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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8장, 작은 존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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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8, 2020 00:36에 작성됨.

[도쿄도 오타구 키사라기 자택 ------ 중학생 키사라기 치하야]


“카나가와에 간다고요? 내일 당장?”

“여름인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그렇잖아. 모처럼 고민해서 세운 계획이구만. 반응이 왜 그래?”

“아뇨, 뭐... 상관없겠죠. 적어도 하루 전보다는 일찍 이야기해주면 해서요.”

“일찍 이야기해도 이러네 저러네 하면서... 쯧.”

“왜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죠? 미리 이야기한다고 나쁠 건 없잖아요!”

“됐어. 또 똑같은 이야기는 관두자고.”

“정말...”


  소녀가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는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지만, 싸우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말없이 거실을 지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섰을 때, 아버지가 소녀를 불러 세웠다.


“치하야, 이번 주말에는 카나가와 쪽 바닷가에 갈 거니까, 적당히 필요한 짐 같은 건 챙겨 놔라.”

“...네.”


  갑자기 무슨 바다인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소녀의 반에서도 가족 단위로 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방금 전에 준비물을 사러 나가야 했던 것도 원래 담당이던 코이데가 갑자기 가족 여행을 가게 됐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학교에서 수다를 떠는 편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학생들이 무리지어 이번 주말의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 갑작스러운 계획 통보에 불만도 있었다. 아버지 딴에는 형식적이더라도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겠지만, 소녀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평소의 불안정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소녀는, ‘화목한 가정 흉내 내기’ 따위는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아버지와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무언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언젠가부터 소녀는 결과를 알면서도 부딪치느니 그냥 조용히 따르는 편이 평화롭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피곤한 일을 줄이는 편이 낫다는 것도 배웠다.


“치하야, 저녁은 어떻게 할 거니?”

“...별로 배가 안 고파서요. 좀 전에 이것저것 챙겨 먹었더니.”

“그래도...”

“알아서 할게요. 괜찮아요.”


  소녀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 밖으로 애가 어쩌다 저렇게 됐냐, 같은 뻔한 레퍼토리의 다툼이 들려 왔지만, 소녀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챙겨 먹었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 불편한 식탁에 둘러앉느니 차라리 저녁을 거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있었다.

  소녀는 의자에 앉은 채 빙그르르 돌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늘 똑같은 벽지, 벽에 붙여 놓은 클래식 포스터를 지나 책장 위에 놓인 디지털 카메라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소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에 다가선 뒤, 카메라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어린 시절 항상 손에 쥐고 다녔던 이 카메라는 소녀의 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녀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사진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사진을 통해 추억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소녀는 주로 추억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찍었다. 해변에서 만들었던 모래성이라던가, 나무 블록으로 만든 탑이라던가, 공들여 쌓아 올린 카드 같은 것들을 사진으로 남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완성!”

“사진 찍어줄게. 거기 서 봐.”

“뒤에 서는 게 좋을까?”

“조심해. 건드리면 무너질지도 몰라.”

-툭.

““앗!””

“으앙... 어떡해...”

-찰칵.

“응?”

“후훗, 괜찮아. 유우. 다시 쌓으면 되니까.”


  소녀의 사진에는 항상 환하게 웃는 소년이 함께 찍혀 있었다. 소녀의 추억에는 항상 소년이 함께했다. 모래성도, 탑도, 카드도 함께 쌓았다. 하지만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후로 소녀는 사진을 찍는 것도 그만 두었다. 지금은 먼지가 쌓여버린 검은 화면은 그 후로 한 번도 빛을 내뿜어본 적이 없었다.

  소녀는 전원을 켜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다시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드러누워 무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에, 유우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덤덤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밀려드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써 잘라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늘은 공원에 가자!”

““와아!””

“유우는 오늘 아빠랑 캐치볼 할 거니까, 글러브도 챙기렴!”

“치하야는 엄마랑 자전거 연습하자?”

“네!”

“아빠! 소프트콘도!”

“하하, 소프트콘은 오는 길에 먹자꾸나.”


  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무뎌졌을지 몰라도, 가끔씩 그 때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부모님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오면 더욱 그랬다. 유우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평범하고 화목했던 그 때의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다.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어머니, 퇴근하면 까칠까칠한 수염으로 자꾸 볼에 입맞춤을 해오던 아버지,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던 유우, 그리고 공원에 산책을 나갈 때면 아버지가 사 주시던 소프트콘까지. 그 날 이후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이따금 소녀를 조여오고는 했다.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새로 산 CD를 꺼냈다. 조심스레 비닐을 벗겨낸 뒤, 케이스를 열고 CD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플레이어의 덮개를 닫은 뒤,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썼다.

  소녀가 음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떠나간 남동생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있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복잡한 감정들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율의 진행과 곡의 분위기에 몰입하며, 곡 안에 담겨있는 모든 걸 끌어내 표현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소녀에게 음악은 복잡한 현실로부터의 대피소였고, 지친 일상 속의 안식처였다. 

  첫 곡이 끝나고 트랙이 넘어가자, 포근한 기타 선율이 소녀의 귀를 간질였다. 소녀는 조금 전 역 앞에서 보았던 길거리 공연을 떠올렸다. 이름과 얼굴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슨 유키라고 했던 남자가 ‘음악을 통해 관객과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한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났다.

  

“...이어진다.”


  소녀는 그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연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감정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소녀의 노래는, 소녀 자신과 음악, 그 사이의 관계에 국한되어 있었다. 소녀는 최선을 다해 곡을 표현해냈지만, 정작 그 표현이 어디에 닿는지,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하늘에 있는 그 아이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곡이 클라이맥스를 지나 잔잔한 페이드로 마무리되자, 소녀는 역 광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누군가와,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와.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더 멀리, 더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있을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가수가 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노래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당장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해서 간단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차분히 생각을 이었다. 지금처럼 실력을 계속 갈고 닦은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가 오디션을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지치는 일상 따위, 모두 놓아두고 나아가 꿈을 향해 달리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험난한 길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저편에는 불확실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소녀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먼 미래의 일을 지금부터 너무 자세히 고민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르는 선율에 의식을 맡기며, 소녀는 복잡했던 감정을 화음의 저편으로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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