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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의 저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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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7, 2020 10:35에 작성됨.

-프롤로그-

하늘

 

[도쿄 스이게츠 학원 고등부 운동장 ------ 타도코로 신이치]

 

평범한 날이었다. 푸른 하늘, 적당한 바람, 푸른 잔디. 나는 오른손에 바나나맛 우유를 들고, 입에는 메론빵을 문 채 카츠라기와 함께 트랙을 걷고 있었다. 카츠라기는 나의 메론빵 권유를 완고히 거절하고, 늘 먹던 초코소프트콘으로 점심을 대체하고 있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사토가 도시락을 옆에 낀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합류했다.

 

어이, 오늘도 트랙에서 식사야? 그러지 말고 어디 좀 앉자.”

우리가 걷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늘도 도시락이냐? 레이나한테 직접 자랑하라니까?”

시끄러. 모처럼 치킨 카라아게를 싸봤단 말이야. 스탠드라도 좋으니까 좀 앉자고.”

세 조각은 줘야 할 거다.”

그럴 줄 알고 두 배로 쌌다. 이 식충이들아.”

 

사토는 요즘 요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햄버그를 시작으로 다양한 것들을 만든다더니,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매점 대신 직접 도시락을 싸 오고 있다. B반의 레이나가 요리 잘 하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은 뒤로 시작된 것이기에 심심할 때마다 놀려먹고 있지만, 본인은 일단 부정하고 있다. 솔직하지 못한 녀석. 내가 요리를 권할 때는 그 노력을 하느니 사 먹는 편이 싸게 먹히겠다는 건 언제고, 하루아침에 카라아게를 튀기고 있으면서 부정할 걸 부정해야 할 거 아닌가. 좌우간 카츠라기와 나에게는 얻어먹는 카라아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사토와 함께 운동장을 떠나 교사로 들어갔다.

교실에는 점심시간마저 앉아서 공부를 하는 무시무시한 놈들이 있었으므로 냄새를 피우면 불필요한 눈초리를 받을 것이 뻔했기에, 우리는 사토가 도시락을 싸 오는 날이면 옥상에서 적당한 자리에 둘러앉고는 했다. 그날도 햇빛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딱히 돗자리는 없어서 적당히 옥상 창고 옆에 세워져 있던 종이 상자 몇 개를 깔고 앉았다. 옥상은 생물부의 실험 코트가 널린 빨랫줄로 일종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츠라기가 막 카라아게 하나를 맨손으로 집어 들어 사토에게 제지를 당하려는 순간, 산들바람이 불어와 실험 코트 하나가 빨랫줄을 탈출해 떨어졌다. 실험 코트로 가려져 있던 저편에는, 한 소녀가 난간에 기대어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누가 있는데?”

보통 옥상에서 점심을 먹는 인간들은 우리 말고는 없는데.”

 

카츠라기는 사토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카라아게 하나를 입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실험 코트가 걸려 있던 쪽을 바라봤다.

 

키사라기네.”

?”

우등생들만 모아 놨다는 그 D반에서도 최상위. 왠지는 모르지만 학교도 잘 안 나오고, 나와도 조퇴하는 일이 많아서 잘 안 보이는데, 별 일이네.”

 

카츠라기는 마치 만화에 나오는 설명 담당 캐릭터 같은 말투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 이래봬도 합창부 파트장이라고. 부원 얼굴 정도는 알고 있어.”

너 생물부 아니었어?”

방과후에는 생물부. 합창부는 틈틈이.”

- 그보다 의외네, 합창부라니.”

어느 쪽이, 내가? 아니면 키사라기가?”

, 둘 다일까, 키사라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너는 딱 봐도 합창부랑 어울리게 생기지는 않았잖아.”

잘도 함부로 말하네.”

 

사토와 카츠라기가 투닥거리는 사이, 나는 키사라기, 라고 했던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같은 2학년이었지만 카츠라기의 말대로 잘 모르는 아이였다. 지나다니면서 한 번쯤 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키사라기라는 이름은 딱히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우리가 방해하는 건 아닐까?”

멀리 있는데 뭐. 저쪽도 딱히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고.”

 

한 십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우리는 사토의 도시락을 비우고 잠시 햇빛을 받으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이어폰을 빼고 블레이저 주머니에 넣더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려가는 계단이 우리 뒤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 방해됐다면 미안.”

“...”

나는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우리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뭐랄까, 차갑네.”

원래 저런 걸. 나도 특별히 말을 섞어본 적은 없어.”

얼음공주님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지만 말이야

 

사토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나만 모르는 거야?”

그건 나도 처음 듣는다만.”

-? 지난번에 다이고가 조별과제 하는데 애먹었다는 얘기 했었잖아. 기억 안 나?”

, 그게 키사라기 얘기였어?”

 

다이고는 우리와 어울리는 남자 놈들 중 유일하게 D반에 속해 있는 녀석이었다. 잘 떠올려 보니 지난 달 소그룹 연구를 하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진지하고 유능해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조금 딱딱해서 뭔가 부탁하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마 그게 키사라기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진지하고 유능하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

관심 있으시면 소개시켜드릴까?”

그건 아니고. 그보다 너도 말해본 적 없다며.”

 

키사라기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딱히 반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은 있었지만, 내 취향은 좀 더 둥글둥글한 성격이라. 그렇다면 왜일까. 오후 수업 내내 생각해봤지만 쉽게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분위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카츠라기는 생물부에 가느라 먼저 헤어졌다. 사토는 요리 학원에 등록했다며 정문에서 나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귀가부라 학교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집 방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다녀왔습니다-”

, 왔구나, 신이치.”

...? 뮤 삼촌? 어째서 우리 집에?”

오랜만에 본 조카의 반응이라고는 뭔가 아쉽네.”

 

뮤 삼촌은 어머니의 막내 동생인데, 얼마 전에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사회인이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내가 중학생 때는 대학에 다니면서 우리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나에게는, 이것저것 챙겨주는 친한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몇 달 전에 일자리를 알아본다면서 자취방을 구해 나갔는데, 어째선지 지금 우리 집에 와 있다. 그것도 아주 편한 차림으로.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 우리 집에서 산다 그거지?”

음음. 잘 부탁해. 신짱.”

신짱이라고 부르지 마.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 아저씨가.”

업무상 네 또래 JK들이랑 친근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적당히 협조해줘.”

어조가 이상하잖아. 그거.”

 

뮤 삼촌은 조그만 연예기획사에 프로듀서로 취직했다고 한다. 연예기획 같은 일에는 전혀 일가견이 없어 보이는 인간이 어떻게 덜컥 프로듀서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쪽에는 뭔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좌우간, 연수를 받을 때까지는 자취방에서 매일 출퇴근을 했지만, 얼마 전에 정식으로 프로듀서가 된 뒤로 업무량이 늘어나 먼 거리를 오가는 것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당분간 우리 집에 머물면서 회사를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뮤 군. 프로듀서 일을 한다고 했지? 그러면 역시 아이돌? 아니면 음악?”

아이돌 쪽이야. 얼마 전에는 메인으로 담당하는 아이도 정해졌어.”

우와, 그러면 사인이라던가, 콘서트 티켓이라던가, 슬쩍 받아볼 수 있는 거야?”

, 아직 그 정도로 유명한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물어볼게.”

 

퇴근한 어머니와 부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여동생까지 넷이 둘러앉은 저녁 시간. 여동생은 이상하게 들떠 보였다. 나는 아이돌 쪽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타카가키 카에데 같은 유명 아이돌 정도밖에 모르지만, 친구들 중에 몇몇은 이쪽에 빠삭하니까 혹시 사인을 얻어 달라거나 하는 부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래서, 담당이라는 아이돌은 누구야? 나도 알 만 한 아이돌이야?”

유이나는 잘 모를지도 모르겠네. 이제 막 신인 오디션 쪽으로 나오고 있으니까.”


여동생도 나름 아이돌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가끔씩 TV에 나오는 음악방송을 보는 정도라 열성적인 편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삼촌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데? 내 친구들 중에서는 아는 애들이 있을지도.”

키사라기 치하야라고...”

“...?”


-프롤로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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