어서, 다시 잠드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서 맑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열린 방문으로 들어오셨다.


“하하, 딱 걸렸네. 치하야.”

“주말인데... 지난주까지 시험이었으니까 좀 더 자고 싶었는데...”

“음음. 그랬구나. 잠이 잘 안 깨면, 자, 아침인사 뽀뽀.”

“바로 나갈게요.”

“...”


  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나와 살짝 젖은 앞머리를 말린 뒤,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상차림을 마무리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평소처럼 신문을 읽고 계셨다.


“어머, 일찍 일어났네. 치하야.”

“,,,”


  나는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는 어머니를 무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자 나도 그만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서 치하야,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지?”

“네. 오후 2시쯤에 역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엄마도 신경은 쓰겠지만, 늦지 않게 조심하렴.”

“괜찮아요. 알람도 맞춰 놨으니까.” 


  오늘은 옆 반인 레이나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원래는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지난 학교 축제 때 공연한 것을 계기로 친해지게 됐다. 레이나도 음악을 좋아해서, 오늘은 같이 CD샵에서 음반을 구경하기로 했다. 클래식을 주로 듣는 나와 달리 레이나는 록 음악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도전해보는 것도 중요하니까, CD를 둘러보면서 록 음악에 대해서도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왠지 온 몸이 뻐근한 기분이 들어서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잡지를 읽었다. 얼마 전에 같은 반의 타나카 양에게서 새로 추천 받은 음악 잡지가 있어서, 몇 달치 분량을 빌려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신작 앨범 소식이나 칼럼도 실려 있었고, 학교 밴드부를 소재로 한 만화가 연재되고 있기도 했다. 평소 순정만화 같은 걸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도 담겨 있어서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자주 가는 CD샵에서도 진열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 다음 달부터는 직접 사볼 생각이었다.


  정오에 맞춰서 점심을 먹고, 시계가 1시 30분을 가리켰을 때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늘 입던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챙겨 입은 뒤, 악보가 그려진 에코백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치하야.”

“천천히 즐기다 와도 괜찮으니까.”

“...?”

“당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

“하하.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가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자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잔뜩 내렸는데(시험기간 내내 비가 오는 바람에 가방에 넣어두었던 시험지가 다 젖어버리기도 했다), 분명 어젯밤까지 계속 내리던 비는 오늘 새벽쯤에 그친 것 같았다.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평소에 비해 공기가 서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맑은 하늘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조금 빠른 속도로 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에 거의 도착하자, 역 앞 광장 자판기 옆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 레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치하야짱!”

“늦어서 미안, 레이나. 오래 기다렸어?”

“늦기는, 아직 54분인 걸? 나도 방금 전에 왔어.”


  레이나는 자판기에서 캔 음료 하나를 뽑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잠깐 주춤했다가 캔을 받아 들었다.


“내가 사도 됐는데.”

“동전이 남았거든♪ 지갑 안에서 짤랑이는 건 역시 싫잖아? 무겁고.”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고마워. 잘 마실게.”


  우리는 캔을 비운 뒤 전차에 몸을 싣고 몇 정거장을 지났다. 두 정거장쯤 지나서 열차를 갈아탄 뒤, 시부야에 내려 걸음을 옮겼다.


“우와, 사람 엄청 많아!”

“토요일이니까. 평소에도 시부야는 붐비기도 하고.”

“치하야는 주말마다 자주 온댔지? 나도 자주 나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끔이라도 기회가 생기면, 레이나도 같이 오자.”

“정말? 고마워!”


  나는 기뻐하는 레이나를 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CD샵에 도착해 시간을 보낸 뒤, 4시쯤에 카페에 들렀다.


“치하야짱은 소프트크림? 타피오카는 괜찮아?”

“응. 난 소프트크림이면 돼.”

“치하야짱, 소프트크림 엄청 좋아하네~”

“그, 그래 보여?”

“응. 왜, 평소에도 매점에서 자주 사 먹잖아.”

“뭐... 그러네.”


  소프트콘은 싫어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쪽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

“치하야짱?! 왜 그래?! 어지러워?!”

“ㅇ, 아니야. 괜찮아. 그냥 잠깐 느낌이 이상해서.”

“진짜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서 앉자.”

“으, 응. 혹시 어디 이상하면 꼭 말해야 돼? 괜히 참지 말고!”

“후후. 괜찮다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5시가 지나자, 해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5시 30분쯤에 역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오늘 즐거웠어! 같이 나와 줘서 고마워, 치하야짱!”

“응.  나도 즐거웠어.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자주 나오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나와 완전히 헤어진 뒤 집을 향해 걸어가는 와중에도, 미소가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즐거웠다. 학교에서 음악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는 거의 처음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니 레이나도 장르를 떠나서 굉장히 깊고 넓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나는,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오싹함을 느꼈다.


“엄마-? 아빠-? 여보세요~ 계세요~?”


  집안에 인기척이 없었다. 불도 전부 꺼져 있었다. 어디론가 외출을 나가셨다면 분명 문자라도 남기셨을 텐데, 휴대전화를 확인해 봐도 아무런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의외라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들어서는 순간,


-펑!

“꺄아악?!”   

  ““서프라이즈!””


  초가 꽂힌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터진 폭죽을 손에 든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깜짝 놀랐지? 대성공이네!”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꺄악! 하고 소리까지 질렀으면서~”


  아버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 오늘, 아무 날도 아니잖아요.”


  그랬다. 오늘은 아무런 기념일도 아니었다. 내 생일도, 부모님의 생일도 아니었고, 결혼기념일이라던가 하는 날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있는지도 모르겠는 케이크의 날이라던가 하는 기념일도 아니었다. 서프라이즈고 뭐고, 깜짝 놀라는 게 당연했다. 도저히 예상할 거리가 없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우리 딸 시험이 끝난 기념일이지!”

“헤에...”


  그게 뭐야. 쓸데없이 거창하게.


“어라, 반응이 너무 시큰둥한데?”

“시험을 좀 더 잘 봤으면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원래 그 때는 시험도 몇 개 틀리고 하는 거지~”

“푸핫, 아하하!”


  나는 대책 없이 능청스러운 아버지의 반응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나를 따라 웃으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다. 조금 많이 뜬금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해 주셨다는 게 감사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정리된 뒤, 우리는 모두 식탁에 둘러 앉아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올해 우리 딸 생일에 케이크를 못 사서 얼마나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뒤늦게라도 챙기면 좋잖아. 안 그래?”

“또 그 얘기에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아하하. 그게 아버지 마음이란다. 그래도 좋아하잖아? 생크림 케이크.”

“싫지 않지만요.”

“여보, 우리 딸이 점점 츤데레로 크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어머, 그러게요. 차가운 여자도 매력적이지만, 조금 더 살가운 게 좋을 텐데~”

“츤데레?! ㅇ, 아니거든요?! 그보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그렇게 또 한바탕 웃은 뒤에, 나는 어머니가 잘라주신 케이크 조각 위에 얹어진 빨간 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케이크 위에 얹어진 초콜릿이나 딸기는 유우가 다 먹으려고 해서 싸웠던 기억이 나네요. 후후.”

“응? 뭐라고, 치하야?”

“기억 안 나세요?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유우가 초콜릿 장식을 먹겠다고 해서-”

“누구?”

“유우라면 남자아이니? 어머, 설마 우리 딸 벌써 남자친구가...”

“...네?”


  그 순간, 나는 그제야 뭔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다급히 시선을 주변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 어디에도 유우가 없다.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을 빠져 나갔다.


“치하야! 갑자기 왜 그러니?!”


  깜짝 놀라며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팽개치며, 나는 유우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문을 열어젖힌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었다.


  그 방은 창고였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과, 아직까지도 풀지 않은 이삿짐 상자들이 쌓여 있는.


“치하야, 무슨 일이니? 갑자기 하지 않던 짓을 하고...”


  뒤늦게 나를 쫓아온 부모님을 피해, 나는 다시 집 안을 헤집어 놓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이 담긴 액자부터 가족사진, 그리고 앨범까지 전부 꺼내서 뒤졌다.


  하지만 그 모든 사진 속에는, 부모님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하루를 다시 뒤돌아보았다. 어머니에게 깨워진 뒤 아침을 먹고 레이나와의 약속장소에 나갈 때까지, 이 집 안에 키사라기 유우라는 아이는 없었다.


  작은 액자를 손에 쥔 채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치하야, 때로는...”

“...?”


  나는 주저앉은 채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입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때로는, 잘라내고 나아가야 하는 것도 있는 거란다.”

-!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0-


  -쏴아아.


  오늘따라 신경 쓰이는 세면대의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장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대체 뭐였을까.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악몽이라면 평범하게 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빈도가 이상했다. 최근 며칠간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단순한 악몽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타나카 양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있던 여학생이다. 매번 음악 잡지를 읽고 있던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레이나는 조금 더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물론 레이나라고 불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이름은 히야마 레이나. 내가 부를 때는 히야마 양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렇게 부른 적도 거의 없지만.


  유일하게 나눠본 대화는 내가 아직 아이돌을 하고 있던 시절, 우연찮게 CD샵에서 내 미니 앨범을 발견한 히야마 양이 먼저 다가온 적이 있었다. CD를 내밀며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때의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일단 사인은 해 주었지만, 그 후로 공연 같은 걸 보러 와도 되냐는 말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황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제대로 된 라이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보러 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쩌다 한 번 생기는 쇼핑몰 옥상 야외무대 공연을 보러 오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두세 번 정도 대충 얼버무리자 히야마 양은 그 후로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랬다. 꿈속에서 본 일들은 말 그대로 꿈속이었다. 가끔은 그 때 타나카 양에게 말을 걸어봤으면 어땠을까, 히야마 양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럴 여유 따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키사라기 과장님!”

“...?”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출근한 나에게, 먼저 인사가 날아들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먼저 나오는 직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어제부터 수습기간이 시작된 젊은 신입사원이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야부키 카나 씨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야부키 씨. 일찍 나오셨네요.”

“네! 어제 쿠보오카 계장님이 내 주신 숙제가 있었거든요! 일찍 와서 점검해두려고요!”

“열심히 하시는 모습은 보기 좋네요. 조금 힘들더라도 힘내세요. 혹시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물어보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나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야부키 씨를 격려한 뒤 머그컵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처럼 메모지에 오늘 기한의 업무를 적어 모니터에 붙이고, 하나 둘 서류를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숫자와 서류 속에 파묻혀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옥상으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바로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처리하는 데 전념했겠지만, 왠지 오늘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맑은 공기 대신 옅게 전해져오는 담배 냄새가 나를 반겼다. 흡연 구역은 옥상 한쪽 구석에 따로 있었지만, 시설이 노후화되어서 그런지 약간의 연기가 밖으로 흘러나오고는 했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난간에 기대어 아래로 보이는 신주쿠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장난감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자동차는 쉴 새 없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거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계단으로 한참을 내려왔을 때, 아래층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과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중년의 남성들이었다.


“쿠보오카, 회계부는 요즘 어때? 지낼 만 해?”

“잘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막막하지 뭐.”


  우리 부서의 일원이자 야부키 씨의 수습기간 사수, 쿠보오카 계장님이었다. 상대는 영업부의 과장급 인물이었다. 자주 마주친 적은 없지만 가끔 규모가 큰 회의에서 봤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너도 참 독하다, 독해. 나였으면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 밑에서 일 못하겠다고 진즉에 때려 쳤겠다.”

“놀리려고 온 거냐? 과장 단 뒤로 짓궂어졌네.”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네가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 싶다. 그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너보다 훨씬 유능한 것 같던데?”

“어이쿠, 아픈 데를 찌르면 나도 상처 받지.”

“분발해.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보다 늦게 승진하고 싶지 않으면.”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계단 통로를 타고 두 층 위까지 들리는 바람에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너네 부서는 수습 들어왔다며? 어떠냐?”

“글쎄다... 능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좀 답답하더라.”

“회사도 너무하지. 최종승인부서에 수습을 넣는 건 또 뭐하는 짓이냐?”

“잘난 영업부가 좀 받아주지 그랬냐.”

“얘기 못 들었어? 우리 이번 분기 구조조정이야. 내 목도 남아날지 모르겠어.”

“너나 나나 신세는 마찬가지구만.”

“아무튼, 신입이 유능한 애가 없으면 어떡하나? 결국 잘라야 되잖아?”

“모르겠다. 웬만하면 수습기간 퇴사는 안 시키기는 하지만... 내가 수습을 붙잡고 있으면 결국 팀이 안 돌아가니까. 지금도 내가 낸 빵꾸는 과장이 겨우 메꾸고 있어. 그렇다고 퇴사를 시키자니 좀만 양보하면 딸뻘인데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람 좋아서 어디 일 하겠냐?”

“너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해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 거다.”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됐을 때, 나는 그 두 분이 서 있는 층까지 도착했다. 나를 발견한 쿠보오카 계장님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키사라기 과장님.”

“안녕하세요, 쿠보오카 씨. 그쪽 과장님은...”

“영업2팀 사사키 츠토무요. 그쪽이 그 유명한 키사라기 과장님?”

“아, 네. 회계3팀 키사라기 치하야입니다.”

“듣자하니 고생이 많으신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현장을 벗어났다. 두 분의 대화에서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있었지만, 업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기에 딱히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후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메모지에 적힌 업무 내용을 또 한 줄 지워낸 뒤, 나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야부키 씨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 부분, 다시 해봅시다, 야부키 씨.”

“ㄴ, 네.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없지만...”


  쿠보오카 씨의 표정에서 답답함이 전해져왔다. 야부키 씨도 지쳐 있었다. 나는 문득 쿠보오카 씨가 계단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도 내가 낸 빵꾸는 과장이 겨우 메꾸고 있어. 그렇다고 퇴사를 시키자니 좀만 양보하면 딸뻘인데 미안하기도 하고...’


“야부키 씨, 잠깐 쉬면서 천천히 다시 해 봐요. 나는 잠깐 업무 처리하고 다시 확인하러 올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쿠보오카 씨는 자리로 돌아와 담뱃갑을 챙긴 뒤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모니터 너머로 야부키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업무에 적응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회사라는 조직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 순간, 전날 밤 꿈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때로는, 잘라내고 나아가야 하는 것도 있는 거란다.’

‘저, 아직 미숙하지만, 동경하던 곳이니까, 꼭 열심히 해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


  그와 동시에, 야부키 씨가 전날 퇴근하며 나에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한 층을 올라가자, 위층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쿠보오카 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쿠보오카 씨를 불러 세웠다. 


“저기, 쿠보오카 씨!”

“...? 아, 키사라기 과장님. 급한 일인가요? 잠깐 옥상에 좀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니요, 업무 때문은 아니에요. 아니, 업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


  쿠보오카 씨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호흡을 진정시킨 뒤, 결심을 다진 눈으로 말했다.


“야부키 카나 씨의 수습기간 교육,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무언가를 잘라내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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