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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바라 엘레나 『판타지스타 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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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3, 2021 17:46에 작성됨.

"아, 마침 잘 만났네 엘레나. 있지, 사무소에 간식이 잔뜩 들어왔는데-"


클리어스카이 건 이후로도 엘레나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과연 이쯤되면 프로듀서도 이상을 눈치챌 수밖에.  프로듀서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넌지시 어떠냐고, 잘 지내냐고 언질을 주었다. 라인으로도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냈다. 상담. 미팅. 이야기. 근황. 이런 직접적인 단어들을 쓰기도 했지만, 간식이나 선물 같은 고전적인 회유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미, 미안해 프로듀서! 나 급한 볼일이 있어서!"

"엘레나! 잠깐만!"


그렇지만 결국, 이런 결과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프로듀서는 시어터 복도에 가만 서서, 어느덧 저 멀리 작아져가는 연두빛 실루엣을 바라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원참. 대체 뭘 숨길 게 있다고. 이러지만 말고 조금 강제적인 수단을 쓸 필요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쫒아가는 편이. 프로듀서는 생각을 멈추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운동부족의 직장인의 신체로는 브라질 태생의 건강 소녀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음.....이렇게 된 이상 다른 아이돌에게 잡아오라고 시킬까? 프로듀서의 머리 속에서는 발 빠른 후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히비키, 마코토, 우미, 아유무, 스바루, 타마키 등. 확실히, 이들을 동원한다면 못 잡을 건 아니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 이들도 흔쾌히 협력해줄테고. 그러나 붙잡아서 사무실 의자에 앉혀놓는다고 해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지가 또 다른 걱정이었다. 후우. 프로듀서가 한 차례 더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등 뒤로 다가오는 한 아이돌이 있었다.


"어라, 프로듀서쨩? 무슨 일? 그러다 땅 꺼지겠다, 얘."

"리오?"

"뭐 고민하는 거 있어? 뭣하면 이 언니가 이야기를 들어줄까?" 

"없는 건 아니지. 그치만 입 밖에 낼 정도까지는....."

"아이잉~ 그러지 말고. 실은 있지- 이쪽도 프로듀서쨩에게 말할 게 좀 있어서."

"그럼 어쩔 수 없나."


프로듀서보다 조금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살짝 주황빛이 감도는, 중간 길이 정도의 금발이 인상적인 아이돌. 모모세 리오였다. 리오와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던 프로듀서는 끝에 가서 조금 난처한 웃음과 함께 작게 손짓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하지는 신호였다. 곧 미소지으면서 프로듀서의 뒤를 따르는 리오.


프로듀서는 몇 걸음 안 가 사무실 문을 발견하고는 문 손잡이를 붙잡아 열었다. 그리고는 사무실 불을 키며,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과 리오가 안으로 들어온 걸 확인하고는 살포시 문을 닫았다. 리오가 근처에 있던 사무용 의자를 끌어 프로듀서와 마주보도록 앉자, 프로듀서도 덩달아 원래 자기 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자아, 자아. 그래서 그 고민은?"

"아마 너도 짐작했겠지만, 요즘에 엘레나가 말이지-"

"아 그거? 우연이네. 마침 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 엘레나쨩이 이상해진 이유."

"......헤에."


이거 원. 생각도 못한 수확인데. 프로듀서의 갈색 두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리오는 그런 프로듀서를 나무라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어쩌지? 프로듀서쨩이 생각하는 것만큼 기쁜 내용은 아닐지도."

"무슨 의미?"

"우선 들어봐."


프로듀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ARRIVE의 뒷풀이에서 있었던, 프로듀서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을. 


그러는 한편, 시어터 뒷편의 공터에서는.


"흥, 흐흥.....짠!"


누군가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리듬이 담긴 바람과도 같은 움직임. 혹시 보는 이가 있다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누군가, 엘레나의 표정은 그 움직임과는 맞지 않게 어두웠다.


".....어쩌지."


즉흥 춤을 대강 마무리 지은 엘레나는 풀죽은 얼굴로 빈 공터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혼자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근사한 춤사위. 하지만 모두와 함께 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혼자서 튀는 움직임이 되어버린다. 이러면 안되는데. 엘레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보았다. 머릿 속으로 다른 이들의 동작과 타이밍을 생각하면서. 혼자 튀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럴 수록 점점 춤 동작은 처음의 매력을 잃어만 갔다.


"재미없네."


시원찮은 마무리 포즈를 취하던 엘레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달리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시어터 건물을 한 차례 돌아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공터를 떠났다.


.....


...


그렇게 엘레나가 고민하던 와중, 쉬는 날이 돌아왔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엘레나는 외출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꾸민 상태로, 번화한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쇼케이스 너머 화려한 옷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작은 악세서리나마 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엘레나는 대로변을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다,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런데 그 때였다. 마침 그 앞에 똑같이 마주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네 녀석은!"

"앗! 그 때 새까맣고 이상한 아저씨!"

"아저씨라니! 나는 쿠로이 타카오다!"


나이에는 다소 맞지않는 듯한, 다소 요란하게 보일 정도로 화려한 보라색 양복 차림을 한 중년 남성.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아, 이 사람은 그런 쪽이구나. 하고 딱 감이 오는 이. 다른 누구도 아닌 961 프로덕션의 쿠로이 사장이었다. 인상도 인상이지만, 지난날 있었던 사건 탓에 엘레나는 더욱 경계심이 담긴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절~대 그쪽 사무소로는 가지 않을 거야!"

"크크, 그런가. 그렇지만 생각만큼 잘 안되는 모양인데."

"뭐, 뭐야."


쿠로이가 던진 한 마디에 엘레나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괜히 막 던지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직감대로였다. 아무리 수단방법 안 가리는 악질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능력이 안되면 잔챙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쿠로이가 누군가. 잡음은 많긴 해도, 잘 나가는 예능계 사무소의 사장이다. 말단 프로듀서 생활부터 해서 차근차근 올라간, 자수성가형의 남자다. 거기다 지금도 몸소 왕성하게 현장을 다니고 있다. 눈 앞의 여자애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말 안해도 알다마다. 그 삼류 프로덕션 하는 일이 그렇지."

"765 프로덕션을 나쁘게 말하지 마!"

"네 마음 하나 알아주지 못하는 프로덕션이 삼류 아니면 무엇이겠나?"

".....아니야. 우리 사무소는 나쁘지 않아. 내가 나쁜 거야."

"논. 그건 아니란다."

"에....."


엘레나가 상상도 못했던 말이 쿠로이에게서 튀어나왔다. 엘레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쿠로이를 바라보았다. 쿠로이는 주위를 가볍게 돌아보고는, 짐짓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여기서 이러고 있기에는 좀 그러니 어디 앉아서 이야기해볼까."


.....


...


"여기 블랙 커피 하나하고 크림 소다 하나 나왔습니다."

"고맙군."

"가, 감사합니다."

"굳이 사양할 필요 없이, 그보다 훨씬 대단한 걸 시켜도 되거늘."

"이걸로 됐어."

"흐음, 그래. 그러면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시간이 썩어 넘칠 정도로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 몸에게 있어서 시간은 몇 안되는 평등한 것이란 말이지."

"하, 하아....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쿠로이 사장과 엘레나는 근처에 있던 카페로 이동한 뒤, 카페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아 각자 주문했던 음료를 받아들었다. 아직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엘레나한테, 쿠로이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시마바라 엘레나. 내가 보기에 너는,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다고 하나 본래의 천성을 완전히 억누르기에는 또 괴로운 상태고."

"으, 응."


어떻게 알았어!? 엘레나는 그렇게 외치려던 걸 겨우 억누른 채 빨대로 애꿏은 크림 소다만을 휘휘 저었다. 쿠로이는 여유를 과시하듯 블랙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는 이도저도 안될 거다."


그 말에 맥없이 크림 소다를 젓던 손이 멈췄다. 엘레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인 걸 확인한 쿠로이는  계속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너는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으니 간단하게 정리해주마. 요는 선택의 문제라는 거지."


쿠로이가 자신의 커피와 엘레나의 크림 소다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괴로워도 꾹 참고 완전히 억누르거나, 아니면 아예 억누르지 않거나. 둘 중 하나."

"둘 중 하나...."


쿠로이 사장이 제시한 선택지에 엘레나의 주의가 경도되기 시작했다. 훗. 쿠로이는 거만한 코웃음 소리와 함께 자기만의 지론을 계속 이야기해내갔다.


"내가 너였다면 처음부터 억누르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사무소가 아닌 다른 좋은 곳을 찾아 들어갔겠지. 예를 들어 이 나의 961 프로덕션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규모 만큼은 알아주는 346 프로덕션이라던가."

"잠깐!"


엘레나가 목소리 높여 쿠로이를 제지하려는 순간, 쿠로이가 한 손을 들어 엘레나의 눈 앞에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엘레나가 흠칫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쿠로이가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너에겐 재능이 있다. 널 알아주지 않는 녀석들이 우매한 거다! 억지로 남들에게 맞추려고 들지 마라! 오히려 놈들을 압도하는 거다! 사람들은 약자한테는 배려해야한다니 착해야한다니 지껄이지만, 진정 강한 자에게는 전혀 그런 소리하지 않지."


네가 그 강자가 되면 그만인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지. 멋대로 자기 할 말을 다 쏟아놓은 쿠로이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엘레나와 마주보았다. 엘레나의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두 눈에 한 차례 파도가 일었다. 쿠로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옳지 않아도. 엘레나는 쿠로이를 강하다고 생각했다. 강해서 저렇게 아무런 고민도 없을 수 있는 걸까. 


튀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


혼자 즐거우면 안 돼.


계속해서 반복되는 자기 검열 속에서 짜부러질 것 같은 마음이 그 강함에 이끌리는 순간. 쿠로이는 그를 놓치지 않고 검은 손길을 뻗었다.


"생각 있으면 연락해라.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나 정도 위치 되는 인간은, 워낙 부르는 곳이 많다는 거다. 크하하핫!"


자기 앞에 내밀어진 961 프로덕션의 명함을 엘레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쿠로이는 마지막까지 자화자찬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지갑에서 새까만 카드를 스스럼 없이 꺼내 점원에게 내밀었다. 


그 사이, 엘레나는. 


"....."


앞에 놓여진 명함 모서리에 천천히 손 끝을 가져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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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스타라는 건 축구용어인데 관객도 선수도 매료시킬 정도로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전방위 활약 선수라고 하더군요. 그치만 팀플레이 위주로 작전을 짰을 때는 판타지스타를 활용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과 호흡을 맞추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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