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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2장, 새까만 숲의 노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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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6, 2020 19:40에 작성됨.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2학년 D반 앞 복도 ------ 히야마 레이나]


“저기저기, 다이고 군?”

“안녕, 레이나. 무슨 일이야?”

“혹시 오늘도 치하야는 학교 안 나왔어?”

“키사라기? 나오긴 나왔는데, 3교시 끝나고 조퇴했어.”

“그래...? 그렇구나...”

“밴드부 때문이지? 나중에 뭐라고 전해줄까?”

“아니! 괜찮아. 고마워, 다이고 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우리 반 교실 쪽 복도로 돌아왔다. 2학기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한 달 가까이 지나 10월이 되었지만, 우리 밴드부는 아직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습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지난달에 어떻게든 곡을 정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다음 라이브 준비로 엄청나게 바빠진 치하야가 학교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연습은커녕 전원이 모이는 것도 어려운 상태였다. 전에 계획했던 버스킹도 당연히 취소되었다.

  사실 세션은 이미 점심시간과 오후에 각자의 파트를 연습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정한 곡들 중에서 보컬이 위주인 곡들도 꽤 있었기에 치하야가 없는 상태에서는 완벽한 합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컬에 맞춰 세세한 음향이나 분위기를 조정해 나가야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치하야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봄에 치하야에게 밴드부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이미 치하야가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건 서머 페스티벌 때도 알고 있었고, 그 때 다 함께 오다이바에 놀러갔던 것도 나중이 되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이 실제로 들이닥치자 나는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이후로 음악과 밴드는 내 일상의 큰 부분이자 소중한 꿈이었다. 최근 모리 선생님과의 진학 상담에서는 음악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기에 이번 스이게츠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기회였다. 사실상 공연으로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우리 학교의 예체능 계열은 나름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에 축제 공연 역시 유용한 스펙이 되어 주었다. 물론 센터 시험이나 실기 성적 등이 더 중요하기는 했지만, 꼭 스펙으로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번 축제가 소중한 경험을 쌓을 기회임은 분명했다.

  나는 복도에 나와 있는 타로 군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웬일로 사토 군이나 신이치 군과 함께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늘도 자고 있는 걸까나.


“안녕, 레이나.”

“안녕. 타로 군...”

“왠지 텐션이 낮은데. 무슨 일 있어?”

“오늘도 치하야가 학교에 안 나왔대.”

“그렇구나. 큰일이네. 벌써 10월이니까, 슬슬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해야 할 텐데...”

“그러니까...”

“치하야한테는 따로 연락해봤어?”

“응. 아마 이번 주에도 거의 못 나올 거라고 하던데...”

“일단 각자 파트라도 완벽하게 해놓는 게 좋겠지. 세션 파트가 완벽하면 합주는 금방 할 수 있는 거니까.”

“응. 그렇지...”


  방과 후 정기 부활동 시간, 우리는 밴드부실에 모여 각자의 파트를 연습했다. 세션들만 따로 합주를 해보기도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보컬이 없는 상태였기에 완벽한 합주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연습을 마치고 언제나와 같이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교문으로 향했다. 괜찮을 거야. 치하야가 레슨 틈틈이 연습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점심시간만이라도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세션은 충분히 연습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여어, 히야마!”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선생님들을 제외한다면 나를 히야마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몇 없는데. 설마...


“타츠 언니?”

“오랜만이야. 놀랐어?”

“당연하죠! 왜 갑자기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일부러 찾아온 건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어. 요 주변에서 일하거든. 혹시나 있을까나~ 하고 와 봤는데, 마주쳐서 다행이네.”

“일자리 얻은 거예요? 얘기 안 해줬으면서.”

“아직 인턴이야. 좀 더 출세하면 얘기해주려고 했지.”


  올해 초까지 함께 밴드를 했던 타츠 언니였다. 그 후로도 연락은 종종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는데, 우연이라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반가웠다.


“다들 잘 지내죠?”

“야마우치는 잘 나가고 있어. 다른 애들은 그다지 연락을 안 하고 지내기는 하는데, 그래도 다들 잘 지내는 것 같더라.”

“다행이네요...”

“너는 어때? 밴드부, 잘 돼가고 있어?”

“네. 그럭저럭.”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봄에 다 함께 둘러 앉아 있었던 우리 밴드의 마무리 회식 자리를 떠올렸다. 타츠 언니는 스이게츠제를 보러 와주겠다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마우치 오빠는 휴가를 써가면서까지 와주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의 복잡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츠 언니는 명절 때 만난 어른들 마냥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밴드부의 일을 물어왔다. 마치 ‘취업은 잘 됐니?’, ‘대학은 잘 갔고?’ 같은 말들을 물어오듯이. 상황이 좋다면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뭐 어렵거나 고민거리는 없고? 언제든지 물어봐도 돼.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시 타츠 언니에게 상담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면서 긴 이야기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학교생활이었고, 나의 부활동이었다. 굳이 타츠 언니를 끌어들여서 걱정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언니도 분명 바쁜 일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나와 타츠 언니는 잠시 전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밴드를 그만두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몇 달 사이에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등, 서로 못 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잠시 후, 전철역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애들한테도 안부 전해줄게. 열심히 해! 축제, 기대하고 있을게!”

“네! 반가웠어요, 언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고민을 계속했다. 애써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었다. 지금은 단순히 연습을 못 하는 수준이지만, 상황이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치하야가 축제 당일 날에 올 수는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치하야는 아이돌이라는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런 치하야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했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건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치하야는 이제 자신의 꿈에 충분히 다가 선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자꾸만 조급해져갔다. 꿈을 위한 무대, 기대해주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 그게 나에게서 자꾸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초조하게 했다.

  치하야가 레슨 틈틈이 연습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점심시간만이라도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세션은 충분히 연습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걸까?

  그냥 이렇게 기다려도, 계속 믿고 기다려 봐도, 괜찮은 걸까?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운동장 ------ 타도코로 신이치]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코다이 녀석의 부탁으로 학생회의 잡무를 돕던 나는 느지막이 밴드부실로 향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할 틈이 없었기에 적당히 매점에서 메론빵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카츠라기 녀석이 심심할 때마다 먹길래 맛이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앞으로도 종종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밴드부실 앞에 도착하자 의외로 안에서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다들 먼저 가 있겠다고 했는데, 아직 연습을 하지 않고 있는 걸까.

  메론빵을 입에 문 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들 가운데 공간에 둥글게 의자를 깔고 앉아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여, 늦어서 미안. 코다이 녀석이 생각보다 늦게 놓아줘서 말이지.”

“괜찮아. 와서 앉아. 타도코로.”


  나는 다시 메론빵을 입에 물고 의자를 끌고 왔다.


“흐흐스, 므흔 이이으?”

“입에 문 채로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무슨 일이냐는 거지?”


  카츠라기 녀석, 하나도 모르겠다면서 다 알아들었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자, 카츠라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일단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끝까지 들어 줘, 타도코로.”

“으음.”


  나는 여전히 입에 메론빵을 문 채 왼쪽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대답했다. 학생회에서 무거운 상자를 옮기다보니, 왼쪽 팔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코드 짚기 힘들겠네. 코다이 녀석한테 나중에 뭐라도 얻어먹던가 해야지. 그보다 카츠라기는 무슨 이야기길래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걸까.


“이번 스이게츠제 무대를 위해서, 새로운 보컬을 구하기로 했어.”

“...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입에 물고 있던 메론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카츠라기?”

“타로 군의 말대로야. 신이치 군.”


  레이나가 말했다. 나는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 그러니까, 무대에 설 보컬리스트를 새로 구하겠다고? 치하야 말고?”

“응. 본인하고도 이미 통화했어.”

“그래서? 치하야가 그거에 동의했어?”

“응. 연습도 계속 못 나오고 있고, 정작 축제 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면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카츠라기, 사토, 그리고 레이나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어이, 농담이지? 내가 좀 늦게 왔다고 장난치는 거지? 재미없으니까 그만 둬.”

“그런 걸로 농담을 할 리가 없잖아. 타도코로.”


  사토가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뿐.


“봄부터 쭉 같이 해온 멤버잖아? 결성한 이후로 쭉 같이해왔잖아? 그런데 이렇게 대체하겠다고? 이렇게 쉽게?”


  나의 말에 레이나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츠라기는 분위기를 살피고 나를 말렸다.


“타도코로,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레이나랑 우리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니ㄲ-”

“결정?! 그딴 걸 결정이라고 포장한다고?! 그 정도면 된다는 거야?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 함께 해왔던 연습, 그 추억, 그 일상! 그걸 전부 대체하겠다고? 단지 연습에 몇 번 빠졌다는 이유로?!”

“적당히 좀 해, 타도코로!”


  내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자, 보다 못한 사토가 일어나 나에게 소리쳤다. 사토는 자기만 세션 연주자가 아닌 것을 신경 쓰고 있었는지, 평소 이런 회의를 할 때면 한 발짝 물러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간간히 조언을 해 주는 타입이었다. 그런 사토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인다는 건, 지금의 상황이 평소의 평범한 회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오버하는 건데? 치하야 본인하고도 이야기했다고 했잖아! 우리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네가 과하게 반응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리고 넌 처음부터-”

“그만해, 사토 군.”

“응? 아, 알겠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레이나가 끼어들었다. 사토는 레이나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격앙된 얼굴로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이나는 고개를 들더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이치 군, 네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아.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먼저 치하야에게 이야기를 꺼낸 것도 맞아.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요즘 연습 때문에 곤란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치하야가 보컬리스트를 새로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거든.”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한테는 그거면 되는 거야? 그냥 무대에 설 수 있으면 그게 누가 되었던지 상관없다는 거야? 치하야가 아니더라도?”

“신이치 군!”


  레이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치하야가 아이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잖아.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도 치하야의 꿈을 우선으로 응원해주겠다고 했잖아! 그건 다 어떻게 된 건데?”

“치하야한테는 치하야의 꿈이 있듯이, 나한테는 내 꿈이 있는 거야! 나한테도 이 무대를 기대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이 무대로 다가서고 싶은 꿈이 있는 거라고! 왜 그걸 몰라주는 건데? 치하야의 꿈은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생각해주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건데? 응? 신이치 군!”


  레이나는 호소하듯이 소리쳤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레이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꿈이나 진로 같은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물론 전에 인디밴드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평소 라이브를 찾아다닐 만큼 음악과 드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나 스스로가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이 있었다는 걸, 나는 이 순간이 되어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나에게는 그런 걸 감안해줄 여유가 없었다. 뮤 삼촌이 치하야의 학교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 치하야가 학교와 밴드부를 아이돌 활동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 그리고 바다가 푸르게 빛나던 그 날 밤에 들었던 치하야의 노래. 그 모든 사연들을 지닌 나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레이나만큼이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충분했다.


“...좋아. 네가 원하는 게 뭔지는 충분히 알았어. 레이나.”

“신이치 군...”

“그렇다면 기타리스트도 구해 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면, 기타를 치는 사람도 누가 되던 상관없겠지.”

“뭐...?”


  레이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도코로,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카츠라기가 말했다. 나는 카츠라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말한 그대로야. 스이게츠제, 난 동참할 생각이 없어.”

“어이, 타도코로!”

“줄리아가 됐던, 아니면 누가 됐던, 잘 구해 봐. 난 갈 테니까.”


  사토가 발끈해서 나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카츠라기가 그를 제지했다. 레이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눈믈을 흘렸다.

  나는 밴드부실을 나와 문을 닫고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 10초 정도 지났을까, 밴드부실에서 달려 나온 카츠라기가 나를 붙잡았다.


“타도코로, 잠깐 이야기 좀 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붙잡아도 돌아갈 마음 없어.”

“알아. 그냥 이야기 좀 하자고.”

“...”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정작 이야기를 하자던 카츠라기는 한참동안 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답답하다고 느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뭐를?”

“처음 시작할 때 치하야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던 쪽은 너였잖아, 카츠라기. 니시야마 선배가 어쨌네 하면서. 그랬는데도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

“...”


  카츠라기는 고개를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고민을 마친 듯한 카츠라기가 말했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뭐?”

“지금의 치하야는 웃고 있잖아. 평소 학교에서도 그렇고, 무대 위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니시야마 선배가 했던 부탁도 그렇고, 치하야의 학교  생활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나는 카츠라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츠라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레이나의 말 그대로야. 치하야는 치하야의 꿈을 쫓고 있잖아. 성공적인 아이돌이 되어 있잖아. 이제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걸 떠나서 각자 스스로에 대한 것도 신경 써야 할 때야. 타도코로.”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카츠라기.”

“뭐...?”

“정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거면 됐다, 여기까지 왔으니 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억지 부리지 마, 타도코로. 치하야는 아이돌이야. 학교를 못 나오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치하야는 평범한 학생이 되는 것 대신에 아이돌로서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


  카츠라기의 말을 들은 나는 뮤 삼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길거리 공연에 대해 물은 날로부터 이틀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온 뮤 삼촌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나에게 진지하게 상담할 거리가 있다며 질문을 해왔다.


“저기, 신이치.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아?”

“응. 얼마든지. 치하야에 대한 거야?”

“응.”


  의외라고 생각했다. 봄에 처음 이야기했을 때 이후로, 삼촌이 나에게 직접 치하야에 대한 걸 물어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치하야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것을 나를 통해 듣고 싶지 않다고 했던 뮤 삼촌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웬일로 그런 걸 다 물어본대.”

“혹시 평소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치하야의 모습이 어땠어? 자세한 거 말고, 표정이라던가, 분위기라던가.”

“으음... 최근에는 학교를 나오지를 않으니까 모르겠는데.”

“당장 최근이 아니더라도, 여름방학 직전이라던가.”

“한 5월까지는 좀 까칠했는데, 그 후로는 편해진 것 같아. 자주 웃기도 하고.”

“밴드부에서 연습할 때도 그랬어?”

“애초에 밴드부가 아니면 치하야를 볼 일이 없거든요?”

“...그렇구나. 알겠어. 고마워.”

“그거면 돼? 더 안 알려줘도?”

“응. 괜찮아. 아무래도 최근에 치하야가 학교에 못 나가고 있는 걸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참고가 될까 싶어서 물어봤어.”

“고생이 많네. 치하야도 뮤 삼촌도.”

“푸흐. 고맙다. 빨리 자. 이 시간까지 TV 보면 키 안 큰다.”

“이미 다 컸네요.”

“그 정도면 더 안 커도 되기는 하지. 아무튼, 빨리 자.”

“예-”


  뮤 삼촌의 말을 들은 후로 나는 확신했다. 치하야는 평범한 학생 대신에 아이돌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건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그곳에 있어주는 것들. 그 ‘평범한 학생’으로서의 일상이 뒷받침되었을 때, 나아가 또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때는 내 일상의 큰 부분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때였다.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사진이었고, 음악이었고, 잔소리꾼 카츠라기와 귀찮은 여동생 유이나였다. 그 새로운 요소들이 하나 둘 모여 다시 나의 일상을 구성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나는 카츠라기에게 물었다.


“카츠라기, 예전의 치하야에게서 중등부 시절의 나를 봤다고 했지?”

“뭐? ...응. 처음 시작은 그거였지. 맞아.”

“중등부 3학년이 넘어가던 시기에, 나는 우울하고 쉽게 짜증내던 타도코로 신이치가 아니었잖아. 그건 맞지?”

“그렇지. 2학년 넘어가고 기타를 친다고 하면서부터는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때의 넌, 이미 충분히 달라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잖아.”

“타도코로, 그거랑 이건 상황이...”

“다르지 않아.”


  카츠라기는 착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카츠라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수시로 던지던 잔소리는 그때의 나한테는 일상이 됐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소중한 일상이 됐다고. 우리도 마찬가지야. 지금의 치하야에게는 우리와 하는 밴드부가 소중한 일상이야. 그 일상이 있기 때문에 아이돌로서 나아갈 수 있는 거지, 그걸 포기하면서 아이돌을 선택한 게 아니라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본인이 이야기해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 뮤 삼촌이 나한테 치하야가 밴드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말해줬으니까.”

“뮤 형이...?”

“응. 되도록 자기를 안다는 걸 숨겨달라고 하고, 1년 내내 치하야에 대해서 묻지도, 이야기해주지도 않았던 그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으니까.”


  카츠라기는 더욱 혼란스러운 것 같았지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치하야가 아이돌 활동 때문에 아예 학교를 못 나오는 상황까지 왔잖아. 그 상황에서 네가 일상을 이야기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오히려 밴드부를 유지하면서 무대에 서는 게, 치하야에게도 일상의 일부를 유지해주는 길 아닐까? 네가 이탈하고, 결국 밴드부가 와해되어버리면, 그걸 치하야가 바라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건 유지가 아니야, 카츠라기. 그냥 치하야로부터 밴드부라는 일상을 뺏어오는 거야.”

“뭐...?”

“새 보컬을 뽑아서 무대에 선다고 치자. 치하야는 그걸 보면서 기뻐해줄까? 안 그래도 부활동을 신경 쓰고 있는 치하야가, 결국 대체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보면서 기뻐해줄까?”

“별 수 없잖아.”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카츠라기는 손을 떨면서도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별 수 없잖아, 타도코로! 현실을 보라고. 상황을 좀 보라고! 결국 그렇게 기다리다가 치하야가 축제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까지 가버리면, 그걸 준비하던 우리의 입장은 어떻게 할 건데? 레이나는 어떻게 할 건데! 네가 고집 부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이야기했잖아. 보컬도 기타도 새로 뽑아서 무대에 서라고.”

“넌 그걸 말이라고-”

“너희가 무대에 서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어. 다만 나는, 치하야에게 또 다시 무언가를 잃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데 동참할 생각이 없어.”

“타도코로...”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난 네가 아니야, 카츠라기. 객관적인 상황을 보고 모두가 행복한 방법을 찾을 정도로 성인군자가 아니라고.”

“타도코로, 제발...”

“그만해. 네가 뭐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더 물러설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말을 마치고 일어선 뒤, 카츠라기를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도, 나에게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끊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 함께 만들어온 추억, 모두와 이어지는 음악, 꿈꿨던 평화로운 일상. 그 모든 걸 내가 스스로 끊어냈다. 원인 제공은 저쪽에서 했다는 것도 핑계였다. 결국 내가 끊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다고 치하야가 뭘 알아줄 리도 없었다.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치하야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꼬리를 끊고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치하야를 대체하는 것에 저항했다,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변명이었다.

  나는 옳은 판단을 한 것일까? 정말 치하야를 위한 것이 맞는 걸까?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저, 나에게 음악이라는 활로를 가르쳐 준 소녀를 대체할 수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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