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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 시즈카 『나아가야만 보이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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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8, 2020 17:57에 작성됨.

"저, 이거.....받아주세요."


데뷔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시즈카는 아이돌이 되어 받은 첫 월급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고작 몇 만엔 정도. 중학생 용돈이라기에는 조금 많았지만, 성인이 보기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었다. 그래도 시즈카는 아버지에게 월급을 드리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아이돌로서의 성과를 보이고 싶었다. 


"나는 너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강요한 적 없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드리고 싶어서."


누런 종이봉투를 내민 손이 잘게 떨렸다. 시즈카의 아버지는 턱 끝만으로 거절을 표했다.


"너 필요한데나 쓰거라."


시즈카에게 돌아온 말은 그뿐이었다. 시즈카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봉투를 한 손으로 꾹 쥔 채 그 곳을 떠났다. 그런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시즈카는 또다시 월급을 받았다. 전보다는 조금 더 두툼해진 봉투. 그렇지만 시즈카는 기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았지? 앞으로 얼마나 해야 결과가 나올까. 앞으로 얼마나 해야 인정받을 수 있지?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


...


요즘 시즈카가 부쩍 열심인데. 프로듀서가 시어터 아이돌들의 활동 기록을 살피던 도중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아이돌이 어떠한 일을 했다 외에 추가로 몇몇 특이 사항이 적혀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 중 아이돌의 참여도 항목에 집중했다. x월 x일.   x월 ㅁ일.  x월 ㅇ일. 시즈카는 한 달에 벌써 3번이나 일을 했다. 일만 있는 게 아니다. 극장 내 정기공연에도 1번 출연했다. 공연을 위한 준비 외에 자주 트레이닝도 잊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벌써 몇 번이나 휴일에 시어터를 방문하는 시즈카를 봤는지 모를 정도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려나."


프로듀서가 사무실 책상에 수첩을 쫙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들어온 일 중에서 특별히 시즈카를 지명하거나 맞겠다 싶은 일들만을 추렸다. 그렇게만 해도 4개는 되었다. 대중에게 자주 얼굴을 비치면서 주가가 오른 덕도 있지만, 시즈카 자체가 기본이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한 몫 했다. 그러고보면 시즈카의 실력은, 엄청 노력해서 갖춘 거였지. 프로듀서는 지난날 39 프로젝트 오디션에서 보았던 엄격, 진지, 근엄의 화신이었던 소녀를 떠올렸다. 흑단같은 긴 머리가 인상 깊었던 그 소녀는 고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이 시대의 첨단 엔터테이너라 일컬어지는 아이돌이 되는 것을 지망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진지하고 절박하게. 


소녀는 바로 시즈카. 모가미 시즈카였다.


그렇게나 아이돌이 되고자 했던 건, 시간이 없어서라고 했던가. 아이돌은 중학생 때까지만. 그렇게 아버지하고 약속했다고.....프로듀서는 시즈카의 속사정을 떠올리면서 종이 위에 펜을 놀렸다. 일 4개 중에서 가장 급하게 들어가야 할 일을 골랐다. '사막의 공주와 호수의 왕자' 이라는 뮤지컬 오디션이었다.


.....


...


"축하해!"

"네?"


시즈카가 '사막의 공주와 호수의 왕자'  오디션을 치른 지 며칠 뒤였다. 한참 밖에서 전화를 받던 프로듀서가 시어터 대기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러고는 히죽히죽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시즈카에게 보였다. 시즈카가 벌써 질렸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프로듀서는 일부러라는 듯 더욱 느물느물한 웃음을 지었다.


"으흐흐흐, 이래도 모르겠니?"

"기분나쁘니까 그만두세요."

"에- 그랬어? 그러면 빨리 본론을 말해볼까."


어흠. 프로듀서는 헛기침을 한두번 하더니 다시 입을 열였다.


"전에 오디션 한 거 있잖아, 붙었어."

"그, 그런가요!?"


그제서야 시즈카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시즈카가 응모한 배역은 주역인 공주가 아닌 시녀. 그렇지만 주역인 공주와 같이 나오는 씬이 많고, 솔로 파트도 존재하는 등 그저그런 조연보다는 훨씬 비중이 있었다.


"시즈카는 뮤지컬 처음이지? 첫 출발치고는 아주 좋은 시작 지점이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극단 사람들하고도 합을 맞춰야하니까 그쪽 연습실에도 왔다갔다 해야겠네. 어디보자.....여기서는 지하철 타고 30분 정도 걸리나."

"그 정도야 괜찮아요."

"여유되면 이쪽에서도 종종 태워줄게."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아하하, 믿음직스러운 건 좋긴 한데."


가끔은 이쪽을 의지해주기도 해달라고. 프로듀서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도 시즈카는 굳건히 '됐어요'를 말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렴."

"네?"

"이제 할 거 없잖아. 레슨 없고 일도 없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앞으로를 대비해 미리 쉬어두는 게 좋아. 자세한 연습 일정은 정해지는 대로 라인 보낼게. 그럼 이만."


자신의 생각을 한 수 미리 읽은 듯한 프로듀서의 말에 시즈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시즈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떠나갔다. 혼자 남은 시즈카는 붕 뜬 기분으로 주변의 의자를 잡아끌어 앉았다. 프로듀서 말대로 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렇지만....시즈카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른스러운 듯 보이지만 결국 그 나이대 소녀. 자랑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걸 속 안에만 묻어두지는 못했다. 시즈카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뮤지컬 오디션에 붙었어. 주연은 아니고 조연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역이야.


이렇게 대놓고 축하해달라는 라인을 보내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일일까. 시즈카는 화면에 쳐놓았던 문자를 싹 지웠다. 얼굴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다. 처음치고는 아주 좋다. 처음부터 주역을 꿰어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은 기쁨을 주었다. 희망을 갖게 했다. 이렇게 성과를 쌓아나가면, 언젠가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이돌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끼이익.


시즈카가 몇 단계를 순식간에 뛰어넘는 생각, 아니 공상에 잠깐 젖어 있을 때였다. 작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려, 시즈카는 깜짝 놀라 곧장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는 그 소리를 만들어낸 인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앗, 시즈카 쨩!"

"미라이."


그 인물 또한 탄성과 함께 바로 시즈카에게로 다가왔다. 옆으로 묶은 밤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살랑살랑 움직였다. 미라이였다. 시즈카와 같은 나이로, 이부키 츠바사랑 같이 '신호등 3인조'로 불릴 정도로 같이 다니는 아이. 경계심이 누그러진 시즈카는 슬쩍 휴대폰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어디보자, 지금 이 시간이면....레슨, 끝났나보네."

"응! 좀 힘들지만 재밌었어. 시즈카 쨩은?"

"나, 나는 그냥....."


시즈카는 부끄러워하며 미라이를 살폈다. 미라이의 호박색 눈에서는 시즈카가 왜 저런가하는 호기심이 엿보였다. 어쩌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까. 시즈카는 어른스럽게 아무 것도 아닌 척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칭찬받고 싶었던 어린 마음 쪽이 이겼다 시즈카는 주저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 있지 미라이. 실은 나 말야."

"응."

"전에 뮤지컬 오디션이 있었다고 한 거, 기억해?"

"오디션? 에.....뭐였더라?"

"마, 말했잖아. 사막의 공주와 호수의 왕자....."

"아~ 그거! 응! 시즈카 쨩, 거기 도전해본다고 했었지!"

"응. 그래서 말인데, 나.....붙었어.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그래도-"

"와앗~! 정말!? 축하해!"

"꺅, 미라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시즈카는 무작정 자기를 안아드는 미라이를 천천히 밀어냈다. 정말, 이 애는.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니까. 시즈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 것치고는 싫은 건 아니었다. 조금 부러운 면도 있었다. 저렇게나 자신의 생각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가능하다니. 그럴 수 있다니. 그래도 된다니. 시즈카는 머리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조금 부정적인 감정에게서 눈을 돌렸다. 지금은 미라이가 보내는 순수한 축하에 기뻐할 때였다.


"고마워. 나, 열심히 할게."

"응!"

"저기, 난 이제 가볼까하는데. 미라이는?"

"에- 좀 더 있다가면 안 돼?"

"프로듀서가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해서."

"으으음.....그럼 어쩔 수 없네. 잘 가.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봐."


시즈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라이에게 작별을 고했다. 웃는 얼굴의 배웅을 뒤로 하고, 시즈카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시즈카의 집과 시어터 간에는 거리가 좀 있던 관계로, 오후에 출발한 게  저녁 가까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런데.


"아버지?"

".....시즈카냐."


시즈카는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쳤다. 시즈카의 아버지는 대부분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편이었기에, 꽤 드문 일이었다.


"저어, 그.....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처리할 게 그다지 없었다."

"그런가요."


시즈카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평소에 종종 보곤 하는 굳은 얼굴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면, 그. 시즈카의 마음 안에서 다시 공상의 싹이 자라났다. 만약, 지금....내가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이야기 한다면. 아버지는.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전처럼 무시당할지도 몰라. 시즈카의 마음 안에서 울려퍼지는 경고는 고동에 비하면 미약했다. 꿀꺽. 시즈카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집 안에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는 순간에 그를 불렀다.


"아, 아버지."

"왜 그러냐."

"저....오늘.....그, 뮤지컬 오디션에.....주, 주역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아버지의 냉담한 반응에 시즈카의 입에서는 작게 경련에 일었다. 아,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시즈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혹시, 괜찮으시다면,  공연을 보러 와주실 수는 없을까 해서요.....프로듀서한테 미리 말씀 드리면 자리 정도는....."

"주역도 아닌 걸 굳이 보러 갈 필요는 없지."

"저, 그래도 어느 정도 비중이."

"그래봤자다."


아버지는 시즈카의 말을 딱 자르고는 대문을 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마디만 남기고는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아직도 그 정도구나.


아직도, 그 정도.....내, 아이돌로서의 성과가.


아직.....


문이 열려있음에도 시즈카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 섰다.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를 계속 곱씹으면서. 열려있는 틈새가 점점 줄어들 때까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닫혀버릴 때까지.


"시즈카? 뭐하니?"

".....들어가요."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어머니가 자길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하지만 들어보세요 공주님. 호수는 아름답지만, 왕자님은 멋진 분이시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답니다."


시즈카가 본격적으로 '사막의 공주와 호수의 왕자' 공연을 위한 연습에 들어간지 며칠이 지났다. 시즈카는 자기 방 안에서 대본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오디션을 위해 받았던 것보다 훨씬 두텁다. 실제로 공연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먼저 황량한 사막을 지나가야하지요. 매서운 모래바람 앞에서는 지도도 소용없답니다. 사막을 건너가고 나면, 울창한 숲을 지나가야하지요. 숲에는 교활한 늑대들이 살고 있답니다. 공주님의 길고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뒤쫒아 와서는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낼지도 몰라요. 숲을 지나가고 나면 오, 커다란 가시덤불이 마치 벽처럼 둘러져 앞을 가로 막고 있답니다. 공주님의 아름다운 몸에서는 피가 흘러 나올 거에요."


시즈카는 기나긴 대사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자기가 맡을 역인 시녀가 공주를 막아서는 대목이었다. 오디션에서도 이 부분을 가지고 평가를 했던 만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시즈카는 그 다음 공주 역이 할 대사를 눈만으로 읽어내렸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왕자님을 만나러 갈 겁니다. 약속했는 걸요.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와 만나겠노라고. 별이 반짝이는 호수에서.


시즈카는 '사막의 공주와 호수의 왕자' 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떠올렸다. 


사막 나라에 살던 공주는 사막에서 조난당해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다. 공주는 그 사람을 궁으로 데려와 극진히 간호하여 정신을 차리게 한다. 그 사람은 저 멀리 호수 나라의 왕자로, 사막 나라의 보물인 오아시스를 보고자 왔다고 했다. 왕자의 간곡한 요청에 공주는 오아시스를 보여준다. 오아시스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는 왕자. 왕자는 공주에게 자신의 나라로 와줄 수 없겠냐고 한다. 자신의 나라로 오면, 그 때는 자기 나라의 보물인 호수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공주는 7년 후 자신이 어른이 된다면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하며, 7년 후 꼭 왕자의 나라로 가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로부터 7년 후.


어른이 된 공주는 약속대로 사막 나라를 떠나 호수 나라로 가려고 하지만, 시녀가 그를 가로막는다. 시녀는 공주에게 온갖 말로 겁을 준다. 하지만 공주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길을 떠난다. 시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나아가, 마침내 호수 나라에 도착한다. 약속대로 공주를 기다리고 있던 왕자는 공주에게 호수를 보여준다. 호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공주에게 왕자는 청혼하고, 공주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


원작은 동화책이라고, 그 애가 말했었지. 시즈카는 자기에게 선뜻 원작을 빌려줬던 이, 키타자와 시호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그렇게 해달라고 안했는데. 갑자기 자기 멋대로 와서는. 뭐어, 오디션에 합격했던 건 그 덕분인 것도 있으니까. 감사하지 않으면. 당사자 앞에서는 죽어도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을 생각하던 시즈카는 다시 처음 대목으로 돌아가, 자신의 배역을 돌이켜보기로 했다.


내가 맡은 역은 시녀. 공주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공주의 앞길을 방해하는 존재. 시즈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역을 연기할 수 있었다. 공주를 걱정한답시고 말을 자아내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똑같았으니까. 


자신의 아버지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시즈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자신은 공주가 되고 싶었다.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자길 기다린다 하더라도 전부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맡은 건.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공주가 아니라 시녀였다.


"나는.....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


시즈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대본을 탁하고 소리나게 덮었다.


.....


...


극단 연습실. 시즈카가 다른 극단 인물들과 같이 전체적으로 합을 맞춰보는 시간이었다. 트레이닝 복 차림을 한 시즈카는 자기보다 작고 여리게 생긴 소녀 앞에 서서 양 팔을 크게 벌리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공주님."

-적당히 하고 현실을 마주하거라.


"호수는 아름답지만, 왕자님은 멋진 분이시지만."

-연예계라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야. 


"거기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답니다."

-차라리 공부를 하는 게 더 쉬을 게다.


시즈카는 자신이 말하는 대사 하나하나마다, 아버지가 전에 하던 말들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싫어. 싫은데.....시즈카의 감정과는 반대로, 시즈카는 참으로 능숙하게 이야기 속 시녀처럼 행동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왕자님을 만나러 갈 겁니다. 약속했는 걸요.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와 만나겠노라고. 별이 반짝이는 호수에서."


시즈카가 참으로 '시녀'였다면, 대치하는 소녀 또한 참으로 '공주'였다. 공주는 시녀의 위협적인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떳떳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시즈카가 그런 공주를 속으로 부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좋아, 우선 거기까지. 잘하고 있어."


둘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던 뮤지컬 연출가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연습을 중단시켰다. 후우. '공주'가 아니게 된 소녀는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시즈카는 묵묵히 원래 대기하던 곳으로 걸어가 웅크려 앉았다. 칭찬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다. 


자신은 시녀이니까. 공주가 아니니까. 


조연이니까. 주연이 될 수 없으니까. 


공주와는 다르게 나아갈 수 없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시즈카의 머릿 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시즈카는 어딘가 촛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이 정도구나. 나는. 시즈카의 마음에 작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에서는 새까만 연기 같은 조바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시즈카는 이마에 배여나오는 땀을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그리고는 공주 쪽을 바라보았다. 객원 멤버인 자신과 다르게, 공주 역을 맡은 이는 원래 극단에 소속되어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금 멀리서, 다른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 네....."

"아까 되게 잘하던데요."

"아닙니다."

"목 마를 텐데 이거라도 마시세요."

"감사합니다."


시즈카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다른 극단 멤버 한 명이 다가와 작은 페트병에 든 음료수 1병을 건네었다. 시즈카는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그것을 두 손 모아 받았다. 멤버의 권유한 것이 무색하게, 시즈카가 페트병 뚜껑을 열어 음료수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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