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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9장,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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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4, 2020 01:07에 작성됨.


-제9장-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2학년 A반 ------ 카츠라기 타로]


  여느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점심시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밴드부 연습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슬슬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기도 하고, 다들 1학기 마무리 때문에 바빴기 때문에 방학 전 일주일 정도는 연습을 쉬기로 했다.

  생물부 학기말 보고서를 적당히 마무리 지은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으로 고개를 들고 사토와 타도코로를 찾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주변의 분위기가 왠지 떠들썩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교실에는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적한 교실과 달리 복도는 북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다들 창밖을 내다보며 들뜬 듯이 떠들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에 찾던 두 사람 역시 교실에서 조금 떨어진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둘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야?”

“직접 봐.”

“응?”


  나는 타도코로의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쓰는 고등부 본관 건물은 두 개 동이 가운데 통로를 두고 연결된 형태였다. 그래서 각 층 복도에서 밖을 내다보면 가운데 조성된 정원이 보였다.

  정원의 분수 앞에는 아키타와 치하야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충 주변이 돌아가는 분위기와 전체적인 정황을 보았을 때, 사랑 고백이 이루어지는 중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주변이 떠들썩한 이유는 당연히 이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생긴 이벤트에 주변의 동급생들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누구누구, 아키타야?”

“키사라기, 아이돌이라고 하지 않았어?”

“제법이네, 아키타 녀석!”


  옆 반의 남자애들은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했다. 나는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반대편에는 왠지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주시하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그 중 몇몇은 파란색으로 빛나는 사이리움을 들고 있었다. 나는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타도코로에게 물었다.


“쟤들은 누구야?”

“팬클럽이래.”

“...응?”

“치하야의 팬클럽이라나. 생각보다 큰 조직이던데.”


  타도코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단하네. 치하야는.”

“우리가 무감각한 것도 있긴 해.”


  만화에서나 보던 ‘교내 팬클럽’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상점가 CD샵을 지나가다 보면 가끔씩 치하야의 노래가 들려오고는 했다. 지난번에 카탈로그를 사러 들렀을 때는 치하야의 유닛이 나온 포스터를 발견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타도코로의 말대로, 우리는 치하야가 신인 아이돌이었던 때부터 함께 밴드부 활동을 해오다보니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감각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아키타가 치하야한테 관심이 있었다니, 의외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던 사토가 말했다. 나는 잠시 예전에 합창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키타도 합창부원이었으니까 치하야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관심이 있었다면 왜 작년 내내, 그리고 치하야가 합창부를 그만두기 전까지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난번에 아키타가 타도코로와 나에게 치하야에 대한 것들을 물어왔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서머 페스티벌 무대나 아이돌 활동을 하는 치하야를 보면서 합창부에서 볼 때와는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하고 건드렸다. 돌아보니 레이나가 서 있었다.


“저기저기, 다들 뭐 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안녕, 레이나. 정원에 무슨 일이 있긴 해.”

“뭔데뭔데?”


  복도 창가는 전부 동급생들로 메워져 있었기 때문에, 레이나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레이나가 창밖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었다. 레이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에에?! 저거, 치하야 맞지?!”

“응.” 

“상대는? 상대는 누구야?”

“아키타. C반의.”

“뭐어어어어?!”


  좀 과하게 놀라는 것 같긴 하지만, 원래 레이나는 텐션이 높으니까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려나. 흥미롭다는 듯이 창밖을 보던 레이나는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추더니 탐정 같은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음음. 그렇게 된 건가.”

“응? 레이나, 뭐라도 알고 있어?”

 

  타도코로는 그런 레이나에게 물었다. 레이나는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별건 아닌데, 왠지 치하야랑 같이 복도를 걷고 있으면 아키타 군이 인사를 해오고는 했거든. 그럴 줄 알았으면 이야기라도 나누게 해줄 걸 그랬나봐~”

“그랬어? 뭐, 그랬어도 별다른 영향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타도코로는 레이나의 말에 무미건조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어? 신이치 군, 아키타 군의 순수한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막 이야기할 수가 있어? 실망이야!”

“...에? 내가 나쁜 거야?!”


  레이나는 왠지 지난 생일 서프라이즈 이후로 타도코로를 자주 놀렸다. 타도코로는 열심히 반박해보려고 했지만, 레이나는 그런 타도코로의 주장을 간단하게 논파했다. 그 때, 둘의 만담을 지켜보던 사토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치하야는 왠지 인기가 많아진 것 같네. 지난번에는 러브레터도 받았다고 하고.”

“그랬어? 나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너는 동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구나. 타도코로.”

“...혹시 너희 둘, 나한테 뭔가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


  레이나에 이어 사토도 타도코로에게 장난을 쳤다. 평소라면 레이나와 사토에 말에 타도코로가 태클을 거는 식이었는데, 역으로 타도코로가 당하는 모습을 보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왠지 즐거워진 나는 그냥 내버려둘까 생각도 들었지만, 타도코로가 불쌍하기도 해서 끼어들기로 했다.


“최근의 치하야는 분위기가 좀 달라졌으니까. 밝아진 게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타로 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뭔가 귀여운 부분이 잔뜩 나오고 있다고 할까~”


  그 순간, 주변이 일제히 술렁였다. 우리도 주변의 동급생들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떠드는 사이 창밖의 정원에서는 상황이 클라이맥스로 다다른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키타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오, 아키타 군, 무릎을 꿇었어!”

“...소용없을 걸.”

“신이치 군, 아까부터 왜 그래? 경쟁심이야?”

“아니, 그게...”


  레이나는 타도코로에게 방금 전의 눈초리를 쏘았지만, 창밖의 상황은 타도코로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치하야는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아키타에게 무엇인가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정원을 벗어났다.

  주변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치하야의 팬클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몇몇은 탄식하며 아키타를 동정하기도 했다. 아키타 본인은 실연의 아픔을 맛본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마냥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키타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어떡해, 불쌍한 아키타 군...”

“그치만, 레이나도 치하야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잖아?”


  타도코로는 레이나에게 물었다.


“뭐, 확률이 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달달한 상황은 즐겁잖아? 아무리 결과가 뻔해도, 분위기를 망친 신이치 군이 나쁜 거라구!” 


  아니, 이제는 어느 쪽이 더 나쁜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레이나도 은근 소악마 같을 때가 있다니까...

  연애는 역시 복잡한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한 나는 타도코로가 어떻게 그렇게 결과를 확신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져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타도코로.”

“응?”

“너는 어떻게 치하야가 거절할 거라고 확신한 거야? 일말의 가능성 정도는 모르는 거잖아?”

“무슨 소리야. 카츠라기.”


  타도코로는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아이돌은 연애 금지 같은 게 있다고. 당연하잖아?”

“““아.”””


  좀 전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가끔씩 치하야가 엄연한 프로 아이돌이라는 걸 잊어버리고는 했다.

  잠깐, 그런데 그걸 다 알고 있었으면 전에 아키타가 치하야에 대해 물어올 때 이야기해줬어도 되는 거였잖아?


“...타도코로. 확실히 이번 건은 네가 나빴던 것 같아.”

“카츠라기, 너마저?!”


  믿던 나에게 배신당한 타도코로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 창가에 모여 있던 동급생들은 다들 각자 점심을 먹으러 흩어졌다.

  모처럼의 이벤트 때문에 떠들썩한 점심시간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평화로운 학교의 일상이 또 하루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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