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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혼돈 안심위원회입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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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6, 2021 19:39에 작성됨.

EP27) 매운맛 주의! 가끔 아무런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리버


리버P "후우…"


오늘도 나는 내 담당 아이돌들의 퇴근길을 배웅하고 내 전용 수면실로 돌아왔다. 왜 집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사장이니 집에 돌아올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 치고는 내가 할 일은 제법 적어서 나야 언제든 출퇴근이 자유롭고 진짜 여유로울 땐 아예 그 날은 사장 자리가 비어있을 때도 있다.


리버P "하아…"


한 번 더 덮고 있는 이불을 뒤척이고 한숨을 내쉰다. 이 한숨의 의미가 드디어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조금 있었지만, 사실 오늘 돌연 마음 속에 찾아온 우울감이 더 컸다. 이게 오늘의 어느 시점에서 꼬리를 물고 슬픈 감정으로 찾아왔는지는 이미 깊은 슬픔을 느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었다. 알아도 나에겐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야.


리버P "루비야, 아무래도 이런 사장직을 감당하기엔 과분할 정도로 난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누군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들을 위해 몸바쳐 칼에 피를 과감하게 묻히고…"


내가 처음 장만했던 날부터 잠을 잘 때마다 끌어안고 잤던 거의 내 몸집만한 포근한 하얀색의 귀여운 곰인형 루비를 끌어안고 대화체로 중얼거리듯 얘기하였다. 무슨 소녀도 아니도 그것도 다 큰 남자 성인이 마치 이거 없으면 잠을 제대로 청할 수도 없는 것처럼,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나이에 맞게 남자답게 얌전히 곰인형 빼고 잘 수 없느냐' 라고 조롱하기에 딱 좋은 광경이겠지.


리버P "누군 똑같은 이공계생 출신인데 너드인 나랑 다르게 사람들과 잘만 어울리고 다니는 3대600 치는 부러운 피지컬의 여자도 있고


누군 나랑 똑같이 비참한 과거를 갖고 있는데도 아이돌들을 위해 우는 소리 한 번 안 내는 과거도 곱상한 프로듀서 씨도 있고


누군 인생이 서바이벌인 다른 의미로 미쳐버린 과학자 출신에 그러면서 말솜씨는 참 질투날정도로 곱게 해대는 닛타 아닌 프로듀서 씨도 있고


누군 처음부터 인간도 아닌 신으로 태어나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다니는 미쳤다는 소리 듣는데도 자신감있게 다니는 회장 영감탱이도 있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열심을 다하는 이들을 보며 나의 이미지는 어떨까 생각해봤다. 굳이 깊게 떠오르지 않아도, 학창 시절부터 또래 애들에게 들어왔던 너드(Nerd), 기크(Geek), 인간계산기(Human Calculator), 로너(Loner), 선생의 개(Teacher's pet)… 아마 이 외에도 더 비참한 말들을 생각해낼 수 있겠지.


리버P "그래서 왜 나만 이런건데… 왜 그들이 주장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왜 내 귀엔 배부른 소리가 되버리는 건데…"


분명 그들도 인격체인 이상 똑같이 부정의 감정을 느낄터, 하지만 난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돌의 웃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용기를 지닌 용맹한 전사, 나는 그들의 웃음조차 지켜주지 못한 비열한 찌질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더 내려갈 멸칭도 생각 안 날 정도다. 있으면 지금 당장 내 입 안에서 팡팡 터졌겠지…


리버P "왜 난 이렇게 비참한 운명이 결정된 거야. 낙하산으로 시작해 사장직까지 올라온 천운을 겪었는데도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불행할 수밖에 없는거냐고. 적어도 아이돌들이 그저 밝은 모습으로 있어주는 결과가 있다면 내 노력이 헛고생이라고 우는 소리를 하진 않았을텐데…"


인생이란 원래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못하다. 이 뒤에 '그런 현실을 불평하지 말고 겸손하게 받아들여라' 는 빌게이츠의 공부 명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지만, 눈물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지금의 나에겐 이런 것도 전부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저 내 몸의 일부처럼 아껴온 루비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래야지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이물질같은 생각이 다 씻겨 내려갈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반응하지 않는 내 매마른 눈물샘이 원망스러웠다.


- 똑똑


리버P "…… 들어와, 열려있어."


이런 식으로 좀 우울한 명상에 젖어보려고 했는데 그런 조용하고 평온한 정적을 깬 노크소리 때문에 이런 고요한 기분을 잡쳐버린 탓에 돌아가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대충 수면실까지 이용하면서 밤에 소속사에 남아있는 아이돌들의 리스트가 몇몇 떠올랐고 그런 목소리를 이미 들었으리라 생각헤서 그냥 들여와 주기로 하였다.


- 철컥


토오루 "소란스럽게 우는 소리를 하네… 후훗, 시원하게 잘 울었어?"

리버P "너희들 때문에 내 대답은 아니오다."

코이도 "ㅃ, 삐엣!? 으으… 죄송해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신다고 들었는데 방해됐나요?"

마도카 "그렇게 우울할 시간 있으면 자신 소속 아이돌이나 더 챙겨주시지 그래요? 미스터 울보…"

토오루 "…… 히구치, 지금은 입 열지 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런 위로를 건네던 토오루가 마도카의 태클에 화를 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상황에 상관 없이 혼자만의 우울한 명상에 젖어있는 시간을 빼앗긴 거 같아, 아이돌의 호감 여부와 관계없이 내 기분이 몹시 불쾌했고 그런 아이돌들에게 그만 실없는 폭언을 해버렸다.


리버P "내 걱정이 되서 들어온 건 고맙지만, 나가줘…"

히나나 "헤에, 프로듀서 그거 뭐야. 행복하지 않을거라고?"

리버P "사장으로서 명령한다. 당장 내 수면실에서 나가…"

토오루 "엣… 흐응~ 이렇게 나오는거야?" (못마땅한 표정)

코이토 "ㄱ, 그래도… 저희는 그저 걱정되서 들어왔을 뿐인데…"

리버P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지금 너희들한테 이런 내 모습 창피해서 못 보여주겠다고…"

마도카 "…… 하아… 가자, 아사쿠라."


마도카가 토오루의 팔을 낚아채고 토오루를 끌고 내 전용 수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혔고 그 이후로 나는 문 너머로 어떠한 녹칠 멤버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 속에는 이제야 다시 혼자가 됐다는 사실보다, 녹칠에게 돌이킬 수 없는 미운털이 박혔을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우울한 감정에 죄책감까지 얹어져 복잡하고 꼬인 생각밖에 안 들었다.


리버P [미안해, 녹칠 얘들아.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려서… 하지만 난 누군가의 위로보다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너희들에게 이기적인 태도로 실없는 분노의 목소리와 함께 쫓아내 버린 건 인정할게. 어차피 질러버린 이상 내 잘못을 돌이킬 수도 없는 신세고 이제와서 용서같은 건 바라지 않으니까, 그러니 다음 날부턴 나같은 찌질이 말고 다른 더 좋은 담당 프로듀서를 붙여주거나 해볼테니까 너희들 의견을 묻고 답장해줘…]


그리고 폰을 이부자리 아무데나 던지고 아까 전보다 더욱 꽉 루비를 껴안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 불안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제발 딱 한 번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속죄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해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너그러울리도 없고, 무엇보다 내 몸은 불안에 덜덜 떨렸다. 웃기만 해줘도 시간이 모자랄 내 아이돌들에게 폭언이라니… 난 분명 프로듀서 자격 박탈이다. 천벌을 받아도 싸다.


- 띠링


그리고 그런 불안에 질끈 감은 눈을 뜨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내 폰 메신저 알림소리였다. 평소보다 폰을 집는 내 팔의 속력이 다소 느려졌다. 잠금을 푸는 속력도, 알림을 확인하는 속력도… 모두 불안감 때문이라고 속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메신저를 확인했다.


토오루 [ 에- 뭐야 그거~ 후훗 ]

히나나 [ 히나나 놀랐잖아! ]

코이토 [ 삐에… 저, 정말 괜찮으시죠? ]


리버P [ 오히려 난 너희들에게 나가라고 마음에도 없는 폭언을 한 것 때문에 미안해. 사과할게… ]


히나나 [ 아하~♥ 히나나 정답! 마음에도 없는 폭언은 마도카 선배에게도 자주 듣는거라 딱히 히나나는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진 않다구? ]

마도카 [ 뭐야, 그거… 그리고 사람에게 화를 낸 책임은 지셔야죠? 전 딱히 화난 점은 없어서 속죄를 받지 않아도 괜찮지만, 분명 나머지 애들에겐 필요할 거에요. 성심성의껏 사과의 뜻을 보여주요. 당신네 소속사 아이돌이 탈주라도 하는 꼴 보기 싫다면… ]

코이도 [ ㅃ, 삐엣!? 마도카 선배… 그리고 프로듀서 씨! 그냥 저희 멋대로 오해하고 수면실로 들어온 게 더 미안해요. 사과는 굳이 필요 없으니까요. ]


리버P [ 아니, 사과하게 해줘. 너희들 마음보단 역시 내가 더 불안해. 난 죽을 죄를 지고도 너희들에게 천금으로도 못 갚을 용서를 얻었어. 역 앞에 새로 오픈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갈텐데 점심 12시까지 정문 앞으로 모여줘. ]


히나나 [ 아하~♥ 밥먹는 거면 나도 좋아하고 토오루 선배도 좋아하니까 히나나는 갈 거야! ]

코이도 [ 으응, 이미 용서했는데 딱히 사과의 뜻을 보이지 않았어도 됐는데…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

마도카 [ 먹을 것으로 사람을 다스리려는 건가요. 미스터 사육사 ]

토오루 [ 후훗, 히구치도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래~ ]

마도카 [ 야, 아사쿠라! ////// ]


어느새 무거웠던 내 마음의 짐이 가시는 듯 녹칠 톡방은 다시 훈훈하고 가벼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런 나를 용서해준 녹칠을 잠시나마 재평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람 관계라는 게 99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으로 모든 게 무너지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녹칠은 그 반대로 나의 한 번의 잘못보다 99번의 선행을 기억하는 똑똑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내일 해가 하늘 중앙에 걸리는 정오 시간이 되기 전에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를 할 각오로 아직도 내 곰인형 루비를 손에 놓지 못하고 드디어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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