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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 시즈카 『나아가야만 보이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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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9, 2020 11:48에 작성됨.

.....


...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실제 무대 의상을 입은 채 중간 점검에 들어가는 날이 되었다. 극단 사람들은 작은 무대를 빌려 공연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시즈카도 그와 함께했다.


"마침내 7년이 지나, 저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세월. 저는 언제나 마음 속으로 그 분을 그렸습니다. 그 분의 늠름한 자태. 곧고 올바른 눈빛. 진중하면서도 다정했던 그 목소리. 그 분과 했던 약속을."


'공주'가 조용히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며, 대사를 읊었다. 알록달록하고 길다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공주'는 두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팟, 하고 켜지는 무대의 조명. 뮤지컬 메인 넘버의 전주가 흘러나온다. '공주'가 숨을 들이키며 노래를 시작하려는 그 찰나였다.


"잠깐만요 공주님!"


'시녀'가 공주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만큼은 아니어도, 그 나름대로 격식있는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녀'는 성큼성큼 '공주'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인 넘버의 전주 대신 색다른 곡조가 흐르는 가운데, 일부러 내는 또각또각하는 구둣소리가 무대 바닥을 울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공주'의 앞을 '시녀'가 가로막았다. '공주'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크게 한 차례 젓더니, '시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가야만 합니다."

"정말 오랫동안 그 분을 사모하고 계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공주님. 언듯 공주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것처럼 보였던 '시녀'는 새롭게 말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호수는 아름답지만, 왕자님은 멋진 분이시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답니다."


'시녀'가 까치발을 세워가며 양 팔을 크게 벌렸다. 마치 동물이 자기 몸집을 최대한 크게 보이게끔 하여, 적을 위협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왕자님을 만나러 갈 겁니다. 약속했는 걸요.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와 만나겠노라고. 별이 반짝이는 호수에서."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공주'에게, '시녀'는 크고 빠른 말소리로 차례차례 바깥의 위험함을 일렀다.


"먼저 황량한 사막을 지나가야하지요. 매서운 모래바람 앞에서는 지도도 소용없답니다. 사막을 건너가고 나면, 울창한 숲을 지나가야하지요. 숲에는 교활한 늑대들이 살고 있답니다. 공주님의 길고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뒤쫒아 와서는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낼지도 몰라요. 숲을 지나가고 나면 오, 커다란 가시덤불이 마치 벽처럼 둘러져 앞을 가로 막고 있답니다. 공주님의 아름다운 몸에서는 피가 흘러 나올 거에요."


저는 공주님이 다치길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그 약속은 잊어버리세요. 호수는 아름답지만, 우리 사막 나라의 오아시스에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시녀'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마쳤을 때였다. 그동안 잔잔하게 깔리던 배경음이 반전하며, 새로운 넘버의 시작을 알린다. '시녀'가 노래를 시작한다.


-잊으세요♪ 부디 잊어버리세요♪ 

-지난 날 맺었던 그 약속♪ 당신을 파멸로 이끌테니♪ 

-멈추세요♪ 부디 멈추세요♪ 

-그 분과는 잠깐 동안 만남♪ 저와는 오랜 시간 함께 했죠♪

-정녕 저를 저버리고♪ 가실 생각인가요♪


'시녀'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솔로 파트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제 '공주'가 그에 대해 답가를 불러야한다. '공주'는 내심 '시녀'의 기백에 놀라면서도 주어진 역을 수행하려 했다.


"그만! 그만!"


하지만 그 때.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연출가가 돌연 고함을 질러가며 중지를 요청했다. 흐르고 있던 반주가 멈췄다. 두 사람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 또한 꺼졌다. '공주' 역을 맡은 이와 '시녀' 역을 맡은 이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얼굴을 연출가 쪽으로 향했다. 연출가는 인상을 쓰며 일갈했다.


"너 말야, 너무 튀는 거 아니야?"


'시녀' 역을 맡은 이, 모가미 시즈카에게로.


".....예?"

"실력 있다는 건 알겠어. 확실히 대단해. 괜히 새로운 기회를 찾는답시고 이 동네를 기웃거리는 어중이떠중이들에 비하면 한참 나아. 언제나 열심히 하고 말야. 좋아, 좋다고. 그런데."


연출가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시즈카는 불안한 눈으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담았다. 연출가는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뭘 연기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나?"

"시녀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공주를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앞길을 가로막으려 합니다."

"그래 맞아. 그런데 방금 넌, 어떻게 연기했지?"

".....저, 저는...."

"처음에는 좋았어. 그런데 가면 갈 수록 뭔가 조금 안 맞는 것 같더라. 왜 그럴까 싶었는데, 오늘 보니까 좀 알 것 같네."


연출가가 마침내 확신했다는 듯 소리쳤다.


"네가 무대에서 선보이는 몸짓, 대사, 노래. 그 전부가 공주를 방해하는 것으로만으로는 보이지 않아! 네가 마치 주역인 것마냥 굴고 있다고!"


연출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시즈카의 마음 속을 크게 강타했다. 어느덧 잔뜩 금이 가 있던 마음은 산산히 부서지고, 그 안에 들어있던 검은 연기와도 같은 감정들이 사방으로 풀려나왔다. 


"너는 공주가 아니라 시녀 역이라는 걸 명심해."

".....그럼."

"왜 그러지. 할 말 있어?"

"그럼! 처음부터 배역을 그 자리에 맞는 사람으로 뽑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뭐, 뭐라고!"


조바심, 분노, 슬픔, 괴로움.....시즈카는 그런 것들에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울분에 찬 목소리가 자신의 말을 반박해오자, 연출가는 안 그래도 구겨졌던 이마에 더욱 주름이 가게 했다. 공주 역을 하는 이를 포함해, 다른 조연들이나 무대 스텝들의 이목이 단숨에 시즈카에게로 모였다. 시즈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외쳤다.


"그 쪽이 생각하는 시녀 역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강판하실 거면 마음대로 하세요!"


됐다, 됐어. 모든 게 끝나버렸다. 어떻게 마련한 기회인데.....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즈카는 참담한 심정으로 모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혼자 무대에서 내려와 출구를 향해 걸어나갔다. 극단 단원들이 뒤쫒아가려는 걸 연출가가 손짓으로 막았다. 이윽고 시즈카의 모습이 출구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연출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765 프로덕션입니다.


"이봐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믿고 맡길 수 있는 애라고 해서 받아들였더니....."


-네?


"당신네 아이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강판하실 거면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그래, 내 원하는 대로 해주겠습니다. 그 애한테 더는 나오지 말라고 전해주십쇼."


.....


...


"왜 여기 온지는 알겠지."

".....죄송합니다."

"먼저 저쪽 말을 전할게. 더는 오지 말라고 하더라."


시즈카가 뛰쳐나가는 사건이 벌어진 뒤, 며칠 후 오후. 프로듀서는 시어터 내 사무실에 시즈카를 불러, 자신의 맞은 편 자리에 앉혔다. 시즈카는 프로듀서가 전하는 통보를 듣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성은, 하고 있는 것 같네. 그렇지만. 프로듀서는 답답한 심정으로 시즈카를 살폈다. 


기껏 얻은 기회를 날려먹었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형태로. 


현장에서 이렇게 트러블이 나면 그거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소문이 돌고 돌아, 전반적인 평판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프로듀서는 상대 극단의 규모를 헤아려보았다. 중소규모 극단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아주 유명하고 큰 극단이었으면 타격이 꽤 컸을 것이다. 일단 극단 쪽에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공문을 보내놓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이 될지....추후 그 쪽에서 일거리를 다시 얻기는 힘들겠네. 그래, 그건 그렇다고 해도. 프로듀서는 이해타산적으로 흘러가는 사고를 잠시 접었다. 그리고는 좀 더 중요한 곳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믿음직스러웠던 시즈카가 빅 트러블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공주 역에 도전하는 게 좋았을까? 만약 탈락해도 미련은 없었을 것 같고."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프로듀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시즈카가 시녀 역에 불만이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시즈카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주제 넘게 굴었으니까. 계속 아이돌을 하려고 했으니까. 뭘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시즈카가 자포자기식으로 내뱉는 말에 프로듀서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절박하게 아이돌이 되길 원했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프로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잖아. 그걸 전부, 의미 없게 만들 셈이니?"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던 걸지도 몰라요."

"시즈카!"


프로듀서의 외침에 시즈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울 애가 아닌데. 프로듀서는 시즈카가 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거듭 생각했다. 시즈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동안 주제 넘게 굴었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이유. 배역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 듯 했다. 연출가와 부딪친 탓에 저럴 것 같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왜.....시즈카는 계속 아이돌을 하려고 했다는 게 잘못이라고 말할까.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했으면서. 


왜 그렇게 안달복달했냐면, 시즈카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왜 남은 시간이 없냐면, 시즈카가 아이돌을 할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었기 때문에. 


누가 그걸 한정지었는가. 바로 시즈카의 아버지가. 


왜 그러는가. 시즈카의 아버지는 시즈카가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한다. 


시즈카가 겨우 사정사정했기 때문에 그나마 중학교 3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시즈카는 중학교 2학년. 남은 기간은 1년 남짓. 


만약 시즈카의 아버지가 생각하기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시즈카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아이돌을 졸업해야 한다.


아, 어쩌면.


프로듀서는 이제야 겨우 실마리를 잡아냈다. 프로듀서는 일부러 의자에서 내려와 쭈구려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 숙인 채 계속 울고 있는 시즈카와 눈을 맞추려 들었다.


"네가 해왔던 것들이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즈카는 눈물을 그치지 않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망설였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몇 번을 고민해본 끝에,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있지 시즈카.....이건 내 멋대로의 생각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들어보겠니?"


시즈카가 다시 한 번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꼭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할 필요성이 있을까?"


그 말에 시즈카는 눈물 가득한 눈을 프로듀서에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뜻이 담겨있었다. 그래도 프로듀서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 꿈은 네 꿈이지, 아버지의 꿈은 아니잖아.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겠지. 당장 너는 미성년이니까.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꿈을 부정당한다는 아픔도 있을 거야. 이렇게 말로만 하는 건 쉬운 일이겠지. 네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겠지."


프로듀서가 도중에 숨을 집어삼키며 시즈카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도 난,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네 꿈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해. 만약 꼭 다른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다고한다면, 내가 네 꿈을 인정해줄게. 네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게. 나뿐만이 아니야. 미라이도, 츠바사도, 다른 극장의 모두도 마찬가지일거야. 분명 네 팬들도 네 꿈을 응원해주고 있을 거야."


그래도, 부족할까? 프로듀서가 나중에 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을 때였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손등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져 닿는 것을 느꼈다. 시즈카가 흘리는 눈물 방울. 프로듀서가 여전히 그치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프로듀서는 따뜻한 뭔가가 자신의 손을 꼬오옥 부여잡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부탁드릴게요. 제게 다시.....다시 기회를 주세요."


프로듀서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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