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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2장, 새까만 숲의 노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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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6, 2020 01:18에 작성됨.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교무실 ------ 키사라기 치하야]


  2학기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학교에 나온 소녀는 오전 쉬는 시간 내내 보충수업 일정과 밀린 수업자료를 받기 위해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후보생 생활을 시작한 1학년 2학기 때나 2학년 1학기 초에도 학교를 빠지거나 조퇴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짧게 학교를 들리는 수준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건 이번 주 분량이란다, 키사라기. 혹시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친구들이나 선생님한테 질문하렴. 오후 6시 전까지는 상관없어. 주말에는 조금 곤란하지만.”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이돌 활동은 잘 되어가는 것 같더구나. 우리 아들이 CD를 사 달래서 혼났어. 음악 CD가 그렇게 비싼 줄은 처음 알았지 뭐니.”

“괜찮으시다면 CD 정도는 다음에 드릴게요. 지인이나 가족들 선물용으로 받은 게 아직 남아 있어서...”

“어머, 그래도 괜찮니? 고마워라.”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야. 바쁜데도 열심히 따라오는 걸 보면 보람이 있어. 아, 곧 가 봐야한다고 했지? 늦기 전에 가봐. 힘내렴. 선생님도 응원하고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소녀는 수업 자료를 가방에 챙겨 넣고 교무실을 나섰다. 적어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불성실하다며 눈치를 주던 선생님들도 최근에는 소녀의 아이돌 활동을 응원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소녀의 지명도가 오른 영향도 있었겠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은 만큼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도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소녀는 가방을 메고 건물을 나서서 교문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가는 길에도 동급생 두 명에게 사인을 해 주어야 했지만, 누가 되었건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은 기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항상 최선을 다해 팬서비스를 해 주었다.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소녀는 운동장 스탠드의 계단을 통해 트랙으로 내려왔다. 트랙을 따라 잠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익숙한 밴드부실의 푸른 문 앞이었다. 안에서는 기타의 멜로디와 드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모여 있던 부원들은 환한 얼굴로 소녀를 반겨 주었다. 특히 레이나는 스틱을 스네어 위에 올려놓고 단숨에 달려와 소녀를 끌어안았다.


“치하야!”

“오랜만이네, 레이나. 자꾸 연습에 못 와서 미안해.”

“아니야! 치하야는 톱 아이돌이니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아직 톱은 아니지만... 후훗,”


  소녀는 레이나에게 안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운데 놓인 드럼, 그 오른쪽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사토, 사토의 오른쪽에 서서 베이스를 들고 있는 카츠라기, 그리고 드럼 왼쪽에 서 있는 기타리스트 타도코로까지. 오랜만에 보는 밴드부실의 풍경이었지만, 소녀의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소녀가 밴드부실의 익숙한 풍경을 보고 미소 짓고 있을 때, 타도코로가 소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괜찮아? 스케줄이 있는 거 아니었어?”

“오후부터 라디오 녹음이 있어서 곧 가봐야 해. 오늘은 수업자료를 받으러 오전에만 나왔어. 사실 지금 막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잠시라도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사토가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네. 레이나, 치하야가 있을 때 곡을 정해두자.”

“아, 그래!”

“곡이라면...?”

“응, 스이게츠제 준비를 슬슬 시작하려고! 후보로 뽑아둔 곡들도 있는데, 치하야는 특별히 하고 싶은 곡 있어?”

“으음...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후보 중에서 골라도 될까?”

“응응. 좋아.”


  소녀는 레이나가 보여준 리스트에서 서너 곡을 골랐다. 아마 바쁜 스케줄 때문에 연습에는 자주 나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곡을 정해두면 개인 레슨 시간에도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곡을 정하고 난 뒤, 베이시스트인 카츠라기가 말했다.


“아, 맞다. 조만간 요요기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면 어떨까 싶은데.”

“버스킹? 길거리 공연 말하는 거지?”


  타도코로가 물었다.


“응. 곡을 정했으니까 연습한 걸 시험 삼아 공연 해봐도 좋고, 아니면 지난번에 서머 페스티벌 때 했던 곡도 좋고. 서머 페스티벌 이후로 제대로 된 공연을 못 했으니까, 한 번쯤 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대찬성이야!”


  레이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타도코로도 동의를 표했다. 소녀는 지난번에 미키와 함께 쇼핑을 나갔을 때 길거리 공연을 보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때도 했던 고민인 사람들이 알아봐서 곤란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쩍 바빠진 스케줄도 문제였다.

  소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타도코로가 말했다.


“치하야는 어때? 스케줄, 바쁘지 않아?”

“일단 프로듀서한테 여쭤볼게. 가능하다면 했으면 좋겠어.”


  소녀의 말을 들은 카츠라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날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 치하야의 스케줄도 고려해야하고, 일단 우리도 곡 연습을 해야 하니까.”

“좋아좋아! 버스킹이라니, 기대되네~!”


  그 때, 언제나와 같은 수업 예비종이 들려왔다. 부원들은 각자의 악기를 정리하고 교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소녀도 다시 가방을 챙겨들었다. 밴드부실을 빠져나와 문을 잠근 뒤, 소녀는 부원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사무소로 가볼게. 오후 수업도 힘내.”

“응! 치하야도 스케줄 힘내!”

“아, 맞다. 치하야!”


  소녀가 몸을 돌려 교문 쪽으로 걸어가려고 하자, 타도코로가 뒤에서 소녀를 불러 세웠다.


“응? 무슨 일이야, 타도코로 씨?”

“학교에 자주 못 나오는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리는 항상 밴드부실에 있을 거니까.”

“오오, 달달한 멘트 뭐야. 타도코로?”

“시끄러.”


  타도코로는 사토의 말에 빠르게 쏘아붙였다. 소녀는 그런 부원들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즐거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던 학교생활에 변화를 가져다준 아이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평화로운 일상을 보며, 소녀는 그 평화가 언제까지고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쿄도 오타구 765프로덕션 ------ 프로듀서]

“이번 주 내로 기획서가 넘어오면 11월 초에는 가능할 겁니다. 일단 말씀하신 날짜는 비워두겠습니다만, 저희 쪽에서도 너무 오래 비워둘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네. 늦어도 목요일까지는 넘겨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담당자와의 전화를 끊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앞자리에서 초조하게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리츠코가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프로듀서님?”

“이번 주 내로 기획서를 넘겨달라고 하시네. 그러면 11월 초에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12월까지 넘어가면 연말 행사들이 겹쳐서, 아마 어려울지도 모른대.”

“흠... 이번 주 내로 처리하려면 꽤 바쁘겠네요.”

“응. 그래도 해 봐야지.”

“프로듀서님이 시작하신 일이니까 메인 기획은 믿고 맡겨두겠지만, 필요한 부분은 저도 전력을 다할게요!”

“고마워, 리츠코.”


  도쿄돔. 이른바 꿈의 공연장으로 불리는 메이저 공연장의 상징. 무도관의 5배에 달할 정도의 관객석인데다,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공연장은 스타디움이나 야외 공연장뿐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세부적인 세팅과 규모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도쿄돔 라이브에서 적자를 피하기 위한 관중의 규모는 4만 정도. 매진은 무리더라도 대부분의 좌석을 채워야만 적자를 면할 수 있는 구조였다. 4~5만 명 규모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그룹은, 그만큼 전국적으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준이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치하야는 무도관 라이브 이후 단숨에 B랭크를 넘어섰고, 곧 A랭크 진입을 앞둔 메이저 아이돌이 되어 있었다. 하루카는 라디오와 방송에서, 유키호는 연극과 영화에서 활약하며 여름 내내 치하야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입지를 쌓아올렸다.

  TORICO 외의 유닛들도 순항 중이었다. 프로젝트 페어리는 얼마 전 6천 석 규모의 단독 라이브를 매진이라는 기록으로 마쳤다. 무도관이 8천 석 정도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성공적인 수치였다. 물론 무도관에는 단순한 관중의 수보다도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만, 그래도 페어리도 자체적으로 훌륭한 관중 동원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메인으로 나서는 두 트리오 외에도 아미마미와 야요이, 이오리의 듀오 역시 눈부신 성장세를 보였다. 아즈사 씨와 마코토도 솔로 유닛으로서 상당한 입지를 다졌다. 최소 트리오에서 퀸텟으로 이루어진 유닛들이 성장 스토리와 멤버들 간의 호흡을 앞세우는 게 최근 아이돌 시장의 유행이라는 걸 감안하면, 두 사람은 오직 퍼포먼스와 개인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낸 사례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도쿄돔 라이브가 진행되기까지는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방송과 CM 오퍼가 들어오고 있었기에 그때까지 4만 명 규모의 관중을 동원한다는 것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CD 판매량과 음원차트, 아이돌 랭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했을 때, 6개의 유닛으로 이루어진 12명의 팬덤이 충분히 4만 명 이상의 관중을 모을 수 있다는 게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내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도쿄돔 라이브에 들어갈 대략적인 예산을 계산하고 있을 때, 치하야가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치하야짱!”

“어서 와, 치하야. 좋은 소식이 있... 아, 프로듀서님. 치하야한테는 프로듀서님이 직접 이야기하실래요?”

“응? 응. 그럴게.”

“좋은 소식...?”


  리츠코는 치하야에게 도쿄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나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치하야는 어리둥절한 것 같았지만, 우선은 가방을 내려놓고 내 자리로 다가왔다.


“프로듀서, 좋은 소식이라는 건...?”

“응. 놀라지 마, 치하야.”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조금 뜸을 들였다. 도쿄돔 수준이면 이 정도는 뜸을 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11월 초에, 도쿄돔에서 올스타 라이브를 하기로 했어.”

“돔...인가요!”

“응! 틀림없는 도쿄돔이야!”


  치하야는 눈을 크게 떴다. 치하야의 표정에는 놀란 감정과 함께 기쁨도 묻어나고 있었다.


“돔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겠네요.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으면...!”

“유닛들뿐만 아니라 다 함께 나오는 올스타 곡도 편성할 생각이라서, 오퍼 스케줄이 없는 시간대에는 다 함께 집중레슨을 할 생각이야.”

“저도 열심히 할게요!”

“응. 치하야는 항상 성실하게 하고 있으니까. 특별한 걱정은 없어. 지금처럼 잘 부탁해.”

“아, 프로듀서. 그런데...”

  방금까지 들떠 있던 치하야는 갑자기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학교의 밴드부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다보면 행인 분들이 많이 알아볼 거고, 혹시 스케줄이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나한테 상담하려고 했던 거야?”

“네. 괜찮을까요?”

“으음...”

  

  나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부활동이라. 밴드에서 공연을 하려면 분명 자체적으로도 모여서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치하야는 도쿄돔 라이브 전까지 주말 스케줄이 꽉 차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시간을 뺄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설령 스케줄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지명도가 올라버린 상황에서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공연을 하는 건 그거대로 위험부담이 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치하야는 이전까지 한 번도 학교생활에 관련된 일로 이런 부탁을 해 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예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부활동에 참가할 시간도 없어졌다.

  유명 아이돌들이 학교와 일을 병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나는 최대한 학교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케줄을 조정해왔다. 치하야에게는 특별히 더 그랬지만, 꼭 치하야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평범한 여자아이로서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쉽사리 학교생활에 집중하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야마모토 씨의 말대로 치하야와 765프로 아이돌들에게는 지금이 포텐셜을 확 터뜨리는 시점이었고, 밀물이 밀려들어오는 시점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도쿄돔이라는 전례 없는 대규모 라이브를 앞둔 상황에서는 아이돌 활동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프로듀서로서 더 나은 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결론을 내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치하야, 아마 길거리 공연은 조금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역시... 그런가요.”

“응. 나도 치하야가 최대한 학교생활을 유지했으면 좋겠고, 부활동도 계속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 한 명의 아이돌이기 이전에,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여자아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도쿄돔 라이브를 앞둔 한 달 반 정도는 다 함께 라이브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 이번 라이브가 모두가 톱 아이돌에 가까워지는 중요한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

“괜찮아요, 프로듀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치하야는 내 말에 동의했지만, 오랜 기간 치하야를 봐온 나는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아쉬움이 배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의외였다. 예전의 치하야였다면 당연히 학교생활보다 아이돌 활동과 라이브를 우선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치하야는 학교생활을 아이돌 활동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마친 치하야는 하루카와 유키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응접실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두 사람이 사무소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와, 하루카, 유키호. 바로 스튜디오로 가는 거지?”

“네. 치하야짱은 아직인가요?”

“와 있어. 지금은 응접실에.”


  치하야는 응접실에서 나와 둘을 반겼다.


“어서 와, 하루카, 하기와라 씨. 금방 챙겨서 나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응!”

“천천히 해도 괜찮아, 치하야짱.”


  외투를 챙겨 입은 치하야는 두 사람과 함께 사무소를 나섰다. 내 스스로의 책임의식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인사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기분 탓이겠지. 내가 너무 민감한 거겠지. 하고 생각하며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리츠코와 함께 밤늦게까지 라이브의 기획서를 작성한 뒤, 퇴근해서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27분이었다. 퇴근한 누나는 물론, 신이치와 유이나도 이미 잠든 것 같았다. 지난 몇 달간 야근하는 날들이 많다보니 집에 왔을 때 다들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밤늦게 들어오는 가장의 마음인가, 예전에는 매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신이치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용돈에 보태 쓰라며 누나 몰래 지폐 몇 장을 쥐어주던 매형의 얼굴이 떠올라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키코 누나와 나의 사이에는 열 살이 넘는 터울이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사실상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랬기 때문에 누나는 물론이고, 매형도 나에게는 부모님과 같은 느낌이었다.

  매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 누나의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도 사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표면상 이유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려면 아키코 누나네 집이 가장 적당한 하숙집이었기 때문이지만, 갑작스럽게 가장이 되어버린 누나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누군가 살짝 노크를 하더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이치, 안자고 있었어?”

“잠깐 졸긴 했는데, 뮤 삼촌이 올 때까지 기다렸지.”

“왜 그랬어. 아침에 분명 늦게 들어온다고 이야기했는데.”

“할 말이 있어서.”

“뭔데? 말해봐.”


  신이치는 오른쪽 뺨을 살짝 긁적이더니 말했다.


“오늘, 치하야가 길거리 공연에 대해서 묻지 않았어?”

“응? 응. 그랬는데, 어떻게 알았... 아. 맞다. 밴드부였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 정도는 기억하라고.”

“요즘 워낙 바빠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든. 순간적으로 기억이 안 났어.”

“과로는 병이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어떻게 됐어?”

“일단 길거리 공연은 어려울 거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중요한 일이었어? 그 길거리 공연.”

“그랬구나. 요즘 치하야가 계속 학교에 못 나오고 있었으니까, 밴드부 애들도 조금씩 곤란해 하고 있거든. 그래도 치하야한테는 아이돌 활동이 우선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아니야. 신이치.”

“응...?”


  신이치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치하야는 아이돌 활동만큼이나, 너희와 하는 밴드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길거리 공연에 대한 건 내가 혼자서 결정한 사안이야.”

“아, 그래...?”

“되도록이면 치하야에게 학교에 나갈 시간을 많이 주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난 라이브 이후로 상황이 이렇게 돼서, 여러모로 학교에 나가는 건 힘들게 됐어. 그래도 치하야는 여전히 학교나 밴드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점은 잊지 말아줘.”

“뭐,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일단은 알겠어. 나도 이만 자러 갈게. 잘 자.”

“응. 잘 자, 신이치.”


  신이치는 방에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나는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워 어두컴컴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밴드부 애들도 조금씩 곤란해 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학교에 나가지를 않는데 부활동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다시 내 안의 스스로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생각을 했고,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결단은 기존의 내 방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 라이브가 성공하면, 분명 치하야는 업계에 획을 그을 아이돌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내린 이 결정이,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정말 최선의 결정이었을까.

  나의 판단이 옳았기를, 최선의 결정이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는 천천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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