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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프로듀서 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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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1, 2020 04:57에 작성됨.

잠깐 동안의 회상을 마치고 나는 전철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간다. 어째서 지금 시간에 도착했느냐고, 30분 일찍 도착했을텐데도 상사라는 이름으로 폭언을 해 대는 40대의 중년 남성을 보고 죄송하다는 말과 하며 겨우 내 자리에 앉는다. 가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겠지,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상사를 향해 마음 속으로 애도를 하고는 타자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의미없는 자료, 의미없는 보고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의미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아, 자리에 있군. 찾고 있었는데 말이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심시간이 거의 가까워졌을때쯤 아침의 화는 다 풀린 듯한 상사가 나의 자리로 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다. 무슨 일일까, 이 상사가 내 자리로 오는 일은 그다지 없었던 일인데.


「무슨 일입니까, 과장님? 주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건 아니고 사장님께서 부르셔서 말이야.」


상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 사장님이라면 이 회사의 사장님 말인가. 그런 높은 분이 나같은 평범한 회사원을 부를리가 없다. 아마 내 앞의 상사를 부르거나 아니면 착오가 있는거겠지. 


「뭐 하는가, 어서 가보지 않고.」


「아, 예...」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는 단 한 번도 디딘 적이 없는 비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아, 혹시 해고하려는 것인가. 그래, 아마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배고픔과 우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들뜨지 않는 나 자신이 조금은 들떠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 이것은 나에게 내려진 합당한 죄와 벌이다. 십년 전의 죄,  십년 전에 행해졌어야 하는 벌.


「오,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가벼운 목례.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저 쪽에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사장님의 얼굴을 본다. 처음 보는 얼굴일텐데, 나는 그 얼굴에 익숙한 온기가 흐른다고 느꼈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아는 사람일까, 나는 사장님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올린 보고는 늘 잘 읽고 있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다만 요즘에는 평범한 회사원의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말이야. 정말, 전 민완 프로듀서의 촉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예?」


들키고 싶지 않았던, 들켜서는 안 되는 과거가 뜻밖에도 사장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어떻게 알고 계신걸까. 혹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사장이 아니라 신이라도 되는걸까.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그래, 흡사 미리엘 주교의 앞에서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이 된 기분이다.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할까, 아니면 절대 아니라고 발뺌을 해야할까.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까 고민하던 찰나, 사장님이 먼저 입을 열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는가? 표정이 매우 좋지 않다만.」


「어, 어떻게...」


「아, 자네에 대한 것 말인가. 뭐어,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됐다고 해야할까. 자네에 대한 것,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야.」


담담한 목소리로 선고하는 사장님.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유와 카나데로 꽤 끝발을 날렸던 프로듀서다. 바로는 알 수 없다고 해도 조금만 찾아보면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나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걸까. 내가 어리석었다. 정말로 어리석었어.


「그럼...」


「아, 일단 말하지만 해고하려는 것은 아니야. 자네는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이력서에 자신의 내력을 허위로 쓴 것도 아니잖나.」


「하지만...」


「됐고 자리에 앉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은근한 미소로 권유하는 사장님. 그에 맞춰 어딘가로 사라졌던 비서가 내가 앉을 자리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온다. 녹차. 몸의 혈행을 도와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차. 어째서일까, 나는 그 향기에 이끌려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 사장님의 미소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인다. 나는 그 온화한 미소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사장님, 말씀하신 커피입니다.」


「아, 고맙네. 음, 평소처럼 맛이 좋군. 아주 편안해지는 맛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아, 그래주게.」


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작게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비서. 이제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나와 사장님 뿐이다. 무슨 말이 오갈까. 나는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어버린 연구원처럼 멍하니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으음, 무엇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아, 그렇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주면 좋겠군.」


「말씀하십시오, 사장님.」


「좋아, 그럼 첫 번째로 물을 것일세.」


「예.」


「자네, 아직도 하야미 카나데를 사랑하나?」


첫 번의 질문. 그 질문은 날카로운 창처럼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사랑이라니.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고, 또한 그 사랑은 덧없이 피었다 진 꽃처럼 산화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사장님은 나의 시선에 그저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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