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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9장,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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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5, 2020 02:27에 작성됨.

[도쿄도 오타구 765프로덕션 ------ 프로듀서]


  모처럼 평화로운 평일 오후, 나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이번 달의 회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소에는 오늘 오전에 라디오 사전녹음을 다녀 온 유키호, 하루카, 그리고 마코토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토나시 씨는 늘 그랬듯이 내 대각선 자리에 앉아 문서 작업을 하고 계셨다. 한편, 리츠코는 아미, 마미와 함께 현장에 나가 있었다.

  내가 프로듀서 연수를 받던 시절에는 다들 후보생이었으니까 언제나 사무소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뒤로는 모두가 사무소에 동시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일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히카와 계곡 로케가 모두가 함께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까지 상황이 급변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데뷔한 치하야는 어느덧 B랭크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TORICO로 유닛 활동을 함께 한 하루카와 유키호도 C랭크에서 착실히 인지도를 늘려가고 있다. 나머지 인원 역시 빠르게 TORICO를 따라잡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물론 아이돌 랭크의 구조상 활동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B랭크 이전 구간의 아이돌이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생각보다 빠른 페이스로 나아가는 것은 오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미숙했던 어제는 어느새 지난 과거가 되어 있고, 또 하루가 지나면 더 먼 곳 어딘가에서 과거가 되어 버린 오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듀서, 차 드세요.”

“고마워, 유키호.”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유키호는 열심히 스프레드시트를 정리하는 오토나시 씨에게 컵을 건넨 뒤, 내 책상에도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무의식적으로 컵을 든 나는 예상치 못한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랐다. 그제야 나는 왜 평소의 찻잔이 아니라 머그컵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컵 안의 내용물은 아이스 녹차 라떼였다. 컵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자, 시원한 냉기를 뒤따라 부드러운 우유의 질감이 느껴졌다. 넘기고 난 뒤에는 녹차향이 향긋하게 남았다.

  나는 입에서 컵을 떼고 고개를 들어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유키호는 나무 쟁반을 끌어안은 채 나의 반응을 살폈다. 왠지 녹차 라떼에 대한 코멘트를 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오늘은 메뉴가 바뀌었네?”

“ㄴ, 네...! 오늘은 덥기도 하고, 지난번에 프로듀서가 라떼를 좋아하신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요.”

“응? 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나?”

“아, 치하야짱이 이야기해줬어요오...!”


  내가 치하야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카페에서 치하야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항상 카페 라떼를 마시기는 하지만, 그런 걸 기억해준 걸까나.


“그랬구나. 유키호의 녹차 라떼, 맛있어. 확실히 이런 날씨에는 시원한 게 좋기도 하고. 챙겨줘서 고마워. 유키호.”

“네! 헤헤.”


  유키호는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하루카와 마코토가 있는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나조차도 경계하던 유키호였지만, 지금은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늘었다.

  나는 성장한 유키호를 보면서 다시 이 업계의 수직구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돌에게 있어서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기량이나 정신력 같은 아이돌 자체의 능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이돌 랭크로 대표되는 객관적 척도였다. 

  프로듀스라는 과정은 사무소와 프로듀서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계에는 대략적인 ‘왕도’가 존재했다. 대학밴드를 하면서 한때 진지하게 음악에 생계를 걸어야할지 고민했던 나는 입사 전에도 그 왕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무명으로 시작한 이들의 목표는 무도관이다. 밴드건 가수건 아이돌이건, 무도관 라이브를 제대로 성공시킨 이들이야말로 메이저의 관문을 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무도관을 거친 이들의 다음 목표는 예전에 하루카와 보았던 도쿄돔이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같은 스타디움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과정이 바로 톱 아이돌로 향하는 청사진이었다. 타카기 사장님은 당장의 성과를 강요한다거나, 반드시 정점에 서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업계에 있는 이상 이 청사진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모두가 가진 목표였다.

  나 역시 언젠가 그 길을 따라갈 것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밴드를 하던 시절에는 무도관은커녕 라이브 하우스 단독공연조차 꿈꾸기 힘들었지만, 프로듀서가 된 이상 나의 아이돌은 꼭 무도관, 그리고 그 너머에서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목표를 가슴 속에 새겼다.

  하지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연수조차 제대로 끝나지 않은 채 패기 하나밖에 없었던 풋내기였고, 본격적으로 연수를 받으면서 자연스레 765프로와 타카기 사장님의 분위기에 맞춰 큰 꿈을 품되, 과정을 중요시하며 나아가는 프로듀스 방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상황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변해 있었다. 치하야의 C1이라는 랭크는 B랭크 진입의 직전, 말 그대로 메이저의 문턱에 놓인 곳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반년 만에 메이저에 진입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내 예상보다는 너무 일렀다.

  유키호의 녹차 라떼를 비운 나는 의자에 기댄 채 빙그르르 돌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태양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 담당할 아이돌을 정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프로듀서 연수 과정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기였다. 그 날도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 오토나시 씨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연수 자료를 쭉 읽어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사장님은 출근하시자마자 나를 호출하셨다. 나는 타카기 사장님을 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지금은 그나마 응접실처럼 소파랑 커피 테이블이라도 놓여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도 없어서 적당히 서 있었던 기억이 났다.


“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자네의 연수 기간은 이걸로 종료일세. 이제부터는 정식 프로듀서로서 우리 765프로의 아이돌 활동을 맡길 생각이네.”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음. 자네는 우리 765프로의 희망일세. 열심히 해주게나.”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심히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앞으로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맡긴다고 하시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사장님은 그 후에 파일을 꺼내어 나에게 넘겨주셨다. 파일에는 연수 기간 동안 사무소에서 마주쳤던 아이돌 후보생들의 프로필이 담겨 있었다.


“자네가 업무에 익숙해지면 좀 더 유동적으로 일을 맡기겠지만, 당장은 메인으로 담당할 아이돌을 한 명 정해주게나. 우선 솔로 활동으로 경험을 쌓고, 차근차근 유닛 활동을 맡기는 걸로 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파일을 받아들고 프로필을 쭉 넘겨보았다. 프로듀서로서의 커리어를 함께 시작하는 중요한 파트너니까 첫 담당 아이돌은 신중하게 고르려고 했지만, 프로필을 살펴보던 나는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치하야의 사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혹시 질문이 있다면 해 주게. 우리 후보생들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한도에서 조언해주겠네.”

“아, 그렇다면 이 아이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시겠어요?”

“오, 키사라기 치하야 군인가. 자네, 보는 눈이 높군. 역시 내 감이 틀리지 않았나~ 키사라기 군은 우리 후보생들 중 가장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졌다네. 성실하고, 노래에 임하는 태도도 진지하지. 하지만...”

“하지만...?”

“가끔 과하게 진지해지거나, 마음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네. 거기에는 과거의 일의 영향이 있지만, 그건 나중이 되면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겠네.”


  그 과거에 대한 내용은 이어졌던 치하야와의 미팅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남동생의 일도, 부모님의 사이도, 그리고 자취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아직은 그런 사정을 잘 모르던 나에게, 타카기 사장님은 설명을 이어가셨다.


“아마 프로듀스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키사라기 군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걸세. 조언을 조금 덧붙이자면, 키사라기 군은 그런 정신적인 부분을 잘 받쳐주는 것이 중요할 거라는 정도만 일러두겠네. 이야기했듯이, 실력은 이미 프로로서 부족함이 없으니 말일세.”

“...그렇군요. 그러면, 제 담당은, 키사라기 치하야로 하겠습니다.”

“오? 조금 더 살펴봐도 괜찮다만, 그래도 키사라기 군으로 하겠나?”

“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어디에서 나온 배짱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치하야는 실력에 대한 코칭보다도 멘탈 케어가 중요한 타입이었다. 겉보기에는 프로듀스하기 수월해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사람의 멘탈을 케어한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 역시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수 기간 동안 배운 765프로의 분위기도 그렇고, 아이돌과의 교감과 파트너로서의 협력 같은 걸 생각했던 것 같다. 뛰어난 실력과 연약한 마음을 가진 이 아이를 보조해서, 무도관, 그리고 그 너머에서도 마음껏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멋들어진 생각도 있었다.

  좌우간, 그렇게 나는 치하야와 함께 풋내기 프로듀서로서 첫 걸음을 내딛었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았을 때 꽤나 성공적으로 프로듀스를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치하야의 실력과 노력은 굳이 내가 터치할 부분이 없었고, 때문에 나는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치하야의 정신적 안정과 신뢰감을 얻는 방향으로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치하야는 처음에 비해 성격도 밝아졌고, 나에 대한 신뢰감도 표현해주고 있으니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거 회상을 거의 마쳐가던 그 때, 사무소 문이 열리고 치하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렴, 치하야짱.”

“어서 와. 치하야.”


  TV 앞 소파에 앉아 녹차 라떼를 마시던 하루카, 유키호, 마코토의 3인조도 치하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치하야짱! 안녕!”

“안녕, 치하야.”

“치하야짱, 녹차 라떼, 마실래?”

“다들 안녕. 응, 부탁할게. 하기와라 씨.”


  유키호가 녹차 라떼를 만들러 탕비실로 향한 사이, 치하야는 내 자리로 다가왔다.


“프로듀서, 상담드릴 게 있는데요. 지금 잠깐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무슨 일이야?”


  치하야는 요즘 들어 나에게 사소한 것들도 편하게 물어왔다. 좀 전에 이야기한 신뢰도라던가, 친근감이라던가, 하는 부분들은 이런 것들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 있잖아요. 저기...”

“괜찮아. 편하게 이야기해.”


  치하야는 잠시 말을 늘렸지만, 그래도 표정이 온화한 걸 보니 딱히 곤란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자, 치하야가 말을 이었다.


“저, 프로듀서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요?”

“...에?”


  적당한 답변을 찾지 못한 내가 낸 ‘에’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사무소 안의 공기가 일제히 얼어붙었다. 탕비실에서 녹차 라떼가 담긴 유리컵을 들고 나온 유키호,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하루카, 하루카의 옆에서 순정 만화 잡지를 읽던 마코토까지. 일제히 동작을 멈춘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아......”


  방금 전까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오토나시 씨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치하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친근감을 가져주는 거랑, 신뢰도가 높은 건 좋은데 말이지...

  이건 좀 과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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