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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2장, 새까만 숲의 노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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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4, 2020 02:11에 작성됨.

-제12장-

새까만 숲의 노래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2학년 A반 ------ 타도코로 신이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언제나와 같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수영부나 테니스부, 야구부 같은 애들은 여름 내내 연습 때문에 바쁜 것 같았지만, 우리 밴드부는 적당히 개인 연습을 하는 걸로 하고 방학 중에는 따로 모여서 연습을 하지는 않았다. 모임이라면 치하야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무도관에 갔던 게 전부다.

  사토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고, 카츠라기는 평소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평소 나의 여름방학은 딱히 특별하다고 할 일이 없었다. 3년 전, 그러니까 그 사진을 찍었던 그 해 이후로 유이나가 중학생이 되면서 해변에 갈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 사이 내 여름방학은 주로 집 근처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거나 시내를 돌며 사진을 찍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올해는 오랜만에 카나가와에 다녀왔다. 물론 혼자였다. 어머니는 회사 일 때문에 바쁘셨고, 뮤 삼촌도 치하야의 라이브 때문인지 여름방학 내내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이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는 여중생인 유이나는 같이 가자고 해도 싫어할 게 뻔했기에, 나는 카메라에 기타만 들쳐 메고 난생 처음 혼자 가는 여행을 해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타는 왜 메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떠돌이 음악가의 기분을 내보고 싶었달까.

  그렇지만 해변에 갔다고 해서 혼자서 모래성을 만들었다거나, 수영을 즐겼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도 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혼자서 해수욕을 즐기는 건 그거대로 좀 이상하니까.

  나는 그 대신 주변을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말했듯이 해변에 간 것이 3년만이었기에, 맨날 도쿄의 건물들만 찍어대다가 오랜만에 자연이 주가 되는 풍경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와 음료수를 사러 다니던 구멍가게에서 사이다를 샀고, 뮤 삼촌이 유이나에게 소프트콘을 사 주던 가게에서 초코소프트콘을 먹었다. 그렇게 추억들을 하나 둘 쫓아가던 나는, 하늘이 어두워진 뒤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그 때와 같은 달이 떠 있었다. 그 때와 같이 푸르게 빛나는 파도가 있었다. 달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소녀는 없었지만, 그 노랫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때의 그 각도를 찾기 위해 해변을 거닐었다. 그리드의 중심을 잡아주는 소녀가 없었기에 똑같은 각도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어떻게든 비슷한 느낌을 내는 각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찰칵.


  셔터음과 함께 밤하늘과 푸른 바다가 화면에 담겼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면을 지그시 바라본 뒤,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 때 그 사진을 찍은 뒤, 나는 뮤 삼촌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불안정한 상태였던 나에게, 사진을 찍으며 조금씩 변화해나가던 나에게, 치하야의 노래는 사진 말고도 또 하나의 돌파구를 제시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 간절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다소 뜬금없지만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후로 1년 반 동안 뮤 삼촌에게 기타를 배우며 나는 다방면에서 변화를 겪었다. 그게 꼭 기타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진과 기타, 그리고 잔소리꾼 카츠라기라는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나는 조금씩 세상을 아름다운 방향으로 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사랑하는 누군가와 결국에는 이별해야한다는 것, 세상은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핑크빛이 아니라는 것. 그 모든 게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탓하고 원망한다고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것을 배웠다.

  마치 화음과도 같았다. 음악을 연주하다보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협화음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도 존재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분명히 악기에서 나는 소리였고, 양쪽 모두 음악이었다.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모두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보다 아름다운 협화음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불협화음이 항상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음악가들 중에는 불협화음을 기교로써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분명 불협화음은 어둡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존재였다. 적어도 내가 듣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마저도 음악의 일부로 녹여내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절망과 불행의 순간을 발판삼아 발돋움하듯이, 불협화음을 통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삶도, 음악도, 결국 다 굴곡이 존재하는구나.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지루한 역사 시간을 반쯤 졸면서 끝마친 나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가을이 찾아와 선선해진 날씨가 역사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의식을 붙들고 있는 것도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개학 첫날부터 풀타임 수업이라니, 좀 너무한 거 아닐까. 여름방학에 맞춰진 생체 시계를 되돌릴 시간 정도는 주셔도 되지 않을까.

  이제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분명 카츠라기와 사토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다가올 타이밍이었지만, 사토 녀석은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고, 카츠라기 녀석도 답지 않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도 창밖을 보며 반쯤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뒷문이 열리면서 레이나가 우리 반으로 들이닥쳤다.


“신이치 군! 밴드부실 가자!”

“벌써...? 점심은 어쩌고? 후와암.”


  나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나는 우리 교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나머지 둘을 찾았다.


“오늘은 도시락 싸 왔거든. 엄청 많이 있으니까 부실에 모여서 먹으면 되지! 그보다, 타로 군이랑 사토 군은?”

“...자고 있어.”


  나는 눈을 비비며 엎드려 있는 사토를 가리켰다. 레이나는 그런 사토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려 깨웠다.


“으으, 뭐야....아, 레이나?!”

“좋은 아침, 사토 군!”


  사토는 눈을 뜨자마자 레이나가 보여서인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아직도 레이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적극적으로 티를 내던지 어필을 하던지 뭐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졸고 있는 카츠라기를 깨웠다.


“어이, 밴드부실 가자.”

“으음...? 아. 응. 그래야지... 왜 이렇게 졸린 건지 모르겠네.”

“개학날이잖아. 그럴 만도 하지.”


  우리는 복도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거의 도착했을 때, 사토가 물었다.


“치하야는? 먼저 가 있어?”

“아니. 오늘 학교 안 나왔대. 방송 촬영이 있댔어.”


  레이나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뮤 삼촌이 방송국에 나간다고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간 것을 기억해냈다.


“맞다. 그랬었지.”

“신이치 군한테도 말해줬어?”

“에? 아. 응. 어쩌다보니...”


  이크. 그러고 보니 레이나도 뮤 삼촌에 대한 걸 모르고 있지. 예전에는 치하야나 다른 애들에게 뮤 삼촌과의 관계를 숨겨야한다는 게 신경 쓰였는데, 정작 뮤 삼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집에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수준이 됐고,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나눌 일도 없었다. 언젠가는 치하야에게도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정도 상황까지 오다보니 그냥 자연스레 잊어버리고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밴드부실에 도착한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했다. 서머 페스티벌이 끝나고 생긴 에어컨은 정작 방학 전까지 한 2~3주 정도 쓰고 말았다. 히터 기능도 있으니까 날씨가 추워지면 또 쓸 일이 생기겠지만,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레이나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레이나는 밴드부실에 놓여 있던 달력을 넘기다말고 말했다.


“우리도 슬슬 스이게츠제 준비를 해야겠지?”


  스이게츠제. 중고등부가 하나가 되어 2주 내내 먹고 노는 스이게츠 학원 최대 행사. 돈이 많은지 문화예술은 물론이고 운동부에도 빵빵한 지원을 넣어주는 우리 학교는, 의외로 도쿄 남부에서 꽤 명성이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축제를 벌였다.

  부스 활동도 부스 활동이지만 공연은 스이게츠제의 하이라이트 같은 존재였다. 특히 고등부 공연은 중등부나 주변 학교에서도 잔뜩 보러오기 때문에 모든 공연부들이 칼을 갈아 나오는 곳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이제 막 2학기가 시작한 참인데 벌써부터 12월에 열리는 축제 준비를 시작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나는 레이나에게 말했다.


“조금 이르지 않아? 아직 세 달 넘게 남았는데.”

“오케스트라나 합창부는 이미 여름방학 때부터 준비하고 있다구! 우리도 질 수 없잖아. 안 그래?”

“뭐, 그건 그렇지만...”

“타로 군, 올해 합창부는 뭐 하는지 알아? 전에 합창부였잖아?”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난 밴드부 시작하면서 그만 둔 상태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몰라.”


  카츠라기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에 합창부에서 무슨 파트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밴드부와 병행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예 그만 뒀던 건가. 옛날부터 합창부 얘기는 전혀 하지를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한편, 카츠라기의 말을 들은 사토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니시야마 선배한테 슬쩍 물어보면 되지 않아?”

“선배는 3학년이잖아. 2학기 되면 3학년들은 다 은퇴한다고.”

  “흠. 그렇구나. 우리도 내년이면 3학년이네. 사실상 축제를 즐길 시간은 올해뿐인가~”

“그렇지! 그러니까 올해는 미리미리 준비해서, 꼭 공연부문 우승을 노리는 거야!”

  레이나는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카츠라기가 말했다.


“레이나, 그러면 우리한테 주어진 공연 시간은 20분 정도인 거지? 세 곡 정도 할 수 있으려나?”

“응. 많으면 네 곡까지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마 각자 연습하고 맞춰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곡을 최대한 일찍 정하는 게 좋겠지.”

“그러면 곡부터 정해놓을까?”

“그래!”


  레이나, 카츠라기, 그리고 사토는 적당한 후보 곡들을 하나 둘 내놓았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치하야가 없는 상태에서 정하는 건 아무래도 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저기, 얘들아. 곡을 미리 정하는 건 좋은데, 아무래도 치하야가 있는 상태에서 논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세션도 세션이지만 일단 보컬이 어떻게 소화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그러네... 치하야라면 뭐든 잘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같이 정하는 게 좋겠지? 그럼 치하야가 나오는 날에 모여서 정하자!”


  그렇게 우리는 상황을 정리하고 간단히 개인 연습을 했다. 아무래도 방학 중에는 연습실에 가지 않는 이상 앰프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간단히 현을 튕기는 것이 연습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앰프를 통해 듣는 기타 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연습이 끝난 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정해진 곡이 없기 때문에 방과 후 연습은 다음 주 정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에 왠지 익숙하지 않은 구두가 놓여 있었다. 뮤 삼촌의 것이었다.

  뮤 삼촌은 방금 들어온 것 같은 정장 차림으로 주방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말했다.


“일찍 들어왔네?”

“여, 신이치. 어차피 다시 나가야되기는 해.”

“또 나가? 집 들렀다가 다시?”

“응. 중요한 서류를 두고 갔거든. 챙겨서 바로 사무소로 가야지.”

“라이브가 끝났는데도 바쁜 거야? 무도관 라이브는 엄청 잘 됐잖아.”

“잘 돼서 더 바쁜 거야. 이제 본격적으로 메이저 아이돌이니까.”


  뮤 삼촌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레이나, 카츠라기, 그리고 중등부의 시즈카와 함께 봤던 무도관 라이브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연예 뉴스나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고, 상점가의 CD샵은 아예 치하야의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라이브를 계기로 오히려 더 유명세를 얻은 건지, 그 몇 주 사이에 치하야는 방송에 라디오에 광고까지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치하야뿐만 아니라 같은 소속사의 다른 아이돌들도 꽤나 유명해졌는지, 몇몇은 나도 얼굴을 외울 정도였다.


“흠. 그렇게 되는 건가. 치하야는 언제쯤 학교에 나올 수 있어?”

“스케줄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확답은 어려운데. 일단 이번 주는 바쁠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왜? 아, 부활동 때문에?”

“아니, 뭐. 별 건 아니야. 잘 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상황이 예상보다 빨라서 따라가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꿈만 같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신이치. 뭐든 열심히 하라고. 꿈을 위해서.”

“결국 돌고 돌아 한다는 말이 그거야? 됐네요, 할아버지. 꿈은 무슨...”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국에는 또 이런 레퍼토리라 질리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와 같은 평화로움이 느껴져서 조금은 즐거웠다. 이런 이야기도 할 틈이 없었을 정도로, 지난 몇 달간의 뮤 삼촌은 엄청 바빴으니까.


“하하. 나도 늙긴 늙었나보네.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늙은 걸 아신다면 과로사하지 않게 조심이나 하세요. 5월 이후로 제대로 쉬는 걸 본 적이 없어.”

“눈물 나게 고맙다. 너도 이 나이 돼 봐...” 

  -띠리릭, 프로듀서, 전화 왔어요! 프로듀서, 전화 왔어요! 띠리릭, 프로듀서-


  그 때, 어디선가 치하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원지는 뮤 삼촌의 휴대전화였다. 뭔데, 저 벨소리. 그런 걸 녹음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조금 기분 나쁜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초 유명 아이돌이 벨소리를 녹음해주는 거니까, 그건 그거대로 부러움을 살 수도 있으려나. 아무튼 기분 나빠.


“네, 여보세요. 오토나시 씨? 네. 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후우. 그럼 또 나가봐야겠네.”

“뭔데, 그 벨소리...”

“다 사정이 있는 거야. 아무튼, 간다. 저녁은 밖에서 먹을 거니까 알고 있어!”

“네, 네~ 알겠네요. 조심해. 쓰러지지 않도록.”

“오케이~”


  뮤 삼촌은 서류가방을 끼고 황급히 집을 빠져 나갔다. 나는 뮤 삼촌의 등 뒤로 닫힌 현관문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기뻐 보이니까 아무래도 괜찮겠지만, 저러다 진짜 쓰러지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방에 대충 가방을 던져 놓고, 주방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낸 뒤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맡겼다. TV를 틀어보니 전설적인 록 밴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왠지 흥미로워보여서, 초코바를 먹으며 가만히 TV를 시청했다.

  잠시 후, 나는 TV를 끄고 자세를 바꾸어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거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른한 기분이 든 나는 하품을 하며 뮤 삼촌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꿈이라. 꿈. 그런 거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뭘 하고 싶다, 무슨 직업이 갖고 싶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뭐 그런 걸까나. 뮤 삼촌이 프로듀서로서 성공을 바라는 것, 치하야가 아이돌로서 성공을 바라는 것. 그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지금까지 뭘 대단한 걸 꿈꿔본 적은 없지만, 지금처럼 사진을 찍고, 기타를 치고, 친구 녀석들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려면 돈이 엄청 많거나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때가 되면 좀 더 생각할 거리가 생기겠지.

  나는 햇빛의 온기와 함께 점점 잠이 쏟아져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게 어쩌면 가장 거창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오빠! 교복 입은 채로 소파에 누워서 자지 말라고 했잖아! 저녁 준비라도 좀 도우라고!”

“...으엑.”

 

  귀를 파고드는 호통에 눈을 뜨자, 교복 차림의 유이나가 양 손에 저녁 재료가 담긴 비닐 봉투를 든 채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분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타이밍이 영 맘에 안 드네.

  아무튼,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 투덜거리며 유이나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고등학생은 힘들다고. 낮잠 정도는 괜찮잖아...”

“뭐래는 거야. 나는 장도 보고 집안일도 하는데. 기껏 생각해서 햄버그를 만들어주려고 했더니, 보람이 없다니까. 오빠라는 사람은.”

“죄송합니다. 온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손이나 씻어. 다녀와서 옷도 안 갈아입었잖아. 오빠 친구들이 오빠가 그러는 거 알아?”

“시끄러. 쪼끄만 게.”

“누구보고 쪼끄맣대!”


  지루한 수업 시간에 졸고, 밴드부실에서 기타를 치고, 뮤 삼촌의 오글거리는 말들에 태클을 걸고, 소파에서 뒹굴 거리다가 유이나한테 혼난다. 이런 것도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라고 할 수 있으려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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