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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1:하야미 카나데-고독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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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9, 2020 01:26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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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군.”

미시로 상무는 자신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커피잔에 입을 댄다. 책상 위의 서류 다발 사이에는 빈 머그잔이 1잔. 시간은 그녀가 여기에 홀로 자리 잡은 후로 대략 2시간이 지났다. 각 부서로부터 일일보고를 받았을 뿐, 그 이외의 일정은 대부분 오후로 미루어져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이따금 인터넷이나 이미 여러 번 읽은 서류들을 훑어볼 뿐. 그녀의 평소 생활방식과 대비되는, 이례적으로 무료한 시간이다. 
두 잔째의 빈 머그잔을 책상에 올려놓고 옆에 놓인 금이 간 액정의 휴대전화를 든다. 
346 프로덕션, 외부 협력자들, 해외 파트너들의 메시지로 한가득한 화면.

"...."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다가 문득 프레데리카의 메시지 칸에 그려진 커다란 해골바가지에 잠시 주춤한다. 
금방 못 본 척하고 다시 메시지들을 흘려보낸다. 이내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은 곳은 `파블로프나`라는 이름이 적힌 메시지 칸. 사진을 보냈다는 알림 외에도 수십 통의 미확인 메시지가 붉은 숫자로 표기되어있다.

"...셋이서 대체 뭘 하는 건가."

내용을 보기 위해 칸을 누르자 화면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알록달록한 빛이 상무의 백지장 같은 얼굴을 뒤덮는다.
주로 프레데리카, 혹은 웬디가 카나데를 붙들고 있는 장면이 찍혀있다. 견학보다는 유흥에 가까워 보이는 상황이다.

‘놀고, 쇼핑하고, 몸 관리도 해보고 카페에서 같이 수다를 떨고. 그렇게 노는 거지 뭐.’

사진들을 쭉 훑어보다가 문득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미시로 본인은 논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자신의 담당 아이돌 중 한 명의 얘기와 사진을 통해 추상적으로나마 ‘청소년의 놀이방식’을 이해하고 있다.

“동행하지 않길 잘.... 음.”

잘 한 걸까.

똑똑.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을 깊이 되새겨볼 여유도 없이 사무실 입구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서둘러서, 하지만 흐트러짐 없이 찻잔과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는 미시로.

“들어오십시오.”

>>>>>>

<2015년 9월 8일 화요일 오후 3시 32분, 346 프로덕션 신관 복도>

미시로 상무의 허락으로 시작된 346 프로덕션의 견학은 원래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당장 구체적인 것도 별로 없이 급조된 일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346 프로덕션 본관의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웬디 일행, 정확히는 미시로 상무의 강렬한 이미지에 모든 근무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상무가 일행에게 사무실로 올라가 있겠다고 말한 것은 그 직후다.
프레데리카와 웬디가 함께한 오전의 `견학`은 마지막으로 식사한 것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흥분한 쌍마처럼 눈에 보이는 곳마다 쏘다니는 두 사람에게 붙은 마부 없는 마차와 같은 꼴이 되어, 나는 하나하나 머리에 담을 정신도 없이 346 프로덕션의 온갖 복지시설에 끌려다녔다.
미용사에 의해 손질된 나 자신의 머리가, 연예인용 마사지실이, 사내 카페의 점심 메뉴가 어떠냐는 등의 두 사람의 질문에는 `무난하다, 괜찮다`같은 대답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웬디가 내 사진을 찍어 보고용으로 미시로 상무에게 보낸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프레데리카의 앞길이 걱정되어서 온 거지, 놀거나 나 자신이 뭘 어떻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현재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여러모로 슬슬 답답해지려던 참에 귀에 댄 수화기 너머에서 상투적인 안내음성이 들려온다.
이번에도 `그 아이`에게 연락은 닿지 않았다. 한편 웬디와 프레데리카는 나를 복도의 소파에 앉혀두고는 아직 소식이 없다.
오후는 내가 좀 더 만족할 수 있게 레슨실 쪽 견학을 트레이너와 협상한다고, 웬디는 프레데리카와 자리를 비우기 직전에 내게 말해두었다.

"미안해, 카나데!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해! 모자찡!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해! 나는 이제 모두 곁에 없을 거야! 계속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하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갈 거야! 계속 응원하고 있을게! 카나데! 모자찡 사무실의 냉장고 안에 고져스 세레브 푸딩을 넣어뒀으니까 먹어도 돼! 모자찡! 내가 죽거든 비석은 우에키짱 모양으로 해줘어어어어!!”

...그러고 보니 프레데리카를 제물로 바쳐버리겠다는 얘기도 귓속말로 덧붙였던가.

어찌나 비명이 요란스러운지, 굵은 빗줄기가 길게 늘어진 통유리창의 행렬을 난타하는 와중에도 멀리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법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FATALITY!!”

이제는 얄밉기까지 한 그 여자의 함성도 마찬가지다.
홀로 복도의 벤치에 앉은 지 대략 30분. 일이 꼬였거나 왕복이 30분 넘게 걸릴 정도로 멀리 갔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웬디로부터 꽃 따러 갈 때 외에는 앉아서 꼼짝도 하지 말고,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른다고 잡아떼라는 우려 섞인 부탁을 들었지만, 간혹 ‘오늘 미시로 상무하고 같이 있었던 아이’라고 뒷담을 하는 경우만 빼면 딱히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멍하니 맞은편의 유리창을 마주 보는 것도 질려가던 참이다.
먹구름을 안은 유리창에 사치스러울 만큼 밝은 LED 조명에 노출된 내 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는 불쾌한 것을 짓누르고 종종걸음을 놓는다.
다행히 소리가 들려온 쪽의 복도는 좌우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있다. 순백색으로 감싸지는 느낌이 안정적이지만 문 테두리마다 널찍하게 붙어 존재감을 과시하는 황색 나무 패널은 조금 아쉽다.

"이 이상은 무리예요.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셔도 여기서 더 제시해 드릴 거라곤 신체 포기각서밖에 안 남았다고!"

한 번 더 모퉁이를 돌자 이윽고 소음의 원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비즈니스 관계에서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은 드라마나 예능에서나 몇 번 볼법한 일이다.

"그러니까 제발 좀 부탁을 들어주세요. 저도 나름대로 절박해요!!"

그러나 웬디처럼 추하게 상대방의 다리에 매달리는 경우는 내 기억상 그 소수중에서도 소수다.

"우선 땡땡이친 미야모토 양을 갖다 바쳤고, 제가 퇴직할 때까지 레슨실 유지보수에 협력, 이번 달 안에 카미야 양이랑 호죠 양이 CD 데뷔 결정 나는 대로 저 포함해서 셋이서 같이 레슨에서 구르기, 미시로 상무님께 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1년 동안 어필하기! 그리고 이번 달에 생일인 베테랑 트레이너, 그 성함 뭐더라, 케이 씨?"
"막내. 루키다."

멍청한 표정이 곁들여진 웬디의 질문에 그녀에게 붙들려진 여자의 얼굴이 조금 구겨진다.

"레이?"
"...나다."
"...세이?"
"그래."
"아, 그렇지. 세이 씨 생일 선물로 제가 상무님한테 만들어드리는 거랑 똑같은 목제식탁 만들기! 비용은 제가 전부 부담하고 도면은 생일 당일까지 완성해올 것! 이 정도면 제가 갑자기 매트리스 빌려간 거 청산하고도 남잖아요?!”

홀로 떠들어대는 웬디의 입은 좀처럼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두 사람은 아직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듯하다.
내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이쪽으로 두 쌍의 시선이 날아온다.

“Oh, hai, 카나데 양.”

여자의 다리를 부둥켜안은 채 어색하고 영혼 없는 좀비 같은 억양으로 인사하는 웬디.

“너는... 아니, 알았으니까 당신은 내 다리 좀 놔!”

레이라고 불린 트레이닝복의 여자는 몸부림치듯 웬디의 몸을 뿌리친다.
외모와 목소리를 보면 아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일 듯하다.

“카미야와 호죠를 데려왔을 땐 우연히 괜찮은 아이들을 데려왔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확실히 사람을 보는 안목만큼은 있는 것 같군. 자세가 위축된 게 좀 걸리지만, 그 외에는 마음에 들어. 외적인 관리도 현역 못지않게 잘 되어있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해오는 그녀의 행동과 말투에서 엄격함과 힘이 느껴진다. 비슷한 이미지는 에일리언 1에 출연했을 당시의 시고니 위버정도일까.

“처음 뵙겠습니다. 346 프로덕션 본사의 트레이너를 맡고있는 아오키 레이라고 합니다. 사내에서는 주로 마스터 트레이너라고 불리고 있지요. 누구처럼 제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당신의 이름은 전해 들었어요.”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애초에 대접을 받을만한 입장도 아니고.”

그렇게 대꾸했더니 마스터 트레이너라는 사람은 조금 곤란한듯 팔짱을 낀다.

“아무리 평상시라고 해도 목소리도 위축되어있네. 혹시 저 사람이 민폐를 끼치거나 하진 않았나?’
“집요하게 따라붙고, 멋대로 집에 찾아오고, 좀 시끄럽게 한 정도.”

마스터 트레이너는 딱히 ‘저 사람’이 누군지 말로도 몸짓으로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민폐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웬디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필 이럴 때’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고생이 많았겠군. 그래서. 하야미 양은 데뷔에 앞서 친구 따라 견학을 하러 온 건가?”

데뷔라니. 아무래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내가 과거에 뭐였는지조차 모르는 눈치다. ‘그 작자’가 자신의 치부라도 숨기듯 나를 유령 인력 비슷하게 만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소름 끼치도록 체감한 적은 없다.
마스터 트레이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생각 없어. 애초에 연습생이 받는 레슨이 아니라 레슨을 하는 연습생 쪽에 볼일이 있는 거고.”
“그러고 보니 아까 미야모토가 자네의 이름을 불렀지. 친한 사이인가?”
“중학교 선배.”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마스터 트레이너.
싱긋 웃어 보이고는 등지고 있던 레슨실의 방음문을 연다.

“원래 내 레슨은 집중을 위해 관계없는 사람은 못 들어오게하지만, 특별히 이번에는 허락해주지. 윌리엄스에게 약속받은 것도 있고, 막연한 감이지만 하야미 양의 장래에 이 견학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마워.”

남의 장래까지 생각해주는 건 좋지만 내게는 정말 쓸데없는 서비스다.
그런 생각을 조용히 곱씹으며 나는 어느샌가 등 뒤에 따라붙은 웬디와 함께 레슨실로 들어간다.

“카....카나데, 모자찡. 곤니치헬로....”
“Salut, 프레짱.”
“Atelihai, 내 지팡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녹초가 된 프레데리카의 인사에 맞받아쳐 준다.
아까 그녀의 비명이 들려온 지 5분도 채 안 되는 것 같은데, 벌써 한참을 설쳐댄 사람처럼 거친 숨을 쉬며 웬디가 늘 들고 다니던 지팡이에 노파처럼 무게를 싣고 서 있다.

“이럴까봐 오전에 체력 봐가면서 설치라고 했는데.”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웬디 쪽을 돌아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린다.
어느샌가 레슨실 한구석의 냉장고에서 김이 서린 물병을 가져온 그녀는 프레데리카에게 터벅터벅 걸어가 자신의 지팡이를 빼앗고 그 빈손에 물병을 적당히 쥐여준다.

“꾸헉.”

단지 그뿐이었는데 무너지듯 바닥에 대자로 뻗는 프레데리카.
나는 그녀의 옆에 개미를 관찰하듯 쪼그려 앉아 흐트러진 금발을 조금이나마 정리한다.

“카나데, 미안. 날 구하러 와줬구나?”
“괜찮아?”
“프레짱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저 고통받기 위해서? 매일 밤 내 다리, 팔, 그리고 손가락까지 느껴져. 프레짱의 팔다리와 동료들을 잃어버린 고통은 절대 없어지지 않겠지….”
“그런 것치곤 팔다리도 몸도 건강해 보이는데. 일으켜줄까?”
"으으....으으으흐어어어어! 프레짱은 아직 그레이트 앤 파워풀이라네!"

의미심장한 소리를 외치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는 프레데리카. 요란스럽게 웬디로부터 받은 물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물을 잘못 넘긴 것인지 콜록댄다.
웬디는 기침하는 프레데리카가 떨어뜨린 빈 물병을 집어 레슨실의 한구석의 쓰레기통에 던져넣는다. 그러고는 독촉하듯 발로 지면을 툭툭 밟는 마스터 트레이너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오늘 미야모토 양의 일정이 어떻게 되죠? 아무리 벌이네, 시간이 촉박하네, 해도 그렇지, 오늘 일정을 다 끝내기도 전에 관짝행일 것 같은데."

9월 7일, 댄스 레슨.
9월 8일, 보컬 레슨을 한 후에 새로운 프로필 사진 촬영.

웬디와 마스터 트레이너의 대화를 들어보니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프레데리카의 일정은 대충 이런 느낌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프레데리카의 변덕 때문에 파투가 났다. 본래 댄스 레슨을 해야 할 시간에 그녀는 내 곁에 있었으니까.
마스터 트레이너의 죽도에 얻어맞기 직전 웬디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육포 제조기`인 마스터 트레이너가 여기에 있는 건 약간의 벌을 포함해서, 이틀 분량의 일정을 하루 만에 그나마 효율적으로 풀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까 모자찡, 위기에 처한 프레짱을 좀 도와줘. 카렌이랑 나오랑 같이 하던 방식으로 있잖아! 카나데, 들어봐? 모자찡은,"

됐거든요, 하고 웬디는 프레데리카의 말을 가로챈다.
마스터 트레이너에게 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몇 번 툴툴대고는 창가의 바닥에 주저앉는다. 창밖의 햇빛은 구름에 가려져 있다.

"다리 안 아파요?"
"그냥 서서 볼게."

같이 앉으라는 의미로 내게 물어왔겠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여자는 뭔가 꺼림칙했다. 단순히 외모나 행동이 이질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프레데리카, 그리고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던 여러 모습과 성격을 가진 아이들, 그리고 잠깐이나마 즐겁게 같이 일한 동료들. 그들과 함께 지낼 때의 나는 말은 조금 적었을지언정 그런 이유로 교류를 줄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후엔`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적어도 이전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는 것 외엔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제 점심 무렵의 코호쿠 다리. 그곳에서 처음 내게 말을 걸어주었을 때.

“거기에 있으면 거울에 자국 남는다고 마스터 ㅌ... 레이 씨가 혼낼 거예요. 당해봐서 알거든요."

어느새 태블릿 같은 것을 꺼내 든 웬디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싱긋 웃어 보인다.
그녀의 말을 들은 후야 나는 등을 기댄 곳이 웬디의 맞은편, 벽의 한쪽 면적을 전부 차지하는 전신거울인 것을 알아차린다.
조금 놀라 등 뒤를 돌아보자 뭔가 불편한듯한 마스터 트레이너의 얼굴, 장난스럽게 가는 눈썹을 씰룩거리는 웬디의 얼굴이 비친다.
그 얄미운 모습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나는 마스터 트레이너…. 레이 씨의 돋보기로 천천히 지지는듯한 눈빛을 무시할 정도로 눈치 없는 여자가 아니다.

"알았어."

하는 수 없이 웬디 쪽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녀가 원하는 그림으로부터 어긋나게 하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기대어 선다.
거울을 참고삼아, 레슨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프레데리카가 정확히 나와 그녀의 중간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실례할게요. 흐리다고 해도 바깥이 조금 거슬려서."

곧바로 통나무처럼 몸을 굴러와 내 옆에 앉는다.

"...."

이쯤 되면 따지는 것도 귀찮다.

"하루에 걸어 다니는 사이코 드라마를 둘이나 상대하다니, 운도 없구만."

죽도로 자신의 어깨를 안마하듯 두드리며 레이 씨는 한숨을 내쉰다.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지만, 그녀의 푸념에는 어느 정도 동감하는 바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했지?"
"상체 스트레칭이요, 캡틴!"
"미야모토, 고맙다. 적어도 후배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봐. 윌리엄스는, 자기 담당도 아닌데 녹화하는 건가?"
"미시로 상무님이 저한테 미야모토 양이 어땠냐고 물어볼지 누가 알아요? 저는 주말에도 사적으로 그분한테 불려다니는데."

웬디의 말에 레이 씨의 날카롭기만 하던 두 눈이 조금 크게 벌어진다.

"혹시 지금 녹화 중이냐?"
"마ㅅ, 레이 씨가 시작하면 하겠죠?"
"크흐흠, 좋아. 미야모토, 상체 4번 자세를 준비해라. 못해도 도와줄 테니까 징징대지 말고."

<스트레칭>

사회생활보다 자기 성격이 지나치게 뚜렷한 웬디와는 달리 레이 씨는 약간 경직된 모습으로 프레데리카의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척 봐도 익숙한 듯 유연한 그녀의 몸에 보고 있는 이쪽까지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든다.

"좀 더!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된다!"

레이 씨의 불만스러운 호통과 함께 귀 따가운 죽도 소리가 레슨실에 울려 퍼진다.
부족한 점은 절대 지나칠 때가 없고, 기준점이 높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진실을 담아 찔러오는 스승. 제아무리 좋은 태도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연습생이라도 마냥 달가운 성격의 스승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프레데리카가 당장 괴롭더라도, 아무런 관심이나 보살핌을 못 받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겠지.

"윌리엄스. 녹화 중에 미안한데 나머지 스트레칭을 나 대신 지도해줄 수 있겠나? 미리 댄스 레슨 세팅을 해둘 필요가 있어서."
"으흐흐….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군요. 카나데 양, 제 태블릿 좀 부탁해요."

대충 화면 안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어딘가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을 남기고 프레데리카에게 다가가는 웬디.
내 손에 쥐여진 웬디의 태블릿 화면에는 프레데리카와 웬디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녹화버튼은 따로 꺼두지 않았다.
의외로 무게가 제법 나가서 나는 벽에 기댄 그대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에 태블릿을 올려둔다.

“모자찡, 잠깐! 잠깐만! 프레짱도 사람이야, 사람! 오징어가 아니, 끄에엑!”
잠시 자리를 비운 레이 씨가 기합 위주로 스트레스를 줬다면, 웬디는 상식적인 선에서 직접 물리적으로 스트레스를 준다.
프레데리카는 레이 씨가 장비 세팅을 끝낸 5분 후에야 웬디의 마수에서 벗어난다.

<댄스>

곧바로 다시 레이 씨의 고된 댄스 레슨이 시작되지만.
만족한 얼굴로 다시 내 옆에 웬디가 앉는다. 그녀의 태블릿은 여전히 내 손에 들려있는 그대로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지! 내가 불타버리는 모습을 잘 봐둬 카나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레이 씨의 죽도로 머리를 얻어맞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끊김 없이 춤을 계속 추는 프레데리카.

스트레칭 때부터 조금씩 희석되어가던 그녀의 장난기가 댄스 레슨에 이르러는 지금껏 프레데리카를 통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으로 덮어씌워 진다.

"엄청나게 집중하고 계시네요. 한마디 소감 같은 거 뭐 있어요?"

모처럼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웬디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속삭여온다.

"괜찮네."
"질문 바꿀게요. 소감을 한두 단어로 말한다면?"

적당히 대답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여전히 귀찮게 사람을 물고 늘어진다.

"톰 크루즈."
"...아드레날린하고 사이언톨로지를 좋아한다고요?"
"언제나 성실하고 일 자체를 즐기는 열정 말이야. 농담이든 진심으로 한 말이든 그 점도 눈여겨봐 줬으면 좋겠어."

`그 작자`를 따라 보육원을 나온 후, 마지막으로 타인의 열정 어린 모습을 직접 보았던 게 언제일까.
프레데리카가 안무를 맞추고 있는 음악은 어디까지나 춤에 익숙해지려는 사람들을 위한 흔한 곡이다.
프레데리카는 단순히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으로 흔하디흔한 음악과 안무를 물들여간다.
무너지지 않는 미소와 열정에 전염이라도 된 건지, 레슨을 주도하는 레이 씨의 텐션도 점차 올라간다.
중간중간에 사소한 것이 틀린 듯 입꼬리가 움찔거리지만, 전체적으로 그녀의 분위기는 프레데리카의 실수를 잠시 후의 일로 미뤄둘 만큼 밝다.
`우리`에게도 눈앞의 프레데리카처럼 열정적이었던 순간이 처음엔 있었겠지.
예전의 나라면 충분히 프레데리카의 춤에 맞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동작에 의지해서 겨우 안무를 기억해내는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떨까.
돌이켜보면 자기의 사인을 쓰는 법조차 잊어버려서 오랜만에 만난 프레데리카의 앞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얻는 것도 없고 상처뿐인 매일. 그 하루하루가 몇 달이 되고, 어느새 1년이 넘는 시간이 되어 내 많은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쿠로사키 코우이치, 내 전 프로듀서이자 영악하고 이기적인 어른이 있었다.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며 보육원으로 대뜸 찾아왔을 땐 상당히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봤던 미시로 상무와 비슷한 분위기였지.

"저기, 윌리엄스 씨?"
"...."
"파블로프나?"
"엄마야…?! 깜짝이야. 전 또 상무님인 줄 알았잖아요."

집중해서 프레데리카를 쳐다보는 그녀의 미들네임을 불렀을 뿐인데 예상보다 반응이 격하다.

"그 미시로 상무님 말인데, 당신이 보기엔 어떤 사람 같아?"
"...알아서 집 구했다는 사람을 반강제로 기숙사에 꼬라박는 27세 노안이요?"
"그런 소리는 그만 좀 해."

대체 평소에 어떻게 살면 사고방식이 이렇게 삐뚤어지는 걸까.

"아이돌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말이야. 프레데리카는 당신 담당이 아니라며."
"꼴통이요. 자기 주관이 엄청나게 센 꼴통."

내가 질문하기 무섭게 대답을 내뱉으며 자신의 입에 왼손을 가져다 댄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겹쳐 마치 보이지 않는 담배라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회사 내에서 상무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거예요. 온 부서를 헤집으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사원들이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고 구슬려보려 해도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했던가?"
"별로 적극적이지도 않고, 비위를 맞춰주는 쪽이었던 내 전 프로듀서와는 반대네. 호감을 살만한 성격이 아닌 건 비슷하지만."
"믿기시진 않겠지만 알고 지내기 시작했을 땐 성격 좋았어요. 덕분에 처음엔 저도 제가 알고 있던 미시로 하루에가 맞나 하고 쫄아서 걱정했죠. 지금 상무님이 관리하고 계시거나 앞으로 관리할 아이돌이 대충 다섯 명인데, 잘 못 하면 아주 골로 가는 거 아니냐고."

아이돌이 대충 다섯 명. 그 말에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쾌한 소름.
웃고 떠들고 함께 했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던 얼굴.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덮어씌워 진다.
전 프로듀서를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노려보던 무서운 얼굴들. 4명의 표정은 분노에 가득 차있고, 한 명은 운다.

"그런데 정말 그따위로 꼴통이면 아이들이 저한테 생일 선물로 ■가 좋■■ 물어■ 커■ ■ 안 섞■■■."

화가 난 얼굴들 사이에서 말도 못 하고 그저 울고 있다.

"■■y. HEY!"
"아…!"

어깨에 닿는 손의 감촉과 고함에 무심코 신음이 새어 나온다.
맨 먼저 되돌아온 시선에 보인 것은 카메라가 무릎에 닿은 채로 종이 사포같이 검은 화면을 보이는 태블릿.
녹화 중임을 알리는 빨간 글씨가 연달아 깜빡이고 있다.

"레이 씨, 저희는 잠시 좀 쉬다 올게요.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가면 문자 한 통 부탁해요."

내 어깨에 올려진 따스한 손이 내 손을 잡아 끌어올린다. 이 시선들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휘둘려 거부하지도 못한다.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뭐라도 말 해줘야 하는데.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웬디에게 이끌려 레슨실을 나간 후다.

>>>>>>

<<TRUST ME>>

<휴식>

"카나데 양. 괜찮아요?"
"난 언제나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뭔가 제가 자료로 보고 생각한 모습보다……. 붕 뜬 느낌이거든요."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제 사무실이요. 우유에 초콜릿 타 먹는 데 거부감은 없으시죠?"
"굳이 당신의 사무실로 가야 할까?"
"제 사적인 일도 있어서요. 어차피 카페보다 더 가깝고. 아이고머니나! 봐요, 엘리베이터로 몇 층 올라가고 조금 걸으니까 금방 왔네요!"

346 프로덕션은 사내 전체가 금연이다. 그래서인지 웬디의 방은 카나데가 그녀의 자동차에서 맡았던 냄새와는 달리 초콜릿 냄새와 약간의 나무 향이 감돈다.
조명이 꺼져있는 사무실이 어찌나 어두운지, 웬디가 커튼을 휙 걷자마자 들어오는 구름 먹은 햇빛이 잠시나마 맑은 날의 자연광으로 보일 지경이다. 한 사람이 쓰는 것치곤 제법 넓은 사무실.

"여기에 좀 앉아 계세요. 금방 차려드릴 테니까."

웬디는 카나데의 양어깨를 붙잡고 접대용 1인소파에 그녀를 앉힌다. 급탕실로 보이는 방으로 웬디가 사라지기 직전, 다크 초콜릿하고 밀크 초콜릿 중에 뭐가 좋으냐는 그녀의 질문에 카나데는 후자를 고른다.
그리고 홀로 남은 카나데는 주위를 둘러본다. 벽에 빈틈없이 일렬로 늘어진 액자의 행렬이 카나데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933년 킹콩, 1939년 오즈의 마법사, 아라비아의 로렌스, 마이클 키튼 주연 배트맨, 데이비드 보위의 래버린스, 터미네이터 2하고…. 대부분 내가 봤던 거네."

액자 안에 예외 없이 들어가 있는 것은 다양한 연도에 찍힌 여러 영화의 포스터. 심지어 옛날의 것을 그대로 지금까지 보존한 듯하다. 빛바랜 잉크에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상한 사람치고는 영화 취향이 괜찮은데."
"맞다, 카나데 양! 죄송한데 책상 위에 시가 상자 좀 치워주실래요? 책상 위에 떡하니 있는 거 상무님한테 걸리면 저 죽습니다!"
"그거 잘됐네."
"네, 고마워요!"
"흥."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의 책상으로 걸어가는 카나데. ㄱ자로 놓인 2대의 책상에는 랩톱, 서류, 도면따위가 가득하다.
그 사이에는 갈색 나무상자 하나가. 아니나 다를까 상자를 들어 열어보니 궐련 수십 개가 빼곡히 담겨있다.

"...."

■■■■■■

마지막으로 궐련 상자를 서랍에 넣고 누구에도 들리지 않게끔 천천히 닫는다.

"왜 담배에서까지 초콜릿 냄새가 나는 거야?"

급탕실에서 나오는 웬디에게 투덜대는 카나데. 침을 꿀꺽 삼킨다.
웬디는 들고 있던 머그잔 두 개를 접대용 테이블 위에 놓은 후, 1인용 소파에 앉아 눈썹을 살짝 올리며 카나데를 바라본다.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그러려니 하세요, 하듯 어깨를 으쓱인다.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는 웬디의 손짓에 따라, 카나데는 주춤하며 자리 잡는다.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나무쟁반과 탑처럼 쌓여있는 판 초콜릿 봉지, 왜 있는지 모를 알루미늄 포일 상자와 빵칼,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콜릿 두 잔.

"역시 여름에 뜨거운 건 좀 그랬나요?"
"오히려 이쪽이 좋아. 마침 에어컨 때문에 좀 추웠고."

먼저 잔에 입을 갖다 대는 웬디를 뒤따라 카나데는 자신의 긴 머리를 젖히고 경계하듯 머그잔을 입에 가져간다.
그 순간 힘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카나데의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다시. 이번에는 좀 더 깊게 들이킨다. 입을 통해 퍼지는 초콜릿과 우유향.
연분홍빛 입술 아래로 흘러내릴 뻔한 핫초콜릿에 무심코 숨을 삼키다,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웬디와 눈이 마주친다.

"대충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맛있어. 기대했던 거보다 좀 더 달지만."

카나데는 어깨너머의 긴 머리칼을 다시 앞으로 넘겨 자신의 귀를 가리고는 쌀쌀맞게 대답한다.

"다음에는 다크 초콜릿으로 해드릴까요?"
"내가 여기에 또 올 것처럼 말하네."
"업무가 아니더라도 지나가다가 들르시면 얼마든지 해드려요."

웬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는 카나데.
웬디는 카나데의 대답을 기다리듯 얼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자신의 핫초콜릿에 눈을 돌린다.
빗소리 안에서의 한 폭의 그림 같은 침묵이 한동안 계속된다.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고 카나데가 먼저 침묵을 깬다. 컵 안에 동그랗게 남은 초콜릿 자국에 시선이 향한다.

"미야모토 양한테 돌아갈겁니다."
"그거 말고. 나를 끌어들이는 데 포기했으니 이제부터 뭘 할거냐는 말이야."
"어이쿠, 혹시 갑자기 저하고 일하고 싶으세요?"
"설마. 그저 궁금해서 그래."

앞으로의 일이라, 라면서 웬디는 아직 절반 정도 남은 잔에 입술을 댄다.

"미시로 상무님하고 같이 또 머리를 굴려야죠. 계획 자체를 수정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카나데 양처럼 가창력 나쁘지 않고, 목소리 괜찮고, 춤도 능숙한 사람을 따로 구하던가."
"ZBS 제휴사무소에 나 말고도 4명 더 있잖아. 그 아이들에게 권유해보는 건 어때? 베개영업에 휘말렸다는 이유로 놓치긴 아까울 텐데."
"동감이에요."
"그래?"

고개를 들어 이상하다는 듯 웬디의 은색 눈을 바라보는 카나데.
웬디는 손에 든 머그잔의 나머지 내용물을 단숨에 비운다.

"당장 제가 전부를 맡지 못하더라도, 같이 일을 벌이기에는 같이 총대를 멜 적당한 사람이 없어도, 자기 딸이랑 말도 섞지 말라고 니시야마 부부가 제 멱살을 잡아도, 사건으로 상품가치가 떨어졌는데 괜한 짓 한다면서 면식도 없는 새끼들이 찾아와서 소리 질러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죠. 물론 상식적인 선에서."

곧이어 탁하고 가볍게 울리는 유리와 목재의 충돌음. 웬디의 무거운 한숨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카나데 양이라면 세상 끝장난 것처럼 울고, 명함을 내밀자마자 주먹질부터 하면서 거절하는 당사자들한테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라면 아무것도 못해. 그 아이들의 일이 어떻게 해결되든 내가 보답 받을 리도 없고."

즉답.

"애초에 내가 저지른 일인걸. 그 사람들이 이야기 안 했어?"

짧게 신음하는 웬디. 망설이는 듯하다가 누가 엿들을세라 속삭인다.

“동료들이 왜 손목을 그었느냐고 묻자 응급실에서 깨어난 니시야마 코하쿠 양은 ‘카나데 언니가’라고 대답했고, 지금까지 쌓여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카나데 양과 쿠로사키 코우이치 전 프로듀서를 향했다……. 최근까지 조사하면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니 대충 그런 느낌이더군요."
"그런 느낌인 게 아니라 그게 맞아."
"...."

웬디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간다. 웬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살살 걸어가 카나데의 소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얼핏 봤을 때 웬디 앞에 앉아있는 카나데는 평온해 보인다. 다리를 꼬고 앉아 태연한 눈으로 웬디의 다음 말을 기다려는 주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카나데 양. 혹시 저를 포함해서 모두한테 숨기고 있는 거 없어요?"

정작 카나데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창백하다. 반대로 머그잔을 쥔 고운 양손은 힘이 잔뜩 들어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듯, 필사적으로 매달려있다.

"`그런 년인 줄 몰랐다`, `이젠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예 저랑 말도 못 섞은 니시야마 양, 그리고 대화하는 내내 똥십은 표정 지은 한 사람 말고는 모두 저한테 이런 식으로 얘기했어요. 당신의 전 프로듀서가 본격적으로 동료들을 말아먹기 시작한 건 니시야마 양이 사고를 당하기 훨씬 전이고요."

카나데가 쥐고 있던 머그잔은 웬디에 의해 하얀 손에서 벗어나 테이블의 웬디의 컵 옆에 나란히 놓인다. 곧이어 머그잔을 잃은 빈자리를 갈색의 손길이 대신한다.

"사람이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카나데 양이 정신적으로 몰린 사람한테 막말할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그런 년인 줄 알고 있었다`따위의 얘기가 나와야 정상 일 거예요. 베개 영업을 혼자 피해갔든 어쨌든, 사람이 긴 시간 동안 쌓아온 이미지라는 게 그렇게 한순간에 쉽게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한 쌍의 금빛이 흔들린다. 그런데도 공원에서 오래 산 영리하고 날쌘 다람쥐 같은 은색 눈을 피하지 못한다. 부드럽게 양손을 감싸오는 따스한 웬디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야 뭐 여러분들을 포기하고 미시로 상무님이랑 머리를 좀 더 굴리면 그만이에요. 굳이 아이돌로 다시 데뷔하는 게 아니더라도 저랑 미시로 상무님은 여러분이 무슨 길을 가든 응원해주고, 저희가 잘못한 만큼 지원해드리겠죠."

따뜻한 온기에 감싸진 카나데의 하얀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런데 지금 카나데 양과 동료분들의 관계는 저희가 응원이나 지원을 하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카나데 양이 왜 이 상황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고요."

목소리는 죽였지만, 웬디의 눈은 불꽃 튀듯 빛난다.

"이렇게 하죠. 같이 모험을 해봐요. 동료들을 다시 만나서 제대로 얘기해보는 거예요. 대신 동료들이나 부모님들이 난리를 치면 제가 막아드릴게요. 이래 봬도 욕먹는 건 익숙하거든요."
"괜히 간섭하지 마."

차분하고도 얼음장 같은 한마디가 카나데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거대한 벽처럼 우뚝 서 웬디를 가로막는 듯하다.  
황급히 웬디가 뒤따라 일어나기 무섭게 가늘고 여린 손은 웬디로부터 빠져나간다. 웬디의 손은 그것을 붙잡지도 못하고 아래로 축 늘어진다.

"카나데 양."
"괜히 간섭하지 말라고."
"...."
"...."

다시, 카나데가 침을 꿀꺽 삼킨다.

"이쯤 되면 충분한 것 같아. 알아서 집에 갈게."

지금까지와는 달리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은색 눈빛으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호의는 고맙지만, 그 사람들 앞에 내가 나타나는 건 서로에게 역효과가 나올지도 몰라. 나는 나대로 앞으로의 계획이 있어. 그 계획에 옛 동료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테고. 솔직히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끼친 민폐 중에서도 방금 제안해온 게 최악이야."

웬디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사무실의 출입구 앞으로 빠른 걸음을 놓는다.

"그래도 당신과 미시로 상무님이라면 안심하고 프레짱을 맡길 수 있겠네. 정신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끝까지 챙겨주길 바라. 아, 당신을 포함한 연예계 관계자들은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기어이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카나데의 시선은 문도 아닌 바닥을 향해있다. 사무실의 반투명한 너머로 보이는 금발의 존재에는 닫지 않는다. 문 너머로 들리는 어수선한 발소리와 카나데의 행동은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있다.

"그리고 당신의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기분 탓일 거야."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린다.

똑똑.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

주전자에 닿은 것처럼 깜짝 놀라 문에서 손을 떼는 카나데.

"나원 참, 잠시만요!"

우악스러운 발걸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웬디의 모습에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휘청이듯 웬디를 피해 문 옆의 벽에 달라붙는다.

"노크 노크!"

목소리에 묻어난 장난기가 넘쳐흘러 어두침침한 사무실 안쪽까지 흘러넘친다.
웬디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문 가까이에 댄다.

"Who`s there(누구냐)?"
"프레데리카!"
"Frederica who(프레데리카 누구)?"
"프레데리카 위드 나오카렌!"
"...저번처럼 문 열 때 놀라게 하지나 마세요."

소리도 없이 열리는 나무문이 카나데와 불청객 사이를 가로막는다.

"벌써 연습이 끝난 건 둘째치고 두 사람은 미야모토 양이랑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카렌하고 나오말야, 학교가 끝나자마자 비를 뚫고 왔다나 봐!"
"모처럼 나오가 내 머리를 정성스레 땋아줬는데 비를 어떻게 뚫고 와? 학교가 끝나자마자 나오랑 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고."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집에서 연습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점심시간에 카렌한테 얘기해서 같이 346에 오기로 했는데... 설마 내가 택시비를 내게 될 줄이야."
"어두운 것 좀 봐. 모자찡, 불 켤게! 모두 눈 조심하시라!"

프레데리카의 외침과 함께 위에서부터 내려쬐어오는 LED 빛이 카나데의 눈을 덮친다.

"손 좀 내밀어 볼래?"
"또요…?"

곧바로 카나데의 시선 앞에 들어온 것은 웬디와 어떤 소녀, 카렌의 모습이다.
카나데의 왼편 시야를 가리는 나무문 너머로는 나머지 두 사람분의 바스락거리는 초콜릿 포장 소리가 통과해온다.
오늘의 카렌은 먹음직스럽게 녹아내린 듯한 캐러멜 색의 머리카락을 한 묶음으로 땋아 오른쪽 어깨 위에 늘어놓고 있다.
카렌은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꺼내 손전등을 켜고는 양손을 유심히 살핀다.
오른쪽 새끼손가락부터 엄지까지, 왼손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확인한 후 카렌이 미소 짓는다.

"헤에. 의외로 안 지워지고 멀쩡하네? 손 쓸 일이 많다길래 금방 지워질 줄 알았는데."
"애초에 쉽게 지워지는 성분부터 아니잖아요. 맨손으로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관리도 나름대로 하고 있고."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게 있잖아, 하고 말하며 카렌은 만져보라는 듯 자신의 오른손을 웬디의 왼손 위에 포개어 보인다.

"오늘 아침에 새로 해본 네일이야. 모처럼 한 거니까 미야모토 씨가 좀 있다 프로필 사진 찍을 때 나도 같이 찍는 건 어때? 마음에 들면 나중에 프로듀서한테도 특별히 해줄게."
"프로필 사진 찍기? Yes. 저한테 네일 해주는 거? Hell no."

웬디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카렌이 제안하기 무섭게 웬디의 양손은 청바지 주머니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늘 있는 일인 듯, 카렌은 키득거리며 웬디의 삐뚤어진 야구모자를 고쳐준다.

"나오, 에어컨 좀 켜줘! 어차피 10분 뒤에 나갈 테니까 섭씨 18도로! 역시 대기업은 에어컨을 빵빵 틀 수 있어서  좋다니…까?"

카렌은 웬디로부터 몸을 돌려 사무실의 문을 닫으려 하다 그대로 멈춘다.
한 쌍의 금빛 수정이 사무실 문 뒤의 그늘 속에서 빛난다.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카나데의 눈동자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양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카나데의 모습은 기도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카렌? 무슨 일 있, 으헥?!"
"아."

곧이어 문이 닫히고, 곤란한 듯 입술을 핥는 웬디를 제외한 나오와 프레데리카의 눈빛까지 카나데를 포위한다.
카나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남색 머리칼 밖으로 드러난 귀가 갓 딴 자두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카나데 찾았다! 말도 없이 가버리면 어떡해~!"

프레데리카의 요란 법석한 말이 사무실의 벽을 타고 울리지만 끔찍하리만큼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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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정)

....거의 반년만이군요. 이미 이전에 한번 한 말이지만 정말 면목 없습니다.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 있으니 제보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그 외 0장 엔딩곡 추가, 잘린 음원 수정, 이전 작성된 본문 수정 등의 변동사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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