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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을 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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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9, 2020 22:50에 작성됨.

치하야가 조심스레 침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작게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 치하야는 그 자리에 가만 섰다. 문 틈새로 살짝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대략적인 윤곽.  누군가 먼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미안, 하루카. 깨버린 모양이네."

"으으응, 아니. 괜찮아.


치하야가 그곳에 약간 미안함을 담은 말을 던지자, 곧바로 그 누군가의 말이 돌아왔다. 치하야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톤의 목소리로.


"먼저 잔다고 그러지 않았어?"

"에헤헤....그랬긴 한데....."


치하야의 물음에 하루카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기 옆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왜 그러는 걸까. 치하야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얌전히 하루카의 인도에 따랐다. 하루카가 그러지 않아도 원래 들어올 작정이긴 했으니까. 치하야는 아까보다는 덜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탁.


방 안에 완전히 찾아온 어둠. 그래도 치하야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스륵, 스으윽.


이윽고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치하야는 하루카 바로 옆자리에 가는 몸을 뉘였다. 원래 1인용인 관계로 두 사람이 눕기에는 다소 좁은 침대. 그래도 하루카와 치하야는 한 자리에 있기를 고집했다. 다른 누군가가 바닥에 눕는 걸 보면 좀 불편하니까. 손님은 손님대로 집 주인의 것을 대신 차지해버리지 않았나하는 마음에. 집 주인은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일단은, 그런 이유였었지. 지금에 와서는 이 좁음마저도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짧은 회상을 마친 치하야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가장 가까운 온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맞닥드리고 마는,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한 쌍.


"잠이 오질 않아?"

"응. 이상하게도. 분명 자야지- 했었는데. 들어와서 누우니까 또 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어째서일까나....후암. 아, 하품 나왔다. 이제 다시 졸린가봐. 혼자 자는 것보다, 치하야 쨩하고 같이 있으니 안심! 이라는 걸까나."

"그러니? 잘 되었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잘 시간이니까."

"근데 있지, 이젠 반대로 자기 싫어."     

"후후, 뭐야 그건."

"그치만~ 치하야 쨩을 놔두고 먼저 꿈나라에 가긴 싫어. 뭔가 있지, 아까운 느낌."

"나도 자려고 들어왔는 걸."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기하자. "

"이야기라고 해도...푸훗, 자, 잠깐, 하루카."


치하야가 하루카를 달래는 동안이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는, 다소 낯간지러운 느낌의 온기에 치하야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루카가 치하야의 손을 꼬옥 붙잡고는 손노리개라도 되는 양 주물거린 탓이었다.


"앗, 미안해. 무심결에....싫었어?"

"그런 건 아니야. 조금 놀랐을 뿐."

"그럼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으음....편한 대로. 그러고 싶다면." 

"그리고 이야기도."

"그건...."

"그렇지 참! 치하야 쨩, 이번 잡지 앙케이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1위로 뽑혔다며?"


치하야가 아직 승낙도 하지 않았건만, 하루카는 더는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 자기 쪽에서 성급하게 화제를 꺼냈다. 이렇게 되면 조금은 어울려주기로 할까. 치하야는 반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하루카에게 응했다.


"응. 설마 1위가 될 줄은 몰랐지만...."

"축하해!"

"응....고마워."


이미 모두에게 축하받은 내용. 그렇지만 하루카에게 받는 건 좀 더 각별한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드러내는 건 부끄럽다는 생각에 치하야는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답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거기 코멘트 중에서 재밌는 소리도 하나 나왔었지."

"재밌는 소리?"

"치하야 쨩이 앞으로 남장에 몇 번 더 도전했으면 좋겠다는 말."

"아, 그건."


하루카가 보내는, 장난기가 반짝하는 시선에 치하야는 급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꾸욱, 꾹. 그러자 하루카는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하면서, 치하야의 귓가에 슬며시 속삭였다.


"후후,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더스크."

"읏....!? 정말, 이런 짓은 그만두었으면 하는데. 파이널데이."

"아하하."


치하야가 장단을 맞춰주자 하루카는 본연의 목소리로 돌아와 즐겁게 웃었다.  


"치하야 쨩, 그 때 멋있었는데. 하루카 씨적으로도, 다음에도 또 그런 모습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고 할까나."

"그, 글쎄....마, 만약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면야."

"에헤헤, 기대하고 있을게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줘. 아, 마침 하루카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응? 뭔데?"


여기서 멈춰야하는데. 한 번 이야기에 물꼬가 트여버리면, 멈추는 게 힘들어져. 치하야는 그걸 자각하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쪽에서도 화제를 꺼내었다.


"전에 하루카, 이런 질문을 받은 적 있었지. 만약에 남자가 된다면, 누구랑 사귈 거냐고."

"어....아, 맞아! 응. 그랬지."


아직 시어터가 생기기도 전의 일이었다. 하루카는 같은 사무소 동료인 야요이랑 둘이 같이 스페셜 앨범을 낸 적이 있었다. 그 앨범 CD의 부록에는 질문답변 코너가 있어, 하루카와 야요이가 번갈아가며 팬들이 보낸 질문지를 뽑아 그 질문지에 적힌 질문에 답했었다. 그리고 마침, 하루카에게는 저런 질문이 들어왔었던 것이다.


"그 때 하루카는 다 좋아서 못 고르겠다고 했던가?"

"응. 그랬어. 덧붙여서 지금도 변함없답니다."

"흐응.....생각보다 그런 쪽이라는 거네, 하루카는."

"에, 그, 그런 쪽이라니?"

"글쎄, 어떨까. 자기 스스로 생각해보는 건?"


전에 당했던 걸 되갚아주겠다는 듯, 치하야가 슬쩍 말꼬리를 잡힐 듯 말 듯 흘렸다. 


"헤에....그럼 치하야 쨩은?"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법. 하루카는 어둠 속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로 치하야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나?"

"치하야 쨩, 만약 남자가 된다면 누구하고 사귈 거야? 참고로 다 좋아서 못 고르겠다는 거 없기니까. 그렇게 알아둬."

"뭐, 뭣."


치하야는 소리가 높아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그리고는 항의하는 눈빛을 하루카에게 보냈지만, 어디까지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만이 도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치하야 쨩은 나하고 다르게 올곧고 성실하고 진지하니까, 분명 좋은 대답을 해주겠지요?"

"즉, 하루카는 본인의 말에 의하면 올곧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다는 소리?" 

"네에. 안타깝게도. 그렇지만 치하야 쨩, 지금 치하야 쨩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나랑 똑같은 수준이 된다는 거니까."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물귀신 작전이란 말인가. 치하야는 아직도 붙잡혀 있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하루카가 그 손을 놔주는 일은 없었다.  


"자, 자, 빨리.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려준다고요? 이제 정말 슬슬 졸려오거든. 후아암."

"잘 자. 내일 봐."

"어허이~ 그렇게 냉큼 넘어갈 수는 없는, 후우, 하아암. 음냐, 법."


아무래도 진짜 졸린 건 맞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좀 더 버티면 하루카가 먼저 녹다운되지 않을까. 치하야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올곧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는 사람이 된다는 소리가 신경쓰여서 그럴 수 없었다. 


"치하야 쨩, 정말 대답 안할 거야?"

"저기, 하루카."

"응? 

"생각해보니 말야, 네가 하나 놓친 게 있어."

"엣, 놓친 거?"


그런지 얼마나 되었을까. 다시 한 번 대답을 보채는 하루카에게, 치하야가 대뜸 승기를 잡았다는 투로 말했다.


"모두가 다 좋아서 못 고르겠다는 대답은 없다고 했지만, 반대로 모두가 싫어서 못 고르겠다는 말은 없다고 한 적 없어. 그러니까...."

"치, 치하야 쨩!? 설마 진짜-"

"후훗, 농담이야."

"치~하~야~쨩~!"

"꺄앗!?"


치하야의 속임수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간 하루카가 성질을 내며 버둥거렸다. 한바탕 뒤흔들리는 비좁은 침대. 한참 소동에 휘말려들어가있던 치하야가 겨우 수습에 나섰다.


"이, 이제 조용히 해 하루카. 모두 잘 시간이니까."

"하아....그랬지요."


치하야 쨩에게라면 몰라도, 이웃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아직도 앙금이 남은 하루카가 잔뜩 삐진 투로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아직도 울분을 풀기에는 모자르다는 듯 입을 한참 내밀고는 비죽였다.


"미안해. 너무 놀려서. 그런데 있지."


치하야는 그런 하루카의 눈치를 보며, 진짜 하고 싶었던 대답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만약에 내가 남자가 된다면, 하루카랑 사귈 것 같아."

"에.....?"


처음에 하루카는 몇 번 두 눈을 깜빡이며 벙쪄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곧 그 대답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기쁜 마음으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꼭 달라붙었다.


"치하야 쨩! 그거 정말이지!"

"마, 만약의 이야기야. 내가 남자라면...."

"만약이라고 해도 하루카 씨는 참 기쁜 걸요, 에헤헷~"


그렇게 한참, 하루카가 치하야를 한참 커다란 곰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끌어안고 있을 때였다. 하루카의 품 안에서, 치하야가 망설인 끝에 겨우 말소리를 내었다. 


"그, 저기."

"아, 미안미안. 너무 세게 끌어안았나봐. 답답했지?"

"그, 그건....그도 그렇긴 하지만....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흐음, 물어보고 싶은 거라....좋아, 지금 하루카 씨는 기분 좋으니까 뭐든 답할 수 있어. 예를 들어 오늘 간식을 몇 개 먹었냐부터 해서-"

".....간식,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해."

"....네이.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떤 건데?"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응?"

"만약에 네가 남자가 된다면, 누구랑 사귈 거야? 아, 물론. 전부 좋아서 고를 수 없습니다. 이런 건 없는 거니까."


그거라면 전에 대답했잖아. 그렇게 대꾸하려던 하루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조용히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모두가 싫어서 고를 수 없습니다. 이런 대답도 없는 걸로 할게."

"하, 하하....처, 철두철미한 걸."

"자, 그러니 대답해. 정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끝에 가서 치하야는 살며시 눈을 감고 하루카에게 등을 보였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그 모습에 하루카는 조금 허전함을 느꼈다. 뭐야, 치하야 쨩. 치사하잖아. 갑자기 그러면. 하루카는 치하야가 다시 자신을 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등 돌린 치하야의 어깨를 꼭 감싸안고는 말했다.


"치하야 쨩. 나, 만약에 남자가 되면 치하야 쨩하고 사귈래."

"....그러니."


살짝 경직된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서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루카는 치하야가 완전히 긴장을 풀기까지를 기다렸다가, 겨우 부드러움이 느껴질 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은 말야, 지금 이대로도 좋아."


....농담이야. 하루카는 맨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못하고, 그저 어색한 동작으로 다시 굳어버린 치하야에게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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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하 왓-호-이. 이 뒤로 둘 다 잠 설쳐서 지각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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