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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1장, 태양의 젤러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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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8, 2020 23:48에 작성됨.

[도쿄도 세타가야구 산겐자야역 ------ 키사라기 치하야]


“치하야 씨~! 이쪽이야 이쪽~!”

“잠깐만, 미키! 천천히 가 줘!”


  소녀는 미키를 따라 서둘러 출구의 계단을 올랐다. 미키는 평소에도 텐션이 높은 편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들뜬 것 같았다. 

  소녀가 미키와 단둘이 어딘가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후보생 시절에는 같이 레슨을 받은 적도 많았으나, 각자 데뷔한 이후 유닛이 나뉘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됐다. 접점이 생기는 경우는 미키가 TORICO의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함께 레코딩을 하는 등 업무 스케줄이 겹치는 때가 전부였다.

  그런 둘이 함께 외출을 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때는 바로 어제, TORICO의 라디오 공개녹음이 있던 날이었다. 녹음을 마치고 나오던 셋은 현장을 찾아준 수많은 팬들에게 선물세례를 받게 되었다. 


“하루카짱, 쿠키 틀을 만들어 봤어!”

“감사합니다!”

“유키호 씨! 항상 라디오 잘 듣고 있어요!”

“ㄱ, 감사합니다~!”

  

  하루카와 하기와라는 주변의 팬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전에는 남성 팬들을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던 하기와라도 언젠가부터 능숙해져 있었다. 소녀 본인 역시 웃으며 팬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부드러운 얼굴로 팬들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저기, 치하야 언니!”


  소녀는 왼쪽을 돌아보았지만,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쉽사리 알아내지 못했다. 소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여기예요, 여기!”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니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소녀는 허리를 낮춰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천진난만한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니 전에 만났던 타카츠키의 동생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여자아이는 활짝 웃으며 소녀에게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항상 노래해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워.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저기, 치하야 씨, 이것도요!”

“감사합니다!”


  선물이 하나 둘 모이면서 결국 손으로 다 들 수 없는 수준이 되자, 나머지는 현장에 동행하고 있던 리츠코가 커다란 상자에 담아 가지고 왔다. 사무소에 도착한 뒤, 하루카와 하기와라는 다양한 선물들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 우와아...”

“이렇게나 잔뜩...”

“급한 대로 한 상자에 모아서 왔으니까, 코토리 씨랑 따로 분류해 놓을게. 조금만 기다려 줘.”

““네!””


  셋은 TV 앞 소파에 앉아 선물을 분류하는 리츠코와 오토나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미키가 눈을 비비며 응접실 쪽에서 나왔다.


“아후. 다들 수고한 거야~” 

“다녀왔어. 미키.”


  미키는 소녀가 안고 있는 꽃다발을 알아채고 말했다.


“어라, 치하야 씨. 꽃은 뭐야? 팬의 선물?”

“응. 키워볼까 생각 중이야.”


  하루카는 소녀의 말을 듣고 관심을 보였다.


“헤에, 치하야짱, 꽃 키워본 적 있어?”

“아니, 어렸을 때 집에 화분이 있던 건 기억나는데... 내가 키워본 적은 없어. 요령 같은 건 찾아보려고.”

“으음...”


  미키는 소녀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스케줄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확인했다. 내일 자 소녀의 스케줄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미키는, 들뜬 얼굴로 소녀에게 말했다.


“치하야 씨, 치하야 씨! 내일, 미키랑 데이트하지 않을래?”

“뭐?!”

“미키, 언니가 자주 가는 꽃집을 알거든. 꽃도 많고 점원 씨도 친절해서 좋은 거야~ 화분이나 도구 같은 것도 있을 테니까, 같이 가보는 거야! 이것저것 팁도 알려주실 지도 모르고~”

“나야 괜찮지만... 미키, 내일 바쁘지 않아?”

“미키는 한가한 거야~ 프로듀서도 없으니까, 일도 재미없고...”


  그 말을 들은 리츠코는 선물을 분류하다 말고 미키에게 말했다.


“미키, 내일은 연기력 레슨이 있잖아!”

“에에~? 그렇지만 미키, 지난 CM도 멋있게 잘 했잖아~ 내일은 오전 중으로 끝내고 쉴게. 쉬어도 되지? 응? 리츠코? 아니, 리츠코 씨?” 

“하아... 대신 오전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건 다 마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오후까지 하는 거야. 알겠지?”

“야호! 치하야 씨, 어디 갈까? 꽃집 주변에 유~명한 카페도 있고, 둘러보고 싶은 게 엄~청 많은데!”

“미키, 제대로 듣고 있어?!”

“하하...”


  소녀는 신경전을 벌이는 리츠코와 미키 사이에 끼어 곤란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소와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 웃음을 보였다. 자유분방한 미키와 성실한 리츠코는 서로 충돌하는 일도 많았지만, 프로젝트 페어리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얻으면서 미키가 하나 둘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리츠코도 조금씩 미키를 풀어주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소녀는 지금 미키와 함께 산겐자야 역에 나와 있었다. 출구를 빠져 나와 상점가를 거닐기 시작하자, 미키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치하야 씨, 평소에 쇼핑 같은 거 많이 해?”

“아니, CD샵이라면 자주 가지만, 상점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아.”


  소녀는 평소 쇼핑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기에, 자주 가는 상점가라고는 자취방에서 가까운 카마타나 한 정거장 떨어진 오모리 정도가 전부였다. 그걸 제쳐두더라도, 오타구에서 세타가야구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와 볼 일이 많지 않았다.


“미키는 어때? 평소에 자주 나와?”

“응! 왠지 귀여운 걸 구경하면 즐거우니까, 집 근처를 자주 돌아다니는 거야. 가끔은 일부러 멀리 나가보기도 하고!”

“그렇구나.”

“이 동네는 어때?”


  소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부야나 아키하바라 같이 엄청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인파도 있고 다양한 상점들이 모여 있어서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었다. 


“아늑한 것 같네. 너무 복잡하지도 않으면서, 아기자기한 느낌이야.”

“그치그치? 미키가 특별히 좋아하는 곳인 거야!”

“그래? 조금 의외네.”

“응? 어떤 부분이?”


  미키는 소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랄까, 미키라면 좀 더 화려하고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 좀 전에 지나 온 시부야라던가.”

“물론 더 크고 화려한 곳들도 좋아하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는 어렸을 때 언니랑 자주 오던 곳이라서, 좀 더 친근한 느낌?”

“그렇구나. 언니라면 예전에 뵀던 그 분이랑?”

“응? 예전... 아, 응! 나오 언니, 전에 데리러 와 줬었지. 맞아. 방학 때 뒹굴 거리고 있으면 언니가 어디라도 나가자고 끌고 나왔던 거야.”

 

  소녀는 몇 달 전쯤 미키의 친언니인 호시이 나오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레슨이 조금 늦게 끝나서 사무소로 미키를 데리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만났던 호시이 나오는 미키와는 달리 차분하고 성실한 성격이라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때마다 언니가 크레이프도 사 주고, 카페도 여기저기 다녔던 거야. 돌아갈 때는 꽃을 사기도 하고.”

“미키한테는 추억이 담긴 곳이구나.”

“응! 언니가 바빠진 후로는 가끔 혼자 오기도 하는데, 오늘은 치하야 씨랑 와서 기뻐!”


  미키는 소녀의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소녀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누군가의 추억에 동행하는 것이니만큼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미키의 언니 역할을 해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키, 이 주변은 잘 알거든! 분위기 좋은 카페나 귀여운 열쇠고리가 잔뜩 있는 가게도 있고~ 아, 혹시 치하야 씨,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건 별로 안 좋아해...?”

“아니, 평소에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보는 건 싫어하지 않아. 나는 산겐자야가 처음이니까, 미키가 잘 알려줘야 해?”


  순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미키는 소녀의 말에 다시 밝아졌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일단 이쪽으로 출발이야!”

“ㅈ, 잠깐만?!”


  미키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카페였다. 상점가에 카페가 많은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이 일대의 카페는 왠지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들이 많았다. 어떤 카페는 깔끔한 블랙&화이트 인테리어로 모던한 느낌을 주었고, 또 다른 곳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소녀와 미키가 도착한 이곳은 밖에서 볼 때는 유럽풍 같은 느낌이었고, 안은 따뜻한 조명이 밝혀져 있어서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음... 타피오카 밀크티 하나랑... 저기, 치하야 씨는 뭐 마실래?”

“저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한 메뉴를 받은 둘은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소녀는 자리 뒤쪽에 서 있는 책장에서 잡지 한 권을 골라 들었다.


“여기, 분위기 엄청 편하지 않아? 주변에 여기저기 다녀 봤는데, 미키는 여기가 가장 좋은 거야~”

“그러네. 조명 때문일지도.”


  소녀가 잠시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 미키가 컵을 들고 무언가 주섬주섬 하더니 소녀를 불렀다.


“저기저기, 치하야 씨! 이거 봐봐!”

“응...?”


  소녀가 고개를 들고 미키를 바라보자, 미키는 가슴 위에 컵을 올려놓은 채 손을 대지 않고 빨대만으로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저기... 뭐 하는 거야?”

“타피오카 챌린지! 손을 안대고 마시는 방법인 거야! 신기하지?” 

“...”


[잠시 후.]


“치하야 씨~ 미안해~ 이제 기분 풀어. 응? 미키가 소프트크림 하나 더 사 줬으니까~”

“...”


  미키는 카페에서 나온 이후로 말이 없는 소녀의 팔에 매달렸다. 타피오카 챌린지인지 뭔지를 한 직후에는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리필해주며 사과했다.


“심했어, 미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푸흐. 이번에는 용서해 줄게.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갈까?”

“치하야 씨 최고! 그러면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는 거야! 아핫☆”


  소녀는 다시 미키를 따라 걸었다. 잠깐 침울했다가도 금방 다시 활발해지는 미키를 보고 있자니 진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함께 돌아다니는 것은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만화 캐릭터 상품이나 열쇠고리 같은 게 많았던 서점과 왠지 80년대 느낌이 나는 상점을 돌아본 뒤, 주얼리샵을 지나며 아이쇼핑을 했다. 그 후 공원 앞을 지나치고 있을 때,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라, 이 노래...”

“하루카의 노래지? 버스킹 같은 걸까? 좋아, 궁금하니까 보러 가는 거야!”

“잠깐만, 미키?!”

“아, 맞다. 밖에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때는 마스크를 쓰라고 리츠코... 씨가 잔소리를 잔뜩 했으니까. 자, 치하야 씨. 이거, 쓰는 거야.”

“에...?”


  미키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내밀었다. 소녀는 미키의 금발이 워낙 눈에 띄니까 마스크보다는 모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은 마스크를 받아 코와 입을 가리고 어느새 공원으로 들어간 미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원에는 5인조로 이루어진 밴드가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연주하는 곡은 하루카의 솔로 곡이었다. 밴드 버전으로 편곡된 것인지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분명 하루카의 노래인데, 이렇게 들으니까 조금 신기한 거야.”

“응. 밴드 연주니까 편곡된 것 같네.”

“치하야 씨의 노래도 나오려나?”

“글쎄. 조금 더 보면 알겠지?”


  둘은 두 곡 정도를 더 들은 후에 공원을 빠져 나왔다. 밴드의 공연에 집중하고 있던 탓인지, 다행히도 소녀와 미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공원에서 조금 멀어지자, 미키는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헤에,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거, 즐거워 보여~ 치하야 씨, 밴드 하고 있다고 했지? 치하야 씨도 버스킹 같은 거 하는 거야?”

“우리는 아직 한 적은 없는데... 아마 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알아봐서 곤란하지 않을까.”

“미니 라이브 같으니까 즐거울 것 같은 거야! 하게 되면 미키도 끼워 줘?”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만약에 하게 되면 미키도 부를게.”

“아핫☆”

  

  길거리 공연이라. 예전에 처음 밴드를 결성했을 때라면 몰라도, 인지도가 꽤 올라 버린 지금은 길거리에서 뭔가를 하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프로듀서에게 상담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점심을 먹고 만난 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시각은 4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미키는 휴대전화로 시각을 확인한 뒤, 소녀에게 말했다.


“치하야 씨, 슬슬 꽃집으로 가 볼까? 미키, 더 놀고 싶지만 저녁 먹을 시간에는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래. 안내를 부탁할게, 미키.”


  미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푸릇푸릇한 분위기의 꽃집이었다. 가게 앞에 나와 있는 꽃들도 많았지만, 창틀이나 가게 외관도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단번에 꽃집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 가운데에 놓인 큰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꽃들이 놓여 있었다. 좌우에 위치한 커다란 쇼케이스 안에도 수많은 꽃들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이름을 들어본 것들도 있었고, 아예 형태조차 처음 보는 꽃들도 있었다.

  소녀와 미키가 안으로 들어서자, 쇼케이스를 정리하던 점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소녀는 점원 치고 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초록색 눈동자에 살짝 갈색 빛이 도는 긴 머리를 한 점원은, 대충 소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꽃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꽃은 아니고, 화병이나 화분을 찾고 싶은데...”

“원예용품이라면 이쪽이에요. 둘러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소녀는 점원의 안내에 따라 진열장에 놓인 화분들을 살폈다. 꽃다발을 넣어두고 키울 거니까, 오히려 화분보다도 화병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용품 쪽을 살펴보는 사이, 미키는 꽃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린~! 손님 오셨니?”

“네, 괜찮아요! 안내해드리고 있어요-!”

“그래, 부탁한다~!”


  그 때, 카운터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안내를 도와준 점원이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어쩌면 점원이 아니라, 주인과 가족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잠깐만, 하나코..!”


  소녀는 발밑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소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점원은 소녀 쪽으로 다가와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죄송해요. 원래 안쪽에 목줄을 묶어 두는데, 어느새 풀려서...”

“괜찮아요. 후후. 귀여운 강아지네요. 쓰다듬어봐도 될까요?”

“네. 물지는 않으니까, 괜찮아요.”


  소녀는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을 보니 왠지 전에 아즈사의 집에서 지낼 때 보았던 강아지가 떠올랐다.


“저기, 점원 언니~! 이거, 장미 한 송이만 따로 살 수 있는 거야?”

“아, 네! 잠시만요!”


  점원은 강아지를 카운터 안쪽으로 데려가 목줄을 묶은 뒤, 미키 쪽으로 다가갔다. 소녀는 다시 화병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혹시 집으로 가져가는 길에 깨지면 위험했기 때문에, 유리보다는 살짝 플라스틱 느낌이 나는 걸로 고르기로 했다.

  소녀가 작은 아크릴 화병을 골라 카운터로 다가가자, 미키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계산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는 것 같았다. 소녀는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혹시 이야기했던 나오 언니일까, 하는 추측을 했다.

  미키가 선물용으로 포장된 장미를 받아든 뒤, 소녀 역시 아크릴 화병을 계산했다.


“1160엔입니다. 담아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점원은 화병을 신문지로 감싼 뒤, 적당한 크기의 쇼핑백을 꺼내 펼쳤다. 그 사이 미키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치하야 씨. 꽃다발 보관하는 거,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러고 보니...”


  둘의 대화를 듣던 점원은 화병을 쇼핑백에 넣으며 말했다.


“혹시, 꽃다발을 화병에 넣어서 보관하시려는 건가요?”

“네. 선물 받은 꽃다발을 키워 보려고 하는데, 요령 같은 게 있을까요?”

“생화 상태의 꽃다발은 물에만 꽂아 두셔도 괜찮아요. 줄기 끝을 사선으로 살짝 잘라주시고, 잎이 물에 닿지 않게 해서 보관하시면 돼요. 아, 이거, 꽃다발을 구매하시는 분들한테 드리는 건데,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


  소녀는 점원이 내민 팜플렛을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꽃다발 시들지 않게 보관하기’라는 제목 아래 이런저런 팁들이 사진과 함께 담겨 있었다. 팜플렛과 쇼핑백을 받아든 소녀는 미키와 함께 가게를 빠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안녕히 계세요~!”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소녀는 미키와 함께 전철역 출구 계단을 내려가 승강장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미키는 장미꽃 한 송이를 소중히 들고 향기를 맡았다.


“미키, 누구한테 선물할 거야?”

“응, 내일 프로듀서 자리에 놓아두려고!”

“뭐?!”

“왠지 요즘 엄~청 바쁘니까, 미키의 마음을 담아서 전해주는 거야.”

“그렇...구나.”


  소녀는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미키가 프로듀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요즘 미키의 행동들이 조금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프로듀서에게 넥타이핀을 선물한 적이 있기에 꽃을 선물하는 것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미키는 가끔 라이브를 설 때도 무대 옆에서 지켜보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키스를 날릴 때도 있었다.

  프로듀서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거야 괜찮았지만, 그게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게 소녀의 생각이었다. 아이돌은 무대 위에서 팬들을 향해, 많은 사람들을 향해 퍼포먼스를 전하는 것이지, 누군가 특정한 한 명을 위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키에게 말했다.


“저기, 미키.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응? 뭔데?”

“미키가 프로듀서를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무대 위에서까지 티를 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우리는 아이돌이고, 팬 분들께 노래를 전하는 게 목적이니까.”

“에-? 그렇지만 미키, 프로듀서가 빛나는 미키를 봐 줬으면 좋겠는 걸.”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우으...”


  미키는 볼에 바람을 넣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분명하게 이야기해주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게 미키 본인에게도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미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 요즘 들어 자꾸 치하야 씨만 신경써주는 걸...”

“,,,뭐?”

“처음 데뷔할 때도 치하야 씨가 제일 먼저 데뷔하고, 이번에 큰 무대도 치하야 씨가 나가고, 프로듀서는 자꾸 치하야 씨만 봐 주잖아.”

“미키, 그건...”

“리츠코가 잔소리해도, 프로듀서가 응원해주니까 미키도 힘내고 있는데, 미키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미키...”

“대답해 줘, 치하야 씨. 치하야 씨는 프로듀서를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프로듀서가 항상 치하야 씨만 봐주는 거야? 아니면 설마... 이미 서로 사귀고 있는 거야?”

“뭐?!”


  소녀는 미키의 페이스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렸다. 분명 시작은 미키에 대한 충고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소녀가 미키의 질문 공세에 말려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소녀는 천천히 미키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지난번에는 사랑에 대한 의미를 물으려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프로듀서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 대상이 프로듀서가 아니더라도, 소녀는 연애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거나 자세히 알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꼭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소녀가 프로듀서에게서 강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아버지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었고, 자신의 꿈을 전력으로 지원해주는 인물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라면, 소녀 자신이 프로듀서라는 인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프로듀서와 나는, 미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런 거야? 그러면 다행...”

“하지만, 프로듀서를 좋아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

“에...?”

“프로듀서를 믿고 있고, 함께 있으면 편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건 미키가 이야기하는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라고 생각해.”

“으으... 왠지 복잡해서 잘 모르겠는 거야... 아무튼, 미키가 걱정한 건 아니니까 다행인 거야. 치하야 씨가 한 이야기는 조금 더 생각해볼래. 오늘은 즐거웠어, 치하야 씨. 그럼 내일 봐!”


  미키는 그렇게 말하더니 반대편 승강장으로 사라졌다. 소녀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미키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키의 페이스는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소녀는 미키가 남긴 큰 숙제가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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