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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 「생일, 이라고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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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5, 2021 00:04에 작성됨.

"만약에 말야, 누가 뭘 준다고 하면 치하야쨩은 어느 걸 받고 싶어?"

"응?"

"그러니까.....선물 같은 거? "

".....손목시계가 좋으려나."


돌연 날아들어온 질문에 치하야는 별 생각 없이 대답하다,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저 지나가는 대화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치하야는 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2월 18일. 딱히 오늘이 무슨 날이라는 건 아닐텐데. 치하야는 다음주를 훑었다. 그러다 25라는 숫자에 눈이 멈췄다. 


25일이라고 하면. 치하야는 그리 좋지 못한 기분으로 방금 전 자기에게 질문을 던진 이, 하루카를 슬쩍 곁눈질 했다. 하루카는 어느덧 다른 애들한테 가서 새로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축하해주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은 그런 걸 받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치하야는 그 날 정말 최소한의 스케줄만을 잡아두기로 했다.


.....


"프로듀서, 실은 다음주 일정 말인데요. 조금 조정을 했으면 해서요."


"그래?" 

"네."


다음날이었다. 치하야는 바로 프로듀서를 찾아가 저런 말을 했다. 프로듀서는 다이어리를 펼쳐 2월 달력을 봤다. 치하야는 펼쳐진 달력의 25일 날짜를 손 끝으로 집으며 말했다. 


"이 날.....그러니까 다음주 목요일을 오프로 해줄 수는 없을까요?" 


개인 사정이 있는 관계로. 완전 100% 거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72%는 거짓인 말을 치하야가 입에 담았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

"그렇습니까."


프로듀서가 고개를 저었다. 치하야는 25일날 하기로 한 일들을 떠올렸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바로 사무소 근처 댄스 스쿨에서 레슨을 받기로 했다. 하루카, 유키호와 같이. 


.....앗. 


치하야는 뜨끔했다. 요주의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카라는 이름의. 이대로 가단 아침부터 축하받아버려.....! 굳이 피할 필요 없는데도, 치하야는 긴장해버렸다. 진정해. 우선 침착하게. 치하야는 오후 일정을 마저 떠올렸다. 오후에는 레코딩 작업이 있었다. 다행히 이 때는 혼자. 아니, 엄밀히 따지면.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눈치를 살폈다. 프로듀서는 25일이 무슨 날인지 잘 모르는 듯 보였다. 치하야는 안도감과 동시에 왜인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프로듀서, 그러면 오전 레슨이라도 다른 날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음. 그정도라면야."


치하야가 동요를 감추며 한 요청에, 프로듀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슥슥슥하는 볼펜 소리와 함께 글자에 먹칠이 되고, 다른 칸에 글자가 새로이 옮겨지는 것을 치하야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날에는 오후 레코딩만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네. 치하야는 속으로 다짐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25일 전날 저녁. 주어진 일정을 모두 마친 치하야는 하루카랑 같이 퇴근하며 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저기, 치하야쨩."

"응?"

"혹시 내일 말야....."


내일.


그 말에 치하야는 잊고 있던 부담감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것만 같아, 바로 하루카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지고 말았다.


"엣, 치, 치하야쨩-"

"미, 미안. 먼저 가볼게.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하루카가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치하야는 순 거짓말을 토해내고는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내가 무슨 짓을.


치하야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치하야는 우선 미안하다고 메일을 보냈다. 곧바로 돌아오는, '괜찮아'라는 답장.


.....정말로 괜찮은 걸까? 하루카의 본심은 메세지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하루카가 뭐 때문에 말을 걸었는지 물어볼까. 치하야는 순간 그런 생각도 했지만, 결국 더 캐물으려는 걸 관두기로 했다. 그러다 괜히 내일, 25일에 특별한 의미가 생겨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날.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보내면 돼. 흘러가게 하면 돼.


내 생일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축복받아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치하야는 그렇게 자기완결을 내버리고는 시계를 봤다. 벌써 이런 시간이라니. 치하야는 혀를 차며 짐을 내려놓고, 외투를 털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는 것보다도 먼저 낮은 책꽃이에서 교과서와 공책을 꺼냈다. 학교 숙제 제출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모두 마친 뒤. 치하야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자는 동안에 꿈을 꾸었다. 조금 멀리서 다른 누군가를 지켜보는 꿈이었다.


그 누군가는 예쁘게 꾸며진 선물상자를 두 손으로 모아들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다소 요란한 색상의 고깔모자를 쓴 채,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짝짝짝하는 박수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치하야는 그늘진 눈으로 계속 그쪽을 응시했다. 


그 누군가는 자기보다 한참 작고, 어렸다. 


그 누군가의 머리는 이제 어깨 정도까지 내려오는 정도인, 살짝 푸른 빛이 감도는 단정한 흑발이었다. 


그 누군가는 밝게 웃고 있었다. 


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자기보다 조금 더 키가 작은 남자아이를 곁에 두고서. 


.....그 누군가가 바로 몇 년 전의 자신이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벌써 눈이 뜨여있었다. 치하야는 반쯤 멍하니 있다가 힘없이 머리맡에 둔 탁상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알람으로 정해둔 것보다도 한참 이른 시간대. 치하야는 일단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원래부터 밤잠이 없는 타입인데, 그런 꿈을 꾼 이상 다시 잠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치하야는 언제나처럼- 아니, 언제나보다는 조금 이른 하루를 삐걱거리듯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많이 주어진 듯한 시간. 물론,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에 머리는 평소보다는 그리 명쾌하지는 않았다. 치하야는 작게 하품을 하며 미리 아침 운동을 할까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어제 했던 숙제 점검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게. 치하야는 아직 잠옷차림인 채로, 어제 책상에 올려두었던 노트를 뒤적였다. 잠이 부족한 머리가 쉽게 그 내용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몇 번 노트를 파라락 펼쳐보던 치하야는 곧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부터 판단 미스라니. 


치하야는 어둡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몸단장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지금 흐트러진 차림새로는 마음가짐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씻고, 양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고.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이던 치하야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역시 몸을 움직여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이른 아침 운동을 나가기로 했다.


.....


운동을 끝낸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치하야는, 처음보다는 멀끔해진 정신으로 숙제 점검을 끝냈다. 아직 기한이 남긴 해도 이대로 제출해도 될 것 같았다. 잘 됐네.마침 레슨을 옮겨서 오전 시간이 비었으니까, 이참에 학교에 가서 제출해버리는 게 어떨까. 간 김에 오전 수업도 받아두는 편이- 아니, 오후를 생각하면 수업까지 받는 건 시간에 쫒길 것 같네. 서두르지 말자. 


선택을 마친 치하야는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했다. 그리고는 트레이닝 복 대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얀 와이셔츠와 짙은 암녹색 빛깔의 조끼와 체크무늬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역시 같은 배색의 블레이저 자켓. 고등학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조합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치하야는 현관에 놓인 로퍼에 발을 밀어넣고는, 몸을 숙여 살짝 구겨진 뒷꿈치를 손가락 끝으로 쭉 펴내며 똑바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신발장 위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결국, 앞으로 지나칠 수많은 나날에 불과한 것. 


유리에 냉담한 시선이 한 차례 반사되어왔다. 자신을 보는 것인데도 마치 남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치하야는 무정히 등을 돌리고는, 현관 문 손잡이를 힘주어 비틀어 열었다. 철컥하는 소리가 한 번. 그리고 문이 열린 뒤, 쿵! 하는 소리가 한 번. 마지막으로 또 철컥하는 소리가 남겨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공기 중으로 산산히 흩어졌다.


..... 


"어라? 키사라기 양,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지요?"

"숙제, 미리 제출하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어디보자....마침 곧 있으면 키사라기 양 클래스네 수업인데.  이왕 온 김에 듣고 가는 편이-" 

"죄송해요. 그럴 시간은 없어서."


학교에 도착한 치하야는 바로 교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숙제를 내준 이인, 수학 담당 교사 앞에 섰다. 교사가 건넨 말에 치하야는 어디까지나 거짓은 아닌 말로 답했다. 흐음. 교사는 눈 앞에 내밀어진 심플한 노트를 받아들더니, 한 차례 펼쳐서 보았다. 정갈한 글씨. 깔끔하게 정리된 그래프와 수식. 일목요연한 해답 도출 과정. 딱 봐도 학력이 우수한 학생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트에 머물고있던 안경 너머의 시선이 다시 치하야에게로 돌아왔다. 치하야는 묵묵히 그 앞에 서 있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다는 듯이.


"그쪽 활동 때문에 많이 힘들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좀 더 학교에 얼굴을 비출 수 있었으면 하네요."


이만 가봐도 된다는 듯, 교사는 의자에 앉은 채로 치하야에게서 등을 돌렸다. 치하야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에서 나왔다. 수업 시간인 지금,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자기 말고는 없었다. 한산한 복도를 지나며 치하야는 다음 일정을 머리 속에서 그렸다. 이제 오후 일정만 남았네. 슬슬 사무소로 출근할까? 이대로 가는 것보다는, 역시 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출입구에서 실내화를 갈아신는 와중에, 치하야는 하나 깨달았다.


이대로 765 사무소로 갔다간, 자신처럼 일을 기다리는 동료들과 마주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치하야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지만, 가끔은 그게 탈일지도 모르는 동료들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이것봐, 벌써부터 이렇게 축하인사가. 치하야는 잠시 무음으로 해두었던 투박한 휴대폰을 가방에서 꺼내 살폈다. 아직 아침인데도 하루카를 비롯한 다른 모두가 보낸 축하메세지가 그 곳에 담겨있었다. 코토리와 타카기 사장의 것마저도. 어째서인지 프로듀서의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튼간에, 이대로 얼굴을 비췄다간 아웃이야. 치하야는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듯한 부담감에 속이 불편해졌다. 그들이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축하가 싫다는 것도. 그렇지만 받을 수 없었다. 치하야에게는 과분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그들에게 그만큼 돌려줄 수 없었다. 


차라리 조금 전 만났던 교사처럼 대해주면 좋을 텐데. 끝에 약간 껄끄러운 소리를 했어도, 순순히 자신을 보내줬으니까. 그와 나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까. 그들도- 765 프로덕션 사람들도 그렇게 해준다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교문을 나온 치하야는 한 차례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학교 건물 전경이 보였다. 


여기에 비하면 765 사무소는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 그렇지만, 자신은 그 안에 몸을 담고 있다. 주위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카기 사장. 오토나시 씨. 아미, 마미. 미나세 씨. 미키. 가나하 씨. 타카츠키 씨. 시죠 씨. 리츠코. 하기와라 씨. 마코토. 아즈사 씨. 하루카. 그리고- 765 프로덕션 인원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보던 치하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집에서 대기하다 바로 레코딩 현장으로 직행하기로 하자. 프로듀서한테는 메일을 보내면 되겠지. 교문 앞을 지나치면서 치하야는 휴대폰을 조작해 메일을 보냈다. 몇 분 후 답장이 돌아왔다. '그래. 거기서 보자.' 라는.


.....이걸로 된 거야. 거리를 걷던 치하야는 역에 도착해 전철에 탔다. 출근 시간대 이후라서 그런지 객실은 많이 비어있는 편이었다. 어쩐지 붕 뜬 기분인 치하야는 일 쪽으로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앞으로 할 일은 레코딩. 사무소에서 전철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외진 스튜디오. 거기서 케이블 드라마 주제곡 녹음을 할 예정이다. 거기에 필요한 악보는- 


그 때였다. 차게 식은 듯 보였던 두 갈색 눈에 당혹스러워하는 빛깔이 들었다. 치하야는 황급히 옆에 두었던 가방을 열어 뒤적거렸다. 숙제를 챙겨가는 용도로 가져온 것이기에 당연 그 안에 악보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다는 걸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치하야는 기억을 거슬러가며 악보의 행방을 찾았다.


.....


...


..


악보를 그만 사무소에 두고 와버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나온 결과에 치하야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스튜디오에서 다시 달라고 하면 받을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치하야 나름대로 노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적어둔 메모가 없었다. 그리고 악보를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스텝들에게 불성실하게 보일 소지가 있었다. 어쩌지. 프로듀서한테 가져다 달라고 할까. 다른 아이돌들과의 혹시 모를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부탁하기에는 좀 껄끄러웠다. 조금 전에 메일을 보냈는데 또? 거기다 원래는 자신이 제대로 챙겼어야 하는 건데. 하아, 정말 어쩌면 좋을까.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치하야는 갈등했다. 


..... 


그리하여, 결국에는. 치하야는 집 대신 타루키정 빌딩 앞에 서고 말았다. 사무소로 올라가 누가 오기 전에 잽싸게 악보를 챙기고 도망치기로 한 것이다. 자기 것을 자기가 챙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도둑질하는 듯한 느낌에 치하야는 마음이 켕겼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치하야는 결심했다는 듯 출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가, 꾹 닫혀있는 유리문을 밀어젖혔다. 고장난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철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최대한 조용히 앞으로 밀어냈다. 약간 벌려진 틈새. 치하야는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응? 치하야쨩?"


사무소에는 사무원인 코토리가 있어, 방문객을 알아채고 말을 건넸다. 


"두고온 게 있어서요."


치하야는 인사 대신 온 목적만을 입에 담고는 전방을 스캔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코토리 외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치하야는 탁자에 놓여있던 악보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하야쨩."

"네?" 


또 한 번 자길 부르는 소리에 치하야는 화들짝 놀라서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학교 들렀다 온 거야? 어쩐지 신선하네. 교복 입은 치하야쨩은."

"아, 네."


치하야는 확보에 성공한 악보의 귀퉁이를 괜히 매만지면서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코토리는 그런 치하야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다 화이트 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25일. 목요일. '치하야-레코딩'이라고 적혀있는 게 보였다. 코토리는 웃으면서 물었다.


"아침에 메일 읽어봈어?"


움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대답에 치하야는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음.....역시 직접 전하는 게 더 좋을까나. 생일 축하해, 치하야쨩."

".....감사합니다."


치하야는 인사치레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었다. 어라? 별로 기뻐보이지 않는 모습에 코토리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치하야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황급히 작별인사를 남겼다.


"저, 저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 덜컥! 하고 문이 기세 좋게 열렸다. 치하야는 기기긱하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딱딱한 동작으로 그곳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저 명랑한 인사의 주인공은 야요이였다. 


"타타타타카츠키, 씨."

"앗, 치하야 씨! 생일 축하드려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는 치하야를 발견한 야요이는 바로 축하인사를 건네었다.


"어, 어어.....응. 고마, 워."


치하야가 어색하게 답하자 야요이는 신기하다는 듯 치하야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자꾸만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 타카츠키 씨.....?"

"아, 죄송해요. 이 시간에 치하야 씨가 올 줄은 몰라서.....참, 맞다! 선물!"


치하야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야요이는 사죄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는 메고 온 가방을 황급히 뒤지더니, 작은 꾸러미를 꺼내 슥 내밀었다. 


"에헤헤, 혹시나 해서 챙겨오길 잘했네요! 저어, 이거라도....." 


치하야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투명한 포장봉투에 작은 쪽지와 간식거리가 들어있는 게 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떠맡겨진 선물.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축하인사에. 선물에. 피할 길 없는 직격을 맞아버린 상황이었다. 치하야는 한참 물끄러미 손 안에 담긴 선물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건, 그저 부채감이나 받아서는 안될 것을 받았다는 죄악감에 짓눌려 가라앉아버리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벼, 별로일까요.....우우, 어쩌지. 역시 생일 선물이니까 이런 것보다는 좀 더 빠방-한게....."


표정을 어둡게하는 야요이에게 치하야가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이걸로 충분해. 으으응. 그것도 아니겠네.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를 정도야."


치하야는 두 손 안에 폭 담기는 작은 선물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이 작은 선물이, 불안감에 멀리 달아나려는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주고 있었다. 무거움과 동시에 느껴지는 따스함. 치하야가 다시 야요이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근처에 있던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닫힌 문 너머 계단실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의 발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라.....치하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보내려고 했지만, 곧 어떤 물체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 물체는 누군가가 치하야에게로 내민 머그컵이었고, 컵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음. 서서히 퍼져오는 씁쓸하면서도 그윽한 향기. 컵을 내민 그 누군가, 코토리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어쩐지 치하야쨩을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 같네."

"설마 서로 짜기라도 한 건 아니겠죠?"

"후후,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 걸."


반신반의하는 질문에 코토리는 작은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떠나갔다. 치하야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든 채 원래 확인하고자 했던 화이트보드를 응시했다. 확실히, 이런 일정이라면 사무소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겠는데.....그렇다면 이건 우연의 산물, 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신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에, 에에엣!? 치, 치하야쨩!?"


치하야는 자기를 보자마자 두 눈이 동그랗게 된 하루카를 보고는 쓰게 웃었다. 이미 메일을 보냈으면서도 굳이 또 크게 '치하야! 생일 축하해!' 라고 말해주는 마코토에게, 치하야는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계속 모이는 크고 작은 선물에 가방에 다 들어갈 수 있을까, 같은 조금은 행복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이라는 날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일지도 모르지. 


후후, 너무 지나친 생각이려나. 불필요했던 긴장이 해소되어 치하야는 조금 들떴다가도, 곧 오후에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왕 이렇게 될 거였다면, 프로듀서한테 그런 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계속되는 판단 미스에 치하야가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슬슬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사 인사를 빼놓을 생각은 없었다. 


"저기, 모두.....제 생일을 축하해줘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아쉽지만 여기 없는 사람들도 전부 제 생일을 기뻐해준 거네요. 그래야하는 이유는 없는데도. 저, 실은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네요. 이렇게 커다란 것을 받아버린 만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답례해야할지 벌써부터 고민이-"

"됐어."


이어지려던 말을, 그 자리에 있던 이오리가 냅다 끊어버렸다. 


"미나세 씨?"

"그런 걱정은 내일이 되고나서야 해."


날카로운 말소리의 이면에는, 그렇지 않은 게 담겨있었다. 치하야는 풋하고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네.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두지 않으면. 선물 고마웠어. 잘 쓸게."


치하야는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짐을 들고서 사무소를 나갔다.


.....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저녁. 레코딩을 무사히 마친 치하야는 녹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로듀서와 합류했다.


"수고했어."


프로듀서는 평소처럼 치하야를 대하는가 싶더니, 곧 짠하고 뒤에 감추고 있던 선물 상자 2개를 슥 꺼내보였다. 앗. 치하야가 가만 서 있자 프로듀서는 멋쩍은 둣 웃었다.


"이정도면 서프라이즈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안 놀라네."


치하야는 쿡쿡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도 그럴게, 벌써 잔뜩 축하받아버렸는 걸요. 다른 동료들에게."

"아, 그랬어? 후우, 다행이네."

"다행이요?"

"응."


치하야가 선물을 받아들며 묻자 프로듀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오늘 널 직접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면 어쩌나 싶었거든."


그래도, 어떻게든 잘 맞아떨어진 것 같네. 프로듀서는 안경 너머로 치하야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응? 그거야 당연하지. 담당 아이돌의 생일을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너스레를 떠는 프로듀서에게, 치하야는 조금 투정이 깃든 목소리로 답했다.


"어쩐지 프로듀서한테서는 메일이 안 와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하하, 만전을 기하느라 말이지. 나까지 피해버리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피하다뇨....아, 그러고보면 이거. 치하야가 그제서야 선물을 2개 받았다는 걸 눈치챘다.


"아, 그거. 실은 말이지, 어제 하루카한테 메일이 왔거든. 원래라면 내일 같이 레슨받을 때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으니 프로듀서 씨에게 맡겨두고 싶다고 말야."


그 말에 치하야는 사무소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자기를 보고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넘어져버린 하루카. 곧 다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가 싶더니, 가방을 열어 포장된 작은 꾸러미를 꺼내들고는그대로 내게 돌격을.....어라. 치하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루카는 분명, 내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런데도? 


"하루카도 참. 미리 2개를 준비했다니까. 얼만큼 축하해주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프로듀서는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며 핫핫 웃었다.  그 말에 치하야는 엄청난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다른 모두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더 하루카에게는. 


"면목 없어졌네요. 이렇게나 열심히 준비해줬는데. 저는 그저, 피할 생각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뭐,뭐어.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기운 내."


다음에는 안 그러면 되잖아. 프로듀서가 의기소침해진 치하야의 어깨를 턱턱 두드리자, 치하야는 조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생일이라는 건 소중한 날이라고. 케이크를 합법적으로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하지.....아, 그렇지. 이왕 말 나온 김에." 

"네?"

"괜찮다면 돌아가는 길에 케이크라도 하나 사갈까? 근사한 파티는 무리겠지만, 잠깐 기분을 내는 것 정도야." 


어때? 프로듀서의 권유에 치하야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잔잔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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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도망치는 치하야쨩과 쫒아가는 하루카를 위시로 한 765 프로덕션 멤버들로 우당탕하고 쿵탕하고 개그적인 걸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하여튼 치하야쨩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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