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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미 슈코 「여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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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9, 2021 14:26에 작성됨.

What does the Fox say? - Weissmann


비. 내리는 비. 겨울비. 차가운 비. 나는 어째서 우산도 없이 이 비를 맞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천천히 식어 가야하는 걸까. 금방이라도 차가운 땅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 것처럼 식어 가야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나 커다란 죄를 지은 걸까. 이 비를 온 몸으로 맞아야 할 정도로 대죄를 지은 걸까. 그 어떤 대죄보다도 커다란 죄를 지은 걸까.


「....」


나의 직업은 프로듀서. 밥 먹듯이 야근을 하고 숨 쉬듯이 치이는 말단 관리자. 철창 없는 감옥의 재소자. 기다리는 이 없는 무기 징역수. 아마 나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 용서되지 않는 대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삶이 이렇게 고달플 수 있을까.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면 어둠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단칸방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나는 어째선지 그 한 마디를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문 너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구두를 벗어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돌려 놓았다. 언제 또 비 오는 바깥으로 나가야 할 지 모른다. 작게 한숨을 쉬며 비에 쫄딱 젖은 가방을 내려놓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쏟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얼 바라 부서진 비행기의 잔해 속에서 가라앉고 있는 것일까. 무얼 바라 하얀 물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어서 와~」


비로 얼룩진 현관을 넘어 주방으로 들어왔을 때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놓여진 신발은 낡고 허름한 구두 한 켤레 뿐일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목소리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자 분명히 아무도 없어야 할 방 쪽에서 여우처럼 가벼운 발소리가 나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다.


「시오미 씨...?」


「얏호~ 기다렸다구~」


「어째서 여기에...? 분명히 아까까지는...」


시오미 슈코. 나의 담당 아이돌. 그리고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말했던 여우. 길들여지지 않은 여우. 나 이외엔 길들일 수 없는 여우.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홉 개의 흰 꼬리를 가진 여우. 꼬리들이 축축한 비를 머금은 바람에 나부끼는 여우. 흰색 여우.


「프로듀서를 만나기 위해 몰래 택시 타고 왔어! 그러니까 택시비 내줘! 1만엔!」


「1만엔이라니, 너무 바가지쓰신 것 아닙니까. 아니, 애초에 나머지 돈은 용돈으로 쓰실 생각이시죠?」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내리는 요호 슈코 님의 형벌이외다~」


「에휴...」


어딜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대화. 하지만 이것이 시오미 슈코라는 소녀를 정의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다. 소녀라는 것은 본래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생물이지만, 이 소녀는 그 의미를 뛰어넘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가진 생물이었다. 아니, 애초에 가출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소녀다. 그 의미는 시오미 슈코라는 운명과 결합되어 더욱 미묘해졌고 불규칙해진다. 그런 소녀를, 우연히도 도쿄의 어느 역에서 발견한 것이 나였다. 길들일 운명. 어느 순간부터의 시오미 슈코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그저 현실의 평범한 어느 날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보다 프로듀서,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오랜만에 슈코 쨩이 낼게~」


「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아니, 북쪽일까요. 확실한 건 동쪽은 아닐 것 같군요.」


「그런 프로듀서에게 1만엔 추가의 형벌을 내리겠소이다~ 어서 돈을 내놓으시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하세요. 애초에 저보다 돈도 많이 버시잖습니까. 그런 분께 제가 왜 1만엔이나 되는 거금을 내놓아야 하는 겁니까. 제 봉급은 시오미 씨가 버는 돈의 절반도 안 된다구요.」


「그야 내 돈이 프로듀서 돈이고 프로듀서 돈이 내 돈이잖아~? 그러니까 어서 주라구~」


「사양하겠습니다.」


「에~ 째째해~! 짠돌이!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


우연찮게 주운 귀여운 생물이 사실은 짜증나는 소녀였다는 전개는 어느 소설에 있을까. 아마 어느 소설에도 없을 거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그것이 짜증나는 존재인지 귀여운 존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섞어서는 안 되는 두 색처럼 서로의 빛을 잃고 만다.


「슈코 쨩이 당신과 함께 장어덮밥 곱배기를 먹고 싶다고 말해야겠어? 슈코 쨩같은 소녀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게 하다니... 당신은 엄청난 귀축이야!」


「그렇게 매도하셔도 1만엔은 드리지 않을 겁니다. 대신 저희 집에 있는 잔반이나 처리해 주시죠. 사용기한이 아슬아슬합니다.」


「그건 이미 처리했어! 쓰레기통 안으로!」


「쓰레기통... 직접 치우셨단 말입니까?」


「그야 어쩔 수 없잖아~? 배고픈데 돈은 없으니까 냉장고 좀 뒤져봤지~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헛고생이였어.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더라고. 아. 무. 것. 도.」


「그야 그렇겠죠.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라면 몇 개밖에 없을 테니까요.」


「정말~! 슈코 쨩이 올 줄 알았으면 뭘 좀 놓고 있으란 말이야! 덕분에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어! 어서 먹을 것을 내놔! 내~놔~아~!」


「나이도 찰 만큼 차신 분이 어린애처럼 징징거리지 말아 주세요. 뭐, 저도 배가 고프긴 하니 뭐라도 배달은 시킬 거지만요. 아, 장어덮밥 곱배기는 제외하겠습니다.」


「치사해! 어째서 그것만 안 되는데!」


「월급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돈 없는 월급쟁이는 아껴서 써야 한답니다. 자, 그래서 뭘 드시겠어요? 저는 이 파인애플 피자가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의 말에 시오미 슈코라는 이름의 짜증귀여운 생물은 대답 대신 얼굴을 찌푸린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방금 전에 한 못난 프로듀서가 마음 속으로 생각한 한 가지 명제를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 있는 이 생물을 설명할 수 없다. 이 교활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우를 설명할 수 없다.


「농담입니다. 그럼 적당히 피자라도 시키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사실 장어덮밥 곱배기는 슈코 쨩도 그냥 얘기해 본 거랍니다~」


「그건 완전 진심이셨던 것 같은데요. 표정이 완전 진심이셨어요.」


「그렇게 보였다면 그렇게 보인거겠지~ 자, 그럼 어서 피자를 주문하도록! 슈코 쨩은 그 동안~ 으음, 뭘 하면 좋을까~」


「미리 말해 드리지만 저희 집에는 게임기도 없고 가지고 놀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 정도야 몇 번이고 왔으니까 알고 있다구~ 자아, 그러엄... 아, 프로듀서. 잠깐 이 쪽으로 와 주겠어?」


「네, 그러죠.」


소녀는 프로듀서를 부른다. 불러 멈춰 세우고 꼬리짓을 한다.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 프로듀서는 꼬리들을 쓰다듬으며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간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죄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죄. 한 프로듀서와 한 요호만이 알고 있는 대죄. 그런 죄.


「고마워, 프로듀서.」


「별 말씀을요. 애초에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면 집 열쇠같은 건 드리지 않았어요.」


「후후, 그렇겠지♬ 참, 그런데 말이야.」


「네, 시오미 씨.」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아?」


「네, 얼마든지요.」


「솔직하게 말해서... 시오미 슈코라는 존재는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야?」


여우는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답을 알고 있어도 계속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지금 그녀가 묻는 질문이 그런 질문이다.


「시오미 씨는...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한 번 더 대답해준다. 그녀도 아는 대답이다. 이 말로 나의 죄는 더 무거워졌겠지.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기뻐하는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죄를 짊어지리라. 바깥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기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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