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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마도카 – 비익연리(比翼連理)(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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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1, 2021 01:15에 작성됨.

녹칠의 지방 로케 촬영이 날이 왔다. 장소는 도쿄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교외로 큰 호수와 녹음이 어우러진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번 지방 로케 촬영의 목적은 녹칠의 데뷔곡 앨범 표지의 촬영과 뮤비 촬영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나는 백미러로 아이들의 잠자는 모습을 조금씩 지켜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촬영장소로 곧장 이어지는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직전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에 왔었던 것 같은 기억, 그런 유사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불안감이 급습하였고, 등에서 식은 땀이 생기며 흘러 내리려 하고 있기에 에어컨 온도를 조금 내리자, 갑자기 추워진 바람 때문인지 아이들이 뒤척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 여러번 하고 나서 다시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 들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하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였기에 아이들을 깨우자, 다들 기분 좋게 잠잤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에게 정신 차리고 조금만 있다가 차에서 나오라고 말한 후, 나는 조수석에 놔둔 가방에서 이번 기획서만을 들고서 차 밖으로 나왔고, 주위를 둘러본 후, 숲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숲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이곳에 도착하기 전의 내 착각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듯이 점점 눈에 익은 주변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숲 정중앙에는 나무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관리가 잘 된 건물은 촬영 도중 우리가 쓸 숙소였고, 건물 반대쪽에는 이곳과는 어울리지는 않은 현대식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그곳은 오늘 촬영에 도움을 주실 스태프 분들과 스폰서분들의 숙소였다. 나는 목조 건물을 가까이 가서 올려다 보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된 숙소는 3층의 구조로 숙소 주변에는 가볍게 캠핑 파이어도 가능한 시설들이 보였다. 나는 아까 가져온 기획서를 보고서 왜 촬영지의 주소를 보곳도 눈치 채지 못하였지, 하고 내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찾듯이 황급하게 숙소 주변을 둘러보고서 최종적으로는 숙소 문을 열었다. 환기가 덜 된 탓인지 약간의 먼지가 공기 속에 녹아있었지만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대낮이지만 주변이 숲으로 둘러 쌓여 있기에 불을 켜지 않으면 꽤 어두웠다. 나는 스마트폰을 조작하여 라이트를 켜고서 벽면에 손을 올리고 더듬어가며 형광등의 전원 스위치를 찾아 다녔다. 이윽고 손 끝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어 누르니 건물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졌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시야 회복에 힘을 쓰자, 1층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 곳곳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기에 어두웠던 것에 한 몫 거두었었고, 나는 그곳에서 거대한 천에 뒤덮인 무언가를 보았다.

창문가에 가까이 위치한 곳에 있는 그것은 천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눈에 익숙한 무언가였다. 나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그것에 다가갔었고 다가갈수록 왼쪽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뒤덮인 천을 조금씩 손으로 잡고서 휙 하고 들쳐낸 그곳에는 잊을 수 없는 물건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있어서 잊어서는 안되고, 잊을수도 없는 친숙하고 내가 등을 져버리자고 마음 먹은 존재가 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그것은 그랜드 피아노였다.

건반을 보호하기 위해 닫혀있는 뚜껑을 열자,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보존되어있는 흰색 건반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그 중에서 왼쪽 낮은음을 담당하고 있는 곳에는 거무튀튀한 얼룩이 남아있었다. 관리를 잘하였어도 지우지 못한 얼룩은 처음 보는 사람이 보면 소름 끼칠 정도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얼룩 자국과 내 왼쪽 손목을 교차하면서 바라보았다.

나는 이 얼룩이 생긴 이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장소도 알고 있었다. 단지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서 잊고 살았을 뿐이었다.

 

큰 의미는 없었다. 창가에 쳐져있는 커튼을 걷어내고서는 피아노 앞에 있는 전용 의자에 앉아서 가볍게 피아노의 조율을 끝마치고서는 건반을 한 개씩 눌러보고 잘 되었는지 확인하였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정장 자켓을 근방에 벗어 두고서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고서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서는 피아노 하단부에 위치한 페달을 밝고서는 멜로디를 자아냈다.

연주를 하기 시작한 곡은 녹칠의 곡, 이번 뮤비 촬영의 중심이 되는 곡이었다. 눈앞에 악보가 없어도 연주를 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때까지 수백 번, 수만 번 들었고 악보라면 필요없으니까..

 

원곡보다는 조금 느리게 천천히 한음 한음 눌러 나가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고 조금 템포를 높여서 원곡에 가까운 박자에 맞춰 연주해 나가자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도 금방이었고, 연주가 중반에 가까워지자 이때까지 들리던 피아노의 음색은 여자가 비명 지르는 듯한 절규하는 소리로 바뀌었고 누군가가 옆에서 속삭이듯이 환청도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을 누군가가 손을 겹치며 뒤덮듯이 기분 나쁜 촉감도 느껴졌고 악보를 놓는 선반에는 온몸에 피를 뒤덮고 피아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정면으로 나를 쳐다보는 누군가의 모습이 있었다.

 

눈 앞의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긴 머리카락에 가리워져 있는 공허한 두 눈에는 내 모습이 비추어져 있었고, 눈동자 속의 나는 겁 먹은 것도 무서운 표정도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과 같은 표정이었다. 정체모를 사람인가, 사람이라고 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눈에 익숙한 연주자용 연미복 차림이었고, 나와 똑같이 정장만을 벋고 있었다. 내 표정을 조금 관찰 후에 소매 부분이 새빨갛게 젖어있는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어루만지었다. 피에 뒤덮인 그 손은 기분 나쁠정도로 축축하고 손끝에는 굳은살이 박혀있는지 꺼끌꺼끌한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건반 위에 놓여있는 내 왼손 손목에 난 길게 난 상처자국을 손톱을 세워서 위에서 아래로 상처자국을 후벼파듯이 긁어내기 시작하였다. 통증은 없었다. 몇 번 더 그렇게 긁어낸 후에는 만족했다는 듯이 웃기 시작하였고, 그때 였다.

 

열려있던 문을 통해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들어왔다.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등을 돌리자 새빨간 존재는 다가온 불청객에게는 흥미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이내 사라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박수 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최소 4명 이상의 인원이었다.

등을 돌린 그곳에서 시선을 마주친 사람은 총 5명이었다.

녹칠의 아이들과-... 눈에 익숙한 여성이 한명 더 있었다.

 

마도카를 제외한 녹칠의 아이들은 엄청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는 표정과 함께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같이 옆에 서 있었던 여성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촬영을 한 것인지 카메라 렌즈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조작을 끝마치고서는 만족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익연리(9)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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