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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제4장, 새의 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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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5, 2020 22:47에 작성됨.

-제4장-

새의 시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운동장 ------ 카츠라기 타로]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긴 하지만.”


  레이나는 운동장 구령대 아래의 하늘색 문을 열어젖히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체육창고처럼 생긴 이곳은 사실 밴드부실이다. 원래부터 밴드부실로 계획하고 만들어진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2년간 방치된 것 치고는 세월에 비해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저기, 레이나. 여기가 밴드부실이야? 2년 된 것 치고는 좀...”

“응? 아, 사실 옛날에 쓰던 비품창고야. 원래 밴드부실은 음악실 쪽이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앙상블 연습 장소로 쓰고 있어서 여기밖에 남은 곳이 없다고 하시더라고. 남는 드럼 세트랑 예전 밴드부 비품도 여기 있어.”


  그럼 그렇지. 2년 전에 사라진 밴드부는 이제 연습실조차 남지 않았다 이건가. 그래도 드럼 세트가 남아 있는 게 어디인가. 작년에 오케스트라가 퍼커션을 전자 드럼으로 교체하면서 음악실 드럼 세트를 밖으로 빼냈었는데, 그 드럼 세트가 아마 여기로 온 것 같다. 우리 학교의 기자재 지원이 빵빵한 줄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드럼 세트 하나를 통째로 방치할 줄이야... 덕분에 우리가 쓸 곳이 생겼으니 감사할 일일지도.

  키사라기의 합류 후 4인조+1명으로 밴드부가 구성된 지 이틀째, 우리는 창고 청소... 아니, 밴드부실 입주를 위한 정리를 하러 왔다. 아무리 봐도 창고인 이곳은 한 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있었고, 반대쪽 구석에는 해체된 드럼 세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리 선생님께서는 일단 상자는 적당히 구령대 앞쪽에 내어 놓으면 된다고는 하셨지만, 애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안녕, 치하야!”

“늦어서 죄송해요. 타치바나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교무실에 들르느라 늦었어요.”

“괜찮아. 키사라기. 우리도 막 도착한 참이거든.”

  키사라기가 뒤늦게 우리와 합류했다. 그 뒤로 우리는 열심히 밴드부실이 될 이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와 타도코로가 상자를 옮겼고, 레이나는 드럼 세트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토는 키사라기와 함께 앰프를 확인했다.


“회로에 먼지가 쌓이면 좋지 않은데... 키사라기, 거기 상자에서 마이크 케이블 좀 줄래?”

“네? 네. 잠시만요.”

  키사라기는 케이블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케이블이 다 꼬여 있어서 찾지 못하는 걸까?


“저기, 케이블은 아직 찾는 중이야?”

“그게... 어떤 게 마이크에 들어가는 건지...”

“응? 아, 그랬구나. 내가 찾을게. 키사라기는 레이나를 도와줘.”

“죄송해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음. 키사라기는 기계치인 것 같네. 전에도 피처폰을 쓰길래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현대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다이고에게 들었을 때는 뭐든지 완벽하게 해낸다는 이미지였는데,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구나.

  우리는 그 후로도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정리하는 데 썼다. 정체불명의 상자를 전부 내놓은 뒤 간단하게 먼지를 쓸고, 레이나는 드럼 세트의 배치를 마쳤다. 사토가 아직 쓸 만한 앰프 세 개 정도를 추려 적당히 주변에 놓아두자, 제법 밴드부실 같은 모양새가 갖춰졌다. 정리를 마친 우리는 키사라기가 체육관에서 가져 온 접이식 의자를 놓고 둥글게 둘러앉았다.


“시간은 20분 정도 남았네. 잠깐 쉬면서 정해야 할 부분들을 논의하자.”

“정해야 할 부분이라면, 밴드 이름 같은 걸까나?”

“이름도 그렇고, 형식상 부장도 정해야 해.”

“그러면 이름부터 정할까?”

“잠깐잠깐.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우리, 제대로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자기소개부터 하는 거 어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타도코로랑 사토, 그리고 나는 원래 친한 사이지만, 레이나는 지나다니면서 자주 마주쳤을 뿐, 특별히 연관점이 있지는 않았다. 레이나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서 거의 잊을 뻔 했다. 키사라기 쪽은... 거리감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고.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동안 키사라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선을 살짝 낮추고 한 곳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밴드부실 ------ 키사라기 치하야]


  역시 관둘걸 그랬어.


  소녀는 분위기에 휩쓸려버린 전 날의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노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이제는 다가와 주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승낙했지만, 정작 상황을 맞닥뜨리자 그녀는 상상 이상의 부담감을 받고 있었다.


“저기, 키사라기.”


  카츠라기라는 이름의 남학생이 말을 걸어 왔다. 합창부에서 활동할 때 자주 마주치긴 했지만, 별다른 친분이나 교류는 없었다.


“혹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표정이 좋지 않아서.”


  아, 또 가시 돋친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 아니었던 소녀는 가끔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을 하고 있으면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인다는 오해를 받기 일쑤였다. 최악이었다. 이 사람들은 특별히 생각해서 다가와 주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해를 사는 것뿐이구나.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프로듀서의 말대로 노력하고 싶었는데, 바꿔나가고 싶었는데. 결국 그 때 이후로 전혀 나아가지 못했구나, 하는 죄책감이 소녀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음... 그래? 그렇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줬으면 하는데. 앞으로 같이 활동할 날이 많으니까. 너무 거리를 두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혹시 뭔가 사정이라도 있어?”


  소녀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앞으로? 과연 그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곳에 쓰게 될까. 첫 날부터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리고는, 앞으로 다른 이들을 상처주지 않고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 합창부에서의 악몽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응?”

“당신이 저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뭐?”

“ㅊ, 치하야?”


  카츠라기는 적잖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그는 그저 소녀를 걱정해서 질문을 던졌을 뿐일 것이다. 별다른 의도도, 그녀를 해코지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소녀도 당연히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해도, 역시 무리겠죠.”

“키사라기! 말이 심하잖아! 카츠라기는 그저...!”


  말을 하고 나서도 아차, 하고 생각했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치하야, 네가 뭘 안다는 거냐?’

‘아이돌? 그딴 걸 해서 뭘 어쩌겠다고?’


  이래서는 그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프로듀서를, 사무소의 모두를, 그리고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이들을 실망시켰다. 소녀는 후회했다. 역시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을 때, 제대로 해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 기대어 울고 싶어졌다. 프로듀서라면, 하루카라면. 이런 자신을 보고 뭐라고 이야기할까, 하고 생각했다.

“잠깐, 사토. 기다려줘.”

“아, 응...”


  소녀는 마치 포식자를 맞닥뜨린 사냥감처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사토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흘렸다. 그 두려움의 대상은 사토도, 카츠라기도 아니었다. 소녀는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ㅈ, 죄송해요. 심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치하야...”


  소녀를 공연에 초대했던 드러머, 히야마도 카츠라기 못지않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소녀는 애써 히야마를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저, 밴드부로 활동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모처럼 신경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소녀는 사과를 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당황하고, 상처받은 그들의 표정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소녀는 급히 문을 열고 밴드부실을 빠져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잘 된 것 아닐까. 그냥 놓아두면 이대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한편, 밴드부실.]


  밴드부실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평소와 달리 말을 아끼던 타도코로 신이치가 정적을 깼다.


“으-음. 이거 어째 상황이 어려워졌네.”


  그의 분위기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히야마 레이나와 사토가 적잖게 충격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의외로 당사자인 카츠라기 타로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는 당연히 당황스러워했지만, 그 후의 그는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반박하는 사토를 직접 제지할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이, 카츠라기, 혹시...”

“역시. 너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응. 부끄럽지만 부정할 수가 없네.”  


  둘은 마치 서로 통했다는 듯이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난 뒤, 타도코로 신이치는 마커 하나를 집어 들고는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 명단을 적어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밴드 이름은 다음 기회에 정하는 걸로 하자.”

“그래야겠지.”

“저기, 얘들아?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치하야가 방금 저렇게...”


  침묵을 지키던 히야마 레이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타도코로 신이치는 특별히 대답하지 않고 명단 작성을 마친 뒤 돌아섰다.


스이게츠 밴드부: OOO

보컬리스트: 키사라기 치하야 如月千早

기타리스트: 타도코로 신이치 田所信一

베이시스트: 카츠라기 타로 葛城太郎

드러머: 히야마 레이나 檜山玲奈

잡무: 사토 さと


  카츠라기 타로가 먼저 입을 열었고, 타도코로 신이치가 그 뒤를 이었다.


“걱정 마, 레이나.”

“카츠라기랑 나는, 이미 저런 타입을 만나 본 기억이 있거든.”



[도쿄도 오타구 765 프로덕션 ------ 프로듀서]


  바쁜 날이었다. 물론 최근 일주일 동안 바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지만, 오늘은 오전에 유키호의 인터뷰, 오후에 방송국 미팅이 있어서 이동할 일이 많았다. 평일에도 일거리가 생기기 시작해서 아이들이 학교를 빼야 하는 일이 생기고는 있지만, 그래도 랭크가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뿌듯하기도 했다.

  시계가 5시 30분 정도를 가리키자, 치하야가 사무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별다른 일거리가 있지는 않았으므로, 간단한 저녁 레슨 정도만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치하야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물론 평소에도 활발하다거나, 밝다거나, 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최근에 과로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까? 역시 오늘은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까? 아니지, 레슨을 시켜주지 않으면 오히려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ㄱ, 굿 이브닝, 치하야-!”

“...영어, 인가요.”


  아, 틀려버렸나. 치하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시선을 아래로 흘렸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저기, 치하야?”

“프로듀서, 오늘은 쉬어도 괜찮을까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레슨은 개인적으로 연습해오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 그래. 요즘에 일이 많아져서 힘들었지. 그러면 오늘은 쉬는 걸로 하자. 무리하지 말고.”

“...네. 죄송합니다. 프로듀서.”


  치하야는 그러고는 돌아서서 사무소를 빠져 나갔다. 창밖을 살피자 건물 출입구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 무슨 일일까. 지난 아카바네 방문 이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인사도 무난하게 잘 받아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창문 앞에 서서 고민하던 중, 사장님께서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거셨다.


“자네, 요즘 고생하고 있는 것 같군. 키사라기 군의 일인가?”

“아, 네. 어째선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음. 키사라기 군은 뛰어나지만, 가끔 마음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 그래도 자네라면, 잘 해결할거라 믿네. 지난 몇 달 간 잘 해주었으니 말일세.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만 퇴근해도 좋네.”

“네? 그래도 괜찮을까요?”

“키사라기 군도 자네도 지쳤겠지. 편히 쉬게나. 아, 오토나시 군, 자네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도 좋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나는 자리로 돌아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 정리를 거의 끝마쳤을 때, 오토나시 씨가 말을 걸어왔다.


“프로듀서 씨, 치하야짱이 걱정되시나요?”

“네, 아무래도 걱정이 되네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지...”

“요즘 들어 일이 갑자기 늘었으니까요, 피곤할 수도 있겠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역시 그런 걸까요. 감사합니다. 오토나시 씨.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네요.”

“저기, 프로듀서 씨,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라도...”


  그래. 갑자기 활동이 늘어나면 충분히 피곤한 날이 있을 수도 있지. 내일도 있으니 당장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좀 더 상황을 살펴보면 되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오토나시 씨! 저는 내일 스케줄을 좀 더 조정해봐야겠네요.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ㄴ...네? 아, 네! 우으...”


  음? 오토나시 씨가 어째선지 실망한 표정을 지으시는데, 혹시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좌우간, 나는 사무소 건물의 계단을 내려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서 내려 공원을 지나가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더라도(もし幸せ 近くにあっても)...”


  치하야였다. 그러고 보니 치하야의 집도 이쪽 방향이었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시간대. 뛰어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텅 빈 공원에서, 그녀는 노래하고 있었다. 비록 빈 공원이었지만, 멀리 있는 누군가가 들어주면 좋겠다는 듯이. 나는 치하야에게 말을 걸어야할지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가다듬기 위해서. 그 신성한 의식에 굳이 내가 간섭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시야 밖에서, 잠시 서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네?”

“경시청 이케가미서 소속 모리 순경입니다. 잠시 검문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귀찮게 되어버렸네. 아무래도 여고생을 숨어서 지켜보는 거동수상자로 오해받은 모양이었다. 


“잠시 가방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저기, 프로듀서? 여기는 무슨 일로...”

“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러 온 치하야가 내 신분을 인증해줘서 일단 검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치하야와 나는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군요. 프로듀서도 퇴근길이셨군요.”

“응.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미안. 치하야.”

“아니에요. 신경써주신 거니까요.”

“그래서...”


  나는 말을 하면서도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앞서서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네?”

“오늘의 치하야는, 왠지 피곤해 보였거든.”

“아, 네...”

  치하야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자세하게 물어도 괜찮을지, 혹시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지 하는 고민이 끊이지를 않았다.


“프로듀서, 저는 역시... 변할 수 없는 걸까요?”


  치하야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조금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우선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도 될까?”

“저, 프로듀서가 말씀해주신 대로 노력해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도망치고 말았어요.”


  그 후로 치하야는 대략적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주었다. 부활동 제의를 수락했지만, 부담스러워하다가 결국 오해를 사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지난번에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번에도 함부로 이야기했다가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됐지만, 그래도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치하야랑 처음 만난 지도 벌써 세 달 가까이 됐네. 본격적으로 치하야의 담당 프로듀서가 된 건 두 달 정도지만.”

“네? 그러네요. 그건 갑자기 왜...”

“지금의 치하야는, 그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또 도망쳐버렸으니까요.”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네? 그렇지만, 전 결국 달라지지 않았는걸요.”


  치하야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첫 미팅, 기억 나? 그때의 치하야는 나랑 이야기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저, 그랬었나요?”

“응. 어서 일류 가수가 되어야 하니까, 낭비할 시간은 없어요. 라면서.”

“그런...”

“하지만 지금의 치하야는, 이렇게 나한테 고민 상담도 해 오잖아.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 밴드 라이브에 초대해준 것도, 굉장히 기뻤어.”

“그건, 프로듀서의 평가도 참고하기 위해서...”

“바로 그거야. 치하야는 일류가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포함해주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프로듀서...”

“치하야는 자신이 변하지 못했다고, 성장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만, 사람은 한 순간에 변할 수 없어. 그렇지만 조금씩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언젠가는 큰 도약이 되거든. 노력해보고 싶어서 부활동 제의를 받아 들였다고 했지? 치하야는 그 결정을, 한 걸음 내딛어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거잖아. 그게 성장했다는 증거야.”

  치하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 이미 엄청난 실례를 저질러 버린 것 같아서...”

“그건 치하야가 직접 결정해야겠지.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해 줄지는 알 수 없지만, 치하야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면 분명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것도 과정이니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저, 항상 걱정만 끼치는데도, 프로듀서는 매번 상냥하시네요.”

“으-음. 치하야를 닮은 아이를 하나 알고 있거든.”

“네? 저를 닮았다니, 누구인가요?”

“치하야가 조금 더 편하게 스스로를 대할 수 있게 되면, 그 때 알려줄게.”

“그것도 과정...인거네요. 후후.”


  치하야는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인용한 뒤 살짝 웃어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하고, 한 사건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변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작은 변화일지라도, 그녀는 확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비록 비틀거리고 불안해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치하야, 집으로 가는 길이지? 우리 집도 이쪽 방향이거든. 가는 길에 편의점이 있으니까, 소프트콘이라도 먹으면서 가자. 내가 사 줄게.”

“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우으... 좋아요.”


  치하야와 나는 공원을 나와 길을 건너 걸음을 옮겼다. 흔들려도 괜찮다. 좌절하도 괜찮다.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


  그것도,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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