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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에필로그 3, 모가미 시즈카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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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5, 2021 13:03에 작성됨.

-에필로그 3-

모가미 시즈카의 경우


[도쿄 스이게츠 학원 중등부 2학년 B반 ------ 모가미 시즈카]


“모가미~! 집에 안 가?”

“으, 응. 가야지.”


  그제야 나는 주변 아이들이 하나 둘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늘어났다. 전에는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종례시간 까지도 선생님의 말씀을 최대한 집중해서 들었는데, 지금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금세 멍해져서 시간이 훌쩍 흘러가있고는 한다. 지난번에는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기억에 없는 수업이 끝나 있던 적도 있었다.


“요즘 들어 멍하네, 모가미.”

“그래 보여?”

“응. 6교시 때도 그렇고.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흐음, 그래~?”


  나오미는 나를 보며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 안 그러던 내가 갑자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거나, 공상에 잠긴 모습을 보면 의심이 들만도 했다.

  고등부 밴드 선배들과 키사라기 선배의 곡을 만드는 작업을 한 이후로, 나는 점점 스스로의 진로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밴드부의 선배들은 내 꿈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되도록 도전해보기를 권유해주고 있었다. 여름에 무도관에서도 그랬고, 곡을 만드는 동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오늘은 꼭 담판을 지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정작 아버지의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이 미웠다.

  2학년도 이제 거의 끝나간다. 사실상 마지막 기회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지난여름에 어떻게든 활동을 시작하면 3학년 2학기 전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2학기는 이미 반 이상 지나갔고, 3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사실상 3학년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3학년이 되면 고교입시가 시작될 테니까 마지막 열차는 이미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결국 망설이기만 하다 그 열차를 놓쳤다.

  꿈이라면서. 동경해왔다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 동경하던 키사라기 선배의 곡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으니까. 지난 한 달간 마음껏 노래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충분할 거야...


“모가미, 괜찮아?”

“응? 왜 그래?”

“...눈물, 흘리고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 왼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슬프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ㄱ, 괜찮아!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아서.”

“어디 봐봐. 바람 불어줄게.”

“아니야, 이제 괜찮아. 고마워, 나오미.”


  나오미와 나는 계단을 쭉 내려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밖으로 나와 교문 쪽을 바라보자, 왠지 주변이 웅성거리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다들 뭔가 어수선한데. 무슨 일이지?”

“글쎄...”

“어라, 저거 혹시, 키사라기 치하야 아니야?!”

“풀 네임으로 부르는 거야? 키사라기 선배잖아.”

“그건 그렇고! 중등부에는 무슨 일이지? 누군가 찾아온 건가? 학교 잘 안 나온다고 고등부 선배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

“누군가 찾아 오셨을지도 모르겠네.”


  키사라기 선배는 고등부 블레이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네모난 가죽 가방을 앞쪽으로 들고 있었다. 지나가며 인사를 건네는 중등부 아이들을 환한 미소로 받아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키사라기 선배를 보면서 순수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나오미와 내가 교문을 지나갈 때쯤, 키사라기 선배는 왠지 반가운 표정을 하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미 씨!”

“모가미, 너 부르는 거 아니야?”

“뭐?!”

“모가미 씨!”


  키사라기 선배가 내 쪽으로 다가오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키사라기 선배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사라기 선배, 혹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응. 모가미 씨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

“아, 네...”


  나는 나오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나오미는 굉장히 어색한 연기톤으로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아차! 가는 길에 문구점을 들려야 하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모가미, 미안하지만 먼저 가 볼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키사라기 선배랑 편하게 이야기 나눠!”

“으, 응?”


  갑자기 무슨 문구점이야. 엄청 티 나잖아. 키사라기 선배는 뻣뻣하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나오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키사라기 선배,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는 건...”

“모가미 씨, 카마타 쪽으로 가지? 잠깐 동행해도 될까?”

“ㄴ, 네! 얼마든지요!”


  그렇게 키사라기 선배와 함께 하굣길에 오른 나는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여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키사라기 선배는 굉장히 편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Just be myself!!」, 모가미 씨가 녹음해줬다고 들었어. 맞지?”

“네! 그, 부족한 실력이라,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후후, 아니야. 굉장히 큰 도움이 됐어.”

“ㅈ, 정말요?!”

“응. 악보가 있다고 해도 누군가 멜로디를 불러주면 곡을 파악하기 훨씬 쉬우니까.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 정도면 충분히 재능이 있는 것 같아.”

“ㄱ, 감사합니다, 키사라기 선배!”


  선배는 내가 계속 얼어붙어 있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가미 씨, 나, 이름으로 불러줄래?”

“네?!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치하야라고 해도 돼. 성으로 불리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ㅊ, 치하야 선배...”

“선배라고 깍듯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쪽도 익숙하지 않거든.”

“그러면 치하야 씨...?”

“응. 그 쪽이 좋겠다.”

  치하야 씨는 그 후로도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다. 대부분은 음악에 관한 것들이었다. 조금 긴장이 풀린 나는 아는 선에서 최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카마타 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 치하야 씨가 물었다.


“저기, 모가미 씨. 아이돌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그건...”

“아, 밴드부의 동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야. 혹시 착각이었다면 미안해.”


  나는 잠시 침묵했다. 오른손이 희미하게 떨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치하야 씨한테까지 숨겨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용기를 내보기로 한 나는 떨리는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잡은 뒤 입을 열었다.


“아이돌은 어렸을 때부터 꿈꾸고 있었어요. 치하야 씨의 노래도 엄청 좋아하고...”

“그래? 모가미 씨라면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꿈이라면 썩히지 않는 게 좋기도 하고.”

“그렇지만... 집에서 강하게 반대하셔서요. 기회라면 올해가 마지막이었을 텐데... 고교입시가 시작되면 아이돌 같은 걸 하기는 어려워서, 아마 안 될 것 같아요.”

“부모님이 다 반대하시는 거야?”

“아니요, 어머니는 해보고 싶다면 괜찮다고 하시는데, 아버지께서 강하게 반대하셔서...”

“......”


  치하야 씨는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굳어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흘렸다.


“모가미 씨.”

“네?”

“내가 본격적으로 데뷔한 건 올해 초야. 사무소에 들어간 건 작년, 그러니까 고등부 1학년 때고.”

“그렇군요...”

“모가미 씨의 상황을 완전히 알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나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던 적이 있었으니까.”

“...!”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게 처음인 내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정작 아이돌이 되고 나면 주변에서 수많은 도움을 받게 돼. 프로듀서 같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니까.”

“...”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놀란 표정으로 치하야 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꿈이 있다면, 그리고 그 꿈이 간절하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지는 마. 상황은 수시로 변할 수도 있고, 중간에는 품어왔던 꿈에 대해 의심이 생길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꼭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거든.”


  밴드부의 카츠라기 선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 하지만 난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치하야 씨는 이미 성공한 아이돌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아직 첫 걸음조차 떼지 않은 입장인데, 과연 내 앞길도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나도 무대 위에서 저렇게 빛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게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조여 올 아버지의 존재가 두려웠다.

  나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치하야 씨는 약간 당황하며 사과했다.


“미안해. 혹시라도 참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모가미 씨. 혹시 지난 라이브의 무대, 봤어?”

“네? 네! 굉장히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봐 줬구나. 고마워. 사실 나, 준비가 부족했던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거든.”

“아니에요! 전혀 문제없었어요. 엄청 멋있는 무대였어요.”

“사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 감사를 전하고 싶었어. 스스로 완벽하게 곡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모가미 씨가 불러준 샘플을 계속 떠올리면서 불렀어. 마치 듀엣을 하듯이.”

“......”


  듀엣? 나랑, 치하야 씨가...?


“참견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모가미 씨가 아이돌에 관심이 있다는 걸 듣고 한 번쯤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꿈과 재능을 썩게 내버려두는 건 아쉽다고 생각해서...”


  그 순간, 나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공상을 넘어 망상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두운 관객석에서 환하게 빛나는 펜라이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치하야 씨와 나란히 서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망상이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 지금까지 계속 망설이고 참아오기만 했잖아. 어린애 취급을 받으면서 시키는 일을 하며 살아왔잖아. 한 번쯤은 맞부딪혀도 괜찮을지 몰라. 아니, 부딪히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아.


“감사해요. 치하야 씨.”

“응? 어느 부분이?”

“저, 도전해볼게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한 번쯤은 부딪혀볼게요.”

“...”


  치하야 씨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시는 걸 보니 크게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치하야 씨와 같은 무대에서 노래해보고 싶어요.”

“응. 기대하고 있을게. 나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니까, 언젠가는 아이돌 동료이자 라이벌로서 만나자.”


  라이벌. 치하야 씨와 내가 라이벌...

  분명 저런 사람과 경쟁해야한다면, 뜨내기 같은 실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거야.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어. 적어도 같은 아이돌로서 경쟁할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한 번 시작한 이상 반드시 따라잡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모가미 씨는 여기서 전철을 타는 거지? 나는 집이 저쪽 방향이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치하야 씨!”

“아니야. 내가 감사를 전하려고 시작했던 이야기인 걸. 앞으로 자주 보자. 응원할게, 모가미 씨.”

“네! 안녕히 가세요!”


  그 후로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창밖의 풍경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에서 내린 나는 거의 질주하다시피하며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지나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음.”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계셨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할 때면 항상 저런 식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딱딱하게 나의 이야기에 반박했다. 마치 벽에 가로막혀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항상 저 벽을 넘고 싶었다. 저 벽을 넘을 수 있다면, 내 진심이 아버지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품어왔다.


“아빠, 오늘은 일찍 왔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시기라서 말이다.”

“...”


  정작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이런 일들을 반복해왔다. 오늘은 꼭, 오늘은 꼭. 그러다 1년이 지났다. 이제 정말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치하야 씨의 말 때문에 분위기에 휩쓸려버린 거라도 상관없다. 내 안의 무언가가 지금 도망친다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아빠.”

“음?”

“잠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듣고 있다. 이야기하려무나.”

“아니. 신문을 내려놓고 똑바로 봐 줘.”

“...?”


  아버지는 신문을 내리더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차가운 눈빛에 잠시 움츠려들 뻔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 아이돌에 도전해보기로 결정했어.”


  이게 바로,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한 내가 내딛는 첫 걸음이었다.



-에필로그 3, 모가미 시즈카의 경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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