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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9장,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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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6, 2020 02:38에 작성됨.

[도쿄도 오타구 765프로덕션 ------ 프로듀서]


“아하하, 치하야도 참, 의외로 어설픈 구석이 있다니까.”

“그, 그렇지만...”


  마코토가 웃으며 말했다. 


“후우, 치하야짱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깜짝 놀랐어...”

“미안, 하기와라 씨...”


  유키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치하야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편 하루카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푸, 푸흡.”

“하루카, 부끄러우니까 그만둬 줘...”

“미안 미안, 그렇지만 당황하는 치하야짱이 엄청 귀여웠거든. 헤헤.”


  한 차례 폭풍이 사무소를 휩쓸고 지나간 후, 네 사람은 TV 앞 소파에 앉아 녹차 라떼를 홀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넷을 보며 방금 전의 일이 떠올라 피식, 하고 웃었다.


[방금 전.]


  치하야의 폭탄발언을 들은 나는 얼어붙은 채 멍하니 치하야를 올려다보았다. 하루카와 유키호, 마코토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오토나시 씨는 얼굴을 붉힌 채 거의 글썽이는 것 같았다. 왠지 눈치가 보인 나는 우선 상황을 수습하기 전에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단 응접실에서 이야기할까.”

“네. 그러죠.”


  치하야와 나는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정작 치하야는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사랑고백을 한 것 치고는 굉장히 평온해보였다. 나는 그런 치하야에게 되물었다.


“저기, 치하야. 혹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네? 아. 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점심시간에 옆 반의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았거든요.”

“아, 그래...? 그런데 방금 전 그건...”


  나는 상황을 천천히 조합해나갔다. 치하야는 미인이니까, 학교에서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는 것 정도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치하야가 고백을 받았다는 사건과 방금 전 폭탄발언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아, 고백은 당연히 거절했어요. 대신 그 후에 밴드부 동료들이랑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뭔가 청춘기다운 전개네.”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딱히 연애 경험이라던가,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도 없다 보니,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치하야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에 빠졌다.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남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은 치하야가 8살이었던 때.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후로 가정의 분위기는 마치 “빛을 잃은 것 같았다”고 한다.

  8살.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에 해당하는 나이다. 8살이라면 그냥 한없이 순수하고 밝은 아이가 실컷 웃고 떠들며 뛰어놀 나이였다. 오냐오냐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라야했을 시기를, 치하야는 상실의 슬픔 속에서 불안한 분위기를 견뎌내며 보냈던 것이다. 분명 중학생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나는 어느새 좀 전의 당혹감을 떨쳐낸 채 치하야의 상황에 공감하고 있었다. 동시에 밴드부의 아이들은 치하야에게 사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밴드부 친구들은 뭐라고 했어?”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왠지 기대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으-음. 보통 그 나이대의 고등학생이면 좀 더 스트레이트한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원들이 좀 특이한 걸까나. 아니면 치하야를 생각해서 일부러 진지하게 얘기해줬을지도?

  

“음, 그러면 말이지. 조금 전은-”

-우당탕!

“어?!”


  그 순간, 응접실 칸막이가 요란하게 넘어졌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하루카 일행과 오토나시 씨가 칸막이와 함께 넘어져 있었다. 칸막이 뒤에서 몰래 듣고 있었던 건가. 치하야는 넘어진 하루카를 보고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루카?! 오토나시 씨도?!”

“아야야...... 그보다 치하야짱!”


  하루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치하야에게 말했다.


“그러면 방금 전에 프로듀서 씨한테 한 말은, 같이 있으면 편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뜻인 거지? 그렇지? 그런 거지?!”

“응...? 응. 그건 그런데... 듣고 있었어?”


  하루카는 내가 하려던 질문을 대신 해주었다. 치하야가 이야기한 정의에 따르면, 치하야가 나에게 했던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성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사랑이 아니라, 신뢰감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나는 걱정했던 난감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했고, 한편으로는 치하야가 나를 완전히 신뢰해주고 있다는 것에 기뻤다. 메이저 진입을 앞둔 치하야가 혹시 준비되지 않은 채 너무 빠르게 랭크를 높여온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한편, 하루카는 여전히 치하야에게 질문공세를 이어갔다.


“그러면 그, 있잖아. 혹시 프로듀서랑 연인이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지?”

“응? 그거야 당연하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하루카?”

  치하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예상은 했지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니까 조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치하야에게 말했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사랑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성에 대한 호감 같은 걸 생각하니까. 잠깐 놀랐을 뿐이야.”

“그런가요. 남녀 간이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아.”


  치하야는 말을 흐리고 갑자기 얼어붙더니, 얼굴을 붉히고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루카는 그런 치하야를 보며 헤헤, 하고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차분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당황한 모습이 된 치하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ㅍ. 프로듀서...”

“응? 왜 그래, 치하야?”

“저 혹시, 방금 전에 정확히 뭐라고 했었죠...?”

“방금 전이라면, 밴드부 친구들이 뭐라고 해줬는지 이야기했는데.”

“아뇨, 그거 말고... 처음 프로듀서한테 상담할 게 있다고 했을 때...”

“아. 그거...?”


  곤란해진 나는 볼을 살짝 긁적이며 치하야가 했던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해주었다.


“저, 프로듀서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요? 라고...”

“아... 아아......”


  치하야는 얼굴을 더 붉히더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삽을 꺼내 들었다.


“저, 구멍 파고 묻혀있을게요!!!!”

“치하야?!”

“치하야짱! 그건 내 대사야!”

“삽은 어디서 난 거야?! 유키호꺼는 지난번에 압수했잖아!”


  ...그렇게 폭주해버린 치하야를 어떻게든 뜯어 말리면서, 사랑고백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다시 현재.]

  오토나시 씨까지 달려들어 어떻게든 치하야를 진정시킨 뒤, 우리는 다시 찾아온 평화를 즐기며 유키호의 아이스 녹차 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TV 앞 소파 쪽으로 다가 서자,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인 치하야가 나에게 사과했다.


“으으... 죄송해요, 프로듀서... 저, 자각도 없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하, 괜찮아. 치하야는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 부분은 기뻐.”

“밴드부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프로듀서가 떠올라서, 정작 연인 관계에 대한 의미는 까먹고 있었어요...”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왠지 기대게 되는 상대라. 그것도 나름 사랑이라는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애초에 사랑이란 건 워낙 정의하기가 힘든 말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누가 해준 이야기인지 궁금해져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그 이야기는 누가 한 거야?”

“밴드부의 기타리스트가 해준 이야기에요. 아마 프로듀서는 모르실텐데... 아, 예전에 아카바네에서 마주친 친구들 중 한 명인데, 기억하시나요?”

“아, 그래...”


  너였냐, 신이치! 고등학생이면 좀 더 고등학생답게 평범한 연애 이야기를 하라고! 내가 비슷한 얘기를 했을 때는 늙다리 같다고 했으면서, 너는 언제 그렇게 성숙해진 건데!

  내가 마음속으로 신이치를 원망하는 사이, 치하야의 옆에 앉아 있던 하루카가 치하야에게 물었다.


“저기, 치하야짱,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때?”

“응? 뭐가?”

“치하야짱이 이야기했던 그 사랑의 의미 있잖아.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거나, 하는 느낌! 나는 어떻다고 생각해?”


  치하야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루카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좋다고 생각해.”

“정말? 기뻐!”

“조금 더 믿음직스러워지면 좋겠지만...”

“에.”

“후후, 농담이야. 하루카는 지금 이대로도 좋아.”

“정말~!”


  나는 녹차 라떼를 홀짝이며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프로듀서로서 치하야의 멘탈을 케어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루카가 없었다면 지금의 치하야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하루카에게는 주변에 힘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다. 데뷔 초에 다소 힘들어하던 치하야를 받쳐준 것도, 성 대신 이름으로 불러달라며 치하야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도 하루카였다.

  하루카와 치하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둘을 지켜보던 마코토가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들의 우정은 아름다운 거구나~”

“그러게, 마코토짱.”


  유키호가 마코토의 말에 맞장구쳤다. 이를 들은 치하야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도,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응?”

“하기와라 씨, 항상 상냥하게 챙겨줘서 고마워. 마코토도, 전에 계곡에 갔을 때, 이것저것 가르쳐줘서 고마웠어. 나는 가끔 이야기나 행동을 함부로 할 때가 있으니까... 모두들 배려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아하하... 부끄럽네.”

“앞으로도 힘내자, 치하야짱!”


  마코토는 부끄러운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뻐 보이니 다행이었다. 나는 그런 넷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오토나시 씨도 나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반년 사이에, 다들 많이 성장했네요. 그렇죠, 프로듀서 씨?”

“그러네요. 혹시 제 부족함 때문에 이 아이들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아니에요. 지금까지 프로듀서 씨의 활약은 대단했으니까요~ 아, 방금 사장님이 연락하셨는데, 좋은 소식이 있으니까 기대하게나! 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좋은 소식이라... 뭐일지 궁금하네요.”

“저도요, 후후.”


  때마침 사무소 문이 열리고 타카기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옆구리에는 두꺼운 서류 봉투를 끼고 계셨다.


“다녀오셨어요!”

“오오, 마침 있었군. 아이돌 제군들도 수고가 많네.”

““““안녕하세요!””””

“아, 자네, 키사라기 군과 잠시 사장실로 와 주겠나?”

“네? 네! 가자, 치하야.”

“네. 프로듀서.”


  나는 치하야와 함께 타카기 사장님을 따라 사장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사장님은 가방을 내려놓고 옆구리에 끼고 계시던 서류봉투를 나에게 내미셨다.


“이건 뭔가요?”

“이번에 방송국에서 나온 기획서일세. 자네가 담당하게 될 일이니까, 조금 이따가 읽어보게나.”

“네. 알겠습니다.”


  나에게 서류봉투를 넘겨준 사장님은 나와 치하야를 번갈아 바라본 뒤, 비장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자네들을 특별히 따로 부른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네.”

“좋은 소식이라면...”

“키사라기 군.”

“네?”

“자네, 무도관에서 노래해보지 않겠나?”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치하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장님은 치하야에게 기획서 요약본을 건네준 뒤, 설명을 이어가셨다.


“이번 여름 시즌 특별 기획으로, 올해 데뷔한 유망한 아이돌들을 뽑아 오디션 프로그램을 개최하기로 했네. 우리 765프로에서는 키사라기 군이 뽑혔고. 최종 5인에 선정되면 무도관 라이브에 출연할 수 있어. 지상파에서 생중계되는 행사니까, 여러모로 좋은 기회가 될 걸세.”


  무도관 라이브를 향한 오디션 프로그램. 잘 진행되기만 한다면 무도관에 설 기회를 얻는 것은 물론, 확실하게 메이저 아이돌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는 치하야에게 물었다.


“어때, 치하야?”

“...”


  치하야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뚫어져라 기획서를 읽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치하야?”

“네? 아, 죄송해요. 프로듀서, 저, 갑자기 두근거려서...!”

  나는 치하야의 말을 듣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출연 여부 따위, 치하야에게는 물어보는 의미조차 없었다. 나는 처음 프로듀서 일을 시작했을 때 다졌던 각오를 다시 떠올리며, 치하야에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줄게. 반드시 무도관에서 마음껏 노래할 수 있도록!”


  내 각오를 들은 치하야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프로듀서!”


  밝게 미소 짓는 치하야의 눈은, 언제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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