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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츠바사 블룸 (翼 Bloom)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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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7, 2021 16:17에 작성됨.

9.


 쌀쌀한 가을 날씨, 구름이 지저분하게 낀 야외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만원이었다.


 765 프로덕션의 간판 아이돌 두 명이 메인인 무대다. 호시이 미키나 이부키 츠바사의 이름은 시린 바람에도 불구하고 팬들을 끌어모으는 효과가 있었다.


 당연하다. 자신이 찾아내고 키워낸 아이돌들이다.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담당 아이돌들의 능력을, 그는 분명히 믿고 있었다.


 두 명은 대결 구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미키나 츠바사를 관리하는 프로듀서로서는 아무 의미 없는 구도였다.


 비즈니스란 그런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테두리 내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다.


 이러한 사정을 아직 중학생인 호시이 미키나 이부키 츠바사에게 해 봐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며 감정만 상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최고의 무대를 추구한다.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무대를 원한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는 아이돌들이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별 의미 없는 대결 구도는 잠시 접어두고 무대를 더 즐겨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그렇다고 미키나 츠바사의 기분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팬들의 환호성이 무대를 뒤덮었다. 더 이상의 리허설은 없다.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도 없다.


 대기실에서 나가기 전, 그는 미키와 츠바사를 보았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두 소녀의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특이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그만큼 믿는 아이들이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도 호시이 미키다. 뭐라고 한들 이부키 츠바사다. 어떤 무대, 어떤 노래, 어떤 퍼포먼스를 요구해도 그가 원하는 만큼 해낼 아이들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호시이 미키가 방긋 웃으며 눈사래를 친다. 평소보다 좋은 컨디션인 것 같았다. 


 그러다 굉장한 기세로 이쪽을 보던 이부키 츠바사가 눈에 들어왔다. 미키처럼 웃지는 않았지만, 날개처럼 양쪽으로 삐친 머리카락이 마치 강아지의 꼬리처럼 붕붕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감기가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몸이 마음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더 이상 없다. 지금부터는 팬들과, 그리고 아이돌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대의 맞은편, 관중석의 가장 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10.


 프로듀서가 없는 세계다.


 평소답지 않게 그 작은 차이는 거대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상실감은 곧 두려움이 되었고, 두려움은 그녀의 작은 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호시이 미키는 노래하고 있었다. 프로듀서에게는 익숙한 곡이며, 이부키 츠바사에게는 그리 많이 접할 기회가 없었던 노래다.


 하지만 이부키 츠바사에게 지금 들려오는 그 노래는, 그녀에게 경각심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호시이 미키가 키사라기 치하야처럼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아마미 하루카처럼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수려한 퍼포먼스 없이 부르는 이 노래에, 관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츠바사마저 멋지다, 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호시이 미키라는 아이돌은 프로듀서가 없는 무대 위에서 그녀의 이름처럼 빛나고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부키 츠바사는 중얼거렸다.


 프로듀서의 권유로 765 프로덕션에 발을 들인 이래로 시어터의 간판 아이돌로서 여러 솔로 무대를 경험해 보았지만, 이제껏 이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즐거운 무대, 빛나는 무대, 그리고 객석의 모두가 귀엽고 빛나는 자신을 보아 주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자기만족이다. 귀엽고 멋진 아이돌이 되고 싶지만,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냥 그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미없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


 어린아이의 논리다. 중학생이면 다 컸잖아, 라고 말은 해도 프로듀서에게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가 없는 세계를 자각해버린 아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기, 사라져버려도 찾아주실 건가요?]

 [분명 바빠서 메일도 못 보내는 거겠죠]


 이어지는 [마리오네트의 마음]


 무대 뒤편에서 보이는 호시이 미키의 옆모습은 분주했지만, 그 시선만큼은 확실히 객석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이부키 츠바사라서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객석보다 조금 더 멀리, 관객이나 아이돌의 공간이 아닌 곳을 향하고 있었다.


 프로듀서다, 이부키 츠바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부르는 [마리오네트의 마음]은 확실히 그를 보며 부르는 것이다. 츠바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봐요, 실이 풀려버릴 것 같아졌어요]

 [마음이 고장 날 것만 같아요...]


 정말로 망가진 마리오네트인양, 호시이 미키의 댄스와 퍼포먼스는 만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부키 츠바사 또한 재능있는 아이돌일진대, 그녀의 앞에 거대한 벽 하나가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 심층 머메이드 유닛으로 같이 댄스 레슨을 했던 당시, 가나하 히비키의 템포와 체력에 맞추기 어려웠던 것이 기억났다.


 에에ㅡ, 재미없어. 그렇게 말하고 레슨을 몇 번 빼먹었지만, 아마도 질투 반 동경 반이 뒤섞인 질척질척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옆에 나란히 섰을 때 자신의 빛이 바랠 것이 두렵기라도 했을까, 무대 위에 올라갈 준비를 하며 츠바사는 각오를 다졌다.


 이카루스의 밀랍날개는 별과 나란히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다르다. 다를 것이다.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잠들지 않을 것이며, 빛나는 반짝임으로 청중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래를 시작했을 터였다.


 ‘어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츠바사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어려운 안무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세세히 보였다. 하지만 가장 뒤편, 출구 근처에서 기대어 이쪽을 보는 프로듀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백스테이지에선 그렇게 잘 보였던 그 얼굴이, 그 표정이,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나 눈짓 하나하나까지 보였던 그것이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떤 표정으로 무대를 보고 있을까, 혹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닐까, 비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로듀서의 명성에 먹칠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어깨를 짓눌렀고, 자기도 모르게 츠바사는 몸을 살짝 떨었다.


 “......?”


 그런 츠바사의 이상징후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의외로 프로듀서였다.


 [아까까지의 가치관]

 [전부 바꿔 버릴 정도로ㅡ]


 감기 기운이 아직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고민하고 있을 사치스러운 시간 따위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고작 두 소절 뒤에는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다급히 조명 스태프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무대 위의 호시이 미키에게도 손으로 작은 신호를 보냈다.


 [열중하게 되는 일이 있단 걸]

 [믿어 볼래?]


 격렬한 안무 도중에도 미키는 그의 신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야 미키 역시 츠바사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보같은거야, 그녀답지 않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해 주고픈 이야기들이 몇 개 있지만, 지금은 무대 위다. 노래와 춤, 그리고 화려하게 빛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무대를 보러 와준 팬들과, 그리고 무대를 기획해 준 프로듀서에게 대한 예의다.


 아이돌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빛나려면 좋건 싫건 빛나게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무대를 기획할 프로듀서가, 무대를 세팅할 많은 스태프들이, 같이 환호하고 무대를 즐길 팬들이.


 그 모든 조건이 완성되어야만 아이돌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반짝일 수 있으리라.


 아직 그녀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호시이 미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이 자리에서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밤중의 Show time]

 하이라이트에 맞추어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며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호시이 미키를 비추었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손을, 팔을, 어깨를, 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팬들의 함성이 터져나오며, 연두색 팬라이트의 불빛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미러볼은 필요없어]

 그리고 양팔을 좌우로 쭉 펼치며, 무대 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어필을 선보였다.


 [순간의 반짝임 그 눈에 잊지 않을]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며 무대의 조명이 다시 들어왔지만, 펜라이트의 불빛은 여전히 압도적인 연두색이었다. 두 소절밖에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호시이 미키는 그 짧은 시간에 무대를 장악하고, 모든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최고의 아이돌이란 그런 것이다. 765 프로덕션의 프로듀서가 키워낸, 이것이야말로 톱 아이돌이라 불리는 아이돌인 것이다.


 [최고인 우리들을 새겨 줄게]

 객석의 모든 팬분들이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도록, 프로듀서 또한 잊을 수 없도록, 바보같은 후배 역시 잊을 수 없도록.


 [지금 바로...]

 그 순간, 이부키 츠바사는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어떤 노래를 부르건, 어떤 퍼포먼스를 선보이건, 적어도 지금은 호시이 미키라는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11.


 멋진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날도 제법 서늘했고, 음향을 다루기 힘든 야외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수 하나 없는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여 주었다.


 단지 이부키 츠바사의 텐션이 라이브 도중에 조금 떨어졌다는 점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트러블이겠지만, 그래도 프로 아이돌답게 발랄한 목소리와 싱그러운 미소로 그녀의 무대를 장식했다.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극장의 간판 아이돌이다. 그저, 상대가 조금 나빴을 뿐이다.


 팬들의 앙코르 요청에 응하여 호시이 미키가 [별무리의 심포니아]를 부른 뒤, 이부키 츠바사가 다시 무대에 올라, 그녀와 함께 [Thank You!]를 부르는 것으로 라이브 무대는 막을 내렸다. 그는 언제나처럼 모두가 무대 뒤로 퇴장하고 나서야 객석에서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시이 미키와 이부키 츠바사, 두 명의 아이돌 모두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참석해 준 아오바 미사키 또한 대기실 소파에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호시이 미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부키 츠바사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런 두 명과 프로듀서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듯, 아오바 미사키는 뒷정리를 핑계로 조용하고 신속하게 대기실 문을 나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기실에는 프로듀서를 비롯하여 셋 만이 남게 되었다.


 “둘 다, 고생했어.”


 프로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기실 내부에 흐르는 정적을 참지 못한 것이다.


 선택해야 하는 고충을 다른 아이돌들이나 사무원들이 알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선택해야 한다. 설령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리는 경쟁을 싫어할지라도, 때로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한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불을 보듯 뻔하다. 아마 두 명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호시이 미키의 자신만만한 미소도, 이부키 츠바사의 걱정스러운 표정도, 모두 결과를 알고 이에 승복하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이다.


 겉으로는 그렇겠지, 그는 두 명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투덜거렸다.


 따라서 그 역시,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호시이 미키와 이부키 츠바사, 두 명에 대한 예의다.


 두 명이 동등하게 전력을 다했다면 말이다.


 “응응! 허니 말대로 미키, 고생한 거야.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못 말리는 마이페이스의 아가씨는 이미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지 않는 점이, 제아무리 호시이 미키가 어른스러운 외형이라 하더라도 아직 중학생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사춘기 소녀는, 그런 미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부루퉁한 얼굴로 미키를 보고 있었다.


 다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이 짜증이나 질투보다는 자책에 가깝다는 것을, 어른은 알고 있다.


 “확실히, 미키의 무대는 완벽했ㅡ”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미키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고,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미키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단순히 뒤끝이 찜찜한 승부가 싫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허니, 미키의 무대가 끝났을 뿐인 거야.”


 중학생이지만 선배로서, 그리고 아이돌로서 한층 성장한 것이다. 그렇기에 프로듀서로서 단호하게 제지할 이유가 없다.


 “아직 츠바사의 무대는 보지 않은 거야, 그렇지?”


 이부키 츠바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씹어버린 입술은 분명 일그러진 감정의 단편이다.


 “미키 선배, 놀리는 건 그만둬 주세요.”


 평소 이부키 츠바사의 서글서글한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녀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말이었다. 미키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미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웃으며 대답했다.


 “흐응~? 미키는 놀릴 생각 같은 건 없는 거야.”


 “누가 봐도 분명히, 미키 선배가 더 완벽했잖아요!”


 “미키는.”


 갑작스러운 미키의 말에, 츠바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미키는 의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츠바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키는, 분명 질투 많은 소녀인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츠바사가 허니에게 무슨 말을 하건, 미키가 막을 권리는 없는 거야.”


 “......”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애써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가 보아 온 호시이 미키라는 소녀는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아이였던가. 아니라면, 눈앞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시어터에서의 경험이 그녀를 한층 성숙하도록 만들었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미키의 예전 모습을 알던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허니는 아직 츠바사의 무대를 보지 못 한 거야. 그렇지, 허니?”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그는 실소를 삼키며 말했다.


 “미키 말이 맞아.”


 공연장에 남아 있던 팬들이 퇴장하고 있었고, 무대 뒷정리는 시작하지 않았다. 음향설비도, 연출을 위한 소품도, 필요한 의상도, 아직 퇴근하지 않은 코디네이터도, 무대를 총괄하는 프로듀서도, 그리고 무대를 빛낼 아이돌까지 아직 그 자리 그대로 있다.


 그래서, 그는 프로듀서로서 호시이 미키가 이부키 츠바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직 막은 내리지 않았어.”


 그러나 최후의 앙코르가 없다면 막은 내려갈 것이다.


 이부키 츠바사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복잡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평소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이부키 츠바사의 얼굴이 아니라, 틀림없는 사춘기 소녀의 얼굴이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12.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비록 관객은 퇴장했고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지만, 이부키 츠바사는 그녀가 가장 빛날 수 있는 이곳에 있다.


 무대 의상은 갈아입지 않았었다. 아마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호시이 미키의 말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카스가 미라이처럼 열정적인 무대나 모가미 시즈카같이 절도있는 무대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호시이 미키와 같이 완벽이라 부를만한 무대를 바란 것 또한 아니었다.


 솔직한 무대, 가장 이부키 츠바사다운 무대를,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는 원했던 것이다.


 막을 내린 야외극장의 무대 위에서, 이부키 츠바사는 고개를 들어 객석을 보았다.


 “......”


 불 꺼진 입구에서, 그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없어야만 했지만, 호시이 미키나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시어터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그는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올 이유가 없는데, 츠바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프로듀서다. 텅 빈 좌석들의 정 가운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가장 무대가 잘 보이는 위치에 그는 앉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다. 프로듀서만이 보아주었으면 한다. 오롯이 그만을 위한 앙코르다.


 그런 이부키 츠바사의 심정을, 프로듀서는 그녀의 눈빛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었다.


 정규 공연이 끝나고, 엔딩 이전의 솔로 앙코르를 미키가 담당하게 되고, 츠바사가 잠시 무대를 내려갈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분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울먹이는 얼굴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언가 스스로 결론을 낸 듯, 결심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둔한 남자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아이돌들과 선을 긋지만, 밀어내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성과 논리만큼이나 감정이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부키 츠바사는 직설적인 아이다. 틀림없이 직구로 정면승부를 걸어오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프로듀서의 권한으로 무대를 해체하는 것을 아주 조금 뒤로 미루어 두었을 뿐이다.


 아직 어둑어둑한 무대 위이지만 음향도, 조명도, 퍼포먼스를 위한 장비들도, 드라이아이스도, 난방장치도, 다른 스태프들이나 아이돌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오로지 프로듀서와 무대,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이부키 츠바사라는 이름의 아이돌뿐.


 그녀라면 분명히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츠바사의 무대를 감상할 것이다.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받아줄 것이다.


 이부키 츠바사를 위해서, 그녀의 마음을 위해서.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츠바사는 마이크를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입을 떼기 힘들었다. 그 순간, 무대 위에 조명이 켜졌다.


 눈이 동그래졌다. 프로듀서를 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입고 있지 않았던 코트다. 언제 챙겨왔는지 츠바사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녀가 골라준 코트였다. 이를 알아차린 순간,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억해 주었구나, 생각해 주었구나, 애초에 오늘 라이브를 준비하면서 프로듀서는 이부키 츠바사의 무대를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부키 츠바사는 겉옷을 벗어 던졌다. 프로듀서의 눈에 걱정이 깃드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아무래도 좋다. 빛나는 조명 위에 서 있는 아이돌이라면, 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One, Two, I love U CHU, CHU]


 그런 츠바사의 기분에 맞춰주듯, 메인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프로듀서가 부탁해 둔 곡이다. 이부키 츠바사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다.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즐겁게, 신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무대를 보아주었으면, 그리고 귀엽다고, 아름답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Lesson!! I need U baby]


 그에게 아이돌이 필요하듯, 이부키 츠바사 역시 그를 강하게 원하기 때문이다.


 저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들어보라, 이부키 츠바사가 최후의 앙코르를 노래한다면 반드시 이 노래일거라 생각했던 것이리라. 마음이 통했다. 조금 전까지의 가라앉았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날아갈 것만 같이 기쁜 마음이었다.


 목소리에 깃털이 달렸다면, 분명 그의 주변에서 솜털처럼 맴돌고 있으리라.


 이부키 츠바사는, 그녀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I meet U, 사랑의 Yes/No]

 시작은 조금 억지였을지도 몰라요!


 [주도권은 서로 절반씩]

 지기 싫어서 달라붙기도 했고요.


 [봐, 손에 닿은 곳부터 성장하고 있어]

 하지만 프로듀서 씨의 옆에서,


 [두근거리고픈ㅡ 여자아이잖아]

 심장의 고동이 한 걸음, 나아가게 했어요.

 


 한 소절 한 소절 나아갈 때마다 콩콩 뛰던 심장이 두근거림으로 변해간다. 빛나는 자신을 상상하며 불렀던 것보다, 프로듀서를 생각하며 부르니 뭔가 엄청 좋은 느낌이다.


 이부키 츠바사의 대표곡으로서 수없이 불러왔던 노래이건만, 지금과 같은 기분은 처음이다.


 사랑의 레슨 초급편.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딱 알맞은 레슨이 아닌가,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은 틀림없는 행복의 미소다.


 조금 더 자신을 봐주길 바란다. 조금 더 그를 보길 원한다.


 그저, 두 명이서 마주보며 알콩달콩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눈 마주칠 확률이 엄청나]

 항상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연해요.


 [의식해줬으면 하는 건 이미 들켰어]

 프로듀서 씨도 눈치채셨을 거예요.


 [무언의 신호로는 복잡하니까]

 그래도 역시, 직접 듣고 싶어,


 [해답을 서로 맞춰봐야겠지]

 반드시 말하게 만들테니까요!


 [좋아하는 걸 10개 말해줄래?]

 조금 더, 프로듀서 씨를 알려줄래요?


 [자기 자신의 재발견, 네가 말하면ㅡ 그건]

 아무것도 아닌 듯 말씀하셔도,


 [챠밍-포인트라구!]

 저는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I meet U, 사랑의 Yes/No]

 아이돌과 프로듀서로 만났지만,


 [애절함만으로는 재미없잖아]

 슬픈 이야기는 싫어하니까,


 [들뜬 마음이 시끌벅적해]

 사랑하는 기분을 노래할 거예요.


 [나뿐인 걸까? 아니겠지?]

 그런 마음이 나뿐만, 은 아니겠지요?



 흘러넘치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하면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보다,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한다.


 간주가 흐르는 그 짧은 시간에 네 글자,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한쪽 팔을 높게 들어 L,


 양팔을 머리 위로 동그랗게 말아올려 O,


 잠시 내린 두 팔을 뻗어 올려 재빨리 V,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점프하며 E,


 착지하자마자 그에게 달려가 안길 기세로 팔을 흔들었다.


 그제야 프로듀서의 얼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실소나 동정심에 가득 찬 웃음이 아닌, 자상함과 기대 가득한 미소였다.


 봐 주지 않는다는 것은 괜한 걱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주하지 않았던 것은 이부키 츠바사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I meet U, 사랑의 Yes/No]

 아마 그녀가 연심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은 이 순간일 것이다.


 [주도권은 서로 절반씩]

 이전과는 조금 달라질 줄다리기를 생각하자,


 [봐, 손에 닿은 곳부터 성장하고 있어]

 두근거리던 심장이 쿵쿵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근거림은ㅡ 너랑 함께, 잖아?]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애매한 건 NO랑 똑같아]

 그렇다면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평균점을 가뿐히 넘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둘이서 특별한 관계가 되어보자]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약속이야ㅡ!]

 그에게 하는 말이며, 츠바사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약속의 KISS]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것처럼,


 [초급편 끝, CHU!]

 새로운 시작을, 소녀는 선언했다.



13.


 시끌벅적하고 바쁜 일상으로의 귀환이었다.


 대형 라이브건, 미니 라이브건, 하다못해 가끔 이벤트 차원에서 진행하는 게릴라 라이브라 할지라도 프로덕션이 돌아가려면 여러 가지 서류 작업은 필수다.


 특히나 라이브가 끝난 다음이 더욱 바쁘다. 프로듀서 한 명과 사무원 두 명이서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처리하기에는 제법 빡빡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바쁜 일상은 765 프로덕션의 유일무이한 공식 프로듀서에겐 의무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일상을 잠시 뒤로 미루어 둘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건 중의 하나를 그는 한숨과 함께 받아들였다.


 병가.


 엄밀하게 말해서 주말이기 때문에 그냥 출근을 안 하면 되는 문제긴 하지만, 사무업무 특성상 주말이라고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병가라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핑계를 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핑계는 아니다.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는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의 의자에 앉아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 씨도 사람이네요.”


 “누구 덕분에 말이지.”


 사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웃음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접촉도 없었을 터다. 그런데 정말로 공기감염이라도 되어버렸는지, 츠바사의 감기가 이쪽으로 옮겨온 모양이다. 증상도 똑같으니 확신할 수 있다.


 계획했었던 데이트는 당연히 취소되었지만, 오히려 츠바사는 이를 기회로 대담한 요구를 해 왔다.


 간병 해 드릴게요! 라는 말에 그는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두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며 안돼에~? 라고 묻는 츠바사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올스타즈에 이어서 시어터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의 자택을 알게 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텐쿠바시 토모카도, 이부키 츠바사도,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두 명 다 아직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의자에 앉아 털실과 바늘로 스웨터를 뜨고 있는 츠바사에게 그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감기 옮아.”


 “나한테 옮은 거잖아요? 면역 있어서 괜찮아~.”


 “......”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흐흥,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츠바사는 연두색 숄을 고쳐 두르고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보아하니 거의 다 완성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연노랑 셔츠에 풀색 스웨터, 그 위에 연두색 숄. 굉장히 어른스럽고 단정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 번도 츠바사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츠바사는 해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한순간의 우연일지도 모르고, 하룻밤의 변덕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예쁘네.”


 그래서 그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될 속내를 말해버리고야 만 것이다. 넘지 않으려 애썼던 선을 조금, 정말로 조금이지만 밟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곁눈질로 힐끗 보며 츠바사는 싱긋,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평소처럼 달려들지도 않고, 기뻐하면서 방방 뛰지도 않는다. 그저 고혹적인 눈웃음과 함께 입꼬리만 살그머니 올릴 뿐이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어른이에요, 라고 주장하는 듯,


 “칭찬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차분하게, 기품있게, 그러면서도 이부키 츠바사라는 특색은 남겨둔 채로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상하리만치 포근하게 안심이 되는 목소리다.


 “아, 맞다!”


 그러다 갑자기 뜨개질하던 베이지색 실타래를 내려놓고,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간장의 짭짜름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그는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부키 츠바사는 요리를 할 줄 알던가, 작은 의문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그녀가 가지고 온 야채 죽을 보자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가 버렸다.


 “어때요, 프로듀서 씨.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생각보다 굉장히 먹을 만 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이지. 맛있어 보이는걸?”


 “히비키 씨한테 배웠거든요~.”


 그런 거라면 맛은 충분히 보장할 수 있으리라. 믿음과 신뢰를 벗삼아 그는 한 숟가락 죽을 떠먹으려는 찰나.


 “자, 프로듀서 씨. 아~앙!”


 “......”


 히죽이죽 웃는 츠바사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정도는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건방진 꼬맹이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여간,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으려 했지만,


 “으-응, 안돼에~?”


 “......”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츠바사에게 안 돼, 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뜻대로 입을 살짝 벌려 한 숟가락 받아먹었다.


 따스한 온기가 입안에 퍼졌고, 어때요? 라고 묻는 츠바사에게 그는 코를 훌쩍이며 가까스로 말했다.


 “다음부턴 고기도 넣는 게 어떨까.”


 “에ㅡ, 프로듀서 씨 둔탱이!”


 “잠깐, 야, 아앗, 뜨거워!”


 볼을 부풀리며 뜨거운 죽을 그의 입으로 푹푹 퍼넣는다. 결국 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츠바사가 쥔 숟가락을 가까스로 빼앗아 자신이 스스로 먹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츠바사와 눈이 마주쳤다.


 “프로듀서 씨.”


 배시시 웃는 모습이 천사와도 같았다. 츠바사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지만, 그런 프로듀서에게 그녀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ㅡ빨리 나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츠바사의 얼굴은, 토마토보다도 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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