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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프로듀서 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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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5, 2020 08:50에 작성됨.

평일과 주말, 평일과 주말. 회사원의 생활이란 정말로 별 것 없다. 평일에 출근하고 주말은 쉬는 쳇바퀴같은 삶이니까. 가끔은... 아니, 꽤 잦은 빈도로 주말에도 일하러 나가긴 하지만 그것은 평일의 연장선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평일의 끝에서 나는 주말을 찾고, 주말의 끝에서 나는 평일을 맞이한다. 그래, 시간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흘러간다. 금방이라도 나같은 의미없는 인간의 시간을 집어삼킬듯이 격류처럼 흘러간다. 그래, 이 정도가 딱 좋겠지. 의미없는것 은 의미없이 흘러가야만 의미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또다른 평일이 시작되었을 때, 점심시간에 늘 하던 것처럼 햇살을 쬐며 끼니를 때우던 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발신자는-


「오랜만이야, 프로듀서 씨. 잘 지냈어?」


「카나데....」


어째선지 기운이 쭉 빠져있는 듯한 목소리의 카나데였다. 무슨 일이지, 설마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인가. 나를 만나서 좋은 일은 별로 없을텐데. 


「바빠? 바쁘다면 나중에 전화할게.」


「아아, 괜찮아.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바쁜 걸로 치면 네가 더 바쁠테니까. 그렇지 않아?」


「어머, 나는 요즘 엄청 한가하다고? 출연하던 드라마도 종영했고 말이야.」


「아아, 그런가. 하지만 카나데 정도의 여배우라면 더 바쁠 줄 알았는데.」


「...당신과 함께였던 때 정도는 아니야.」


왜일까, 카나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그리움이 묻어난 듯했다. 그리워해서는 안 돼, 카나데. 나같은 것을 그리워해봐야 또 상처를 입게 될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 어쩌면 나도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던 나날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작게나마 키워나갔던 조그마한 감정들.


「목소리에 기운이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으응. 별 일 없어. 그저 출연하던 드라마가 끝나서 조금 나른할 뿐이야.」


「그런가. 수고했어, 카나데.」


「후훗, 그 말을 듣기 위해서 전화를 걸지는 않았지만 듣기에 나쁘진 않네.」


나의 말에 금세 온기를 되찾은 카나데의 목소리. 내 목소리로 힘이 난다면 다행이네. 카나데는 우울이 어울리지 않아. 소녀처럼 웃고, 장난치고, 그러면서도 가끔씩 보여주는 어른의 모습만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것이 카나데의 본모습이고 내가 바라는 모습이니까. 사랑스러운 소녀. 그것이 하야미 카나데라는 소녀를 말하는 수식어니까.


「참, 프로듀서 씨. 혹시 약속 잡을 수 있을까?」


「어? 그건 무슨 소리야?」


「카오루가 프로듀서 씨를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프로듀서 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도 만나고 싶다고 엄청나게 졸라대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안 돼.」


그건 안 될 일이다. 카오루라니, 그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야.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나같은 사람을 만나게 한단 말이야. 


「어째서?」


「어째서라니, 카오루는 10년 전의 일을 모르는거야?」


「으응, 알고 있어.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아. 카오루의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거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카오루가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도?」


카나데의 말이 나의 가슴 속에 비수같이 꽂힌다. 카오루. 류자키 카오루.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잘 따르던 그 아이. 순수라는 무기로 무장한 채로 해맑은 웃음을 짓던 아이. 그리고 10년 전에는 고작 11살이었던 그 아이. 


「...어째서.」


「그건 프로듀서 씨가 직접 물어보지 그래?」


기분 탓일까,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를 친 것처럼 카나데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기쁨의 올가미.


「어떻게....」


「그야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거든. 드라마 촬영도 끝났겠다, 오랜만에 내가 살고 있는 맨션에 와서 자고 있어. 아, 방금 막 일어났네. 전화 바꿔줄까?」


「괘, 괜찮-」


「으웅....?」


카나데의 말에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는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막 일어난 듯한 카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카오루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카오루는 10년 전의 카오루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래? 전화라도 한 번 해볼래?」


작게 웃으며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 카나데.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쇠사슬에 감겨 꼼짝 못하는 나. 그러니 나는 거부할 수 없다.


「하아... 너란 녀석은 정말로...」


「그래서 전화를 바꿔줄까, 어떻게 할까? 나중에 만나서 대화를 나눌거라면 프로듀서 씨한테 무리한 일은 부탁하지 않을건데 말이야.」


「카나데, 너....」


카나데는 이미 알고 있는거다. 내가 카오루에게 꼼짝도 할 수 없다는걸, 카오루에겐 무르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야. 나이가 들더니 예전보다 더 영악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영악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험한 세상을 헤쳐가려면 그 정도는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테니까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약속을 한 번 잡자, 카나데. 그거면 될까?」


「후훗, 그것 참 영광이야. 그래, 언제가 괜찮아?」


나의 백기 투항에 작게 웃으며 묻는 카나데. 하아, 언제가 좋을까. 그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빨리 해치워두는 것이 낫겠지. 빨리 만나면 카나데도 좋아할테고 말이야. 카오루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지만, 뭐 어때.  


「일주일 뒤의 주말은 어때? 어차피 두 사람 모두 연예인이니 곧 다른 일도 들어올테니까.」


「어머,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얼마 전까지의 프로듀서 씨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조금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게다가 어영부영 미루고 있다가 바쁜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을수야 없지. 그래서 어때? 시간 괜찮겠어?」


「아, 응. 난 완전 괜찮아. 카오루도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고.」


「그런가. 그럼 기다리고 있을께.」


「기다린다, 라..... 후훗, 그래. 그럼 나중에 봐.」


「그래.」


전화가 천천히 끊어진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누구냐고 물어보는 카오루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듣지 않은걸로 해 두자. 어차피 곧 있으면 만나게 될거고. 그러니 기다리도록 하자. 두 사람을 만날 날을 말이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째선지 나는 두 사람을 만날 날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이 기분은 무슨 기분일까. 설마 이 기분, 나는....


갑자기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카나데와의 대화를, 이 만남 자체를 죄 많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알람이 울린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시간. 회사로 돌아가서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를 써야 할 시간.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이 곳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곳,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 곳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잠시 햇살을 쬐던 재소자가 다시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듯이, 가슴 속에 칭칭 감긴 쇠사슬이 다시 내 몸을 얽어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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