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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투란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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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4, 2021 16:41에 작성됨.

어제랑 비슷한 날씨, 어제와 비슷한 업무, 어제와 비슷한 오늘. 평소와 같은 하루를 다 보내고, 깜깜한 밤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이 어둑어둑한 공기가 자리할 때쯤 그녀가 물었다.


"요즘은 그림은 안 그리시네요?"


특기할만큼 이상한 질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잘 맞아떨이지는 질문도 아니었다. 호숫가에 갑자기 날아든 조약돌같이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질문. 그 파동에 유려하게 흐르던 서류와 펜의 놀림이 칼로 잘린듯 뚝하고 멈춰섰고, 향할 수 있는 모든 시선이 그 질문에 쏠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평소같았으면 능청스럽게 넘겼을 것이다. 대답하기 싫은 일에 대답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정도로 모호하게 넘겨버리는 것은 케이트의 프로듀서를 이르는 가장 단적인 특징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갑작스런 파동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케이트에게 더 이상 정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한 답이 날아간다. 날아가 꽂힌다.


"당신이 저의 담당 프로듀서인 것처럼, 저도 프로듀서 씨의 담당 아이돌이니까요."


"...그렇군요."


"당신이 저를 아는 만큼 저도 당신을 알고 있답니다?"


정직한 답에 돌아온 정직한 대답. 그 대답 또한 날아와 가슴 언저리에 꽂힌다. 케이트의 프로듀서란 인간은 남들이 버틀러라고 놀릴지언정 자신도 아이돌의 이미지에 걸맞는 격식으로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만큼 자신의 일로 아이돌의 일을 흐트려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고, 그렇기에 케이트의 질문은 난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모자란 인간은 이내 어떻게 알았냐는 주제로는 이야기해봤자 별 쓸모가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이미 들켰다고 실토한 상황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침착하자,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케이트의 프로듀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케이트는 346 프로덕션에서 굉장히 얌전하고 상식적인 축에 드는 편이다. 그녀의 프로듀서 또한, 그 아이돌을 모시는 버틀러답게 굉장히 상식적인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그런 책략만을 쥐어짜내고 있는 것이겠지. 


"음, 요즘엔 적당한 모델이 없어서요. 별로 그려보고 싶은 걸 못 찾았습니다."


"Oh, really?"


"케이트 경 같은 분이랑 이렇게 가까이 지내니까, 다른 게 눈에 잘 안 들어오긴 하죠."


"Hmm~?"


칭찬을 얹어서 말을 마무리했지만, 그 말을 듣는 케이트는 뭔가 속내가 더 남아 있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칭찬같은 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을 흐리게 만들 눈가리개를 팽개치고 있었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프로듀서는 익숙한 긴장감을 느꼈다.그녀는 턱을 짚고 천천히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여가면서 훝어보고 있었다. 


"then, 이번에는 제가 producer의 model을 casting해보면 어떨까요?"


"예? 아니, 그보다..."


"그 동안 많은 부분에서 도움받았으니까요. Is it okay?"


"어, 그게 제 일인데요. 월급도 받고 있고요."


"Well...I also just, want to understand you. 저도 producer의 일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좀 더 낫지않을까요? 같이 일하는 사이잖아요, 우리. 이해하는 차원에서라도 한 번 해주고 싶네요. 물론, 대충하진 않을게요. Obviously, producer의 안목에 어울리는 model일 테니까."


책략은 파훼됐고, 이제는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야 할 때.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케이트가 밀어붙이는 상황은 거부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녀가 이러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방해해선 안 된다는 직감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하시죠."


뒷목이 빳빳히 당겨오는 이 감각은 어째서 프로듀서의 등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 뒤, 케이트의 연락을 받은 프로듀서가 도착한 곳은 한 평범한 공간이었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는 화실을 생각했건만, 화실이라기엔 어울리지 않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섬세한 모델인가. 그녀에게서 이미 들은 설명은 궁금증을 키우기만 할 뿐이었다.


"케이트 경, 계십니까?"


"Come in~"


용기를 내서 파문을 던져보자, 유연하게 손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화 속에 빠진 소녀라도 된 것처럼, 헤메이듯 소리를 따라가자 잘린 나무의 숲 속에서 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형의 미녀였다. 프로듀서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의 자리인 것처럼 보이는 곳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모델을 가리고 있던 천이 치워지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반을 가린 몸의 실루엣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직감으로 눈치챈 사실에 더해서 부정확한 실루엣은 시선을 홀려 버렸다. 실루엣에 끌려 흐르는 이미지에 아찔해 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프로듀서는 케이트를 불렀다.


"케이트 경...?"


"어서오세요, 오는 데 어땠나요?"


"여긴..."


"재밌었나요? 재밌었으면 좋겠는데요."


"평소보단 자극적이네요. 그런데....모델은요?"


"제가 있는데 왜 다른 model을 찾죠?"


부정확한 그림자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프로듀서는 그 순간만은 피하려고 했건만 이미 그림자는 돌아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신처럼 차려 입은 케이트의 모습. 금방이라도 르네상스의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모습. 그랬다. 그림자는 조금씩 케이트가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 케이트 경...?"


"참, 옷을 입고 있었죠. 벗을게요?"


"케, 케이트-"


"후훗."


뭇 사람을 흘리는 케이트의 미소가 완전히 흘러가기 전에, 그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옷의 매듭을 풀어버렸다. 속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채였다. 그야말로 태고의 인간의 모습. 그 빛나는 모습에 프로듀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케이트는 그대로 있는 채였다.


"어, 어째서... 아, 아니. 일단 옷부터-"


기절하기 전에 정신을 잡고 뒤돌아서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했지만, 이미 정신을 차리는 것까지가 뇌의 한계다. 뭐가 됐든 불가능.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건가. 아니 뭐가 되든간에 이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왜 옷을 찾나요?"


"그건....."


프로듀서가 단어를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사이에 이미 말할 타이밍은 잘려버렸다.


"Producer는 언제나 제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줬잖아요? 그러니까, Producer의 model로 제가 나서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을테지요?"


"무슨..."


"설마, Producer는 제가 dress같은 걸 입어야만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이었나요? 저는,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나를 순수하게 봐준 Producer에게 감동했었는데....."


"케, 케이트 경...?"


"후후, 왜 그런 눈으로 보죠? 자, 어서 painting을 시작하도록 해요. 좋은 model이 있잖아요?"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쳐서도 안 된다. 프로듀서가 여기서 나가버린다면 그녀를 챙겨줄 사람은 없게 된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아 붓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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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마에스트로 돛새치가 작성하고 제가 수정한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후의 글이 올라올 예정이니 조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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