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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사라기 치하야 「이상한 꿈을 보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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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4, 2021 00:19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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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의 이곳은 지금보다 훨씬 북적이고 있었다. 시부야의 번화가 중심에 위치해있기도 하고,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꽤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었기에, 관광 코스로 들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언제나 붐비는 곳이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나 mp3 파일 다운로드가 훨씬 대중화된 지금은 CD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악수회나 신곡 발표회 등의 행사가 여기서 열리기도 했기에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인파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연인이 됐건, 가족이 됐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클래식부터 헤비메탈까지의 장르는 물론 메이저, 마이너를 가리지 않고 음반을 찾을 수 있는 가게가 몇 없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나는 음악이 듣고 싶어지면 언제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 날도 다투는 부모님을 피해서 집을 빠져나온 날이었을 거다. 사실 주말에는 그러지 않는 날이 더 드물었지만, 딱히 함께 돌아다닐 친구도, 갈 만한 장소도 없었던 나는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온 뒤 항상 전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고는 했다.

  한 번의 환승을 거쳐 가게에 도착한 나는 그 날도 평소처럼 7층의 클래식 코너에서 CD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때마침 할인을 하고 있던 악보집이 있어서, 직접 음원과 함께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샘플을 플레이어에 넣고 들어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꼭 앨범을 사지 않더라도 들을 수 있는 샘플 디스크가 폭넓게 제공된다는 것도 일부러 찾아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튼, 그런 자잘한 디테일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날이... 그 날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잊어버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으음. 팅 하고 왔다!”

“...?”

“저기, 자네 혹시...”


  무대 위에서 노래해보지 않겠나, 나는 이런 사람일세. 연예기획사 765프로덕션, 사장 타카기 준지로. 가수가 될 수 있을 줄 알고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아이돌. 이렇게 된 김에 열심히 해보고 어쩌고저쩌고. 이젠 흔하디흔한 전래동화처럼 설명하는 것조차 질리는 그 이야기.

  그렇게 조그마한 사무소에서 시작해서 조그마한 일거리들을 전전했다. 그마저도 무대가 아닌 이벤트 시상식 보조나 그리드 걸 같은 노래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쩌다 운 좋게 들어온 무대 오퍼는 보통 관객도 열 명 안팎인 백화점 옥상 라이브 같은 일이었다. 물론 관객이 몇 명이던,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해 노래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음악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이들에게 억지로 노래를 들려주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진 빠지는 일도 없었다. 결국 무의미한 날들이 하루 이틀을 넘어 일 년 가까이 반복되자, 나도 지쳐서 거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렇게 노래가 좋았다면, 그렇게 노래에 진심이었다면, 노래할 기회가 얼마나 적던, 아이돌이라는 일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스로의 신념. 노래 하나로, 실력 하나로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믿음을 근간부터 부정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조그만 회사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장이었던 타카기 준지로라는 사람도, 사무원이었던 오토나시 코토리라는 사람도, 그리고 아즈사 씨와 아마미 씨, 하기와라 씨 같은 동료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그런 낭만은 결국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제대로 된 TV 출연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탈락을 반복하며 신인 오디션을 전전하던 어느 날, 백스테이지에서 길을 잃은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던 스태프들의 대화를 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번 주 신인들은 어때?”

“뭐, 신인이야 언제나 넘치지. 중고신인들도 많지만.”

“절반은 지난주에 봤던 이름들이구만.”

“한참 옛날부터 보던 이름들도 있어. 어디더라... 아. 여기 있네. 키사라기 치하야.”

“아, 그 애지? 노래 잘 하는 애.”

“응. 안타까워. 실력은 신인 치고 되게 좋은데.”

“그 정도면 한 번쯤 올려줘도 괜찮지 않나?”

“높으신 분들의 사정을 몰라서 그래? 상업성이 전혀 없잖아. 광고도 안 때려, 음반 판매량도 당연히 저조해, 그렇다고 다른 지하 아이돌들처럼 고정적인 스테이지가 있는 것도 아니야... 재능은 있는 것 같은데. 소속사는 뭐 하나 몰라.”

“안타깝네.”

“우리 같은 말단이 입으로만 떠들어서 뭐하겠냐...”


  내가 상자로 가려진 코너를 돌아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자, 둘은 깜짝 놀라며 대화를 멈췄다. 내가 눈치를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 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디션 끝나셨으면 제3대기실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결과는 끝나고 한 번에 발표해드릴 겁니다.”

“아, 네.”


  스태프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나의 등 뒤로, 둘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방금 거, 들었을까?”

“쉿. 조용히 해.”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했다. 억지로 부정하면서,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오늘은 결과가 다를 거라고, 지난번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었으니까, 분명 이번에는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대기실에 돌아가 앉아있는 내내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히도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그 날 처음으로 오디션장에서 울었다.


  불합격 통보를 받고 대기실을 빠져나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을 찾아 돌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낸 비상계단 한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 전까지는 당연히 한 번도 오디션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불합격이라면 나의 노력이, 노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더욱 레슨에 매진해서, 다음번에는 더 나은 퍼포먼스로 합격해보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매번 불합격이 반복되자 나는 점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세 번, 네 번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두려움이 나를 물들여갔다. 신인 오디션만 일곱 번째 도전하던 그 날도 내심 불합격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그 두 스태프의 대화는 쐐기를 박아 넣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순수하게 실력만을 봐주지 않는 이 업계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도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화가 가라앉은 후에는 극심한 공허감이 밀려왔다. 노래만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순수하게 실력을 봐주지 않는다면, 나는 왜 아이돌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계속할 의미가 없구나.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들이었구나.

  그 날은 사무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쓸 일도 없었던 무대의상을 대기실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 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날렸다. 그러고 한 사흘 정도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거다. 사무소는 물론 학교도 나가지 않았다. 

  나흘째가 되던 날,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오늘은 꼭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아마미 씨의 문자를 받았기에 나는 오후 2시 정도에 사무소로 향했다.


“안녕하세ㅇ-”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순간 멈칫했다. 사무소의 분위기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오토나시 씨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는 대신, 무표정으로 책상 위의 사무용품들을 상자에 옮겨 담고 계셨다.


“어서 와. 치하야짱. 상황은... 조금 안 좋지만. 후후.”

“오토나시 씨, 이게 무슨...”


  오토나시 씨는 나를 올려다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서는 오히려 우는 얼굴보다 강한 씁쓸함과 우울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상황이 정리되면 이야기해주려고 했는데... 우리 사무소, 이번 주를 끝으로 정리하기로 했어. 아마 건물을 비우는 건 다음 달 정도일 것 같지만...”

“...”

“아, 왔는가. 키사라기 군.”


  그때, 타카기 사장님이 사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셨다. 나는 여전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곤란해 하고 있는 건 사장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토나시 씨도, 사장님도, 나도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사장님은 갑자기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씀하셨다.


“정말 미안하네.”

“ㅇ, 아뇨. 딱히 사과를 받고 싶었던 건...”

“내가 부족했기 때문일세. 입이 열 개라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

“사장님...”


  나는 당황했지만, 사장님은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급여라면 이번 달 분까지 확실하게 정산해주겠네. 지난주까지의 업무들과 이번 달 말까지의 계약금까지 합쳐서.”

“돈이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


  사장님은 나의 발언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고작 열여섯 꼬맹이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지만, 그 순간의 나는 돈 같은 건 받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돈보다도 물어보고 싶은 다른 것들이 잔뜩 있었다.


“사장님.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괜찮을까요?”

“...내가 답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물어봐 주게.”

“노래로는... 노래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요?”

“키사라기 군, 그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나는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꾸만 반복되는 오디션 탈락 때문에 가졌던 불안감, 오디션장의 백스테이지에서 들었던 스태프들의 대화, 그리고 내가 느낀 업계에 대한 분노와 공허감까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 사람이라면 나에게 대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을 담아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뒤, 사장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나는 사장님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는데, 결국 한다는 소리가 똑같이 미안하다는 게 전부란 말인가. 그런 말을 듣자고, 사과를 받자고 한 이야기가 아닌데.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게 전부인가요?”

“미안하네. 내가 무능했기 때문일세.”

“...정말 그거면, 제가 전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단순히 사장님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단순히 내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닐세. 전부 내 탓인 게 사실이기 때문일세.”

“그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게 사장님 혼자만의 탓일 리가 없잖아요. 업계가,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이잖아요. 저는 그저, 실력만으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없는 게 사실인지, 그렇다면 그걸 이겨낼 방법은 있는지, 그 와중에도 노래로 소중한 의미를 전할 수 있는지를 듣고 싶었을 뿐인데... 당신은 어째서...


“...무능하시네요.”

“...”

“ㅈ, 저기. 치하야짱......”

 

  타카기 사장님은 나의 무례한 발언을 그저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오토나시 씨는 조금 당황하며 뒤에서 다가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더욱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으시다면, 정말 무능하시네요! 제가 묻고 있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고작 사과 따위를 받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거, 분명하게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아이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미안하네.”


  나는 순간 멈칫했다. 갑작스럽게 끓어올랐던 분노는 급속도로 식어서 동정심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어떠한 반박이나 자기변호도 할 의지를 잃어버린 채 고개를 숙인 그 모습에서, 나는 가끔씩 아버지가 보였던 그 멍한 표정을 떠올렸다.

  저 무기력함은 분명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미 닳고 닳아버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나갈 의지마저 잃어버린 그 무기력함.


“...치하야짱?”


  그 때였다. 때마침 사무소에 도착한 아마미 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타카기 사장님, 그리고 내 옆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오토나시 씨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마미 씨의 부름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타카기 사장님을 향해 말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이야기할 가치는 없는 것 같네요. 그러면...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ㅈ, 저기, 치하야짱?!”


  말을 마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사장님을 지나쳐 사무소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미 씨는 그런 나를 황급히 막아섰다.


“치하야짱, 잠깐만!”

“...막지 말아줘. 아마미 씨.”

“ㄱ, 그래도...!”

“아.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지금까지 고마웠어, 아마미 씨. 앞으로 잘 지내.”

“치하야짱...”

“그러면, 이만.”


  아마미 씨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나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저항하지 못했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그 후로 아마미 씨는 멀어지는 내 뒷모습에 대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게 나에게는 765프로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후로는 다른 동료들과의 연락도 전부 끊겼다. 타카기 사장님이 그 달의 급여 정산을 위해 문자를 보내온 것 말고는, 그 누구도 연락을 보내오지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받은 연락은 대학 2학년 때,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온 아즈사 씨의 소식이었으니까, 소속사를 옮겨 데뷔한 미나세 양을 제외하면 그 후로 4년 정도는 쭉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그 후로는 오히려 평범하게 학교로 돌아갔다.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교복을 갈아입고 학교에 나갔다. 딱히 친구도 없었고, 1학년 때 합창부를 그만둔 뒤로는 별다른 부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저 등교해서, 수업을 듣고, 일과가 끝나면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날들을 반복했다. 회사와 집을 기계적으로 오가는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생활패턴이기도 했다.

  노래는 그 이후로 부르지 않았다. 자취방에 있는 CD를 듣는 일도 거의 없었다. CD 플레이어 위에 놓여 있던 유우의 사진도 치워버렸다. 그렇다고 음악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 생각하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게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계적인 생활 패턴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에는 잡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2학년을 보내고, 3학년마저 지나갔다. 센터시험을 앞두고 대입이 가까워지자,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담임 선생님과 진로상담을 하게 됐다. 지금의 진로를 결정하던 그 순간도, 나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키사라기. 지금 희망하는 쪽이 어디라고 했지? 일단 여기에는 음대라고 적혀 있는데.”

“아뇨. 그쪽은 1학년 때 잠깐...”

“그래? 그러면 지금 특별히 희망하는 대학이나 분야가 있니?”

“...아뇨. 잘 모르겠어요.”

“흐음. 일단 성적은 우수하니까 어디든 무리 없이 넣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본고사도 너라면 잘 할 것 같고.”

“그런가요.”


  담임 선생님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내 성적은 교내에서 한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전국모의시험 성적도 좋은 편이었으니까, 선생님의 눈에는 이런 성적을 받으면서 별다른 목표가 없다고 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 나는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몇 개의 대학 중 자취방에서 그나마 등교하기 편한 곳을 골라 진학했다. 전공은 경영학이었고, 고등학생 때처럼 빡빡한 강의 스케줄을 맞춰서 생활하다보니 특별한 일도 없었다. 연애니, 클럽 활동이니, 축제니 하는 흔한 대학생활의 낭만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장을 받은 뒤 또 적당한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그 바쁜 생활 패턴은 지금도 딱히 변함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돌아와 정장을 갈아입고 출근, 퇴근, 그리고 집.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나서는 책을 읽거나 TV를 틀어놓은 채 시간을 보내다 잠든다. 그리고 또 다시 처음부터 반복.


  그랬던 내가, 지금은 다시 이곳에 와서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 시부야 한복판의 대형 CD샵, 7층 클래식 코너 앞.


  왜?


  왜일까. 대체 왜 나는 다시 여기로 돌아온 걸까.

  지금의 생활패턴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만족하지도 않았지만. 애초에 일상에 만족하고 말고를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765프로를 뛰쳐나온 그 날 이후로, 그냥 매일매일을 멍하니 이어나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특별히 이루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바쁜 매일매일을 보내다 보면, 그런 잡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중학생 때의 나처럼,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아이돌을 그만두기 이전의 나처럼.


  왜일까?

  나는 이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곳에 서 있었던 10년 전의 그 소녀는, 대체 무엇을 이루고 싶었던 걸까?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내 마음 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근한 선율에 실려 흘러갔다. 


  브람스의 Op. 6, No.2. 봄.(Der Frühling)

  가장...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던,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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