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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9장,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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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8, 2020 00:09에 작성됨.

[도쿄도 미나토구 M모 방송국 ------ 키사라기 치하야]


  -두근.


  무대를 마치고 돌아온 소녀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대기실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기간에 걸쳐 오디션이 진행되고, 여름의 피크인 8월 중순에 무도관 라이브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 대형 기획에서, 소녀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상태였다.

  이번 오디션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탈락하게 되어 있다. 소녀는 데뷔 후 꽤 많은 오디션에 출전해서 합격해왔지만, 지금도 오디션이 있을 때면 항상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설령 합격이 확실히 보장되는 작은 규모이더라도, 모든 무대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것은 프로로서의 자세이자 스스로와 한 약속이었다.

  소녀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뒤, 의자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단은 무대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전에 비해 조금은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했다. 소녀는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프로듀서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리들은, 일심동체야!”

“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아, 이상했어? 미안미안.”

“프로듀서, 저보다 긴장하신 거 아니에요? 평소에 안 하던 이야기를 하시고.”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 상대는 무도관이니까.”

“정말...”


  평소에는 낯간지러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면서,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본인이 더 긴장해버리면 어쩌겠다는 걸까. 역시나 못 미더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엉성하고, 능글맞은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솔직해지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당황할 때면 나오는 특유의 ‘에.’하는 반응이 생각난 소녀는, 시선을 약간 내린 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녀와 같은 조에 속해 있는 다른 아이돌들이 각자의 무대를 마치고 하나 둘 대기실로 돌아왔다. 워낙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오디션이었기에,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고, 아예 처음 보는 듯한 얼굴도 꽤 있었다.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기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자, 소녀는 가지고 왔던 잡지를 꺼내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흥흥... 습- 하-……. 습- 하-…….”


  소녀의 앞에는 소녀의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긴 곱슬머리에 푸른 눈동자, 정수리 쪽에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 발군의 스타일을 지닌 그녀를 보며 소녀는 왠지 사무소 동료인 호시이 미키를 떠올렸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소녀는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리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 아이돌은 주변을 더 둘러보더니, 이내 소녀 앞에 멈춰 섰다.


“아, 발견~♪”


  소녀는 왠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곱슬머리를 한 아이돌은 소녀를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ㅈ, 저기, 혹시 저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응? 그냥 구경~”

“아. 그러신가요...”


  소녀는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처음 만난 타인을 경계하는 습관 때문인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글이던 음악이던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 역시 빤히 바라보시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

“아, 특별한 건 아니야~ 뭐 하고 있나 해서. 혹시 방해가 됐다면 사과할게!”

“아뇨, 괜찮습니다.”


  곱슬머리 아이돌은 밝게 웃으며 사과했다. 적어도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너, 좋은 향기가 나네! 그... 치하야짱, 맞지?”

“네.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예요.”

“난 이치노세 시키야. 시키라고 불러도 돼♪ ”

“이치노세 씨라면, 283프로의...?”

“틀렸어~ 346프로라구?”

“아,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이치노세 씨.”

“흠흠. 이치노세 씨 쪽인가... 아무튼 치하야짱, 옆에 앉아도 될까?”

“네. 괜찮습니다.”


  왠지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이치노세는 소녀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왠지 계속 숨을 들이마시는 것 같아서 신경 쓰였지만, 특별히 이상할 것까지는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치노세는 의자에 앉아 다리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소녀가 읽고 있는 잡지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나, 대기실에서 치하야짱의 무대를 봤거든. 왠지 반짝반짝~하는 냄새가 나서, 엄청 좋았던 것 같아.”

“감사합니...다?”


  소녀는 반짝반짝하는 냄새라는 건 대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적어도 자신의 무대에 대한 호평인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거, 음악 잡지지? 치하야짱은 노래도 잘 하고, 역시 음악에 관심이 많은 거구나~”

“네. 보컬리스트... 아이돌이니까요.”

“흐응~ 그치그치. 음악도 엄청 흥미롭지! 다음에는 화성학을 공부해 볼까나~?”


  소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낮추지 못한 채 형식적인 답변을 내어놓았다. 이치노세는 그런 소녀의 태도를 알아챈 건지, 말을 거는 것을 관두고 의자에 앉은 채 좀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녀가 다시 잡지에 집중하는 사이, 이치노세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이런저런 각도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활동 동료인 타도코로에게 사진이론을 배우기 시작한 소녀는, 왠지 관심이 생겨 이치노세 쪽을 바라보았다. 이치노세는 어느새 사진 찍는 것을 관두고 휴대전화의 카메라 앨범을 뒤적이고 있었다. 대기시간이 지루했는지 과거의 사진들을 훑어 내리던 그녀는, 이내 한 사진을 선택해 확대했다.

  사진 속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이치노세가 같은 복장의 성인 남성과 나란히 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배경은 마치 학교의 과학실 같이 생긴 공간이었다.

  이치노세는 사진을 천천히 훑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왠지 표정에서 미묘한 씁쓸함이 느껴져 왔다. 방금 전까지 밝은 목소리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보여줬기에, 분위기의 변화가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효과도 있었다.


“저기, 이치노세 씨? 혹시 사진...”

“응? 아, 봤구나? 옛날 사진이야. 대드랑 찍은.”

“앗, 죄송해요. 일부러 엿보려던 건 아닌데...!”

“헤헤, 괜찮아, 괜찮아.”

“왠지 이치노세 씨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서, 무심코 쳐다보고 말았어요. 실례했습니다.”

“괜찮대도~ 좀 전의 그건 말이지,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이치노세는 웃어 보이며 소녀의 사과에 반응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천장의 조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기, 치하야짱.”

“네?”

“치하야짱의 노래는,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어?”

“네...?”


  소녀는 깜짝 놀라 이치노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겉보기에 밝고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기에, 그녀에게서 갑작스럽게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노세는 여전히 조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있잖아. 사실 아이돌 같은 거 잘 몰랐거든. 원래도 관심사가 금방금방 바뀌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즐거워 보이는 쪽에 끌리는 편이라, 아이돌도 즐거워 보여서 되어버렸어! 라는 느낌?”

“그러셨군요.”

“좀 전의 사진은 대드... 그러니까 아버지랑 찍은 사진이야. 어렸을 때는 꽤나 가까웠는데, 크다 보니 멀어져버렸거든. 그래서 사실 아이돌도, 유명해져서 반짝반짝 빛나면 아버지가 봐 주지 않을까나? 하는 생각으로 하는 것도 있어.”

“저기... 그런 이야기를 왜 저한테?”

“아, 뜬금없이 너무 복잡했나? 미안해. 좀 전에 치하야짱의 노래를 들었을 때, 뭔가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 들어줬으면 좋겠다! 하는 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물어봤어.”


  소녀는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아버지... 소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마음의 짐이자 벽이었다. 그 무게는 유우나 어머니에 대한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아버지’라고 마지막으로 불러본 것이 언제였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소녀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틀에 박힌 표현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적절한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대단하고 엄청난 걸 해 주지는 않았지만, 항상 유우와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었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던,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장이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평일에는 학교생활, 주말에는 아이돌 활동을 병행하는 생활이 시작지자 주말에 휴식 대신 가족과의 시간을 선택했다는 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지를 깨닫기도 했다.

  그러나 유우가 세상을 떠난 이후, 소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벽이었다. 넘어서기에는 너무 높았고, 뚫어내기에는 너무 단단한 벽이었다. 소녀는 그 벽을 우회하고자 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돌아서 반대편으로 갈 수 있도록 벽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그 벽에 끝은 없었다. 소녀는 끝없이 벽을 따라 걸었으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채 끝없는 평행선 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어릴 적의 편안함과 행복감을 떠올렸다. 활짝 웃는 자신과 남동생,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질녘 집으로 돌아가며 먹었던 소프트콘을, 그 부드러운 평화와 안정감을 떠올렸다.

  순간, 소녀의 뇌리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가끔 오글거리는 소리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지만, 세심한 부분에서 친절하고 따뜻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소녀는 그제야 그 남자에게 기대게 되는 이유를 깨달았다. 조금은 어설프고 못 미덥지만, 그 사소한 친절함에서 오는 안정감. 소녀는 그 그리운 감정을 프로듀서에게서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저기... 치하야짱? 나, 혹시 너무 곤란한 질문을 해 버린 걸까?”


  소녀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눈치를 보던 이치노세는 소녀를 불렀다.


“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해보느라.”

“곤란하면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에요.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 저도, 이치노세 씨랑 비슷해요.”

“그래?”

“처음에는 남동생을 위해 노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는 조금씩 넓혀나갔던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내 노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더 나아가면, 저도 이치노세 씨처럼 지금은 멀어져버린 누군가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헤에~ 역시, 반짝반짝하는 냄새는 틀리지 않았어!”

“이치노세 씨는 감각이 좋으시네요. 후후.”


  이치노세는 소녀의 웃음을 보고 살짝 놀란 듯했으나,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다보니 시리어스해졌네. 있지, 나 원래는 엄~청 텐션 높다구? 이래봬도 화학이라던가, 특기도 이것저것 있거든!”

“이치노세 씨도 무도관을 목표로 하고 계신 거죠? 앞으로 자주 마주치게 되면, 또 이야기해요.”

“응! 기뻐♪ 아, 이거. 받아줄래?”


  이치노세는 그렇게 말하더니 휴대전화에 걸려 있던 고리를 풀어 소녀에게 건넸다. 고리줄 끝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나는 고양이 모형이 달려 있었다.


“받아도 괜찮아요?”

“응응! 특제 약품을 적셔 만든 아로마 고리야. 잔-뜩 만들 수 있으니까, 받아 둬!”

  “감사합니다. 소중히 할게요.”

“후후. 꼭 결승까지 같이 가자구?”


  소녀와 이치노세의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어갈 때 쯤, 심사위원이 손에 채점표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A조, 참가자 전원 모여 있죠? 종합심사를 맡은 우타다 오토네입니다. 1차 심사 결과를 발표할 테니, 잘 들어주세요.”


  자신을 우타다 오토네라고 소개한 여성은 그렇게 말하더니 명단을 불러내려갔다. 첫 심사라 합격자 명단은 꽤 길었다. 소녀는 숨을 졸이며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번, 아리스가와 씨. 18번, 이치노세 씨.”

“후후♪”


  이치노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눈웃음을 지었다. 소녀는 기쁜 마음으로 이치노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사위원은 호명을 이어갔다.


“자, 그리고... 27번. 키사라기 씨까지. 이상입니다. 호명하지 않은 분들은 탈락입니다. 합격자 분들은 다음 라운드에 대한 안내가 있을 예정이니, 프로덕션 관계자와 함께 제5대기실로 이동해주세요.”

“치하야짱, 축하해! 이제 시작이네!”


  이치노세는 소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소녀는 밝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럼 난 이제 프로듀서를 찾으러 가볼게. 나중에 또 보자, 치하야짱!”

“네. 이치노세 씨!”

“아, 시키라고 불러줄래? 혹시 어색하면 시키 씨도 괜찮아.”

“네? 그러면... 나중에 또 봬요. 시키 씨.”

“응♪ 그럼 이만~!”


  시키는 그렇게 간단한 짐을 챙겨 대기실을 나섰다. 소녀도 잡지와 휴대전화 고리를 소중히 챙긴 뒤, 프로듀서를 찾기 위해 대기실을 빠져 나왔다.

  사무소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녀의 담당 프로듀서가 먼저 소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평소의 오디션과는 달리 참가자들이 따로 결과를 통보받았기에, 아직 결과를 확실히 모르는 그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함께 약간의 긴장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소녀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평소에 프로듀서가 오디션 합격을 통보했을 때의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소녀는 자신이 항상 냉정함을 유지한 채, 크게 기뻐하거나 웃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오히려 평소에 들떠있던 쪽은 프로듀서였다.


“저기, 치하야. 어떻게 됐어?”


  지금은 평소와 입장이 반전되어 있었다. 결과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 통보에 반응하는 것은 프로듀서였다. 소녀는 말을 전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핀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소녀는, 프로듀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합격이에요, 프로듀서!” 


  소녀가 오디션장에서 환하게 웃어 보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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