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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10장, PROUST EFFEC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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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4, 2020 14:06에 작성됨.

[도쿄도 미나토구 M모 방송국 ------ 키사라기 치하야]


“키사라기 치하야입니다.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더 많은 분들께, 노래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끝인가요?”

“네?”


  대망의 무도관 진출이 걸린 「서머 스페셜 아이돌 JAM!」의 2차 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참가자들은 개인 MC 파트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 올라 있었다. 소녀는 간단한 자기소개로 MC를 마무리했으나,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마땅치 않아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키사라기 씨의 개인 MC, 그걸로 끝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이상입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히카리 씨. 이어서 진행해주세요.”


  소녀는 순간 당황했다. 평소 말주변이 없고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MC와 같은 토크는 항상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나마 전에 비해서는 많이 발전한 수준이기는 하나,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았다.

  소녀는 팁이나 요령을 얻고자 이전의 라디오 방송을 떠올렸다. 하지만 소녀가 편하게 이야기를 하던 상황에는 항상 이야기의 흐름을 조절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루카였고, 다른 방송에서는 타카츠키나 아미, 마미가 이야기를 이끌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 아이들이 없었다. 소녀가 단독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한다는 부담감은, 소녀의 어리숙한 말주변과 더해져 좋지 못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리허설이 종료되고 대기실로 이동하던 중, 누군가 소녀를 불러 세웠다.


“키사라기 씨? 잠깐 나 좀 봐.”

“네.”


  뒤를 돌아보니, 단정한 단발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서 있었다. 기획의 종합 심사를 맡고 있는 우타다 오토네였다.


“조금 전의 MC, 주어진 시간이 많은데도 한두 줄로 끝냈지? 왜 그랬어?”

“아, 그건... 제가 말솜씨가 좋지 못해서...”

  소녀의 말을 들은 우타다는 미묘한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별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3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우타다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아. 키사라기 씨. 대충 상황은 이해해. 이쪽 일을 오래 하다보면 익숙한 유형들이 보이니까. 게다가 지금은 종합 심사를 맡고 있지만, 원래는 보컬 담당이기도 했고, 키사라기 씨의 보컬이 뛰어나다는 거는 높게 평가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이지, 아이돌은 퍼포머, 예능인이야. 음반을 내는 게 위주인 가수와는 다르다고. 우리 기획의 핵심은 빛나는 아이돌을 발굴해 메이저로 띄우는 거지, 노래 경연이 아니야.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보컬에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 어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본방 때는 더 신경써주길 바랄게. 가 봐. 다음은... 이치노세 씨인가. 대체 무대만 끝나면 매번 어디로 사라지는 거야?”


  우타다는 명단을 들고 다른 참가자들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복도의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시선을 떨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때, 또 다른 누군가가 소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긴 머리에 붉은 장미 장식을 단 아이돌이었다. 소녀는 얼핏 그녀를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났지만, 이름은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다.


“저기, 너. 키사라기지? 765프로의.”

“네? 네. 당신은...”

“코다마프로의 히카리야. 동업자니까 이름 정도는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섭섭하네.”

“방송이나 인터뷰 쪽에서 자주 뵀는데, 이름을 외우는 건 특기가 아니라서... 실례했습니다.”

“아니야, 그건 됐어. 그보다, 우타다 씨가 뭐라고 하셨어? MC 부분?”

“네. MC 리허설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아까는 나도 당황했다고. 3분이나 주는 시간을 15초 만에 끊어버리면 흐름이 이상해지잖아.”

“죄송합니다...”

“너, 라디오라던가, 방송 출연 같은 거 하고 있지 않아? 나도 가끔 라디오는 듣고 있는데, 거기서는 그럭저럭 잘 이야기했잖아?”

“평소에는 유닛이나 다른 분들이 이끌어주시는데, 아무래도 단독 MC는 어려워서...”

“그런가...”


  히카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라디오를 듣고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뚜렷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경쟁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담겨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 어쨌든, 흐름을 끊어먹는다거나 하지는 말아줘. 나는 나대로,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다들 모든 방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니까. 노래 좀 한다고 오만해지지 말라고.”

“...”


  히카리는 돌아서서 대기실 쪽으로 걸어갔다. 소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노래 좀 한다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히카리의 말은 마치 소녀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소녀는 단 한 번도 오만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칭찬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타고난 재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765프로에 후보생으로 들어온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이스 트레이닝은 물론, 아침 런닝이나 근육 트레이닝 등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이 ‘아이돌’이라는 자각을 가지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우타다 오토네의 말대로 아이돌은 보컬리스트와는 달랐다. 무대에 서고, 팬들을 만나고, 방송에 나가는 우상화된 존재. 노래도, 댄스도, 비주얼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소녀가 하고 있는 ‘아이돌’이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는 예능방송 출연이나 라디오도 노래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댄스와 비주얼 어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래만큼 노력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소녀는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물론 성실한 노력가인 소녀는 무대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라면 빈틈없이 소화해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하지 않았던 댄스는 항상 소녀의 발목을 잡는 부분이었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무대 위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댄스를 선보였다.

  그러나 노래만큼 열심히 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저 필요한 안무를 연습을 통해 소화해내는 것일 뿐, 댄스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한다던가, 스스로 탐구해보지는 않았다. 가나하나 마코토가 안무 코치와 자주 상의하고 새 동작을 만드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토크는 더욱 문제였다. 지금까지 줄곧 누군가 이끌어주는 이야기를 적당히 따라갔을 뿐, 스스로 다른 라디오나 예능 방송을 참고하며 말주변을 늘려보는 노력을 했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오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컬리스트’ 키사라기 치하야로서는 빈틈이 없었던 소녀는, 정작 ‘아이돌’ 키사라기 치하야로서 한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소용돌이치는 생각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에게 성장했다는 말을 해 주는 프로듀서, 그리고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이야기해주었던 동료들과 밴드부원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직 톱 아이돌이 되려면 한참 멀었음에도, 스스로 ‘이 정도면 훌륭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오랜만에 맞닥뜨린 감정의 소용돌이에 두려움을 느꼈다. 프로듀서를 신뢰하게 된 후로, 밴드부에 들어간 후로,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 후로 잊고 있었던 소녀의 어두운 면들이 다시 한 번 소녀에게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소녀는 다시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밴드에 들어갔을 때, 부원들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고 뛰쳐나왔던 날을 떠올렸다. 프로듀서에게 이유 없는 짜증을 냈던 날을, 강한 불신을 표현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지금 소녀의 앞에 선 소용돌이는, 그 때와 다름없이 크고 강력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 어두운 소용돌이 속에서 쏟아진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치하야, 음악 좋아하지?’

‘키사라기, 무대 엄청 멋있었거든~!’


  살짝 열린 창밖으로 흩날리던 벚꽃잎, 잔잔하게 불어오던 봄바람과 쏟아지던 햇빛을 떠올렸다. 먼저 다가와 주었던 친절함, 그리고 그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아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소녀는, 이내 한 마디 말을 뱉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소녀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그렇다고 MC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당장의 진행 능력이나 말주변은 단순한 결의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심사위원은 분명 자신의 토크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무도관에 선다는 꿈도 좌절될지 모른다. 소녀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우울해하며 고민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탈락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이 오만했음을, 아이돌로서 부족한 점들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노래에 최선을 다한 만큼, 댄스와 비주얼, 토크에도 그만큼의 노력을 쏟아야했음을 깨달았다.

  당장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부를 수 있는 최상의 노래를 전하고, 그 다음은 더 노력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점들을 채우고, 깨달은 것들을 실천해서, 언젠가 다다를 정점을 향해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과정이니까!”


  소녀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대기실로 향했다. 여기서 탈락하게 되더라도, 무도관에 설 수 없게 되더라도, 절대 후회의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며.


“흐-응...”


  한편, 복도 반대편의 모퉁이 뒤에는, 그런 소녀를 지켜보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반짝이는 냄새, 강해지고 있어...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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