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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가사키 트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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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6, 2021 18:50에 작성됨.

"리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죠가사키 미카는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프로젝트 크로네의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미카, 얼굴색이 안 좋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라고 물어본 프로듀서를 모두가 죽일듯이 노려봤다. 대체 저 말에 어떤 반응을 하라는 것인가. 아무도 안 물어봤어, 라고 현명하게 대꾸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있었던 프로듀서의 질문 때문에 그 안은 기각할 수밖에 없었다. 

말투 자체는 꽤나 진지했다. 표정도 진지했다. 내용이 시시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리카는 올해 생일이 지나 13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게 더 이상하다. 남자친구라면 모를까. 아니, 남자친구도 평범하다. 차라리 여자친구를 데려와라. 와, 정말? 같은 형식적인 반응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가 딱 3초. 더 넘어가면 위험하다. 미카는 어떻게든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고, 그럼 안 그래도 시시한 이야기가 지루해지기까지 하는 순간 사무실을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질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프로듀서와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온 척 탈출하기' 계획을 세우는 동맹이다. 슈코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 은신에 성공했으며, 린은 서 있던 공간, 즉 창문 옆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커튼으로 피신했다. 린이 숨자마자 카렌과 프로듀서가 "여보세요? 응, 지금 통화 가능해!"를 외치며 문을 열고 나간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미리아쨩...?"

들켰다. 불쌍한 미리아. 프로젝트 크로네의 멤버도 아닌데 잠깐 얼굴을 비췄다가 봉변을 당했다.

역시 미리아도 여기서 웃을 수는 없었다. 문이 열려 훤히 보이는 복도에서 퍼레이드라도 하고 있었으면 "미리아도 할래!"라면서 자연스레 섞여들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어째서 346프로덕션의 아이돌들은 복도에서 퍼레이드를 하지 않는걸까? 모두가 미리아의 불행을 안쓰러워하며 각자의 은신처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모두의 걱정과는 반대로, 미리아는 씩씩하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미카쨩, 그래서 실제로는... 무슨 일이야?"

***

장소를 옮겨 어느 카페. 

미리아의 몫까지 멋지고 긴 이름의 음료와 히든 토핑을 추가한 미카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미리아는 깔끔하게 그걸 한 줄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리카쨩이 미카쨩보다 그 애를 더 따르는 것 같다는거지?"

"응. 오늘도 그 애를 만난다고 했어... 오늘은 리카랑 내가 처음으로 나시 원피스를 트윈룩으로 사 입은 기념일인데..."

"리카쨩이 그걸 그냥 넘겨버린건 고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미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블랙커피를 빨대로 휘저었다. 전혀 카리스마 갸루같지 않은 모습이다. 카리스마도, 그렇다고 갸루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손톱은 휘황찬란한 컬러로 꼼꼼히 채워져 있었으니, 그것에서 위안을 찾아야할까. 

미리아는 그 빼곡한 패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보니 이런 갸루스러운 네일, 요즘 리카쨩에게서 못 본 것 같아. 

옷 입는 것도 굉장히 차분해졌지. 

리카가 미카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좋아한다. 우스워보일 수도 있는 고민이었지만, 미리아는 미카의 고민을 결코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과 겨우 한살차이인 리카. 그러나 리카의 1년은 길었다. 변하기엔 충분히 길었다. 의견이 안 맞을 때의 이야기지만 화를 내다 프로듀서를 성질머리 드러운 아저씨라고 불러버린 적도 있고,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해버린다거나, 다시 금발로 돌아왔지만 단발로 잘라버렸다거나, 티는 내지 않지만 학교에서 겉도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외출이 적어졌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카렌, 린, 슈코처럼 나이차이가 있는 아이돌 동료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리아와도 예전처럼 가까이 붙어다니는 일은 적어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미리아는 리카를 이제 모른다. 미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만큼 잘 알지 못한다. 

미카쨩도 그런걸까.

더이상 언니! 라고 외치며 안겨오지 않는걸까. 

같이 노래방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 옷을 골라준다거나.

무언가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있지, 미리아쨩."

"응, 미카쨩."

미카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었다. 미리아는 계속 네일을 바라보고 있던게 거슬렸나, 싶어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 손의 동작은 자세를 바꾸기 위한 것도,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도, 냅킨을 가져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미리아의 머리에 안착하기 위해서였다. 

고운 머리카락이 미카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미카는 천천히,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기분 좋아. 프로듀서의 큰 손도 좋지만, 미카쨩의 섬세한 손도 좋아.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미리아의 부드러운 뺨에 닿는다. 살짝 움찔한 미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미리아를 조금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미카는 입을 열었다.

"우리... 리카 녀석을 미행하자★"

더할나위 없이 숨막히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마디였다.

***

"아니,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미 늦었어."

패션 안경을 쓰고 어떤 차원에서는 필수 아이템이 된 마스크에 귀엽기 짝이 없는 모자 세트와 돋보이지 않는 검은 후드집업으로 무장한 둘이 전신주에 기대어있었다. 

당연히 미카와 미리아다. 

"그러니까, 미카쨩. 당당히 하자! 하기로 한거니까 제대로 해보자!"

"아니, 미행을 당당히 하면 큰일이잖아. 18살이 다 돼서 이런 걸 하고 있다니 한심해... "

"미리아도 할게!"

"이미 하고 있잖아. 그리고 미리아는 아직 이런 잘못 정도는 해도 법의 수호 아래에 있으니까 괜찮아. 아... 나는 최악의 언니야... 언니도 아니야, 스토커야... 언니 실격이야... 아이돌 실격이야..."

쿵, 쿵.

자책모드가 심해진 미카가 급기야 전신주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꼴사납다. 사람들이 미카 옆의 미리아마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리아는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미카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저러면 뇌세포 죽는거 아냐? 이미 동생 바보지만, 앞에 '동생'이란 단어가 빠지게 되는거 아냐? ..아니, 그런 걱정이 아니다. 

미리아는 애써 웃으며 - 물론 미카는 미리아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 미카의 등에 손을 댔다. 미카 헤드의 진자운동이 멈췄다. 그 대신, 미리아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미카쨩, 리카쨩이랑 얘기를 해보자. 미행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만나러 오기는 잘했다고 생각해. 만나서 제대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자."

"미리아쨩. 나랑 리카는..."

"미카쨩이랑 리카쨩은, 내가 보기에도 부러워질 정도로 사이가 좋은 자매잖아."

미카는 입을 다물었다.

"내 동생은 아직도 많이 어려. 그래도 미리아는, ...나는, 언젠가 미카쨩같은 언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하루하루 나아져서, 미카쨩이 리카쨩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멋지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싶어. 걱정해주고, 배려해주고 싶어. 리카쨩이 미카쨩을 부르면서 달려갈 때마다, 언젠가 내 동생이 나한테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계속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

"미카쨩, 미카쨩은, 좋은 언니야. 미행하자고 무작정 나와버린 것도, 그리고 바로 후회해버린 것도. 전부 미카쨩이 리카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인걸. 나는 미카쨩이랑 리카쨩이 부러워! 그런 소중한 관계라는게 부러워. 그렇지만, 그에 못지 않게 리카쨩이 부러워. 미카쨩을 언니로 가진 리카쨩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걸 생각하면 조금 질투까지 날 정도야. 언니 동맹인데도 말이야."

언니 동맹. 귀여운 단어에, 자책감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미카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리카쨩이 그걸 모를 리가 없어. 리카쨩이 미카쨩을 안 좋아할 리가 없어."

"...나는 리카가 나를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게 아니야."

"리카쨩이 미카쨩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어."

"....."

"리카쨩은, 미카쨩이랑 시간을 보내는걸 좋아할거야. 아주 많이. 많이많이."

온 몸으로 표현하듯 팔을 활짝 편 미리아는, 어쩐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저기, 미카쨩. 한번만 말해봐도 돼?"

"뭐를?"

"...언니."

미리아는 벌린 팔 그대로 미카에게 다가갔다. 그 동작의 의미를 미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미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이고 미리아를 양 팔로...

"잠깐!!"

 "리, 리카?!"

"뭐하는거야, 뭐하는거야, 뭐하는거야! 언니라니, 언니 동생은 나잖아! 믿을 수 없어! 오늘은 우리가 처음으로 나시 원피스를 트윈룩으로 사입은 날이잖아?! 그런 소중한 기념일에 내가 다른 애랑 놀러간다고 할 때도 무미건조하게 잘 갔다와~★ 라고 하더니, 새 동생을 찾은거냐고! 웃기지마! 우리 엄마 뱃속에서 나온 건 나야!!"

"저, 저기."

"미리아쨩은 조용히 해! 아니, 미리아는 조용히 해! 언니가 새 동생이 찾고 싶어졌다고 해도 그걸 받아주다니, 이젠 절교야! 끝이야 끝! 언니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엽게 말할 수 있단 말이야!! 항상 말하니까 덤덤해져서 말할 때마다 귀엽게 말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아?!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동생이었다고! 언니 주제에 동생 자리를 탐내지마! 동생도 경력직이 더 잘하는 법이야! 신입은 경력을 어디서 쌓나요, 라고 물어보지 마! 원래 비즈니스에는 더 잘 하는 사람을 뽑아야하는 법이라구! 경력직을 뽑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진정해, 리카쨩! 이야기가 이상해지고 있어! 수많은 취업준비생과 신입사원이 분노하고 있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고!"

"쳐다보라 그래! 아이돌은 시선을 한 몸에 모으는거야!"

"여기서 아이돌의 철학을 말해봤자 프로듀서가 칭찬해주는건 아니야!"

"아저씨는 빠지라 그래!!!"

딱콩.

보다못한 미카가 리카의 머리에 가벼운 주먹을 얹었다. 때렸다기보다는 건드렸다에 가까운 강도였지만, 흥분한 리카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이 번졌다.

"때, 때린거야...?"

"그런게 아니라, 진정하라고. 리카,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야. 다른 동생 같은 건 없어. 생각도 없어."

"언니... 바람 핀 걸 들킨 남편처럼 말하지 말아줘... 신빙성만 더해지고 있어."

"바람 핀 걸 들킨 남편이 말하는 말투를 알고 있지 말아줘. 아니, 리카. 정말이야. ...정말이야. 정말로, 정말이야."

"응, 리카쨩. 그 말이 맞아. 미카쨩은 방금까지 리카쨩을 너무 걱정해서 미행했을 정도인걸."

"그건 말하지 마, 미리아쨩..."

"언니..."

"그런거에 감동받지 마. ...이리 와."

리카가 와락 안겼다. 얼마만이었을까. 굉장히 오래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리카가 미카에게 안긴 것은, 그리고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온 몸으로 닿았던 것은. 

아, 그랬다.

항상 리카였다. 안겼던 건 항상 리카였다. 그런 리카가 어느 날부터인가 미카를 반갑게 반겨주지 않게 되었다. 리카가 안기지 않게 되자, 미카와 리카가 서로 안고 있는 일은 없어졌다. 어쩌면 리카는, ... 아니, 리카'도', 자매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느껴 외로웠던게 아닐까. 내가 리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껴버렸던 게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멀어지려 한거다. 일부러 완전히 독립한 척, 떨어져도 괜찮은 척 행동한거다. 내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힘들었겠구나.

"리카, 난 언제나 네 언니야."

"웅. 아고이써."

미카의 몸에 너무 세게 얼굴을 밀어붙여 발음이 제대로 새어나오지도 않는 리카에, 미카도, 미리아도 웃어버렸다.

"미리아땽두... 심한 말 해서 미안해."

"헤헤, 아니야. 괜찮은걸!"

"그런데 리카, 그럼 오늘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응? 아니, 진짜야. 언니가 놀아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 저기 온다☆"

리카가 저 멀리로 손을 흔든다.

누군가 걸어온다.

프로듀서다...

...뭐?

"헤헤, P군! 와줘서 고마워!"

"리카가 요즘 힘들다는데 이렇게라도 도와줘야지. 뭐 하고 싶어?"

"음음~☆ 노래방 가자!"

"좋아! 어, 미리아랑 미카도 있었네. 아하하, 리카. 오늘은 둘만이라고? 그래도 천천히 가자 천천히. 그럼 다들 내일 봐~"

멍하니 리카와 프로듀서를 떠나보냈다.

미카와 미리아 둘 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는 듯이.

"리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럼...."

"프, 프로듀서는 모르는거겠지..."

"......저건 미행하자★ 리카 녀석이 허튼짓하면 바로 달려가야지★"

"응..."

그렇게, 정의의 언니 동맹은 길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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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대회 냈었던 토막글입니다. 

원제는 시스터파이트였지만 딱히 자매가 본격적으로 싸우는 내용은 아니다보니 제목만 살짝 바꿔서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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