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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3장, 똑바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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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31, 2020 14:44에 작성됨.

[765프로 전용 밴 뒷좌석 ------ 키사라기 치하야]


  레코딩을 위해 시부야로 향하는 차 안, 뒤늦게 소식을 전달받은 하루카와 유키호는 리츠코에게 프로듀서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리츠코 씨, 프로듀서 씨는...”

“병원에는 가족 분들이 지키고 계셔. 큰 사고는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소식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주신다고 하셨어.”

“그, 그래도...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오...”

“걱정은 되지만, 가족 분들이 계시니까 일단 스케줄에 집중하자. 프로듀서님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최근 들어 말을 더듬거나 뒤를 흐리는 일이 거의 없었던 유키호는 당황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리츠코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루카와 유키호를 진정시켰다.

  나는 세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로에 그려진 점선들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실선이 되었다. 무언가를 머릿속에 넣고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프로듀서는 무사한 거겠지. 큰 사고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때와는 다른 거겠지. 그 사람을 잃는 건 아니겠지...


“다 왔어. 일단 지금은 집중해서 레코딩 잘 하고, 끝나고 다시 병원에 들를 거니까.”

““네...””


  여기는 어디지. 큰 건물이네.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회사도 이런 건물이었지. 유리 회전문, 로비, 높은 빌딩...


“....하야, 치하야!”

“어?!”

“뭐 하고 있어, 늦기 전에 들어가야지.”

“가자, 치하야짱.”

“스튜디오는 23층이야. 지난번에 썼던 거기. 셋이 먼저 올라가 있어. 나는 주차하고 바로 따라갈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음반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리츠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하루카는 열린 뒷좌석 문 앞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응, 미안해.”


  나는 하루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땅에 깔린 아스팔트의 감촉에서 강한 위화감이 전해져왔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뛰어가던 그 도로. 얇은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지던 딱딱한 감촉. 그 감촉에 마치 다리가 굳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 나는, 앞서 걸어가는 하루카와 유키호의 뒷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치하야짱?”

“...”


  하루카는 걸음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가와 나를 살짝 안아주었다.


“괜찮아. 치하야짱이 걱정하는 건 잘 알고 있어. 치하야짱은 프로듀서 씨를 엄청 좋아하니까.”

“아니, 나는...”

“응응. 무슨 뜻인지 알아. 나도 유키호도, 우리 모두 프로듀서 씨를 좋아해. 그리고 다들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어. 그래도 치하야짱, 지금은 우리도 힘내서 해보자. 프로듀서 씨도 우리가 힘 빠져 있는 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 조금 걱정되지만, 아니, 사실은 많이 걱정되지만... 힘내자, 치하야짱.”

“...응. 그렇겠지.”


  그래. 프로듀서라면 분명 웃으면서 자기 걱정은 하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는 소리를 했겠지. 바보 같이. 자기는 매일 같이 밤늦게 돌아가면서.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10분씩 알람을 맞춰 두고 졸면서. 정작 자기는 엄청 무리하고 있으면서, 나한테는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니까.

  괜찮아. 큰 사고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 때와는 달라. 무사하다고 했어.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타도코로 씨가. 분명, 그렇게...

  타도코로 씨가.


“안녕하세요. 765의 프로듀서 씨는 안 오셨나요?”

“주차장에 계세요. 곧 올라오실 거예요.”

“그런가요. 그러면 먼저 세팅하고 준비하겠습니다. 부스 안에서 기다려주세요!”

““네!””


‘하세가와 미유키... 그러니까, 네 프로듀서는 우리 외삼촌이야.’


  타도코로 씨가, 프로듀서의 조카...

  심지어 같이 살고 있다고 했어. 같은 집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그런데 분명 모르는 사이라고 했잖아. 봄에 아카바네에서는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일단 편하게 한 번 해본다는 느낌으로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별다른 의도를 가지고 숨기려던 건 아니야. 언젠가는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별다른 의도? 아카바네에서의 행동은 분명 의도였잖아. 순간적으로 당황했을 수는 있지. 그렇지만... 그 후로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밴드부에서 프로듀서에 대해 언급할 때도, 프로듀서에게 밴드부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단 한 번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잖아.


“그럼 반주 넣겠습니다-”


‘치하야가 날 믿어주고 있다는 건 기뻐.’


  믿어달라고 했잖아요.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부모님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저한테, 맘 편히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저한테, 765프로라는 마음이 돌아갈 장소를 알려준 게 당신이었잖아요. 계속해서 제 자신을 탓하고 의심하던 저한테,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준 게 당신이었잖아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준 게 당신이었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컷! 키사라기 씨, 그 부분에서 들어와 주셔야 됩니다!”

“...”

“다시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집중해서 해 주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치하야짱. 편하게 하자!”

  그래. 지금은 안 돼. 집중하자. 노래에 집중해야해. 지금의 나는 아이돌이니까. 업무 중인 거라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전할 노래, 더 많은 사람들과 이어지는 노래...


“컷! 이번에는 너무 빨라요! 네 마디 뒤에서 들어오셔야 해요!”

“오늘 따라 왜 이래? 답지 않게.”

“그리고 첫 음도 어긋났어요. 좀 더 신경 써주세요!”


  스태프가 반주를 끊고, 뒤에 서 있던 음향감독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ㅈ, 죄송합니다...”

““...””


  하루카와 유키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애써 둘의 시선을 피하고 악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악보를 읽고,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음으로 바꾸어 내보내야 했는데, 오선지가 일렁이면서 음표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키사라기 치하야. 이 샘플, 전에도 들었잖아. 악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음이라도 떠올려서 부르면 돼. 노래보다 우선할 수 있는 건 없어. 프로듀서도 타도코로 씨도 밴드부도, 모두 노래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노래를 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돼. 오직, 노래에만.


“......!”

“컷! 키사라기 씨, 정 안되겠으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주말이라 피곤한 건 알겠는데, 평소에는 잘 했잖아. 좀 쉬었다가 다시 할 거니까, 잘 좀 부탁한다고.”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너도 알잖아.


  무슨 소리야? 지금은 노래해야하는 상황이라고. 레코딩이잖아. 프로듀서에 대한 건 언제 생각해도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당장은 노래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왜 집중하지 못하는 건데?


  이제 그만 솔직해져야해.

  노래가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도 알아.

  지금의 나는, 노래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거니까.


  그래, 그걸 알면서 그러는 거야? 뭐가 문제인 건데? 프로듀서한테 배신당한 기분이야? 타도코로 씨한테 속았다는 기분이야? 그래서 분노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몰라.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배신감도 들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버렸어. 프로듀서는 고민했던 거야. 타도코로 씨가 프로듀서의 가족이라는 걸 알아버리면, 내가 학교에서도 그걸 신경 쓰지는 않을까 고민했던 거야.

‘아이돌이기 이전에,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여자아이니까.’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했잖아. 그러니까 신경 써줬던 거야. 타도코로 씨도 그걸 지켜준 거고. 별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타도코로 씨의 말은 거짓말이야. 두 사람은 나의 학교생활을 지켜주겠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에 대해 숨겨왔던 거야. 얼마나 신경 쓰였을까. 얼마나 고민해왔을까.


  꼭 누구 같네.


  맞아.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것들도 생각해주고 챙겨주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마치... 행복했던 시절의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이 중요한 사실을 숨겨오고 있었어.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 혼자서 고민하고 희생해오고 있었어.

  나 때문에 고민하고, 나 때문에 희생하고 있었어.

  그러다 닳고 닳아버리겠지. 그러다 지쳐버리겠지. 그러다 결국 망가져버리겠지.

  결국, 변해버린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겠지.

  선의를 위해 무언가를 숨기고, 스스로를 희생하고, 그러다 결국 망가지고.

  그 악순환을, 또 반복할 수는 없어.

  나 때문에, 또 누군가가 상처받게 할 수는 없어.


“저기... 치하야짱?”

“...”


  하루카. 너한테도 고민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 고민을 해결하는 데 무엇도 도움을 주지 못했어. 너는 항상 밝고, 항상 웃고, 항상 나에게 힘이 되어줬어. 처음 사무소에 들어오고 다른 아이들과 말조차도 제대로 섞지 않던 나한테 먼저 다가와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

  그런데 나는 그 무엇도 돌려주지 못했어. 결국 지금도... 걱정만 끼치고 있어.


  그만하자.

  노래는 정답이 아니었던 거야. 유우가 죽은 뒤로도 나는 계속 노래해왔잖아. 그래도 부모님이 이혼하는 걸 막을 수 없었어. 망가져가는 아버지를 구할 수 없었어. 나는 도피했던 거야.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화음의 저편으로 도망쳤던 거야.

  노래는 또 다른 형태의 도망이었던 거야. 그 끝에는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프로듀서가, 밴드부가, 765프로가 그 구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니었던 거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노래했기 때문이 아니야. 하루카가 희생해줬기 때문이고, 레이나가 다가와 줬기 때문이고, 타도코로 씨, 카츠라기 씨, 사토 씨 모두가 이상하리만큼 친절했기 때문이야. 프로듀서가... 일방적으로 희생해줬기 때문이야.


  더 이상 보답할 수 없는 희생을 딛고 일어서고 싶지 않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나 하나만 가만히 있었더라면, 바보같이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는 노래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힘들지 않았을 거야.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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