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화음의 저편. -제11장, 태양의 젤러시- (1)

댓글: 1 / 조회: 516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12-16, 2020 00:05에 작성됨.

-제11장-

태양의 젤러시


[도쿄도 미나토구 M모 방송국 관계자 대기실 ----- 프로듀서]


“혹시 이번 여름에 무도관에 서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기획에 참가한 경험을 살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미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충분한 실력을 갖춘 아이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관계자 대기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기실의 기류를 통해 강한 긴장감이 전해져왔다. 프로듀서나 매니저들은 기본적으로 최종 리허설 전까지만 동행할 수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중계화면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지만, 치하야의 MC 파트를 사전에 챙겨주지 못했던 것은 나의 큰 실책이었다. 예전에 야요이와 히비키의 요리 방송에 나갔을 때도 치하야는 토크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라디오 방송에 나가면서 그럭저럭 매끈하게 진행을 맡아오기도 했고, 최근의 치하야는 전보다 밝고 말 수도 늘어났다는 생각에 그저 전적으로 치하야에게 맡겨두고 있던 것이다. 상황에 여유가 있었다면 전화나 문자로라도 뭔가 이야기를 해주었겠지만, 최종 리허설 직후에 본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럴 틈조차도 없었다.

  본방에서는 346프로의 이치노세 시키로부터 도움을 받아 꽤 훌륭한 MC를 해낼 수 있었지만, 단독 MC에서 다른 아이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혹시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평소의 오디션이었다면 치하야의 뛰어난 보컬로 여유롭게 합격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 기획은 각 사무소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였기에 단독 MC 같은 부가적인 요소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 무도관 라이브에 출연할 5인의 합격자를 발표하겠습니다. 합격자는...”


  심사위원은 차례대로 세 명의 이름을 불러내려갔다. 그 중에는 이치노세 시키의 이름도 있었다. 네 번째 이름이 불렸을 때, 내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아직 치하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남은 합격자 수는 한 명,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메고 있던 관계자 목걸이를 꼭 쥐었다.


“다음은, 마지막 합격자입니다. 7번, 키사라기 치하야 씨.”


  화면에 비친 치하야의 표정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젖히고 의자에 기댔다. 주변의 다른 관계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전화로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이들도 있었고,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면을 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오히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리허설 때부터 내내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결과가 발표되었음에도 여전히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슬쩍 그의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주식회사 346프로덕션’, 이름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딩동.

“알립니다. 다음 호명하는 회사의 관계자분은 30분까지 담당 아이돌과 함께 502호 회의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사이온지프로덕션, 346프로덕션, 82프로듀스, 283프로덕션, 765프로덕션. 이상입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남자는 안내방송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을 빠져 나갔다. 나는 어수선해진 대기실 안의 분위기를 뒤로한 채, 서둘러 일어나 그를 쫓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음...?”

“346프로의 프로듀서시죠?”

“네, 맞습니다만. 그쪽은...?”

“765프로덕션의 하세가와 미유키입니다. 키사라기 치하야의 담당 프로듀서를 맡고 있습니다.”

“아, 키사라기 치하야의... 그래서, 용건은 뭡니까?”


  남자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왠지 사무적인 태도에 거리감을 느낀 나는, 다시 예의를 갖춰 감사를 표했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음?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346프로 쪽에서 도움을 받게 되어서...”

“이치노세가 한 일에 대한 건가요. 그거라면 제가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네?”

“저는 이치노세에게 그 어떤 지시도 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지시를 한다는 게 더 이상하겠죠. 감사라면 그녀에게 전해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돌리실 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말씀하실 건 없으십니까?”

“네? 아, 네...”

“그럼, 이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벙 찐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이치노세 시키의 돌발행동에 346의 프로듀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거대로 이상했다. 나는 순간의 들뜬 감정에 움직였던 자신을 반성했다.


“여전히 딱딱하구만~ 저 인간은.”


  나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판기에서 꺼낸 이온음료 캔을 열었다. 치익, 하고 열리는 캔음료의 청량감처럼, 그의 분위기도 어딘지 모르게 시원시원하다고 느꼈다.


“혹시, 누구시죠...?”

“82 쪽의 사람이야. 이름은 야마모토 다이스케. 그냥 적당히 야마모토라고 불러도 돼.”

“765의 하세가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충 알고 있어. 유명하다고, 미유키 씨.”

“네...?”


  야마모토 씨는 이미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초면에 반말로 나오는 것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일단 나이도 경력도 나보다는 위인 듯해서 그러려니 했다. 별다른 악의도 없어 보이기도 했고.


“뭐,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저 인간, 누군지 알고는 있어?”

“네? 아뇨, 346프로 쪽 분이라는 것만...”

“이런이런, 그 765씨가 이렇게 어리숙한 사람일 줄은... 운이 좋은 건지, 자기도 모르는 수완이 있는 건지... 아무튼, 대충 설명해 드릴게.”

“네. 부탁드립니다.”


  다짜고짜 어리숙하다는 평가를 받아버렸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에 우선은 346의 프로듀서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나루세 카즈히코, 346프로덕션의 마이더스. 그 타카가키 카에데를 키운 남자라고, 저 인간.” 

“아, 그런...!”

“업계에서는 유명해. 애초에 미유키 씨도 이쪽 업계 사람이면서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그 정도로 정보력이 딸리는 거야, 765프로?”

“일단은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됐고. 아무튼 나루세 카즈히코라는 인간은 그 정도의 거물이야. 그러면서도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지. 방금 봤듯이 맨날 저런 사무적인 말투에다가, 스캔들이라고 할 거리도 안 만들고, 그 와중에 작정하고 키운 아이돌은 고공행진. 뭐, 수식어라면 더 갖다 붙일 게 많지만, 일단은 그 정도야. 더 가면 게임 매뉴얼마냥 지루해지니까.”

“그러면, 지금의 타카가키 카에데도, 저 분의 담당 아이돌인 건가요?”

“아니. 타카가키 카에데가 3년 전에 이 기획에서 우승한 이후로 확 뜨면서 손을 뗐다는 것 같아. 그 후로 타카가키 카에데는 알다시피 업계의 아이콘이 되어 있고. 지금이야 관객 동원이나 예산 축소 같은 이유로 5명씩이나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오디션 규모가 더 컸고, 무도관에는 한 명밖에 보내주지 않았거든.”

“그랬군요...”


  82프로듀스의 야마모토 씨는 마치 인터넷 백과사전마냥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을 쏟아냈다. 그의 앞에 선 나는 마치 막 학교에 입학해 선생님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초등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저기, 야마모토 씨. 왜 그런 정보들을 갑자기 저에게 알려주시는 건가요?”

“응? 그야 미유키 씨랑 친해지려고 그러지. 이 업계에서 발이 넓은 건 중요하니까. 혹시 오지랖 넓은 건 맘에 안 들어?” 

“아뇨,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도, 이 정도는 고급 정보라고 할 수도 없는 유명한 이야기들이라고? 혜성처럼 떠오르는 765프로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했더니... 보기보다 큰일이구만, 미유키 씨도.”

“혜성...?”


  내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자, 야마모토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걸 지금 설명하고 앉아있으면 분명 지각할 테니까, 나중에 기회 되면 이것저것 알려 드릴게. 대신 조건은 내 술 친구가 될 것.”

“아, 네. 그러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식사라도 하시죠.”

“식사는 됐고, 술.”

“네...? 네. 알겠습니다.”

“자, 명함이나 교환하자고.”


  야마모토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셔츠 가슴의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82프로듀스 엔터테인먼트사업부 제2파트장 야마모토 다이스케 차장]


  명함을 받아든 나는 그의 직급을 보고 조금은 놀랐다. 다른 회사나 대기업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직급에 대해 생생하게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수직구조에서 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겉보기에는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기에, 굉장히 유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엄청 동안이거나.


“저기, 미유키 씨. 명함 구경하는 건 좋은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아, 네! 죄송합니다!”


  나는 야마모토 씨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내 명함 케이스에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명함을 낚아챈 뒤, 살살 흔들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조만간 한가할 때 연락할게. 먼저 해도 괜찮고. 이따가 회의실에서 보자고. 잘 부탁해, 미유키 씨.”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맞다.”


  그는 한 세 걸음 정도 걸어가다가 멈춰 서고는 다시 나에게 말했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또 이야기해주겠지만, 괜시리 걱정돼서 말이지. 미유키 씨, 일한지 얼마나 됐어?”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한 건 올해 2월 정도입니다.”

“이야, 2월에 시작한 사람이 여기까지 왔다고? 비결이 뭔지, 대단하긴 해...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구만. 미유키 씨는.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낭만적으로만 업계를 보지는 마. 낭만도 중요하긴 한데, 믿던 낭만에 두들겨 맞으면 꽤나 아프거든. 그럼 진짜 간다. 회의실에서 보자고.”

“...”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346의 나루세 씨가 갔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프로듀서로서 미숙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름 연수 과정도 거쳤으니 알 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업계의 수직구조, 아이돌 랭크, 무도관을 거쳐 스타디움으로 나아가는 청사진, 그 과정에서의 기량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 그 정도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름 밴드도 해 봤으니까, 음악계에 몸담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치하야와 다른 아이돌들이 잘 성장해주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성공적이라고, 이 정도면 훌륭한 거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 씨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현실을 바라보는 구멍을 뚫었다. ‘업계에서 발이 넓은 것은 중요하다’, ‘그 정도로 정보력이 딸리는 거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야마모토 씨도 한 명의 개인일 뿐이었고,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업계의 정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미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하는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오늘 중대한 실책으로 치하야의 앞길을 가로막을 뻔 했다.

  야마모토 씨처럼 이 기획의 역사를 꿰고 있었다면, 미리 심사위원들의 성향과 진행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치하야에게 미리 토크에 대한 대비를 시켜주었더라면, 어쩌면 치하야는 훨씬 수월하게 메이저 아이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은 건지, 자기도 모르는 수완이 있는 건지...’


  운. 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치하야의 랭크가 생각보다 빠르게 오른 것도, 이치노세 시키가 치하야를 도운 것도. 잘 맞아떨어진 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치하야의 피나는 노력과 성실성이, 절묘한 운과 만나 여기까지 온 걸지도 모른다.

  만약 치하야가 야마모토 씨 같은 프로듀서를 두었다면, 나루세 씨 같은 프로듀서를 두었다면, 타카가키 카에데 이상의 아이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의심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띠리릭. 프로듀서, 문자 왔어요!


  나는 치하야의 목소리로 알려오는 문자 알림에 휴대전화를 열었다.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치하야의 문자였다.


[치하야, 오후 4시 23분: 집합장소인 502호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치하야.]


  나는 화면을 끄고, 나루세 씨와 야마모토 씨가 갔던 길을 따라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치하야를 축하해줄 말들을 정리했지만, 야마모토 씨의 말들이 자꾸만 나의 사고를 방해했다.


‘너무 낭만적으로만 업계를 보지는 마. 믿던 낭만에 두들겨 맞으면 꽤나 아프거든.’


  낭만. 

  나의 낭만은, 765프로의 낭만은, 잘못된 것일까?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