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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카와 우둔한 옛 신과의 기괴한 티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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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17, 2021 10:58에 작성됨.

"프로듀서 씨, 이거 받으세요."

"응....?"


유난히 시간이 안 간다고 생각하던 오후였다. 시어터 내 사무실에서 서류 업무를 하다 잠깐 숨 돌릴 겸 대기실에 왔더니, 그곳에는 레이카가 있었다. 레이카는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내게 검은 편지봉투를 건넸다.


뭘까, 이건. 약간의 반사광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무척이나 새까만 편지봉투다. 이상한 느낌에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레이카는 어서 편지봉투를 열어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에 떠밀리듯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살폈다. 여전히 똑같은 검은색을 띈 편지지에는 하얀 잉크로 기묘하게 흘려쓴 글자들이 보였다.


"....한연합니다? 아니. 환영합니다?"

"티파티는 좋아하시나요?"

"어....그냥 보통? 애초에 그런데 갈 일이 많이 없기도 하고.....아, 혹시 날 초대하는 거야?"

"네♪"


고마워. 나는 레이카에게 감사를 표하며 밑에 적혀진 다른 글자에 눈을 돌렸다. 어라, 이상한데.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글자들이 마치 녹아내린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글자....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이건. 나는 초대장에 으레 적히곤 하는 상투적인 멘트를 생각해봤다. 보통 초대장에는 일시, 장소가 나오니까 이것도 똑같겠지. 


"저기, 레이카. 미안한데 이거 뭐라고 쓴 거야?"

"어라라? 프로듀서 씨, 모르시는 건가요?"


레이카에게 초대장을 보이자 레이카는 술술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장소는 외우주의 혼돈의 중심. 그리고 일시는 X월 X일 X시."


외우주? 혼돈? 대체 뭔 말이야. 장난인가? 그런데 X월 X일 X시는....바로 지금이잖아! 휴대폰으로 일시를 확인했을 때, 나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어둡고, 차갑고, 축축하고. 분명 뭔가 더 있는데, 뇌에서 그 이상 이해를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앞뒤좌우위아래를 분간하기도 힘든 공간에서는 대략 의자 같은 것. 탁자 같은 것. 그리고 레이카가 보였다. 레이카는 변함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요, 여기!"


레이카가 한 팔을 들어 붕붕 흔들어보였다. 이 끔찍한 공간에서는 의지할 만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고 먼 거리도 아니었다. 레이카가 있는 곳으로 도착하자 레이카는 의자 같은 것을 하나 내어주었다. 거기에 앉은 것만으로도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레, 레이카."

"네?"

"여긴 대체 어디야?"

"외우주의 혼돈의 중심이랍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

"우선 차 한 잔 어떠세요?"


레이카가 내 앞으로 찻잔 같은 것을 두었다. 그 안에 따라진 액체는 입술에 한 방울 닿는 것마저 두려울 정도로 맹렬한 형광빛을 띄었다. 매캐하면서도 휘발유를 연상케하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게 차라고? 내가 거기에 손도 못 대고 있자, 레이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하다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가만히 있으면 차가 식어버려요."

"하, 하하.....저기, 레이카."

"혹시 뜨거워서 못 마시고 있는 건가요? 그럼 제가 식혀줄게요!"


잠깐! 제지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레이카는 대뜸 내 앞에 놓았던 찻잔 같은 것을 들어 후후 불었다. 그녀 특유의 강한 폐활량 때문일까, 김이 나던 액체는 한순간에 그 열기를 잃었다.


"자, 이제 됐죠?"


탁. 레이카가 찻잔 같은 거를 도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되면 거절할 길이 없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수상한 약을 마신다는 심정으로 안의 내용물을 식도로 털어놓았다.


"우웃....."


금속을 액체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강한 쇠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러고보면 이미 액체인 금속이 있었지. 어쩌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먼 옛날 중국의 진시황도 마셨다는 것이니. 시큼한 맛과 함께 올라오려는 욕지기를 나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혹시 별로인가요?"


이런 나와 다르게 레이카는 태연하게 찻잔 같은 거를 입가에 기울이며 잘도 홀짝거리고 있었다. 명백히 정상이 아니야.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부탁이니까, 제발 대답해주면 안될까? 여기, 어디야?"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외우주니 혼돈이니 해도 나로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혹시 몰카 같은 거?"


그렇다면 정말 좋을텐데.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주변을 불안에 찬 눈으로 돌아보았다. 정말 잘 만들어서, 껌뻑 속아넘어갈 정도인 세트장. 그래야하는데.....초조감에 이빨이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몰카? 프로듀서 씨도 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레이카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우주.....? 말도 안돼. 시어터에 있으면서 타임슬립이나 정글 탐험 같은 온갖 이상한 일은 다 겪어봤어도, 이런 적은 처음인데. 나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공기가 있다는 건, 방금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증거다. 하, 하하하.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우주에서 맨 몸으로 티 타임은 아니지. 나는 경련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팽팽하게 위로 끌어올렸다.


"아무리 레이카라도 그렇지,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렇게 옆에 손님도 계시는 걸요."

"아?"


예상치 못한 말에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지금 보이는 건 둘밖에 없잖아.


그래. 보이는 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모든 게 이상해졌다.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날카로운 정을 대고 한 번 크게 망치로 후려친 것만 ㄱ타어ㅏㅆ다.


"프로듀서 씨, 프로듀서 씨?"

"레, 레이카."

 

너는, 보이니.....? 겨우 토해낸 질문에 레이카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프로듀서 씨가 되게 재밌대요." 

"그러, 니."

"어쩐지 얼굴이 새파래진 것 같네요~"

"하, 하하, 아하하."


나는 웃음소리를 켈룩켈룩 기침하는 것처럼 냈다. 레이카는 거기에 변함없는 산뜻한 미소를 돌려주더니,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서도 뭐라뭐라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친한 친구와 담소하는 것마냥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새까만 허공과 눈을 맞췄다. 그 기묘한 광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디선가 희미하게 두둥두두둥하는 북소리며 음산한 플롯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프로듀서 씨를 초대하길 잘한 것 같아요!"


무언가와 재잘거리던 레이카가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성이 자아내는 말소리는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뭐가 더 이어져서 나오면 끝장이다. 그렇게 직감한 나는 되는대로 말을 주워삼켰다.


"고, 고마워. 그런데 있지, 나 생각해보니 급한 볼일이 있어서 말야, 이만 슬슬 가봐야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제발. 응? 보내줘. 제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공포는, 마지막에 나를 크게 소리치게 만들었다. 레이카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는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이 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쿵.


응?


몸에 충격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시야가 달라졌다. 보이는 건 여전히 새까만 어둠인데. 뭔가, 고도가 낮아졌다고 해야할까. 


"앗, 괜찮으신가요?"


멀리서 레이카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넘어진 걸까? 나는 검은 바닥을 손으로 짚어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손이 없었다. 팔이 없었다. 대신 다리라도 움직여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 이제는 다시 팔이 생겼다. 손가락도 제대로 있다. 왼쪽에 5개. 오른쪽에 6개. 다 합쳐서 12개다.


.....어라?


석연찮은 느낌에 주변을 돌아보니, 묘한 일렁거림이 시야에 잡혔다. 마치 바다 속에서 넘실거리는 해조류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쾌했다. 목이 탄 나는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이 불길함 그 자체인 공간에 멀쩡한 홍차가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 괜찮으신가보네요." 

"응?"


레이카의 영문 모를 소리를 목전에 둔 채 나는 평범한 홍차를 쭉 들이켰다. 지나칠 정도로 시큼한 향과 비린내가 동시에 훅 풍겨왔다. 엥? 홍차인데? 아니, 이게 홍차였나? 아니아니. 이게 애초부터 차라고 부를 수 있는 거던가? 뭐야. 이거 뭐야. 방금 뭐야. 나 대체 뭘 한거야? 물이 밀려오듯 넘쳐나는 기괴함에 나는 연거푸 헛구역질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마셨던 것을 토해내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했다.


"우욱, 윽.....히익, 히이이이익.....!"

"으음- 어쩌지? 아직 멀었나봐요."


레이카는 잘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 답하기라도 하듯 거품이 보글보글하고 올라오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기분 나쁘다. 불쾌하다. 혐오스럽다. 부득부득 이가 갈린다. 오소소 돋기 시작한 닭살을 전부 긁어버리고 싶다. 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기괴하고 불경하며 혼란스러운 다과회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음 속에서 들끓어오르는 감정에 몸이 따라주지는 못했다. 왜냐면 다리가 없어서 거를수가업었으니까.


"프로듀서 씨, 걱정 마세요. *()$@*)(#. 아, 이렇게 말하면 아직 못 알아들으시나?"


아자토스 씨가 말이죠,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차를 준비해놓겠다고 하네요. 거기다 와산본도 같이요! 구석자리부터 천천히 일그러지는 시야 속에서, 레이카의 쾌활한 말소리가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와산본.....와산본도 좋지만, 스콘도 있으면 좋겠는데. 꼬부라져가는 혀와 성대가 자기멋대로 말소리를 자아냈다. 점차 멀어져가는 의식. 완전히 의식이 트립되기 전, 암전된 시야에서는 느릿하고 익살스럽게 꿈틀거리는 별들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레이카와 같이, 셋이서 함께한 오늘의 다과회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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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라님 리퀘작입니다. 크툴루 신화니 코즈믹호러니 하는 건 잘 모르는 편이지만, 대략 이렇겠거니 하는 느낌으로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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