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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프로듀서 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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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2, 2020 04:42에 작성됨.

시간의 흐름. 그 모든 것은 느리고도 빨라서 적응하기 힘이 들 때가 있다. 회사에 있을 때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나만의 경험담은 아닐테지. 아마 모든 회사원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을거야. 회사에서 나오면 술잔을 기울이기에도 부족한 시간의 압박이 나를 옭아맨다. 겨우 잠을 자고 회사에 출근하는 나를 볼 때면 얼마나 처량한지.


「후우...」


집으로 가는 길, 왠지 모르게 울적해진 나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 새벽의 거리를 헤맨다. 헤매다 들어간 곳은 한 작은 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런 곳이 오지 않았던가. 아니, 그저 분위기가 비슷해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영부영 자리에 앉은 나는,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는 바텐더의 말에 허겁지겁 늘 마시던 칵테일 한 잔을 주문한다. 붉은 입술같은 그 칵테일. 취하고 싶을 때에 마시는 단 하나의 칵테일.


블러디 메리. 나의 몸을 적시고 피와 살이 될 칵테일. 그리고 보이는 검은 문과 하얀 침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이는 두 사람의 소녀. 그래, 술을 마신 날의 꿈은 항상 똑같다. 아름답다못해 눈이 부실 정도인 두 사람의 소녀와 함께 잠자리를 갖는 꿈.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 내가 욕정으로 가득 찬 죄인이기 때문이겠지.


「프로듀서 씨, 마유....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마유의 보채는 목소리가 나의 귓가를 희롱한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의 것을 원하는 한 숙녀의 몸뚱아리가 무방비하게 나를 맞이한다. 하얀 몸, 하얀 손가락, 하얀 다리.그 어떤 것도 하얀 그 몸에 내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품으려는 찰나, 옆에서 또다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라, 프로듀서 씨는 나를 두고 마유에게 갈 셈?」


옆을 보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가 한 명. 언제나 나를 희롱하던 두 개의 언덕과 붉은 석류알이 침범을 허용한다는 듯이 하얗게 곤두서있었다. 톡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부드러움.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모습에 나의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어머, 프로듀서 씨의 것이 엄청 커져버렸네.」


「카나데 씨, 치사해요오....」


「미안해, 마유. 하지만 나는-」


카나데의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새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귓가에 울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깨어난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축축한 새벽. 왠지 모르게 무거운 기분을 느끼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씻겨내려가는 기분, 하지만 죄악감은 전혀 씻겨지지 않은 채로 하얀 점이 되어 아무렇게나 각인된다. 한숨과 같이 샤워를 끝낸 나는 전혀 가벼워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문을 나선다. 검은 문, 하얀 침대. 나의 뒤에는 평범한 풍경이 남겨진다.


점심 시간이 끝난 회사는 식곤증과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조금이라도 급이 높은 사람들은 꿀맛같은 시간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며 낮잠을 자고, 급이 낮은 사람들은 상사들의 눈치를 보며 타자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급이 낮은 쪽. 한숨을 쉬며 타자를 치는 쪽. 몇십 번이고 해온 지겨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해야 하는 일.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고 강변을 토하겠지만 사실은 전혀 쓸모없는 일들. 하지만 소시민인 나는 군말 없이 내 손가락을 놀린다. 죄악감을 토해내듯이, 잠시나마 쓸모없는 생각을 한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말이야.


몇 번의 출근과 그와 비슷한 수의 야근. 그 모든 것이 겨우 끝난 주말의 아침. 피곤에 쓰러져가는 몸을 겨우 이끌고 검은 문을 나선다. 약속 장소는 카나데와 만났던 카페. 전화한 그 다음 날에 문자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접선해준 카나데는, 부디 잠도 푹 자고 먹을 것도 잘 먹으라는당부의 말을도 함께 남겨주었다. 난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있던 것이 죄악인데. 하지만 카나데의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카나데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테니까. 그렇다면 카나데에게 민폐일 테니까. 나는 아직 카나데에게 프로듀서이니까.


「프로듀서 씨, 어서 와.」


「카나데...?」


카페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겨준다. 분명히 10분 전에 미리 도착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손목에 찬 싸구려 시계에게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한다. 분명히 약속시간보다 10분 전이다. 싸구려긴 해도 시간은 아직 틀리지 않는 시계다. 그런데 어째서 카나데가 먼저 있는걸까. 연예인이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을 기다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카오루와는 인사하지 않을 셈이야?」


「카오루...?」


카오루라니. 내가 알고 있는 그 카오루인가. 그러고보니 카나데의 옆자리에는 주황색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인 한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이 카오루인가? 정말로, 정말로 내가 아는 그 카오루란 말이야...?


「프로듀... 선생님?」


선생님. 나는 이 호칭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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