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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까마귀 연대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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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0, 2020 14:07에 작성됨.

어느 날, 히오리는 성벽 부근에서 일어난 오랑캐들과의 전투를 마치고 귀환 중이었는데, 무척이나 피곤했기에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 한 병사가 병영에서 달려오더니, 노란 빛을 띄는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기사단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왕궁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왕궁이요? 무슨 일이지?”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히오리가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베 나나 왕의 차녀이자 USaGi ARMY의 기사단장 카자노 히오리에게

나나 왕의 후임자를 정하는 회의가 열릴 것이니 히오리 공주는 왕궁으로 출두하시오.

이 편지는 다른 공주들에게도 모두 발송되었소.]


-우사밍 왕국 대재상 아키즈키 리츠코 올림-




히오리는 이 편지를 읽고서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솔직히 히오리는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왕이 되어봤자 좋을 게 무엇이 있겠어? 허구한 날 대신들 싸움이나 봐야 하고, 또 만날 왕좌에만 앉아있으면 좀이 쑤실 텐데 굳이 왕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고.’


이것이 왕좌에 대한 히오리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 히오리는 굉장히 피곤하다. 할 수 있다면 다음 날, 아니, 한숨 자고 나서 가고 싶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안 갈 수는 없는 노릇. 이건 ‘왕명’이다. 왕명은 싫어도 지켜야 한다. 지금 히오리가 보고 있는 이 편지는 아버지로서의 말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말이다.



할 수 없이 말의 방향을 틀어 왕궁으로 향했다. 


“엇, 기사단장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왕궁으로부터 호출 받았습니다. 가야죠.”


“그러시다면 호위부대를 준비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부단장이 즉석에서 인원을 뽑았고, 얼마 안 있어 호위부대가 완성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제가 통솔하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부단장.”


편성된 호위부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히오리의 갑옷의 쇳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 말발굽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왕좌를 두고 겨루는 세력 간의 싸움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왕궁의 문 앞에 도착했다.

이 안에서부터는 말을 탈 수 없기에, 왕궁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맡긴 뒤, 왕궁의 문을 열어젖히고 걸음을 내딛었다.


"여기는 왕성이오! 공주마마 빼놓고는 출입할 수 없소! 무장을 해제하시오!" 


왕궁 대신이 그들을 막아서며 제지했으나, 히오리는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나나 왕 앞에 도착했을 때, 히오리를 비롯해 모든 호위부대원들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투구를 벗고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그리고 대신 여러분. 지금 변방에 적의 무리들을 소탕하고 막 도착했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만이 왕궁을 감쌌다.

그 적막을 깬 것은 히오리의 충실한 까마귀 야타카라스의 울음소리였다.



까아악,



까아악.



야타카라스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적막은 사라지고 여러 감정들이 한데 뒤섞인 소리들이 다시 한 번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히이익?! 까마귀?! 그것도 엄청 커!”


“둘째 공주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사람이 왕이 되면...”


어디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히오리는 상관하지 않고 팔을 올려 야타카라스를 앉히며 말했다.


“안돼, 야타카라스. 여기 지금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게 아니야.”


그 말에 야타카라스가 다시 조용해졌고, 다시 공포스러운 적막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나나 왕은 입을 열어 히오리에게 말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국가기사단장. 일전에 받은 편지에서도 읽으셨겠지만, 지금 이 왕궁에서는 차기 왕이 될 후계자를 두고 논의가 벌어지고 있어요.”


“네. 그 이야기는 편지에서도 읽은 바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참여하시겠습니까?”


“. . .아니요. 저는 이 나라의 국방을 책임질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왕위는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공주들은 왕의 권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욕심을 내던데, 기사단장께서는 그렇지 않으신 겁니까?”


“저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국가기사단장으로서의 권한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허나 왕의 권한을 낮잡아보는 자들이 있다면...그땐 나라의 칼과 방패 된 자로서 움직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히오리의 표정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웃고 있는 거지?”


“저 미소에서 무언가 공포가 느껴져.”


주변 대신들과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이 말한 대로, 히오리의 그 미소는 순수한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알 수 없는 악의가 담긴 듯한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님과의 담화는 이것으로 마칠게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뒤 일어나 다시 투구를 쓴 뒤, 호위 기사들과 함께 나나 왕의 앞에서 물러났다.


물러나오는데, 곁에 있던 호위부대원 한 명이 히오리에게 물었다.


“저기, 기사단장님께서는...”


“네?”


“공주셨던 겁니까?”


“네? 네.”


“하지만 ‘후우야 토쇼쿠’라는 성함을 가지신 공주님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거예요. 그게 본명이 아니니까.”


“네? 그럼...성함이...”


“제 이름은 ‘카자노 히오리’입니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어째서 지금껏 본명을 밝히지 않으셨던 겁니까?”


“카자노 히오리라는 이름은 공주로서 유명하니까요. 황금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 입대 후 5년 동안이나 본명을 숨기고 ‘후우야 토쇼쿠’로...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별로 답답하진 않았습니다. 처음에야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또 하나의 저처럼 느껴집니다.”


말을 돌려받은 뒤 다시 병영으로 돌아갔다.

애초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히오리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몸은 피로 때문에 무거웠다.


‘병영에 돌아가면 먼저 조금만 자야지.’ 


히오리는 굳게 다짐했다.



사실 히오리라고 해서 왕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국가기사단장이라는 직위에 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자신이 왕의 자식이고 공주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왕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왕이 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깔았을 때의 이야기. 혹여나 자신이 왕이 된다면, 그것에 대해선 별도로 생각해보아야 하리라. 


우선 자신이 왕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서, ‘누가 가장 왕이 될 확률이 높은가’를 생각해보았다. 누가 제일 유력한 왕위 계승자 후보일까.


“일단은, 아무래도 미유 언니겠지.”


미유가 아무리 유약하고 내성적이라도 일단은 형제들 중에서 제일 장자고, 그렇기에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왕위 계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게다가 미유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인 ‘애민정신愛民精神’은 그녀를 성군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이다. 


“미유 언니라면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될 수 있겠지.”


두 번째 후보는 하루카. 

사실 하루카는 서열상 자신과 미유를 제외하면 언니 미나미가 더 윗석에 있다. 히오리도 그 사실을 결코 모르진 않는다. 자신의 형제니까.

그럼에도 미나미를 제치고 하루카를 꼽은 이유는, 하루카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단호함’이 있기 때문이다. 미유와 미나미는 성격이 좋기는 해도 너무 우유부단하다. 그래서야 대신들과 귀족들에게 휘둘리기 마련이고 아버지 나나 왕과 도무지 다른 것이 없다. 히오리는 결코 두 번씩이나 그런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카는 다르다. 자신의 철칙인 ‘금욕주의’를 강경하게 밀고나가고 있고, 성격도 똑부러졌다. 반대파 대신들이 혼선을 일으켜도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갈 배짱이 충분하다. 만약에 하루카가 장자였다면 나나 왕이 왕위 계승 문제로 고민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하루카 또한 공주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 그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다.


“하루카가 왕이 되면...백성들이 많이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네.”


하루카의 모토는 ‘철저한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적 사상에 입각하여 자신의 의복은 절대로 화려하지 않다 못해 평민들 사이에 섞여도 모를 정도였고, 일체의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연애를 해도 손을 잡는 것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 않았다. 하루카에게 그런 것들은 그저 쓸데없는 사치일 뿐이었다.


이것이 하루카 자신에게만 적용되면 나쁠 건 없는데, 문제는 남에게도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루카는 궁정의 시종들에게도 드레스 대신 정장을 입게 했고, 왕궁의 파티에 참여하는 귀족부인들에게 ‘치마가 발목을 덮고, 가슴골과 어깨가 드러나지 않으며. 소매가 긴 드레스를 입을 것’을 명했다. 게다가 그 파티에서는 일체의 술을 들여오지 말고, 대신 음료들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되리라고, 하루카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루카의 금욕주의는 평민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녀가 시종들과 귀족 부인들에게 명한, 일체의 노출이 없는 옷을 평민들도 입게 하였으며, 주류장도 전부 폐쇄시켰다. 혹여 밀주를 하는 것이 적발되면 약해도 종신형이었고 극단적으로는 사형까지 내렸다.


게다가 하루카는 동성연애에 대해 극렬한 혐오감까지 갖고 있었다. 동성연애를 하는 자들은 모두 마귀에 씌었고, 잡아서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어떤 사형수의 목을 얻어내어 마을 중앙에 효시한 뒤


‘동성연애를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목의 주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라고 엄포를 놓았다. 사실 그 사형수는 ‘동성애자라서 사형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사형 당했을뿐인' 것에 불과했고, 동성애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하루카는 그런 것 상관없이 ‘동성애자’ 사형수의 목을 보이며 동성연애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런 애가 왕이 된다면 백성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단지 공주일 뿐인데도 금욕주의 사상이 이렇게 강한데, 왕이 되면 더 극단적이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때는 금욕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귀족평민 상관없이 바로 사형시켜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리라.

히오리에게 있어 하루카는 ‘왕이 될 수 없는 공주’가 아니라 ‘왕이 되면 안 될 공주’였다.


다음 후보는, 아버지의 후처이자 자신의 양어머니인 미사키엘라 아오바이아의 첫째 딸인 쿄코 공주였다.

만약 미사키엘라를 후처가 아닌 ‘한 명의 여왕’으로 계산해서 그녀의 딸들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진다면, 분명 유력한 후보가 되리라.

성격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미유보다 쿄코가 더 왕위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미유와 쿄코 모두 애민정신을 가졌지만 쿄코 쪽이 더욱 밝고 활달하며 각종 기술도 많이 가지고 있으니.


다만 쿄코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왕가의 자식들은 10살이 되면 누구든지 정식으로 왕도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했고, 왕위 계승에 대한 준비를 해나간다. 이것은 왕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보좌관이 된다 해도 받아야 할 교육이었다.

그러나 쿄코는 어머니 미사키엘라의 암살시도 발각으로 인해 ‘궁정 출입 불가’라는 초유의 형벌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풀린 뒤에도 왕권파 대신들의 상소(라 쓰고 등쌀이라 읽는다)에 의해 궁중 요리사로 강등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몇 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왕도와 정치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하리라.

게다가 쿄코는 자신이 공주였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은 듯 했다. 그녀는 요리뿐만 아니라 궁궐의 허드렛일까지 도맡다시피 했고, 그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쿄코를 보면 ‘나이 어린 시종’ 정도로 인식했다.


이 모든 건 쿄코의 어머니 미사키엘라의 욕심으로서 빚어진 결과이고, 또한 쿄코의 잘못이 전혀 아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서라도 쿄코는 왕의 자질이 부족했다. 정치나 왕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

이제라도 왕도를 가르치면 되지 않나 싶지만, 일단 쿄코 본인부터가 왕도와 정치에 대해 거부했다. 본인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을뿐더러, 설령 욕심이 있어도 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일단, 양어머니의 자식들은...안 되겠지.”


생각해보면 자신을 포함해 우사밍 왕가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왕이 되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습들뿐이었다.

미유와 미나미는 너무 유약하고, 하루카는 폭군 기질이 보이며, 쿄코는 왕도정치를 전혀 모르고, 아리스와 니나는 너무 어리다.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공주인 사람들이 왕이 되기 위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 전제가 더 떠올랐다.

히오리로서는 전혀 원하지 않는 명제, 있어서는 안 되는 명제, 그토록 부정했었던 명제.


“만약에, 내가 왕이 된다면?”


앞서 말했듯이 히오리는 자신이 왕이 되기를 전혀 원치 않았다. 자신은 나라의 칼과 방패 된 자로서 국가를 지킬 의무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히오리에겐 충분한 권한이었다. 그런 히오리에게 왕관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가령 운명의 장난으로 나에게 왕위가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사실 형제들의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왕좌에 앉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오히려 히오리였다.

군사력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고, 거기에 카리스마도 있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장자상속권에도 가장 가까웠다. 특히, 혹여 미유가 왕위를 포기한다면 법적으로 상속권은 둘째인 히오리에게 간다. 그야말로 미유를 제외하면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히오리는 집요하리만치 왕좌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본인 성격 때문이었다.

우선 미나미는 미유와 아주 비슷하다. 둘 다 유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다. 즉 장자와 삼녀라는 서열을 제외한다면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셈이다.

미유와 미나미가 이렇게 닮았는데, 그렇다면 히오리는 누구와 닮았을까? 그래, 바로 하루카와 닮았다. 하루카의 성격은 매우 똑부러졌고 뚝심이 있다. 그렇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거침없이 밀고 나갈 수 있다.


문제는 그 성격이 낳을 결과다. 상술했듯 하루카의 똑부러진 담대함은 극단적으로 나가면 독단으로 진화해버릴 수 있고, 독단적인 군주는 곧 폭군이 된다. 공주일 때도 금욕주의를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널리 퍼뜨린 하루카가 왕이 되면 더하리라. 


히오리 역시 그런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루카와 자신이 닮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 역시 왕이 되었을 때 폭군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비록 방향성은 다르지만 히오리 역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대신들과 귀족들을 무참히 탄압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본인의 착각일 수도 있고, 괜한 기우杞憂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국의 모든 군사를 거느리는 ‘국가기사단장’ 히오리가 반드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기에, 그녀로서는 왕좌를 반드시 거부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말은 병영에 도착했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고서 바로 침대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지금 이 순간을, 히오리는 간절히 기다렸다.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는 것보다, 지금 이렇게 잠을 청하는 것이 히오리에겐 더욱 행복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3달이 지난 후, 정식으로 후계자 공표가 있던 날이었다.

나나 왕이 대신들과 회의에 토론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내린 결론은...


“첫째 미유 공주님을 왕으로 세운 뒤 넷째 하루카 공주님이 그것을 보좌하는 형태로 갈 거래!”


“그러니까 하루카 공주님은 일종의 총리직을 맡으시는 거네!”


“어떻게 보면 최적의 조건이지. 첫째로서의 정통성과 애민정신을 가진 미유 공주님과 똑부러진 성격의 하루카 공주님의 합작 통치!”


“난 개인적으로 히오리 공주님이 왕이 되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분도 좋긴 한데, 왠지 공포정치 하실 것 같아서 싫어...”


백성들은 이번 결과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왕은 없을 테니.


반면 신하들은 왠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미유 공주님이라...확실히 가장 정통성을 가진 분이시기는 하지만 너무 무르셔서 안 될 텐데...”


“차라리 하루카 공주님이 왕이 되시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실 테니까요.”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나나 왕의 계통이잖아. 더 이상 우사밍 혈통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공화파, 중립파, 반왕권파 대신들의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들은 미유가 미래의 왕이 되기에는 너무 나약하다는 것을 들어 나나 왕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국가회의를 통해 같이 결정한 사실이 아닙니까?, 이제 와 뒤집으려고 하십니까?’


면서 되려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미유와 하루카라고 해서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그러한 말이 나올 것을 진작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히오리만큼의 단호함이 있었다면 이러한 언론플레이 따윈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유와 하루카는 그 정도의 위인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러한 언론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유와 하루카는 히오리를 은밀히 불렀다.


“와주어서 고마워요, 히오리 언니.”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우리를 좀 도와주었으면 해서 말이야...”


“히오리 언니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새로운 계승자로 뽑힌 것이 불만인 대신들과 귀족들이 아주 많아요.”


“그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방법이 있을까?”


“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뭔데요?”


“일단은, 평소처럼 하고 계세요. 아무것도 티내지 말고.”


“그게 무슨 뜻이야?”


“안 그래도 제가 얼마 전에 미래 예측을 통한 계획을 다 세워놓았는데, 그 일들을 기다리시면 돼요.”


“자세히 알려주세요.”


“아직은 비밀이에요.”


말하고는 다시 말을 타고 병영으로 돌아갔다.

미유와 하루카는 히오리가 말한 그 ‘계획’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히오리가 좀체 알려주지도 않고 관련 언급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니 의문에 궁금증만 쌓여갔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반년 후, 나나 왕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미유가 왕으로 정식 즉위하였고, 하루카가 왕의 보좌관으로 정식 임명되어 그녀를 돕게 되었다.

새로운 왕의 즉위를 기뻐하며 평생 충성을 다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녀들을 영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서로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어쨌거나 이 두 파벌들의 공존 속에서 즉위식은 무사히 마쳐졌다.


허나 그때까지도 히오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본인의 본업에 충실할 뿐이었고, 미유와 하루카는 처음엔 히오리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할 따름이었지만, 결국 나중 되면 알겠거니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냇물처럼 흘러가서 나머지 반년이 또 지나갔다.

미유와 하루카는 왕과 그 보좌관이라는 직책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단호함을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우물쭈물했을 문제도, 어느 정도는 확답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허나 그런 모습조차도 고깝다는 듯 보는 대신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반왕권파였다. 반왕권파 대신들과 귀족들은 우사밍 혈통의 왕조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고, 우사밍 왕조를 끌어내린 뒤 자신들의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나나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걸 꼴뵈기도 싫어하는 자들이었는데, 그녀의 딸들인 미유 공주와 하루카 공주가 왕좌에 올랐으니 그들이 느낀 혐오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북쪽의 체롤로 지방 영주 자이젠 토키코를 중심으로 한 반왕권파는 하나둘씩 세력을 모아 덩치를 계속 불려갔다.

심지어 그들은 나나왕의 후처, 그러니까 미사키엘라 아오바이아의 자식들인 쿄코 공주와 아리스 공주, 니나 공주까지 포섭하려 했다. 반왕권파는 쿄코와 아리스, 그리고 니나에게 어머니 미사키엘라가 겪은 고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감정을 자극시켜 자신들의 이복자매들에게 반기를 들게 했고, 반왕권파 왕족으로 만드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간 크게도 그 마수는 히오리에게까지 퍼졌다.


“기사단장님, 사실 왕좌는 기사단장님께 갔어야 했어요. 저렇게 나약한 사람이 왕이라니,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말이죠, 이번 기회에 혁명을 일으켜서, 기사단장님이 새로운 왕좌에 오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힘껏 지지할게요.”



쿠데타 소식은 미유와 하루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지금 북쪽 체롤로 지방의 자이젠 영주를 중심으로 반反왕권파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곳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뭐라고요?! 이...이걸 어떻게 해야...!”


“빨리 히오리 언니를 불러야 해요...!”


미유와 하루카는 다급하게 히오리를 궁으로 호출했다.


궁으로 온 히오리에게, 미유와 하루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히오리가 대답하기를,


“이제야 계획이 시작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얼마 전에 자이젠 영주가 저를 자신들의 무리로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협력하겠다고 말했기에.”


말한 뒤, 한번 절을 하고서는 그대로 왕궁을 빠져나와 말을 타고 다시 병영으로 향했다.


히오리의 충격적인 말을 들은 미유와 하루카는 그대로 절망 속에 빠졌다.

믿었던 동생이자 기사단장 히오리가 자신들과 가족, 이 나라의 왕조를 배신하고 반왕권파에게 협력하겠다고 한 것이다.


“히오리 언니...대체 어째서...”


“왜 우리를 배신한 거야...?”


“흐윽...흑...어쩜 좋아...”


결국 하루카와 미유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깊은 비통함 속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자신들과 왕조를 배신한 히오리를 계속 원망하고, 원망했다. 


한편 병영으로 향하던 히오리도, 남몰래 가슴 아파하며 읆조렸다.


“언니...하루카...미안합니다. 제가 다 뜻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USaGi ARMY 병영에 도착한 히오리는 즉시 병사들을 소집했다.


“우사밍 병사들은 지금 당장 모두 집합하십시오.”


이윽고 병사들이 전부 집합하자, 히오리가 본론을 꺼냈다.


“모두 모이셨습니까? 좋습니다. 지금부터 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어디로 가게 됩니까?”


“저기 북쪽 체롤로 지방의 자이젠 영주에게로 갈 것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자이젠 영주? 그 반反왕권파의 지도자한테?”


“아니, 왕가의 둘째 공주라면서 그 사람한테 협력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내심 왕좌에 욕심이 있으신가벼.”


병사들의 수군거림을 듣다 못한 히오리가 단호히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십시오. 지금부터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한 뒤 병영 마구간지기에게 자신의 말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마구간지기가 가져온 말을 탄 히오리는, 군사를 이끌고 반왕권파의 본거지가 있는 우사밍 왕국 북쪽 체롤로 지방으로 향했다.



북쪽의 체롤로 지방, 군사를 이끌고 오는 히오리를 자이젠 영주가 맞으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국가기사단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나저나, 혼자 저를 마중 나오신 겁니까? 여러 모로 위험하실 수도 있을 텐데.”


“위험하다니요? 저는 자이젠 토키코입니다. 위험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군요.”



“자, 이제 회의장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전에, 가져가야 할 것이 있기에 그걸 좀 챙기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기다려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 말을 하고 나서, 히오리는 예의 ‘사람손’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가, 자이젠 영주를 창으로 찌르는 것이 아닌가?


“커헉?! 이...이게 무슨...”


창으로 찔린 부위에서는 포도주처럼 검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가져가겠습니다.”


말하고서 자신의 명검 '카라스클로‘를 꺼내들고 미소를 지었는데, 다름 아닌 지난 번 후계자 회의 때 지었던 그것이었다.

자이젠 영주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나라의 칼과 방패가 된 자로서 움직이겠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때 히오리가 지었던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히오리는 그때의 사악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띄우며,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카라스클로를 휘둘러 자이젠 영주의 목을 쳤다.



푸슉,


푸왁,



잘린 목에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자이젠 영주의 잘린 목을 자루에 넣은 뒤, 자이젠 영주의 시체를 야타카라스와 까마귀들이 먹게 하고, 자신은 부하들과 함께 뒤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반왕권파 회의실이 보였기에, 말과 병사들을 밖에 대기시킨 후 혼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문을 여니, 그곳에는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분명 반왕권적인 사상을 가지고 이 회의의 자리에 모였으리라.

그들은 히오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경례하며 그녀를 맞았다.


“아, 어서 오십시오. 기사단장님.”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희야말로 기사단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자이젠 영주님이 안 계시는군요. 이번 혁명의 지도자이신데.”


“자이젠 영주님은 기사단장님을 모시러 가셨었는데, 혹시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글쎄요, 뵌 기억이 없습니다.”


“음...그럼 한번 나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디에 계시나 확인할 겸.”


“좋습니다. 밖을 한번 둘러보도록 하죠.”


회의실에 있는 반왕권파 귀족 한 명이 대답했다.

그러자 히오리가 옆에 있던 벽을 네 번 쾅쾅 두드리더니, 순식간에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지체 없이 그곳에 있던 반反왕권파 쿠데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여기서 잠깐,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히오리를 의심하던 우사밍 병사들이, 어째서 수신호만으로 히오리의 의도를 알고서 아무 말 없이, 아니 오히려 충성스럽게 따른 걸까?

간단하다. 히오리는 체롤로 지방으로 향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모두 설명한 것뿐이다. 간단한 수신호 한두 개만 정해놓고, 그것들을 병사들에게 알려준 것이 전부다.


사실 히오리는 병사들에게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우사밍 왕국 북부 체롤로 지방의 자이젠 영주에게 간다’라고만 했고, 그녀 자이젠 영주를 따르겠다던가 하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여튼 히오리는 모든 반왕권파 대신들과 귀족들을 처단하고 회의장에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버린 뒤 바깥 길가로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 없이 남겨져있던 자이젠 영주의 몸은 야타카라스와 까마귀들에 의해 살점마저도 완전히 뜯겨졌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부단장.”


“예, 기사단장님.”


“지금 당장 목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예. 여기 주변엔 나무들이 널렸습니다.”


“잘 됐군요. 지금 당장 목재들을 모읍시다.”


히오리가 내린 의외의 명에 부단장과 병사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주변의 나무들을 가져왔고, 히오리도 그들을 도와 크고 작은 나뭇가지들을 주웠다.


잠시 후,


“기사단장님, 목재가 많이 쌓였습니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무엇을 하시고자 하십니까?”


“부단장, 다시 불을 켤 수 있습니까?”


“예, 문제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이젠 영주의 저 백골들을 나뭇가지 위에 쌓은 뒤에 불을 지르십시오.”


“엣...그건...”


“반역자에게 장례 같은 건 과분합니다. 유골조차 남지 않게 화장해버리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나뭇짐 위에 자이젠 영주의 뼈들을 올려놓고 불태워 화장시켰다. 그리고 타고 남은 잿가루는 가져다가 다섯 뭉치로 나누어 여러 도심 길가에 뿌렸다.


‘반역자에겐 좋은 죽음과 운명조차 허락하지 않겠다.’


그것이 히오리의 신념이었다.



반역자들의 존재와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뒤 왕궁으로 향하다가, 우연히 미사키엘라의 세 딸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은 히오리 자신도 그녀들을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쿄코...아리스...니나...나의 동생들아!”


“히...히오리 언니?!”


“여긴 어떻게...!”


“왜 여기 계세요?”


히오리는 그녀들을 10초간 바라보더니, 왼손으로 ‘사람손’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우사밍 병사들이 그녀들을 둘러싸더니, 포박했다.


“아, 아니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으아아아아~”


미사키엘라의 결박된 세 딸들에게, 히오리는 넌지시 말했다.


“지금은 잠자코 따라와 줬으면 좋겠구나.”


이렇게 말하는 히오리의 표정은 매우 침통했다.

아무리 동생들이라고는 해도 반역의 무리에 가담한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이젠 영주와 그 일당들에게 한 것처럼 할 수도 없었기에, 우선 포박해서 왕궁에 데려간 다음 미유 왕의 판결에 따라 행할 계획이었다.


쿄코와 아리스와 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다가, 도착지가 왕궁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자신들이 결박되어 끌려온 이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안 돼...”


“들어가면...잘못했다고 무조건 빌어야 해요...”


“흐...으으에에엥....”



한편 히오리는, 먼저 홀로 왕궁의 알현실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미유와 하루카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히오리는 투구를 벗고 그들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왜 온 거예요?”


“우리를 몰아내려는 선전포고를 하려고 왔어?”


이렇게 말하는 미유와 하루카의 어투는 더 이상 동생과 언니를 대할 때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소식을 전하고자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반대의 소식이라니?”


“부디 놀라지 말아주십시오.”


말하고는, 품속에서 자이젠 영주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는 붉은 보따리를 꺼내 펼쳤다.


“세상에나?!”


“저게 뭐야?!”


“반역자 자이젠 토키코의 머리입니다.”


“자이젠 영주의 머리라고?”


“잠깐만...그럼 기사단장이 그에게 간 건...”


“설마 제가 정말로 왕조에 반역하려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저도 폐하 그리고 보좌관님과 같은 혈통의 사람입니다. 왕조에 반역하는 것은 곧 저의 가족과 조상을 배신하는 일일지니, 저는 결코 그럴 생각도, 의도도 없었음을 이 자리에서 굳게 맹세하는 바입니다.”


말하며, 히오리는 결백함을 강조하기 위해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히오리 언니...“


“미안해...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혹시나 제가 요전에 했던 말이 폐하와 보좌관님께 상처가 되었다면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그리고 부디 이 아이들도 용서하시옵소서.”


“아이들?”


히오리가 그들을 부르자, 병사들의 연행 속에 미사키엘라의 결박된 세 딸들이 들어왔다.


“얘...얘들아...? 설마 너희도...”


미유가 크게 놀랐던 것은, 그녀는 미사키엘라의 세 딸들이 반역의 무리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을 데려온 히오리조차도 출정하면서 도심에 흐르는 소문을 듣고 겨우 알았을 뿐이었다.


쿄코와 아리스, 니나는 미유 왕이 있는 알현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언니! 아니아니, 폐하! 왕이시여! 저희를 용서하시옵소서!”


“저희가 저지른 반역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발 용서해주세여~잘못했어여!!!”


쿄코와 아리스와 니나가 애절하게 빌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자, 미유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리 반역에 참여했다 해도 이들도 결국엔 좋지 못한 운명을 타고난 나머지 마음에 상처가 생겼으리라. 단지 자이젠 영주는 그 상처를 자극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결국 슬픔을 참지 못한 미유는 그녀들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그리고 외쳤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서 이 아이들의 결박을 풀어주십시오! 이들도 공주입니다!”


그 말을 들은 히오리의 부단장이 단검으로 밧줄을 풀어주었다.

미유는 자유의 몸이 된 미사키엘라의 세 딸들을 끌어안고서 더욱 크게 울었고, 쿄코와 아리스와 니나도 더욱 진심을 다해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잠시 뒤, 눈물을 그친 미유는 미사키엘라의 세 딸들로 하여금 과거 자이젠 영주가 다스렸었던 우사밍 왕국 북부 체롤로 지역의 땅들을 주고 그곳의 영주가 되도록 하였다. 정확히는 체롤로 지방을 3분할한 후, 동쪽은 아리스에게, 서쪽은 니나에게, 북쪽은 쿄코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 그녀들은 자이젠 영주와는 달리 주민들을 사랑으로 대했고, 주민들도 그녀들에게 평생 충성하며 열심히 따랐다.


또한 히오리에게는 왕권 강화의 업적을 달성한 보상으로 왕국의 기사 훈장을 수여했다.

이 기사 훈장은 우사밍 왕국의 명예로운 훈장 중 하나로서, 국가의 이미지 개선에 이바지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즉 우사밍 왕국은 히오리가 왕권 강화와 나라 안정을 위해 반란세력들을 소탕한 업적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일의 여파로 반왕권파는 완전히 소멸되었고, 다시는 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공화파도 크게 움츠러들었다. 반면 왕권파는 자신들의 입지가 매우 확고해진 것에 기뻐하며, 앞으로도 국가에 무한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히오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직, 공화파 세력들이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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