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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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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4, 2014 12:48에 작성됨.

 

 

거짓말은 나쁘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다고 배운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생각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나는 모른다.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나는 성경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고, 불경은 들어본 적도 없으며, 코란이 어느 신을 숭배하는 경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거짓말은 나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에는 대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기를 위한 거짓말과 남을 위한 거짓말.
하지만 살다보면, 그 두 가지 종류에서 벗어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거짓말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좋던, 거짓말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거짓말을 좋아한다. 자기에게 불리하던 유리하던. 남에게 유리하던 불리하던.
요컨데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것이다. 변태처럼.
그런데 만약, 그가 말한 거짓이 내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줬다면, 나는 그 거짓말쟁이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물론 거짓말은 조금은 나쁘지만.

 

 

=================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아이돌이었다.
꿈 속에서, 내 프로듀서는 - 꿈 속에서마저 - 그 사람이었다.
꿈 속에서, 우리 둘은 싸우고있었다.

 

모든 꿈들이 그렇듯, 무엇이 싸움을 일으킨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꿈이 느닷없이 시작되듯,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느닷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왜 싸우는지 알 수 없어도, 갑작스레 싸움에 직면하게 됐어도, 감정은 살아있는 법.
불편하고, 화가 나고, 싸우기가 싫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복잡미묘한 마음이 가슴 속에 꿈틀댄다.

 

꿈에서 깨면, 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만, 감정은 그대로 남는다.
그 복잡미묘한 감정. 원인을 하나하나 생각해본다. 이불에 그대로 누워 눈만 뜨고서. 머리에 남은 꿈의 잔상들을 되짚어본다.
내 일그러진 표정, 반면 시종일관 침착한 그의 얼굴, 조금은 격양된 내 말투, 반면 차갑고 분명한 그의 목소리.
그렇게 실마리를 쫓아가던 도중, 문득 나는 깨닫는다.

 

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기억을 떠올렸을 뿐이라는 것을.   ㅍ

 

오늘은 무섭도록 시리던 겨울이 저물어가는 3월 5일.
나와 프로듀서가 싸우고 하루가 지난 날이다.

 

'두둠칫 두둠칫 두두 두둠칫 두둠칫'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는 사이 전화가 왔다.

 

'프로듀서'

 

지금 이 순간, 가장 받기 껄끄러운 전화다.
받지 않고 놔두면,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끊지 않을까?

 

'두둠칫 두둠칫 두두 두둠칫 두둠칫'

"..."

'두둠칫 두둠칫 두두 두둠칫 두둠칫'

"으.."

'두둠칫 두둠칫 두두 두둠칫 두둠칫'

"휴..."

 

내가 졌다.

 

"여, 여보세요"

"샤워했어?"

"ㄴ,네?"

"냄새 좋다"

"어떻게 아세요?"

"농담이지"

"..."

"치하야. 할 말 있으니까 되도록 빨리 사무소로 나와줘"

"할 말?"

"끊어"

"아, 잠깐만...요.."

'뚜- 뚜- 뚜-'

 

내가 '아' 라고 말했을 때 이미 전화는 끊겨있었다.
항상 이랬다. 프로듀서는 자기 할 말만 한다.
이쯤 되면 익숙해졌을 거라 스스로 생각했는데.

 

"..뭐야 정말"

 

오늘은 왠지 조금, 화난다.

 

사무소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24분.
오늘은 주말이라 9시까지 와도 되지만, 일찍 와달라는 그의 부탁이 있었으니까.

 

'삐그더-어억'

 

무지하게 낡은 문을 여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그 소리는 아직도 싫다.

 

'뚜벅- 뚜벅-'

"아"

 

계단을 올라가면서 불현듯, 나와 그가 어제 저녁 다퉜다는 것이 기억났다.
계단을 밟아내리는 내 발소리에 망설임과 불편함이 서려있다.
우리가 싸우고서 달이 지고 해도 떴지만, 아직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사무소에 들어가서 그의 얼굴을 보면 뭐라고 해야할까.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니,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그리고는 뭐라고 해야할까. 어제 하던 얘기를 계속 할까. 그러면 또 싸울텐데.
물론 결론을 지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하지만 프로듀서랑 싸우는건 싫은데..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내가 벌써 사무소 문 앞에 도착해 멀뚱멀뚱 서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후우.."

 

결의에 찬 한숨. 그래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자. 그리고는 나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을 다잡고 문고리에 손을 뻗는 순간.

 

'끼익'

 

문이 안에서 열리더니 매일보는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며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
귓볼 아래까지 내려오며 귀를 덮는 옆머리
언제나처럼, 반쯤 감겨있는 듯한 - 그래서 더 차가워보이는 - 조금 처진 눈.

 

"안 들어오고 뭐하냐?"

"네? 아.. 생각좀..."

"뭐래.. 빨리 들어와"

"네..."

 

사무소 문은 불투명 유리문이다. 안에서 밖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실루엣은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문 앞에 멀뚱히 서서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다. 난 참 바보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려한다.

 

우리는 사무소 오른편에 있는 소파에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두 팔꿈치를 두 무릎에 대고 몸을 앞으로 뻗었다.
마주보고 이야기 할 때 그는 항상 이 자세다. 농담을 할 때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나.
그의 눈을 보니 오늘은 진지한 이야기다. 무슨 말을 할런지.
혹시 어제 있었던 의견충돌을 조정하려는 것일까.

 

"치하야"

"네"

 

나는 그러기를 바라면서, 빨리 다툼이 해결되고 마음이 편해지기를 기도하며 대답한다.

 

"너 잠깐 미국에 갔다와야겠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제 있던 싸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

 

"여권"

"있어요"

"비행기 티켓"

"있어요"

"휴대폰"

"있어요"

"속에 뭐 입었어?"

"...그건 왜요"

"LA는 낮에 덥고 밤에 추워. 도착하면 낮일텐대. 반팔 같은 거 입었어?"

"아뇨. 아무것도.."

"아무것도? 속옷도?"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내요?"

"미안. 농담이야"

 

여름옷은 전부 여행가방에 넣어놨다.
여행가방은 이미 맡겼다. 좀 일찍 말해주지.

 

"프로듀서는 다 챙기셨어요?"

"나? 뭐?"

"여권이랑 티켓..같은 거요"

"난 그거 필요 없는데"

"왜요?"

"안 가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몹시, 당황스럽다. 마치 이 드넓은 공항에 나 혼자 남겨진 것처럼.

 

==============

 

그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 연락을 준 것은 작곡가 토루키씨 - 우리가 아는 그 토루키씨 맞다 - 였다.
토루키씨는 내 데모CD를 - 반 강제로 -  감명깊게 들었고, 내게 곡을 줄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문제는 그와 그의 녹음 스텝들이 작업차 전부 미국에 6개월정도 체류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지금 바로 곡을 받아서 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 그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

 

프로듀서는 토루키씨가 일본에 돌아올 때면 그 노래는 이미 다른 주인을 찾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프로듀서는 '흔쾌히' 나를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언제 가는거에요?"

"다음주 화요일. 3박 5일"

"짧네요"

"녹음만 하고 바로 오는거야. 놀러가는거 아니니까"

"알고있어요"

"알면 됐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 일어섰다.
그 때 느닷없이 기억 언저리에 숨어있던 일이 떠올랐다.
어제 나와 프로듀서가 싸웠던 일.

 

사무소엔 우리 둘 뿐이다.
지금 끝내자. 어서 끝내야 서로 편해진다.

 

"프로듀서!"

"어?"

"저...전.."

"뭔대. 말 해봐"

"전 파랑새가 정말 별로에요"

"...."

"그래. 어제 그런 얘기를 했었지"

"전 그게 제일 별로라고 생각하니까 그걸 데뷔곡으로 정해요"

"..."

"프로듀서도 말했죠? 제 결정이 반영 된다고"

"응"

"근데 이제와서 발뺌하는 건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이긴 하지만.."

"..?"

"해선 안 될 짓은 아니지"

 

말문이 막혔다. 표정하나 안 바꾸고 저런 뻔뻔한 말을 하다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은 더 충격이 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나는 벙 쪄서 멍하니 앉아 프로듀서에게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진다.
프로듀서는 그런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입을 뗐다.

 

"난 말이야 치하야. 솔직히.."

'끼-익'

"안녕하세요!"

 

타이밍도 참 좋게 들어온 것은 하루카였다.

 

"어서와. 쌍리본녀"

"프로듀서.. 가끔은 이름으로 불러달라구요?"

"안녕. 하루키"

"그거 아니잖아요!"

"미안. 히루카"

"으우우우.."

 

프로듀서는 - 나를 제외하고는 - 대부분 별명으로 부른다.
그래서 모두와 살갑게 투닥거린다. 재밌어 보이긴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하루카가 오자 리츠코, 이오리, 마코토가 다 같이 들어오더니 사무소는 시끌시끌 해졌다.
도저히 파랑새를 가지고 싸울 분위기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에 없던 피로를 만끽하고 있었다.

 

==============

 

"치하야?"

"프로듀서는 왜...왜 안 가요?"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봐"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요. 그래서 놀라고 있다구요.

 

"우리 애들 돌봐줘야지"

"아..."

 

프로듀서는 아이돌 전체를 우리 애들이라 부른다.
사장님 정도가 말 해줘야 자연스러울 듯한 호칭이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내가 같이 갈 줄 알았다는 표정이네"

"....네"

"바보"

"큿.."

 

미국은, 내가 쓰지 않는 언어를 쓰고, 본 적 없는 인종으로 가득 차 있는, 거대한 나라다.
그런 곳에 혼자 가서 노래를 녹음해야 한다니. 게다가 난 스튜디오 녹음마저 처음인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이는 느낌이다. 답답하고 막막한 기분.
이런 내 마음을 프로듀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 간략하게 일정 말해줄테니까 제대로 들어"

 

모르나봐.

 

"왜그래?"

"프로듀서는 제가 걱정 하나도 안 되요?"

"어"

"큿..."

"아, 일정은 따로 설명해 줄 필요 없겠구나"

"네?"

"입국심사 끝내고 나오면 위아래로 하얀 옷만 입은 사람이 있을거야"

"위아래로 하얀 옷?"

"어. 신발까지. 키사라기 치하야 라고 쓰여있는 판떼기를 들고 있을거야. 그 사람 따라가면 돼"

"..."

"이동수단 같은 것도 그 쪽에서 먼저 제공해주겠다고 했어"

"아. 그래요?"

"넌 그냥 시간 맞춰 차에 타기만 하면 돼.
호텔이랑 녹음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건 다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거야"

 

이동수단이 제공된다면 참 편리할 것 같긴 하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내가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라는 것이다.
그런 나한테 자기들 돈까지 들여가면서 태워다주겠다고?

 

"..."

 

뭔가 이상하잖아.

 

"근데 프로듀서"

"응"

"전 아직 연습생이고 데뷔도 안 했잖아요"

"어"

"그런 저를 공항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녹음실로, 녹음실에서 호텔로.
이렇게 데려다 준다고요? 왜요?"

"흐응..글쎄? 자기들이 먼저 그렇게 해준댔어. 나야 모르지"

"음..."

"뭐..설마 장기라도 털리겠어?"

"프로듀서.."

"너무 걱정하지마. 아무 일 없을거야"

 

아무 근거없는 말일 터이다. 그런데 '왠지' 프로듀서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있다.
피곤해보이는 처진 눈이 가끔 그렇게 빛나면, '뭔가 이상하다' 가 '어떻게든 되겠지' 로 바뀐다. 불가사의한 힘.
내가 이상한 건지 그가 이상한 건지. 어쩌면 서로 이상한 걸지도.

 

"알겠어요.."

"그래"

"설마 장기라도 털리겠어요?"

"하. 그래. 그러니까 너무 쫄지말라고"

 

비행기티켓을 수령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혼자다.
첫 해외여행이 일 때문에 혼자 가는 거라니. 조금 우울한 기분.
자동문을 건너 프로듀서 쪽으로 뒤돌아보았다.

 

"가봐. 뭘 보고있어"

 

이런 때에도 쌀쌀맞다니..

 

"갈게요"

"갔다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음흉하게 웃음짓는 그의 모습은, 서서히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 일 때문에 가는 거지만 - 첫 해외여행에 조금은 설레고 있던 나였다.

 

당연하게도, 미국에 가서, 프로듀서가 엄청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게되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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