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화음의 저편. -제1장. 머나먼 음악-

댓글: 2 / 조회: 733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10-19, 2020 12:01에 작성됨.


-제1장-

머나먼 음악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음악실 ------ 카츠라기 타로]


  오늘은 모처럼 생물부 활동이 일찍 끝났다. 2학년 테너 파트장이지만 생물부 때문에 의무 연습에만 참석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오랜만에 자율 연습시간에 음악실에 갈 수 있게 됐다. 비록 티는 잘 안 내긴 했지만 엄연히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합창부랑 잘 안 어울린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사토가 어째선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힘을 주어 음악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음악실에는 전체 부원의 4분의 3 정도 되는 인원이 파트별로 모여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교탁 쪽에는 몇 명이 모여서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검은 장발에 차가운 분위기를 가진 소녀, 키사라기 치하야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쪽이 키사라기였다. 그 외에도 부장과 차장, 학년별 파트장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나도 일단은 파트장이라는 직함이 있었기에,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교탁 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키사라기. 네가 하는 이야기는 알겠지만, 갑자기 모두에게 익숙하던 방법을 바꾸라고 하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롭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타나카 선배, 지금처럼 계속하면 오히려 목 상태 관리도 어려울 거고, 공동연습 때도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략적인 흐름을 보아하니 연습 방법에 대한 논의인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충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3학년 테너 파트장 선배가 내 어깨를 가볍게 건드린 뒤 밖으로 불러냈다.


“타로, 잠깐 매점이나 갈까? 아키타랑 사이토도 같이 갈 건데.”

“아. 네.”


  나와 동급생인 아키타와 사이토, 그리고 파트장인 니시야마 선배는 함께 소프트콘을 들고 운동장 트랙을 돌았다. 연습을 땡땡이치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지만, 니시야마 선배가 불러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일단 함께 걷고 있었다.


“키사라기가 소그룹 분할이랑 연습실 배정 관련해서 새 연습법을 제안했어.”

“네?”

“지금처럼 큰 음악실에 파트별로 모여서 연습하는 자율연습시간이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라면서. 서로 소리가 묻히기도 하고, 그러면 음 자체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아키타가 키사라기에게 동조했다.


“그렇지. 그렇지만 너희도 타나카 성격 잘 알잖아.”

“아. 그건 그렇죠.”

“키사라기의 실력이 워낙 뛰어난 것 때문에 신경 쓰는 것도 있지만, 키사라기는 조퇴나 결석으로 부활동에 안 나오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타나카의 심기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나봐. 뭐, 연습할 장소를 더 구하는 것도 일이기는 하니까.”


  타나카 선배는 합창부의 총괄 부장을 맡고 있다. 본인도 나름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 음대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1학년 때 키사라기가 입부한 이후로 어째선지 실력에 대한 평가가 그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적잖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타나카 선배 쪽은 2학년 때부터 간부진을 맡아 왔던 수완도 있고, 오히려 키사라기는 붙임성이 없는지라 실질적인 권력이나 상황의 주도권은 오히려 타나카 선배에게 있었다. 조금 전의 충돌에는 분명 타나카 선배의 자존심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잠시 상황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다, 역시 여학생들의 관계는 어렵구나, 하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키사라기 말이에요. 작년부터 타나카 선배랑은 안 맞는 점이 있긴 했지만... 선배가 부장이 된 이후로는 별다른 일은 없었잖아요.”

“글쎄다... 올해 들어서는 갑작스럽기는 한데...”


  니시야마 선배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늘 웃는 느낌의 얼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끔 이 선배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아챌 수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만화에 한 명씩 나오는 실눈 캐릭터 같은 느낌이었다. 한 30초 정도 정적이 흘렀을까,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학년에서의 키사라기는 어떤 애야?”

“어떤 애냐고 물어보셔도...”

“여학생 쪽에 물어보는 게 더 확실하기는 하겠지만, 너희들 사이에서도 어떤 이미지가 있을 거 아니야. 평판이라던가.”

“글쎄요, 사실 아는 애들 자체가 많지 않아서요. 지나가다 봤거나 이름만 들어본 정도?”

  나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타도코로는 아예 키사라기를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어째선지 그 후로 빤히 바라보기에 관심이 있나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구나. 우리 학년은 키사라기를 합창부에서 보는 정도가 전부라서, 좀 더 일상적인 부분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대하기 편해질까 생각했는데... 어째 어려울 것 같네.”

“선배들은 키사라기 쪽을 신경 쓰고 계신건가요?”


  내가 물었다.


“뭐, 다들 키사라기가 가장 뛰어난 건 인정하고 있으니까. 사실 우리 중에서도 의견이 갈리기는 해. 나는 조금 더 온건한 편이고, 몇몇은 불성실하다고 좋지 않게 보기도 하고.”


  그 몇몇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일단 조용히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가 졸업하고 나면 너희가 주가 되어야 하니까, 내 입장에서는 실력 있는 후배 하나가 더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남아줬으면, 이라는 표현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다. 확실히 키사라기는 합창부 내에서도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학교를 자주 안 나오기도 했고, 타나카 선배를 비롯한 몇몇 간부진 선배들과도 마찰이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키사라기가 합창부나 학교를 그만 둔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별다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을 섞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키사라기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니시야마 선배의 말대로 그 점은 선배들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어찌되었건 함께하던 부원이 이탈하는 것은 나로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키사라기가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연습 시간에는 파트와 함께 모여서 연습하기는 하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 키사라기를 마주쳤을 때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전의 점심시간에도 그랬다. 아마 우리가 사토의 도시락을 옥상에서 나눠 먹기 전에도 키사라기는 혼자 음악을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들어갈까.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타나카가 잔소리할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니시야마 선배를 따라 다시 음악실로 향했다. 해가 넘어가면서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꼭대기 층의 열린 음악실 창문에서는, 머나먼 음악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쿄도 오타구 타도코로 자택 ------ 타도코로 신이치]

  “...에?”

“왜 그래, 신짱? 혹시 알고 있어?”

“오빠는 아이돌은 잘 모르잖아. 별 일이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왠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키사라기라는 성은 흔하지 않은데, 혹시 친구 중에 있으면 친척일지도.”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뮤 삼촌에게는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여동생이 알게 되면 사인 같은 것을 요구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B반의 레이나가 라이브 하우스에서 인디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유이나가 매달리며 사인을 받아 달라고 했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키사라기는 오늘 점심시간에서야 존재라도 알게 된 사이고, 무엇보다 저쪽은 나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탁을 받게 되면 이래저래 곤란해질 것 같았다. 

  키사라기가 아이돌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몇 가지 의문이 해소되었다. 합창부에 속해 있다는 점은 아마 노래에 관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고,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돌 활동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다 문득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가만히 있다가 오늘에서야 알게 된 애한테, 나는 어째서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는지, 그리고 어째서 뮤 삼촌을 통해서도 연결점이 생기는 것인지. 더 가다보면 운명론이라던가 하는 심오한 고찰에 빠져버릴 것 같아서 일단 저녁을 먹는 쪽에 집중했다.

  9시쯤 되었을까, 나는 뮤 삼촌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삼촌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검은 장발에 차분한 인상을 가진 소녀, 키사라기 치하야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혹시라도 동명이인일지 모른다는 의심도-애초에 흔한 이름이 아니니까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라졌다.


“이 시간까지 업무야?”

“아, 응. 사실 오늘 이삿짐을 옮겨야 한다고 일찍 퇴근한 거라서, 잔업은 지금 처리하려고.”

“회사원 같네.”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이 애가 담당한다는 아이돌이야?”

“맞아. 지난주에 촬영한 프로필 사진인데, B컷은 걸러내야 하거든. 제3자의 입장에서 한 번 볼래? 전직 사진부원 씨.”


  중학교 때까지 사진부인 건 맞는데, 애초에 풍경 사진 위주라 아이돌 프로필 같은 건 모른다고, 하는 태클이 걸고 싶었지만 프로필 사진에 흥미가 생긴 건 사실이었으므로 일단 보기로 했다.


“쿨한 이미지는 좋은데, 그래도 역시 딱딱하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만, 본인이 웃는 얼굴이 편하지 않다고 해서 말이지.”


  점심 때 본 키사라기 역시 무표정이었다. 사토가 얘기했던 얼음공주라는 별명이나, 카츠라기가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확실히 그녀가 점심에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웃는 얼굴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 그래도 조금은 웃는 사진이 있기는 한데.”

“...이건,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해.”


  만화에서 묘사하는 억지웃음이 바로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이것보다는 전에 봤던 차분한 인상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후로도 뮤 삼촌의 A컷 선정을 돕다가, 키사라기에 대해 이야기할 적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다소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아, 누나표 타코야끼가 그리워지는 시간대네. 뭐라도 먹을까, 신짱?”

“키사라기, 우리 학교야.”

“...자세히 말해봐. 신이치.” 


  아, 나왔다. 뮤 삼촌 특유의 ‘진심인 얼굴’. 이럴 때는 가끔 사람이 바뀐다니까. 뮤 삼촌은 그 후로 키사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물었지만 나는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다. 카츠라기는 좀 더 알고 있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얘기했듯이, 나는 오늘이 돼서야 이름이랑 얼굴을 매치한 정도라, 물어봐도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그냥 점심시간에 그런 일이 있었을 뿐이야.”

“음. 그랬구나. 일단 알겠어.”

“혹시 필요하면 물어서라도 알아볼까? 친구 중에 같은 부활동을 하는 녀석이 있는데.”

“아니, 그럴 것 까지는 없어. 치하야의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그런 일들은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나으니까.”

“그런 거 치고는 너무 진지하게 물어보던데.”

“본인이 직접 학교생활에 대해서 간단하게 얘기했던 적이 있어서, 잠깐 신경 쓰였을 뿐이야. 혹시 필요하면 물어볼게. 일단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되도록이면 나를 안다는 얘기도 하지 말아줘.”

“뭐, 원래도 얘기를 나누는 관계는 아니라서 그 쪽은 걱정 안 해도 되지만... 내 친구들에게도 특별히 이야기하지는 않을게.”

“고맙다. 신이치.”


  나는 방을 나와 문을 살짝 닫았다. 그러고는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굳이 뮤 삼촌은 자신을 아는 사이라는 것을 숨겨 달라고 했던 걸까. 정황상 키사라기가 아이돌을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기는 했는데, 혹시 본인이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걸까, 그보다 뮤 삼촌은 왜 그렇게까지 진지해진 걸까. 키사라기는 학교생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애초에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

  봄의 밤공기가 흐르도록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는, 머나먼 상점가의 매장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도쿄도 오타구 타도코로 자택 ------ 프로듀서]


  일단은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대처했지만, 솔직히 앞으로의 프로듀스 방침이나 방향성이 더욱 걱정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신이치의 폭탄선언에 놀라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등받이에 기대어 처음 치하야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저기... 프로듀서?”

“응? 왜 그래, 치하야?”

“한가롭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괜찮은가요? 차라리 시간을 아껴서 레슨을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아뇨, 일류가 되려면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해서...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여전히 낭비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이나마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든 느낌이라 다행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치하야는 굉장히 금욕적이고 선을 긋는 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다지 친근해하지는 않는다. 가끔씩 터무니없는 다쟈레를 날리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인터넷을 참고해 이런저런 말장난을 공부해보고는 있는데, 그때마다 효과는 괜찮지만 일상적인 거리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다.

  나 역시 이쪽 업계나 사회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동료는 신뢰와 유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어느 분야가 되었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함께 나아갈 동료에게 의지하는 것은 큰 원동력이 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었고, 힘겨웠던 일상을 버텨낼 수 있는 돌파구였다. 나는 치하야가 나를 충분히 믿고 의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선을 긋는 태도에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치하야는 지금 고등학생?”

“네. 얼마 전에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학교생활은 어때? 지금까지 아이돌 활동이랑 병행하기 힘들지 않았어?”

“성적은 잘 받고 있어요.”

“음. 그렇구나.”

  조금 전에 신이치를 붙잡고 물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치하야는 학교에 대해 성적 이야기만 했을 뿐 친구나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시선을 떨구기도 했다. 그 후 더 깊게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본인이 유쾌해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치하야는 그 후로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보통 그 또래 여고생들이 학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장 가까운 예시로 하루카가 친구들과 실습 시간에 과자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마코토가 같은 학년의 여학생들로부터 러브레터를 받았다며 고민 상담을 해오는 것에 비하면, 치하야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신이치가 해준 설명에 따르면 치하야는 나와 사무소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보다 훨씬 암담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신이치가 학교의 모두를 알 만큼 발이 넓지는 않지만, 남녀와 선후배를 가리지 않아 나름 인맥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름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는 것은, 적어도 적극적으로 교우관계를 만드는 편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사실 신이치에게 치하야의 학교생활을 알아봐달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일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는지,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면 앞으로의 프로듀스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단순히 하나의 상황을 넘기는 데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치하야에게는 벽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어떤 배경과 이유들이 하나씩 모여, 마음의 벽돌이 되어 쌓아 올린 벽이 있었다. 나는 그 벽을 뚫고 나가고 싶다고 느꼈다. 그 벽을 허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힘으로, 억지로 그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싫었다. 치하야와 함께 시멘트를 녹이고, 함께 벽돌을 들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조차 잘 모르는 타인에 의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신이치가 치하야에게 나와의 관계를 알린다면, 분명 치하야는 학교라는 일상에서도 이를 신경 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스스로에게 벽을 쌓은 그녀에게, 또 다른 벽을 쌓게 할 수는 없었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정작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똑같이 출근하여 평소와 다름없이 치하야를 대할 것이고, 치하야 역시 변함없는 일상을 보낼 것이다. 신경 쓸 것이 생긴 쪽은 오히려 신이치였다. 좀 전에도 왠지 모르게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치하야와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A.I.R.A.]에서 발표하는 아이돌 랭크에서 D3 랭크에 진입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였다. 랭크라는 알파벳과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것이 당장의 성과이자 가장 객관적인 척도였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언가 그 너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적이라고, 불필요한 꿈을 꾼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수치화된 평가의 척도를 넘어선 저편에 그것을 넘어선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 주변을 잘라내고 자신을 조여 온 저 아이에게 주변을 바라볼 여유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 가치를, 되돌려주고 싶었다.

  결국 프로듀싱도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업일 뿐인데 너무 철학적인 걸까,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피로가 몰려오면서 정신이 흐려졌다. 뒤로 젖힌 가죽 의자가 그 어떤 침대보다 푹신했다.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느껴졌다.


“...촌, 뮤 삼촌!”

“으...음? 후와암...... 신짱?”

“멀쩡한 침대는 내버려두고 왜 의자에서 자는 거야. 그보다 신짱이라고 하지 말라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신이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그대로 잠이 들어 아침까지 자 버린 듯 했다. 시각은 8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신짱, 학교 안 가?”

“오늘 토요일인데.”

“그런가... 후암...... 잠깐, 토요일?”

“응. 토요일.”


  아. 큰일 났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 프로듀서님.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즈사 씨. 리츠코랑 오토나시 씨는 이미 회의 중인가요?”

“아, 두 분이라면 사장실에 계세요~”

“아아...! 감사합니다!”


  나는 황급히 사장실로 향했다. 살짝 노크하고 들어가 바로 고개부터 숙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오, 자네. 왔는가. 아무래도 이사하느라 힘을 많이 뺀 모양이군.”

“이쪽이 지난번에 이야기한 프로듀서 군인가? 으음.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네!”

“아. 네......? 이쪽 분은?”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내 사촌 동생 준이치로라네. 지금은 우리 765프로의 회장을 맡고 있지.”

“아, 지난번에 편지를 써 주신 분이 회장님이셨죠? 여러모로 신세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내가 도착했을 때까지는 본격적인 회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오토나시 씨에게서 들은 바로는 하와이에 가셨던 회장님이 서프라이즈로 방문하시는 바람에, 옛날이야기로 한창 즐거워하고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정했던 회의 시간에 늦은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이 많아도, 나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다.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가리켰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치하야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 좋은 아침이야. 치하야 짱.”

“치하야 짱...?”


  앗.

  ...오늘 잘 안 풀리네.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2학년 B반 ------ 히야마 레이나]


“레이나, 좋은 아침!”

“아, 좋은 아침~! 타로 군, 신이치 군, 그리고 카토 군. 맞지?”

“사토, 인데...”

“미안! 정말 미안해! 나, 이름을 외우는 데는 재능이 없어서! 정말 미안!”

“ㅇ,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이런, 또 실수해버렸네. 이름을 틀려버리면 여러모로 미안하니까, 이번에는 잘 외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주 마주쳤으니까 이번에는 모처럼 이름을 떠올려 봤는데, 틀려 버렸구나. 이제라도 기억해놔야지.


“힘내라, 사토.”

“나는 별 말 안 할게.”

“시끄러...”


  자주 함께 다니는 A반의 삼인조는 그렇게 내 뒤로 멀어져 갔다. 저 셋 중에서 타로 군이랑 신이치 군은 확실하게 외우고 있는데, 사토 군만 틀려버렸다. 잠깐, 그보다 사토가 성이던가, 이름이던가? 

  나는 다이고 군에게 부탁 받았던 조사 자료를 전해주기 위해 D반으로 향했다. 시간이 조금 일러서 그랬는지, 아니면 월요일 아침이라 다들 피곤해서 늦게 등교하는 것인지 몰라도, 우등생 모임인 D반인데도 교실에는 한 명밖에 없었다. 검고 긴 머리에 단정한 블레이저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같아서 일단 방해가 되지 않게 문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네. 프로듀서. 그러면 끝나고 바로 사무소로 갈게요.”


  남의 사생활이기도 하고, 엿듣는 취미도 없는 데다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참으려고 했는데, 그, 뭐랄까. 숨길 수 없는 여고생의 두근거림이랄까? 프로듀서라는 단어 때문에 왠지 호기심이 솟구쳐 몰래 들어버렸다.


“방송 쪽 미팅인가요... 그래도 8시 이후로는 레슨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로듀서에 방송... 그리고 레슨. 종합해보면... 혹시 저 아이, 아이돌 같은 걸 하고 있는 걸까? 비록 아이돌은 아니지만 나도 인디 밴드에서 드러머를 하고 있으니까, 뭔가 엔터테이너로서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친해지고 싶어! 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들뜬 채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기, 안녕? 숨어서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하?!”


  우-와. 이 아이, 놀랐을 때 표정이 꽤나 무섭네. 아니면 갑작스러워서 더 그런 걸까. 적대감이 팍팍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친해지고 싶은데, 조심스럽게 다가가야겠다.


“놀랐다면 미안. 난 B반의 히야마 레이나야. D반에는 친구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직 안 온 것 같아서.”

“그러셨군요...”

“이름, 알려주지 않을래?”

“키사라기. 키사라기 치하야에요.”


  거리감 엄청나! 첫인상이 차분해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동급생인데? 내가 먼저 B반이라고도 했는데? 그,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히야마 레이나의 이름을 걸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전화 하는 거 들어버렸거든. 혹시, 아이돌 같은 거 하고 있어?”

“아, 네. 몇 달 전부터 아이돌... 보컬리스트 활동을 하고 있어요.”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어. 그보다 이쪽은 프로듀서도 있는 진짜 프로구나. 멋있다. 우리 밴드는 반 취미지만, 그래도 체계적으로 관리 받는다거나 하면 좀 더 이름이 알려질지도 모르는데.


“저기저기, 아이돌은 아니지만, 나도 밴드에서 음악 연주를 하거든. 이번 주 토요일에 아카바네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이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보러 와주지 않을래?”

“네...? 제가 가도, 괜찮은 건가요?”

“응응! 치하야는 프로니까, 감상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꼭 와줬으면 하는데, 안 될까?”

“토요일 저녁때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해냈다! 고마워, 치하야! 와 준다니 기뻐! 자, 여기 티켓. 혹시 모르니까 두 장 줄게.”


  그 때였다. 다이고 군이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아, 다이고 군! 부탁했던 자료, 가져 왔어.”

“고마워, 레이나. 나는 학생회실에 볼 일이 있어서, 책상 위에 놓아 줘.”

“오케이-!”


  다이고 군은 가방만 놓아두고 바로 교실을 나섰다. 잠시 생각해보니, 나도 행사 건으로 학생회실을 들러야 했다는 점을 깜빡 잊고 있었다.


“아, 큰일 날 뻔 했다! 나도 학생회실에 가봐야 하는데! 그럼 치하야, 이야기해서 즐거웠어! 이번 공연, 열심히 준비할게!”

  나는 다이고 군의 책상 위에 파일을 올려놓은 뒤, 앞문으로 D반 교실을 나서려는 찰나, 치하야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기, 히야마 씨?”

“응?”

“감사해요. 초대해줘서.”

“아니야! 그리고 말은 편하게, 레이나라고 불러줘! 그럼 또 봐!”


  나는 D반 교실을 나선 뒤 학생회실로 향했다. 누군가가 보러 와주는 공연은 즐거웠다. 물론 불특정한 사람들이 공연을 봐주는 것도 좋았지만, 아는 누군가, 친해지고 싶은 누군가가 와준다면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내 휴대전화에서 라인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하마터면 알림이 켜진 것도 모르고 있을 뻔 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우리 밴드의 리더인 기타리스트 언니였다.


[타츠 언니, 오전 7:48: 오늘 오후 6시까지 모여 줘. 전에 쓰던 연습실을 못 구해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겼으니까, 첨부한 지도 보고 올 것. 길치인 히야마는 조심하고.]


  언니도 참. 짓궂다니까.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연습에 늦을 수는 없었다. 특별한 손님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으니까.



[한편, D반 교실 ------ 키사라기 치하야]

  처음 말을 섞어본 여학생-그것도 학교의 아이돌과 같은 인기인-에게 공연 초대를 받아버린 소녀는,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뒤처럼 멍하니 티켓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디즈 나이트 / 아카바네 오오미야 라이브 하우스 / 토요일 오후 8시 오픈, 8시 30분 시작]


  소녀는 티켓 두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냈다.


[제목: 프로듀서, 혹시 토요일에... | 시간: 오전 8:02 | 수신자: 프로듀서 | 내용: 프로듀서, 혹시 토요일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저녁 7시 이후에 저랑 같이 어딘가 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치하야.]


  소녀는 메일을 보낸 뒤 티켓을 소중히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고 살짝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틀에서는 아침 이슬이 떨어지고, 한 쌍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머나먼 음악 (遠い音楽) 

원곡 ZABADAK 

커버 키사라기 치하야

THE IDOLM@STER MASTER SPECIAL 03 수록

 

そっと耳を澄まして 遠いとおい音楽

살며시 귀를 기울여봐 멀고 머나먼 음악

君の小さな胸に 届くはず

너의 자그마한 가슴에 전해질거야

海は満ちて干いて 波はフイゴの様に

바다는 넘실거리고 파도는 풀무와 같이

涼しい音楽を 町に送る

산뜻한 음악을 마을로 보내네


耳を傾けて 地球の歌うメロディ

귀를 기울여 들어봐 지구가 노래하는 멜로디

あふれる音の中 ただひとつえらんで

흘러넘치는 음 속에서 하나만을 골라


雨音 草の息づかい

비의 소리 풀의 속삭임

風のギター 季節のメドレー

바람의 기타 계절의 메들리

聞こえない ダイナモにかきけされ

들리지 않네 발전기 소리에 묻혀

人は何故 歌を手放したの

사람은 어째서 노래를 놓아버린 걸까


そっと耳を澄まして 遠いとおい音楽

살며시 귀를 기울여봐 멀고 머나먼 음악

君の乾いた胸に 届くはず

너의 메마른 가슴에 전해질거야

森は緑の両手に 夜露を受けとめて

숲은 초록빛 두 손에 밤이슬을 받아서

晩餐の祈りを 歌ってるよ

만찬의 기도를 하며 노래하고 있어


耳を傾けて 地球の歌うメロディ

귀를 기울여 들어봐 지구가 부르는 멜로디

あふれる音の中 ただひとつえらんで

흘러넘치는 음 속에서 하나만을 골라


きらめく 虫たちの羽音

반짝이는 곤충들의 날개 소리

鳥の歌 あさつゆのしずく

새들의 노래 아침이슬 방울

きこえない ダイナモにかきけされ

들리지 않네 발전기 소리에 묻혀

人は何故 歌を忘れたの

사람은 어째서 노래를 잊어버린 걸까


バイオスフェア 君の生命こそが

바이오스피어 너의 생명이야말로

バイオスフェア 素晴らしい楽器だから

바이오스피어 멋진 악기이니까

バイオスフェア 歌を奏でて

바이오스피어 노래를 연주하며

バイオスフェア 鳥たちを真似て

바이오스피어 새들을 따라 노래하자

バイオスフェア リズムを受けとめて

바이오스피어 리듬을 받아들여

バイオスフェア 50億のコーラス

바이오스피어 50억이 부르는 코러스


-제1장, 머나먼 음악. Fin.-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