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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리]그저 당신과 ○○○○하고 싶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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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4, 2020 20:18에 작성됨.

동트지 않는 여명 속, 차갑게 식어버린 안개가 텐트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임종을 앞둔 애벌레처럼 침낭 속에서 웅크리다, 다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발버둥 쳤다. 조금만 더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찾아서.

차가운 폴리에스테르 비닐이 얼굴에 닿을 때쯤에야, 당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그제서야, 텐트에서 어둠이 물러간 것을 눈치챘다. 이미 세상은 일상을 시작해버렸다. 만일 새들이 일찍 일어났더라면, 나 같은 건 진작에 물어채갔을 지도 모를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지퍼를 연다. 침낭에서 몸을 빼낸다.


"하아......"


다시 한 번, 지익, 하고 지퍼를 연다. 텐트 안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내 뺨을 질책하듯 후려친다. 지친 몸에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아, 뼛속까지 시려온다.


"일어났어?"


따스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온기에 뺨이 한순간 풀어졌다가, 다시 한 번 찬바람을 마주해버린다.


"네..... 늦어서 죄송해요."


여명이라 보기엔 약간 늦고, 중천이라 칭하기엔 너무 빠른, 하지만 해는 모습을 비추지 않는 흐린 날. 당신의 아침 인사를 들으며 좌절감을 곱씹었다.


나, 모치즈키 히지리는 당신과 함께 아침 해를 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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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요?"


보통 내게 들어오는 일은, 노래와 관련된 일이다. 그것에 딱히 불만은 없다. 오히려, 그 외의 일을 준다면 불만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각자 걸맞은 일이 있는 법이다. 타다 리이나한테는 록 이외의 음악 관련 일이라던가, 마에카와 미쿠에게는 생선을 먹는 일이라던가 말이다.

그래서, 약간은 불만스런 눈초리로 프로듀서를 쳐다보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말이다.


"그건, 사치코가 할 일이 아닌가요?"


"이번에 갈 캠프 정도로 만족할 만한 애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내게 잡지를 건네주었다. 이번 달에 나온 최신 관광안내 잡지였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어본 듯, 책 옆면은 벌써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접힌 모서리를 다듬어, 잡지 한중간의 페이지를 열었다.

넓은 호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옆 공간 1/3정도가 캠프장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텐트를 쳐놓은 사진, 단란한 일가족이 모여서 뛰노는 사진, 밤중에 캠프파이어를 하는 사진, 고기를 구워 먹는 사진. 이쁜 사진들이긴 했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번에 정부 쪽 일을 좀 따와서 말이야. 그게 말이지 사실은 정부시책으로 국내 관광 활성화를......"


잡지에서 눈을 떼었다. 시선은 이제 당신의 말을 따라간다.

짐짓 일부러인 듯, 목소리에 악센트를 주고 강약을 조절해가며 약간의 열정을 담아 내게 설명한다. 조금 어려운 단어들이 나온 듯 하다. 말하다가 스스로 흥분하기라도 한 건지 조금씩 말이 빨라진다. 금새 깨닫고선 헛기침과 함께 필사적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게 귀엽다. 그러면서도, 일정하게,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레, 솔, 파, 파샵, 높은도, 시. bpm은 90 언저리에서 시작해서 평균 3초 간격으로 140 가까이까지 높아지다 다시 90으로 돌아간다. 미, 미, 라, 시, 파, 미, 레. 그의 목소리와 박자에 따라, 의자에 앉은 채로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이 춤춘다. 목과 머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흔들린다.

무언가, 화음을 넣는 게 좋을까.


".....라는 거지. 우리가 1주일간 대절해서 쓰는 거라 전염될 염려도 없고. 스태프도 우리 회사 사람들 뿐이야. 뭐, 걸려버리면 어쩔 수 없고."


"아아.... 그렇군요. 후훗."


내 음감이 이끄는 대로, 추임새로 웃음을 넣었다. 기분 좋은 화음이었다.


"그런 일인데, 어떡할래?"


내용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소리는 그 자체로 즐거우니까. 배경지식이 있다면 한층 더 깊이 즐길 수 있겠지만, 그 배경지식을 얻고 기억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아버리면 본말전도가 아닌가.


"좋아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우선 촬영 일정부터......"


당신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청명한 호수에서 느긋하게 쉴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다---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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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조금 늦은 밤. 스마트폰으로 그 캠핑장을 검색한다. 평점은 3.2/5였다. 의외로 좋지많은 않은 곳이었다. 그래도 풍경은 좋아 보인다. 시설은 약간 낡았지만 관리는 되는 것 같고, 마실 수 있는 수돗물도 나오는 것 같다. 위생은 좋아 보이진 않는다. 샤워실에 쥐도 좀 나오는 듯 하고.

하지만, 호반의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은 하나같이 호평 일색이다.


"그렇다면....."


상상해 보았다.

텐트 속에서 꼼지락거리다, 당신과 같이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그대로 내민 채로, 손을 잡고 텐트 바깥에 같이 나온다.

짙푸른 어둠이 걷힌다. 새하얀 안개들 사이로, 주홍빛이 산란한다. 아침새가 지저귀자 잔물결 하나 없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어둠을 사르는 빛줄기가 드리운다. 수평선 너머, 새로운 내일이 떠오른다.


나와 당신은 손을 잡는다. 그리고, 붉은 아침이 하얗게 타오를 때 쯤 서로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당신에게


"........꺄앗."


여기까지.

그래,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계획에 없다.

아니지, 이건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아니다, 계획인가? 아 모르겠다

잠을 자야 하지만 당연히 잠은 오지 않는다. 수면부족은 피부미용의 주적 중 하나인데, 스스로 수면부족을 불러와서야 대체 어쩔 것인가.


"조금이라면....."


그래도, 당신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건 역시. 

반짝이는 무언가가 명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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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무언가가 명멸했다. 또


깡!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쇠가 부러졌다. 프로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망치와 쇠못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큼지막한 쇠못은 부러져 있었고, 무거운 망치는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듯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세상에......"


어둑해지는 하늘의 시간을 따라 까마귀가 노래한다. 태양은 곧 저물 것이고, 아직 텐트를 피지 못했다. 바닥에 박아야 할 쇠못이 부러지는 소리만 몇 번 울렸을 뿐이다. 혹시나 싶어서 촬영 스태프가 삽으로 땅을 겨우겨우 파 봤지만, 불운하게도 쇠못에 두들겨 맞아 쪼개진 돌 같은 건 없었다. 현대인의 마음만큼이나 단단히 얼어붙은, 대자연의 냉엄함이 있을 뿐이었다.

12월 둘째 주. 눈은 안 내린다. 칼바람 소리가 귀를 베고 지나간 자리가 아려온다.


"자연이 우리를 거부하리라......."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화음을 넣고 싶은 목소리도 아니었고, 나 또한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12월의 한중간 속에서 텐트가 펴지는 걸 기다리길 몇 시간. 이미 내 손끝과 발끝은 현대인의 마음만큼이나 차갑게 아려오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하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촬영 스태프들처럼 숙소라도 따로 잡을 걸 그랬나....."


어차피 컨셉촬영인데, 라고 말하며 투덜거린다. 당신과 캠핑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던 내 마음도 점점 식어간다. 몇 시간 째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인 손발만큼이나.


.......변명을 하자면, 난 노는 게 일이다. 하찮은 자기변명이긴 하다.


"저기..... 제가 도와줄 만한 일은......"


"아직, 아직 할수 있어. 괜찮아."


주황색 노을의 영역이 검푸른 밤의 영역으로 덮여간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선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도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잘 보이는구나~ 마치 별빛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


"......."


".........저기"


현실도피는 좋지 않았다.


"도와줘."


촬영 스태프들은 진작에 철수하고 돌아갔다. 텐트 설치 컨셉샷 다 찍었다고 나몰라라 하고 칼퇴근을 해 버렸다. 캠핑장 관리인은 처음 인사한 이후로 코빼기도 안 보인다. 분명히 자연환경 좋은 시골 캠핑장이건만 인심만큼은 익숙한 도시의 향기가 났다. 아니, 어쩌면 사람 사는 곳은 다 야박할지도 모른다.


"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큼지막한 쇠못을 양손으로 잡아 땅에 박았다.

프로듀서가 망치를 조심스레 내리칠 때마다, 마치 손이 부서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쇳조각이 타면서 불꽃도 같이 튀어올랐다. 따스하진 않았다.

박을 때 따스할 거라던 성희롱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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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첫 날부터, 큰 시련이 있었다. 내가 바라던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그림은 없었다.

사실, 텐트를 설치한 후가 더 문제였다. 캠핑장에서 내가 쓰라고 나눠준 A자형 텐트는, 바닥이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물건이었다. 그 와중에 정부 캠페인 홍보문구는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깔고 쓰라고 에어매트도 주긴 줬다. 어딘가에 구멍이 퐁 뚫려있어서 아무리 바람을 넣어도 부풀어 오르질 않았지만.

당연히, 캠핑장 관리인은 전화도 안 받는다. 아니, 애초에 여기 전파가 통하기는 하나?


"라인전화도 안 받네......"


와이파이는 터지는 듯 하다. 본격적으로 웹서핑을 하기엔 많이 느리지만, 라인 정도의 어플리케이션을 쓰기엔 문제없을 정도의 속도다.


"그러면......."


프로듀서는 텐트 2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나는 내가 쓸 예정이었던, 캠핑장에서 나눠준 고물 A형 텐트. 다른 하나는 프로듀서가 치히로 언니의 발바닥을 핥고 빨아서 회사 경비로 구입한, 나름 튼튼한 캠핑용 텐트. 고정핀 대신 무게추를 사용하는 타입이다.

어디를 써야 할 지는 정해져 있다. 아니, 어쩌면

그래, 인생이란 때론 갑작스러운 우연 때문에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아이돌이 된 것도 좀 우연이었는데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 까진 아니지만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처럼 갑작스러운 충격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경험이 풍부해지면 노래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야. 


.....각오완료. 스산한 바람에 목소리를 태워!


"하는 수 없죠..... 저랑 같은 텐" "콜벤 부를께. 어디까지나 교통비니까 예산으로 처리 가능할 거야. 그나저나 숙박비는 어쩐다......"


"저기" "이럴 줄 알았으면 차 끌고 나올걸. 너라도 호텔에 재워두고 난 차에서 자도 되는데"


"같이" "아 맞다! 법인카드 가지고 나왔지! 와 이거 안 가지고 왔으면 큰일날 뻔했네. 하마터면 오늘밤 잠도 제대로 못 잘 뻔 했어."


"텐트" "걱정마. 자는 모습이나 텐트 치는 모습은 내일 적당히 찍으면 돼. 어차피 컨셉샷이거든."


"자, 그럼 방침도 결정되었으니 호텔로 가자고.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가장 비싼 방으로 잡아야지. 뻑유 칫히!"


그렇게 말하고, 무정한 당신은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줄 차량을 부른다.


"텐트는....." "그냥 두지 뭐. 혹시라도 바람에 날아가면 다시 설치하면 돼. 어차피 회사 비품인데 망가지든 말든 알 게 뭐람. 아,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러고보니 우리 저녁밥도 안 먹었지?"


"........"


이 사람은. 진짜.


".....따스한 요리라면, 아무거나....."


"그렇네. 게 우려낸 국물에 사쓰마아게랑 가마보코랑 소시지랑 무랑 넣고 끓인 오뎅같은 거 먹고 싶다. 아무리 끓여도 오뎅이로소이다는 솔직히 칭찬이지. 오뎅 맛있잖아."


그래도 저녁식사는 내 돈으로 낼게. 이건 원칙적으로 경비로 처리가 안되거든. 이라고 당신은 말했다. 

펄펄 끓어오르는 국물같은 기분을, 차가운 바람으로 겨우겨우 식혔다.


호텔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밤늦게 먹은 오뎅탕은, 속이 시원하게 풀릴 정도로 시원하게 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따스하기까지 했다.


"오뎅..... 맛있어요....."


"그렇지?"


속이 다시 끓어오를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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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라던가, 뭐 그런 운 좋고 편한 전개, 아니, 불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게 운 좋은 일일 리가 없다. 이런 게 운이 좋다고 생각해버리면 내가 마치 변태 같지 않은가. 무엇보다, 일단 아이돌인 이상 스캔들에는 주의해야겠지. 한낱 주간지의 가십거리가 되어서 사라지는 건 사양이다.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니까.


....마유 언니라면 때는 지금이다 하고 육탄돌격으로 결혼은퇴를 선택하겠지만, 난 아니다.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많은 나이다.


"으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뜨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이동하고 대자연에게 거부당하다 밤늦게 뜨끈한 국물로 속을 풀고 깔끔하게 따순물로 샤워까지 했으니, 잠이 잘 올 수밖에 없다.

어째서인지, 밤새 이를 갈은 듯 하지만. 역시 피곤해서 그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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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죄송합니다. 어제 집사람이 갑자기 아파가지고 급히 병원에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죠. 다음부턴 연락이라도 해 주세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프로듀서의 웃음소리. 그 속엔 '이번은 속아준다. 다음에 팔아먹을 와이프는 없을 거다'라고 말하는 듯 한 불신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늙은 캠프 관리인의 미안한 듯 조아린 목소리는 새로운 가족의 등장과 다채롭게 꼬리를 무는 불행을 암시하고 있었다.


"자, 여기 도구도 가져왔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늙은 관리인은 마지막까지 웃으며 떠나갔다. 가족이 힘든 일을 당했을 때의, 그 특유의 슬픈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관리 못하겠으면 연금이나 받아먹고 살 일이지....."


당신의 혼잣말에, '그러게요'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딱히 늙은 관리인이 밉거나 꼴불견인 건 아니다. 그저 분노가 실린 당신의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트리고 싶었을 뿐이다. 내 말을 섞음으로.


"우선은..... 촬영부터 하죠."


"그러자. 에휴. 스태프 분들도 준비해주세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움직인다. 말라버린 풀들이 저벅거리며 밟힌다. 싱그러운 내음이 귓가에서 부서진다. 이미 갈색이 된 초원 사이에 깔린 빛바랜 낙엽들은, 소리를 통해 자신이 마지막에 어떤 색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반으로 조각난 단풍잎을 집어 들었다. 갈색이었다. 살짝 손으로 문대자 어이없게 으스러져 귓가에 단말마를 남기곤 바람을 타고서 떠났다.


준비가 완료될 때 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을 터.


"저기... 프로듀서...."


잠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아, 잠시만. 전화왔다. 여보세요? 예, 센카와씨...... 아 그게 말이죠 어제....."


......어제 호텔을 잡은 건에 대해 따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그녀는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도 해 줄 것이다. 사람을 엄동설한 속, 그것도 지친 남녀를 한 텐트에 처박아두라고 할 정도로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오니, 악마, 치히로는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누명이 아닐까 싶다.


수전노. 잘 쳐줘봐야 역병신. 공물을 드릴테니 제발 저와 프로듀서만큼은 살려주세요.


".....하아."


분주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내 한숨소리를 비웃듯 메워간다. 자연환경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페이가 빵빵하게 나와서인지 모두 힘차게 일하고 있다. 어차피 정부 돈 먹는 거니까 조금은 느긋하게 해도 되련만. 전화는 끝도 없이 길어지고, 준비는 척척 진행되고, 그리고 나만 홀로 당신의 등을 쳐다보며 기다린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 예."


마치, 일부러 무심히 대하기라도 하는 듯. 등을 돌린 채 돌아봐주질 않는다.

한 번 발로 걷어차면 좋은 소리가 날 것 같다. 하지만, 날 위해서 바쁘게 일하는 중에 그런 짓을 해선 안 되겠지.


"으으으......"


무연히 발 밑의 낙엽만 걷어차며 기다린다. 잘게 부서진 낙엽과 마른 풀들은, 이제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다. 당신의 등을 향해서 발을 흔들어 보지만 거기까진 닿지도 못하고, 이내 무릎 언저리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몇 번을 해봐도, 마치 더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마냥, 그저 시계추처럼 그 시간을 반복한다.


말소리가 멈춘다.


"예. 그럼 오뎅도 경비 처리하는 걸로....."


통화음이 꺼진다. 삐익, 하는 소리가 기대감을 돋군다. 

아직 조금 남은 시간이라면


"저기" "다됐슴다! 빨리 시작하죠!" "예~ 히지리도 준비 끝났지? 오늘 찍어야 할 분량 많으니까 빨리 시작하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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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둘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싶었을 뿐이다. 야한 행위라던가, 그런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식은 당연히 있고, 학교 친구들이 돌려보던 영상을 몇 번 본 적도 있다. 나름 두근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프로듀서와 일 때문에 캠핑을 간다고 하자, 자기 남친이 쓰고 남은 거라며 흥분한 얼굴로 콘돔을 주던 반 친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관계가 아닌데. 나와 당신은. 아니라고


"네. 표정 좋고요. 그대로 포즈 잡아주세요. 턱은 좀 더 위로. 네. 좋습니다. 찍을게요!"


"한 20분 후에 휴식 넣죠. 찍을 분량이 많긴 해도 제때제때 쉬어야죠."


"야간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바람에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내고 있다. 당신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 자세 때문에 당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섞이는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마실 거 사온 거 있어요?"


"펩시콜라요." "태극무늬? 재일이었어요?" "한번만 더 그딴 개소리하면 제로칼로리 사올 겁니다."


"아, 자세 바꾸시면 안돼요. 좀만 참으시고......"


무심코, 손바닥을 귀로 가져갈 뻔 했다.

제로칼로리 펩시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꽉 막힌 병 속, 무언가가 나가지 못하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른다. 




---------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어둑함을 넘어선 밤하늘. 이미 까마귀 소리는 들리지 않고, 부엉이가 먹이를 찾아 해메이는 소리만이 들린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고양이 소리와 함께 푸득거리는 날개소리도 들려온다. 저 멀리 소리없이 날아가는 무리는 박쥐겠지.

인도와 차도가 하얀 페인트 선 하나로 구분되는 곳 앞에서, 스태프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차가 떠난 자리에 어제 머무른 호텔이 보인다. 아마 오늘도 머물게 될 것이다.


"후우......"


일본의 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대식 건물이다. 솔직히 이런 외진 곳 보다는 관광지의 도심지 근처에 더 어울릴 듯 한 모습이다. 온천도 없다! 온천 하나 없는 숙박시설이 일본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 적어도 목욕탕이라도 있어야지.


"오늘 저녁은 대충 호텔에서 주는 거 먹자."


호텔이라고 해도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다. 멋들어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단촐함만을 겨우 면한 실용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식당이다. 미닫이식으로 대충 만들어둔 창문엔 어째서인지 헤진 시트지가 붙어있어서 바깥이 안 보인다. 애초에 1층에 있는 식당이라 별로 기대할만한 풍경도 없지만.


즉, 무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히, 인스턴트 카레를 대충 전자레인지로 데워다가 , 마찬가지로 전자레인지로 데운 인스턴트 쌀밥 위에 뿌렸을 뿐인 카레라이스를 씹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프로듀서의 입에서 씹히는 돈까스도, 영 먹음직스럽지 못하다. 튀긴 빵가루 특유의 바사삭한 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육즙이 늘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치 눅눅한 빵 속에서 곰팡이 핀 마분지를 씹는 듯한 소리가 난다.


게다가


"뭐 안 좋은 일 있어? 표정이 영 별로네."


"......조금, 촬영이 힘들었나봐요."


"아, 오늘 일정이 좀 빡빡했지. 미안. 내일은 여기 밥 말고 제대로 된 게 나올 거야."


당신은


"내일은 캠핑 먹방이거든. 재료는 스태프들이 다 준비해 줄 거고 요리도 거진 다 해 줄 거야. 히지리는 그냥 시늉만 하고 밥만 먹으면 돼."


"밥이 불만인 건 아니에요...."


"나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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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듯 한 태도로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순 없었다. 이런 자리라도 없으면, 이번 일 동안 당신과 이야기할 기회가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불만족스런 기분으로, 불만족스러운 식사를 하며, 불만족스러운 회화가 될 걸 알면서도. 나는 굳이 당신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는 걸 택했다.


[오늘은 일찍 자]


[내일 촬영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가자. 회사카드로]


"하아......"


이렇게 보면, 참 아이같아 보인다.

진짜,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이런 사람이랑.

괜한 걸 기대한 내 잘못인가 싶기도 하다. 내가 원하던 건.


".....자자."


어찌되었든, 내일은 내일의 촬영이 있다. 당신이 가져다준 소중한 것이 있다.

비록 내가 원하던 것과는 많이 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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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호텔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햇님이 마중나와주었다. 

오늘로써 3일째다. 앞으로 4일.

컵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는가, 반이나 남았는가는 사람 마음먹기라고 하지만 기한이 반밖에 남지 않은 것과 반이나 남았다는 걸 비교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다. 기한은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반이다. 마지막 날은 도쿄로 돌아가야 하니까.


지글지글지글.

마음이 타들어 간다.

모닥불이 타닥거린다. 고기를 끼워넣은 석쇠에 검댕이 묻는다.


"히지리쨩~ 스마일~ 네~ 좋아요!"


"영상 촬영 시작합니다. 큐 사인 떨어지면 고기 먹어주세요. 3, 2, 1. 큐!"


약간 거무스름하게 탄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다. 입이 작아서 한입에 다 집어넣진 못했다. 카메라는 자연스레 내 얼굴과, 잘린 고기의 단면을 같이 클로즈업한다. 그래도 미소는 지어진다. 이럴 때가 아니면 와규를 언제 먹어보겠는가? 아마 영상에는 영어로 된 나레이션이 함께 붙어서 일본 후쿠시마산 와규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참고로 이 와규는 가고시마산이다. 차마 후쿠시마산을 쓸 만큼 양심이 없던 건 아니었던 듯 하다.


".....컷! 좋아요! 자 그럼 다음" "밥먹고하죠." "찬성!"


또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맛있는 밥이 있어서인지 좀 더 활기찬 분위기다.


"라클렛에 쓴 치즈 치우죠. 어우 냄새나...." "예? 맛만 좋은데...." "이게요?" "낫토도 향이 좀 안좋아서 그렇지 먹으면 맛있잖아요." "저 낫토 못먹어요." "차라리 한국인이 김치 못먹는다는 말을 믿지." "아니 갑자기 선넘네?" "김씨 이년이 김치를 모독했습니다." "불닭볶음면형." "여기요~"


분위기에 휩쓸려, 불닭볶음면에 치즈를 많이 섞어서 먹었다. 입과 위장을 상하게 할 정도로 매운 면발과 소스를, 치즈가 딱 알맞을 정도로 중화해주었다.


"먹을 건 많아. 실컷 먹어."


"저녁에 먹을 건, 남겨놓죠."


"괜찮아.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아."


당신은, 큼지막한 양고기를 호쾌하게 뜯으며 말했다. 갈색으로 그슬린 다리뼈를 잡고, 두툼한 살을 입으로 뜯어낸다. 마치 고기로 된 도끼를 뜯는 듯 하다. 이에 걸린 고기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찢어질 때마다, 안에서 터져나온 물소리가 침샘을 두들긴다. 아까울 정도로 흘러내린 양고기 육즙이 마른 풀밭을 적시면, 여기서 내년엔 양고기나무가 자라는 걸까?


뽀송뽀송한 양털같은 잎 속에 손을 집어넣어, 양을 끌어내면, 메에-


"푸훕."


"옷 조심해."


"안흘렸어요. 그냥 재미있는 상상을, 켈록, 해서, 훕..... 파하...."


"무슨 상상인데?"


"그게.... 푸하하....."


내가 웃었다. 당신도 미소지었다.

즐겁게 웃는 모습에, 나도 그만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횡경막이 들썩인다. 촬영용 의상을 더럽히면 안 되지만, 도저히 미소를 억누를 수가 없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당신이 웃는다. 그러면서도 조금 튀어배긴 고깃조각을 물티슈로 잽싸게 닦아주었다.


"양이, 양고기 육즙이...."


당신도 웃어주길 바란다.


"양고기 육즙이..... 땅에" "꺄악!! 쥐!!"


누군가 외쳤다. 웃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튀어올랐다. 그런 식으로 비명을 지를 수 있구나.


"어디, 어디야?!"


"떨어져요! 잘못하면 진짜로 죽는 병 옮아요!"


"아니 이시국에 코로나도 아니고 유행성출혈열이라니......"


"안다쳤어요?"


"그 쥐새끼 어디있어요?" "저기요. 아, 간다."


갈색 들쥐가, 날 한번 쳐다보고 사라진다.

이새끼가 누구 놀리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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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뒤로 식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종료되었다. 쥐가 파먹었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함부로 입에 대기 껄끄럽다는, 그런 이유였다. 그런 걸 걱정할 거면 당장 방역수칙도 지키지 않는 이 촬영을 어떻게 해 줬으면 하지만, 그런 건 또 칼같이 무시하는 게 도리 아닌가. 냄새나는 것엔 뚜껑을 덮어두는 법이다.


당신도 현장 수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촬영도 얼마 안 가 끝나버렸다.


"그래도 스태프랑 협상해서 몇 개 얻어왔어. 이 정도면 우리 둘이 먹긴 충분할 거야."


겨울 산의 저녁은 빠르다. 이제 4시를 좀 넘긴 정도지만, 벌써 캠프장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아마 5시쯤 되면, 나무숲 속은 밤과 별 차이도 없을 정도로 어두워질 것이다.


"자, 그럼 조금 이른 저녁밥을 먹을까."


"하지만.... 모닥불이....."


촬영용으로 세팅한 모닥불은, 이미 형태면 겨우 유지하고 있는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내가 건들기만 해도 툭 부러지면서 무너져내릴 게 분명하다.


"그런 고급스러운 건 안 써."


당신은 가방에서 버너와 냄비와 도마와 식칼 꺼냈다.

촬영용으로 썼던 고급스러운 조리도구와는 전혀 다른, 일반 가정집에 있을 법한 물건이다.

제대로 닦지 않은 버너는 갈색으로 눌어붙은 자국이 가득해서 스테인리스의 찬란한 광택을 잃었다. 냄비는 분명히 평소에 당신이 쓰던 걸 가져온 거다. 바닥이 눌었다.

도마와 식칼도 이하동문. 도마에는 잔칼자국, 식칼에는 갈은 자국.


"아까 쓰고 남은 야채 있지? 그것 좀 썰어줄래?"


"네. 크기는 어느 정도로요?"


"대충.... 아, 엄지손가락 정도로?"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내 신세가 조금 처량하지만, 그래도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욕심을 내 볼까.


"손 주세요."


"응?"


"엄지손가락 크기요."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추운 겨울 바람 속, 당신의 온기가 느껴진다. 조금 당황해서 숨을 들이키는 당신의 그 소리가 귀엽다. 콩닥콩닥, 심장소리가 귓가를 메운다. 숨소리가 섞인다. 손이 따뜻해진다, 심장에서 퍼진 소리가 손바닥까지 전해진다. 당신의 손바닥에서도 터질듯한 소리가 난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같아질 때까지, 그렇게 손바닥을 붙이고 있었다.


"어...... 히지리 엄지손가락 크기면 돼. 굵기도 그 정도로. 정확하게 맞출 필요는 없어."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바닥을 떼었다.


"네~"


입꼬리가 올라간 만큼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금 전의 나는 미친년이 분명했다.

장인의 마음으로 명경지수 명경지수를 유지하며 야채를 썰자. 그래 우선 단단한 것부터. 그러니까 감자랑 당근이랑.


"안, 안 다치게 조심하고."


서걱, 쿠직.

하마터면 손가락을 크게 다칠 뻔 했다. 이건 당신이 나쁘다. 무조건. 당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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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은 남은 고기에서 지방 부위만 잘라 쓰는 걸로 대신했다. 나와는 다르게, 나름 능숙한 칼솜씨다. 도쿄에서 혼자 생활한 지 몇 년 째라더라. 그러고보니 응용력도 뛰어난 것 같다


그 기름으로, 내가 썬 야채를 볶는다. 삐뚤빼뚤. 엉망진창으로 잘려나간 야채들이다. 이런 조잡한 결과에 '다듬었다'라는 동사를 사용할 수 있을까? 조각별로 크기가 거진 2배 차이는 나는 듯 하다.


"음~ 흥흥흥~"


그럼에도, 당신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냄비에 담긴 야채들을 휘젓는다. 약간 불이 강했던 건지, 기름이 바닥에 눌어붙어 갈색으로 타는 듯 하다.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숟가락을 휘저어간다.


하지만, 나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 성급했던 거 아닐까. 역시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성공의 비결이었던 걸까?

후회해도 늦었다.


"으으으....."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어버렸다.

당신의 콧노래조차,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평소라면 화음을 넣어, 노래로 돌려주었을 텐데.


둘밖에 없는데.

이 얼마나 한심하고 아까운 짓인가.


".......저기."


"녜헵!"


"아,그게... 그... 고기 줘."


"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고기를 찾는다. 고기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도 되는 것마냥 말이다. 인생엔 고기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법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고기는 찾았다.

당신의 옆.

몸을 쭈욱 뻗었다. 당신의 다리를 넘어서.


"어, 우왓! 잠깐!!"


팔을 쭉 뻗는다. 다리가 불안정할 정도다. 그리고 손에 딱딱한 뼈가 잡힌다. 아까 굽기만 하고 먹진 않은 양고기다. 하나는 당신이 다 먹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남아있다. 양고기 카레라니 럭키잖아~


"위험해!"


툭. 발이 허공을 차냈다. 몸이 쓰러진다. 고기를 쥔 양 손이 허우적거린다.


그의 무릎 위로.


"......."


"......."


단단하게 껴입은 패딩 덕분에 그리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한 부분이 상처를 입은 것 같다. 마치, 전쟁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내상을 입은 병사의 기분이 된 듯 하다.


그렇게 슈퍼맨 자세로 굳어버렸다.

양고기를 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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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고기를 받았다.

한 손으로 고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잡아서 능숙하게 고기를 토막낸다. 결대로 해체된 고기가 냄비 안으로 다 들어갔다.


이제 당신은 양파도 집어넣고, 둘을 같이 볶는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당신은 팔을 움직일  때 마다, 내 머리카락을 건드린다. 의외로 나쁘지 않다. 스타일리스트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준 웨이브파마가 흐트러질지도 모르지만, 무심코 당신이라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린다. 패딩과 머리카락이 서로 스치며 사각거린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다. 조금 타는 듯 한 냄새가 난다.


".......다 볶아진 거 아닐까요?"


"어, 그렇지. 물 넣어야지. 이제 끓어오르면 그 때 카루가레 넣으면 돼."


"카레가루."


"그렇지."


"......"


"......"


"......저기, 내려" "싫어요."


무거우니까 내려오라고 하면 당신이라도 용서 못한다.


"조금, 더워....."


"전 추워요."


"음, 우선 팔이랑 다리는 좀 바닥에 내려놓자."


그제서야, 팔다리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통증이 퍼져나왔다. 이건 자업자득이었다.


"......"


"......"


"......흥흥흥~"


당신은 어색하게 콧노래를 시작했다.

물은 아직 끓어오르지 않지만, 당신은 다시 숟가락을 넣어서 바닥이 타지 않게 저어준다. 이렇게 하면 끓어오를 때까지 시간은 좀 더 걸려도, 바닥은 타지 않는다고, 이전에 당신이 말한 적이 있다. 그때의 당신은, 마치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며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흥~흥흥~"


그때도, 당신의 박자에 맞추어 이야기를 했다. 이제, 당신의 콧노래에 맞춰 나도 콧노래를 부른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호반의 캠핑장에,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서툴지만 청아한 한 쌍이다. 냄비가 끓어오른다. 당신은 카레가루를 털어넣는다. 경쾌하게 보글거리던 물은 이제 조금 진중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다. 콧노래에 베이스가 더해졌다. 풍성해진다.

당신의 남은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마치, 모래로 연주하는 하프 같은 소리가 난다. 숟가락이 냄비에 부딪힐 때 마다, 경쾌한 드럼 소리가 된다.

나와 당신의 하모니가, 맛있게 무르익어간다.


고개를 돌린다. 당신이 보인다. 당신의 눈 안에 이제 내가 보이는 듯하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마치 이때라는 듯, 몸이 따스해진다.

당신이, 내려온다.

그리고, 후광이 당신의 등 뒤에서











"거기 사람 있어요?"


강렬한 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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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울 땐 태산같이 움직일 땐 바람같이.

난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당신은 숟가락으로 카레를 조금씩 퍼서 각자의 그릇에 나눠주고 있었다.


"아이고, 난 또 곰이 촬영장 뒤집어놓은 줄 알았지. 여기가 말이죠 가끔씩 밤에 곰이 여기 내려와요. 평소에는 경보장치에 걸리는데 혹시나 해서 순찰 나와보니 뭔 덩어리가 있지 뭐여."


늙은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며, 냄비에서 잘 익은 즉석밥을 꺼냈다.

이 냄비는 관리인이 따로 챙겨다니는 냄비라고 한다. 이 즉석밥도 말이다. 왜 그런걸 챙겨다니는 걸까.


"그런데 밥도 없이 카레를 한 거에요? 너무 성급하시다. 아가씨가 이럴 땐 야무지게 잡아줘야지."


렌지가 없어서 냄비에 넣고 데운 즉석밥 위에, 되직한 카레가 올라간다.


"아하하....."


"암튼, 요즘 사람이 없어서 곰들이 기어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겨울 곰은 진짜로 무섭다고요. 특히 이 계절까지 잠들지 못한 놈은 말이죠. 어디보자, 그게 한 30년 전쯤 일인데 그때 여기에 놀러온 커플이......"


늙은 관리인은, 어느새 우리와 동석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당신 사이에.


이 늙은이는 진짜


"자자, 밥도 잘 익었으니 먹읍시다. 아, 여기 원래 저기 취사장 말고 다른 곳에선 취식금지인 거 아시죠? 오늘만 넘어가 드리는 겁니다~ 특히 이 계절에는 말이죠 산불이 나기가 쉬워요. 21년 전에 말이죠...."


늙은 관리인은, 어둑한 곳 너머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 좋은 듯 웃는 그 면상에, 펄펄 끓는 진득한 카레를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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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으로 가득 찬 아침을 맞이하였다. 오늘은 날씨도 흐리다.


"......으아아아아아......"


4일째.

침대 위에서 바둥거린다.


당신은 날 내버려두고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러 갔다. 왜. 어째서. 날 두고.

난 그저 당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왜, 안되는 건가요......."


마치 운명이 비웃기라도 하는 듯. 당신과 같이 있을 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항상 결정적인 곳에서 방해가 들어온다. 오늘은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어째서어......."


버둥거리다 침대 위에 둔 가방이 튀었다. 친구가 챙겨준 콘돔이 날 비웃듯 날아올라 내 얼굴 위에 착 떨어졌다.


"그와는,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아직, 고백조차 하지 못했는데. 단계를 너무 뛰어넘는 게 아닐까.

콘돔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한숨에 낡은 매트리스도 꺼져가는 듯 하다.


스마트폰에는 결과 보고를 독촉하는 친구들의 메세지가 가득하다. 지금 누구 놀리는 건가 싶어서 보고도 모른 체 했다.

당신이 보낸 메세지만 읽었다


[날씨가 안 좋아져서 대책회의 좀 하고 올게. 오늘 하루는 호텔에서 쉬고 있어.]


이 촌구석에서, 달랑 스마트폰 하나 가지고, 당신이 없는 오랜 무료를 버텨내라고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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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죠. 이 부분은 빼고, 이렇게만 촬영합시다. 조명 넣어주시고요. 예."


눈도 안 내린 호숫가에 하얀 토끼가 뛰어다닌다. 물론 촬영용으로 풀어둔 거다. 동물 관리하는 사람들은 행여나 토끼가 이상한 곳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낮은 철책 같은 걸로 촬영장을 덮은 걸론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엉덩이부터 받히고.... 네, 그렇게."


"저기, 토끼가 자기 설사똥을 먹는데요."


"아, 그건 괜찮..... 아, 지금 낮이지 참. 아무튼 괜찮아요."


원래는 호수에 비치는 태양을 테마로 몇 개 더 찍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철수하는 날까지 쭉 흐릴 예정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내용을 줄였다. 스태프들이 이 사실을 두고 좋은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했는지, 아니면 촌구석에서 빠른 탈주가 가능하게 되어서 기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의 톤으로 봤을 땐, 후자에 가깝지만.


하지만 난, 명백히 낙담하는 쪽이다.


5일째. 이제 긍정적인 정신을 논할 시점은 지나가 버렸다. 날씨는 내일도 흐릴 예정이며, 내일모래에는 나도 당신도 스태프도 전부 다 철수할 계획이다. 그리고 내가 세운 원대한 계획, 아니, 사소한 우연에 맡긴 귀여운, 아니 기대하던 행운은 전부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의 진의를 조금 이른 나이에 깨달아버린 것이다.


"....."


"아, 방금 그거 귀엽네요. 그대로 유지해주세요."


나름 삐졌다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는데, 그게 또 귀엽댄다.

당신이 말해주면 좋겠지만, 남에게 듣고 싶지는 않은데.


"네, 좋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촬영 준비할게요. 이번에는....."


일정을 줄인 만큼 빠듯하게 움직인다. 난 그저 당신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바쁘기는 톱 아이돌만큼이나 바쁘다. 콘서트 때문에 바쁜 거라면 차라리 기뻐할 테지만, 이건 노래를 부르는 일도 아니다. 슬프게도 말이다.


"어... 이건....."


"적당히 포토샵으로 보정하죠. 시간 없으니까 다음 거 빨리 찍어요."


"잠시만요, 수정할 곳 좀 체크해주고..... 됐어요."


"수정하기 힘들어요?"


"약간요. 그래도 원판이 좋고 다른 사진들이 수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나와서 괜찮아요."


촬영은, 오늘과 내일이 마지막이다

원래는 7일을 가득 채울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레 날씨가 변덕을 부렸으니 뾰족한 수도 없다. 게다가 여유도 없다. 4일째 촬영과 7일째 촬영을 날려버린 만큼, 오늘과 내일이 힘들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이 일정이, 줄이고 줄인 일정표인 것이다.


"모치즈키 씨 집중해주세요. 카메라에 시선고정하시고, 다시 한번 액션."


"코로나로 힘든 지방을 살리자~ 오늘은 저 모치즈키 히지리가......"


이미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닿지 않는 목소리만이 서로를 애타게 찾다 지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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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이 내려온다.


"일단 경보장치는 문제없으니까 곰 걱정은 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경보기가 울리면 바로 저기 오두막으로 도망치고 연락하세요."


촬영은 당연히 계속된다. 밤하늘엔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사진이 실릴 땐, 누군가가 편집해서 하늘에 별가루를 뿌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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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니미. 이짓거리 내일 또 해야돼."


"불평하지 마요. 날씨 때문에 꼬인 걸 어쩌라고...."


"난 욕도 못해요?" "아 좀 조용히 하고 넘어갑시다." "숙소 가서 샤워부터 할래....."


"장비 정리 안해요?" "냅둬요. 어차피 내일 쓸 거. 카메라 같은 전자기기만 챙겨갑시다."


신경질적인 목소리, 다툼과 불화의 화음.

무심코 귀를 막았다. 당신의 목소리가 저기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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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늘의 촬영은 끝났다.

밤은 늦었고. 돌아갈 수단조차 마땅히 남아있지 않다.


"......"


내일도, 이 짓을 해야 한다. 물론 밤늦게까지.

차라리 이런 일, 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괜한 기대로 마음만 상하고, 좋을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만 들어오고. 같이 있으려 해도 나도 당신도 바빠서 같이 있지도 못하고. 쓸데없이 짜증만 나고, 시설은 개판이고, 서비스도 개판이고, 당신은 일이나 우연에 쫓겨서 날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이제 지쳤다. 그냥 내일 늦게라도 돌아가고 싶다.

다시 한 번 독백하건대, 이렇게 실망스러울 줄 알았다면


"히지리 오늘은 캠핑 한 번 해볼래?"


이렇게 실망스러울 줄

알았다면


"......네?"


"아니, 그 뭐냐. 기껏 캠핑장에 왔는데. 한 번도 안 하고 가는 건 좀 아깝잖아."


무언가 다른 뜻을 숨기고 있는 목소리. 하지만 악의도 없고, 진의와 말이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


"솔직히 내가 기대하고 있었기도 했고. 캠핑 같은 거 말이야. 남자라면 한번 쯤 해보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일부러 회사 예산으로 텐트도 사 온 건데. 치히로 씨한테 욕 먹어가면서."


"그런..... 가요?"


"뭐 그런 거지."


얼버무린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아마 내가 아니어도 눈치챌 정도로, 확연히 알 수 있는 목소리다.


".....혹시, 싫어?"


조심스러운 목소리


"아니요."


그리고, 붉게 물드는 대답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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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의 상황은 첫날과 다를 게 없었다. 한쪽은 못 쓰고, 남은 한쪽은 쓸 수 있다.

당신을 풀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고, 나도 그런 곳에서 잘 수는 없다. 결국 답은 하나다


"......."


당신이 침낭 속에서 뒤척이며 조용히 코를 골 때쯤에야, 콘돔을 방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당신이 자는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았다. 아주 조금 몸을 밀착시켰다. 침낭 너머로 따스함이 전해졌다.

그렇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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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지 않는 여명 속, 차갑게 식어버린 안개가 텐트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임종을 앞둔 애벌레처럼 침낭 속에서 웅크리다, 다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발버둥쳤다. 조금만 더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찾아서.

차가운 폴리에스테르 비닐이 얼굴에 닿을 때 쯤에야, 당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그제서야, 텐트에서 어둠이 물러간 것을 눈치챘다. 이미 세상은 일상을 시작해버렸다. 만일 새들이 일찍 일어났더라면, 나 같은 건 진작에 물어채갔을 지도 모를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지퍼를 연다. 침낭에서 몸을 빼낸다.


"하아......"


다시 한 번, 지익, 하고 지퍼를 연다. 텐트 안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내 뺨을 질책하듯 후려친다. 지친 몸에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아, 뼈 속까지 시려온다.


"일어났어?"


따스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온기에 뺨이 한 순간 풀어졌다가, 다시 한 번 찬바람을 마주해버린다.


"네..... 늦어서 죄송해요."


여명이라 보기엔 약간 늦고, 중천이라 칭하기엔 너무 빠른, 하지만 해는 모습을 비추지 않는 흐린 날. 당신의 인사를 들으며 좌절감을 곱씹었다.


나, 모치즈키 히지리는 당신과 함께 아침 해를 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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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이번엔 어제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 시시한 걸로 싸울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자, 라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촬영은 날림이 되었고, 건질 만한 사진과 영상은 점점 적어져만 갔다. 편집자가 홀로 걸걸한 욕설을 날리는 장면이 눈에 아른거린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다......"


"빨리 들어갑시다. 추워 죽겠네."


"이시국에 대체 무슨 개짓거린지 원....."


그러거나 말거나, 촬영은 끝났다. 조명은 꺼지고, 스태프들은 어둠 속으로 철수한다. 무대 바깥에 난잡하게 어질러진 장비들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간다. 캠핑장에서 내준 텐트는 2시간 전에 철거했다. 구멍 난 매트는 고이 구겨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공기펌프랑 같이.


이제 어둠만이 남았다. 서늘한 바람 소리가 날 조롱하는 듯 하다.


....그래, 원하는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찌 되었든, 끝이 안 좋긴 했어도 좋은 추억들은 남길 수 있었다. 부엉이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를 시간은 오래전에 지났다. 짜증을 담아 바닥을 찼다. 짓밟힌 잔디가 흙더미와 같이 튀어올랐다.


패여 꺼진 땅에 한숨이 고인다.

비웃는 것처럼 선명하게 웃는 초승달이, 실패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별들이 다시 하늘을 수놓고 있다. 캠핑장의 호수는 넘쳐나는 별빛들을 담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맑은 하늘이 호숫가에서 넘쳐흘러, 캠핑장에 넘쳐흘렀다. 


"히지리, 슬슬" "당신---프로듀서!!"


기회는, 지금뿐이다!


"오늘 밤, 캠핑하고 가요!! 내일 아침 해 뜨는 거 보고 가요!!"


당신의 손을 잡고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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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알림을 맞춘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눈을 떴다.

텐트 속에서 꼼지락거리다 천천히 일어났다. 물자국은 다 말랐다. 결로라고 해 두자. 흐트러져서 완전히 풀어져버린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오는 듯하다. 눈을 깜빡이고 머리카락을 치웠다. 일어나기 시작하는 당신이 보인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렇게, 옷을 차려입고 바깥으로 나간다. 다리와 허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제대로 걷질 못하는 날 당신이 받쳐준다. 그렇게 당신에게 의지하며 걸어간다.


"......"


호수까지 가는 짧은 언덕길인데, 당신에게 등을 완전히 내준 채로 밀려올라갈 뿐인데도 숨이 거칠어진다. 그럼에도 부끄러워서 입을 앙다문다. 그런데도 즐겁다. 서로의 숨소리가 섞이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재밌다. 방금 전까지 부끄러웠다는 걸 잊을 정도로.


"푸훕. 아하하하....."


결국, 내가 먼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아하하하......"


".....푸훕, 하하하."


당신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날 따라서 웃는다.


그래, 이러고 싶었다. 당신과 같이, 호숫가에 앉아, 함께 재잘거리고,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짓을,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함께 사고를 칠 계획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아픈 오산이라고 해 두자.


이제 짙푸른 어둠이 걷힌다. 새하얀 안개에 부딪힌 주홍빛 햇님이 산란한다. 아침새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지저귀자, 잔물결 하나 없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어둠을 사르는 빛줄기가 드리운다. 수평선 너머, 새로운 내일이 떠오른다. 생각보다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나와 당신은 손을 잡는다. 그리고, 붉은 아침이 하얗게 타오를 때쯤, 겉옷만 걸친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

내 마음을 당신에게-----






마지막 날.

오늘은, 하루종일 같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당신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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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갈 말은 여러분이 직접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로리콘들아.

아무튼 이걸로 마감 전 제출은 성공. 그러고보니까 어느 새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전 잘 못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오랬만에 써서 그런지 처음엔 손이 잘 안 풀렸습니다. 썻다 지우기를 수십번은 아니고 여섯번.

그러다가 데레메일 답변 히지리 편을 보고 '아, 이거다'싶어서 바로 플랜 세워서 써내렸습니다. 하루에 조금씩조금씩 쓰다가 22일에 완성하고 23일이랑 오늘에 걸쳐서 조금 다듬어서 완성! 악기 배우는 스토리는 쓰다가 폐기함. 사라져라 내안의 강마에 칸타빌레.


처음엔 '노래'라는 테마를 가지고 어찌어찌 주물러보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래 쪽에선 치하야라고 하는 압도적인 캐릭터가 있어서 그 영향을 못 벗어나겠더라고요. 맨 처음엔 히지리가 765의 대선배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가슴을 키우려 하는 그런 개그감성 가득한 스토리였습니다만 치하야 디스 요소가 강하면 강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치하야 이야기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해서 폐기했습니다. 트럭으로 밀어버릴만한 가족드라마적 요소도 없고 말이죠.

그런 와중에 데레메일이 딱 좋게 나와줬습니다. 다행이야 치하야쨩. 이번엔 가슴으로 디스 안 당했어.


아무튼, 처음으로 써보는 히지리 글이어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부디 즐겁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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