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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문학소녀~ 이 눈물의 이유를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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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17, 2020 21:45에 작성됨.


"하아...."


유리코가 그동안 참아왔던 한숨을 내뱉었다. 겨우 프로듀서에게 들키지 않고 대기실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조금은 긴장을 풀어도 되겠지. 유리코는 잔뜩 움츠렸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는 적당한 의자를 하나 아무 생각없이 뒤로 끌었다가, 끼이익하는 소리에 되려 놀라, 도로 온 몸을 딱딱하게 굳히기를 몇 초간. 


"힉, 후, 후우."


숨을 급하게 집어 삼켰다가, 다시 깊게 내뱉은 유리코는 누가 자길 감시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의자 안으로 쏙 몸을 밀어넣는다.


그냥 집에 갔으면 이럴 일 없었을텐데. 


유리코는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후회를 무시했다. 지금은 집에 갈 때가 아니야. 예정된 재앙, 아니.....라이브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다. 앞으로 노래하게 될 신곡, 조금이라도 더, 봐두지 않으면. 유리코는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비어있는 옆자리에 두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안에 들어있던 파일철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파일철 안에는 신곡의 악보가 들어있었다. 유리코는 불편함이 영 가시질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는, 잠시 창가로 시선을 피했다. 바깥은 벌써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와, 온 사방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빛 속....."


그 풍경은 신곡의 가사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유리코는 다시 악보에 시선을 두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주의받은 점이라던가, 유리코 자신이 노래하면서 신경쓰이는 것들이 잔뜩 메모되어있는 탓에 여백을 찾아내기 매우 힘들어진 악보. 유리코는 순간 갑갑함을 느꼈지만 꾹 참고 오직 오선지 아래 적힌 가사만 주목해보기로 했다.


-발돋음을 해도 닿지 않는 책표지에.


-너의 손이 살며시 준 상냥함.


-눈 앞에 내밀어진 타이틀이 가리켰던


-이 만남은, "사랑의 시작"


"아, 우....."


그 도중에, 유리코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번 자신에게 책을 건네준 프로듀서를 떠올리며, 가사가 그리는 상황과 한데 겹쳐버린 탓이었다. 정말, 그건 별 생각 없으셨을 거야. 나 혼자 괜히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걸 거야. 


그렇게 밀어버리고 넘어가려는 순간, 유리코의 호박색 눈동자가 휘동그래졌다. 프로듀서에게 책을 건네받았던 때보다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 뇌리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눈 앞에 뭔가가 내밀어졌던 기억. 책은 아니다. 책보다 훨씬 작고, 가볍고, 여백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선사해주어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해준 그것.


바로, 프로듀서 씨의 명함.


유리코는 기억의 가장 첫 페이지를 되짚어보았다. 학원제. 낭독극.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낭독할 수 있어서 기뻤다. 실수 없이, 완벽하게 이야기를 모두에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안도감과 성취감이 온 몸을 타고 흐르고 있을 때, 못 보던 사람이 불쑥 앞으로 왔던 거야. 정장을 차려입긴 했어도, 거리감이 있다기보다는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수더분한 인상의 안경을 쓴 남성. 


그 사람은 내 낭독극에 감명을 받았다면서, 돌연 명함을 내밀었지. 아이돌 프로듀서라니, 설마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깜짝 놀라서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 서있으니, 그 사람- 프로듀서 씨는 이렇게 말했지. 아이돌이 된다면, 지금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다고. 아니, 그 뿐만이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이야기의 주인공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아, 어쩌면. 그 때야말로 "사랑의 시작" 이 아니었을까. 마치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내게 찾아와준 프로듀서 씨. 아이돌이라는 환상의 세계로, 내 손을 붙잡고 이끌어.....아앗,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


"우, 우와아...."


어쩌면 좋지. 이렇게 생각하니 더욱, 두근거려. 유리코는 숨을 후후 내쉬면서, 애써 들떠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아니야. 사랑 같은 건. 처음 만난 거잖아. 아, 그런데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는 것도....아니, 아니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알거든요, 이제는. 그런 건 이야기 속에나 있는 거라는 걸. 어쩌면. 아주 어쩌면 현실에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응. 일단 난 아니야. 그럴, 거야."


단순히 숨을 고르는 것을 넘어서, 어쩐지 자기 혼자서 독백에 열중했던 유리코는 마지막에 가서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해서 머리 속에 마구 피어오르던 단편적인 로맨스의 이미지들을 모조리 떨어트렸다. 그러자, 그 텅 비어버린 공간에 또 다른 상념이 불쑥 떠올랐다.


"아, 그러고보면. 그 때...."


아이돌, 권유해줘서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했어야했는데. 자신에게 아이돌이 되면 안되냐는 권유가 온 것 자체가 정말 놀랍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어. 아, 어쩌지. 프로듀서 씨에게 고마워, 라고 말해야하는 이유 하나가 더 늘었다. 


그렇지만.


유리코는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는 시선을 꼭 닫혀진 문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촛점이 살짝 흐려지는 호박색 눈동자. 유리코는 저기 문 너머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프로듀서 씨를 마음 속으로 그려보았다. 분명, 열심히 일하고 계시겠지.....그리고, 역시 곤란해하실까나. 내가 계속 피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고맙다고 하면 그것 그것대로 좀 그럴까나. 타이밍이 중요한데.....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럴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주제에. 아아, 정말 어쩐담! 종극에 유리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런지 얼마나 지났을까. 유리코는 슬금슬금 두 손을 내렸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는 두 눈이, 고개 숙인 탓에 다시 가까워져버린 악보를 포착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까만 오선지. 그 위에 수놓아진 음표와 기호. 그리고 그 아래, 한글자 한글자씩 적힌 가사들. 유리코는 어느덧 그 가사를 다시 처음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날 네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고마워"


-점심이 끝날 무렵의 에피소드


-지금도 기억하시나요?


묵묵히 움직이던 유리코의 시선이 한 순간 멈췄다. 서서히 물기를 띠는 눈. 얼마 안가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이윽고 한 방울이 떨어져 톡, 하고 악보에 적힌 한 소절을 적시고 말았다.


-눈물의 의미를 알고 싶어.


새롭게 눈물 자국이 생겨버린 악보를, 유리코는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리고는 멍-해져버린 머리로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울고 있는 걸까.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고.


눈이 아파서? 슬퍼서? 분해서?


프로듀서 씨를 계속 피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 프로듀서 씨에게 계속 폐를 끼치는 자신이 미워서?


아니야. 일순간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수많은 이유들을, 유리코는 단 하나의 부정으로 일축했다.


나는 프로듀서 씨에게.....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말하고 싶어. 이 마음은 틀림 없는 진심.


그렇지만, 말해버린다면 그걸로 끝나버릴 것 같아. 지금까지 프로듀서 씨에게 느꼈던 두근거림은 정말 착각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바로 이거.


그렇기에 지금 눈물이 나오는 거야. 


유리코는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이 프로듀서를 피했던 진짜 이유와 마주하고 말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게 실은 사랑이 아니었다면 어쩌지. 만약 이런 슬프고 허무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건.....싫어. 유리코는 이대로 "사랑의 시작"이라는 책을 덮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다음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 건 아쉽지만, 슬픈 엔딩을 보지 않고 끝낼 수 있으니까. 그걸로 괜찮은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려고 했지만.


하지만, 이 두근거림의 다음 행방을 알고 싶어. 


이 마음이 강하게 버티고 들어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각한 순간, 유리코는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어김없이 드는 슬픈 예감. 만약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만약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도 프로듀서 씨는, 과연 나를.....자신의 공상대로만 흘러갔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걸 유리코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리코는 마음 한 편으로 프로듀서를 생각했다. 


첫 라이브 때,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해하던 자신을 격려해주던 프로듀서. 


-지금 무대에 섰다고 생각해보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자. 어때 유리코? 지금 관객분들이 널 어떻게 보는 것 같아?

-자,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우, 우선 제가 뭔가 했으면 좋겠다는....그,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 같긴 한데....

-그럼 그대로 해줘야지. 마침 유리코는, 지금까지 계속 연습해왔던 게 있잖아.

-아, 네엣! 마, 맞아요. 저, 이 날까지 계속 연습을....노, 노래하고 댄스....아, 대, 댄스는 아직 자신없는데.

-그렇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볼까. 댄스에 자신없던 유리코는 그만 동작을 실수해버렸다!

-에엣!?

-자, 어떻게 할 거니?

-저, 저, 저, 그, 그 때는....어....그, 그게....어쩌면....어쩌면 좋나요?

-그럴 때는 이렇게 짜잔! 하고 턴해보는 거야.

-네? 그,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그럼.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걸.


".....아."


그 때 프로듀서와 주고받던 대화를 돌이켜보던 유리코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한 차례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책상에 펼쳐졌던 악보를 착하고 소리나게 덮은 뒤, 옆자리에 두었던 가방에 쏙 넣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손등으로 슥 훔쳐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나도 이젠 상관없었다. 


가방을 들어 다시 메고, 옷 매무새 정리까지 마친 유리코는 이제 당당하게 대기실 문 앞으로 걸어가 섰다. 그러고는 잠깐 눈을 감고, 공상을 시작했다.


프로듀서 씨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아, 언제나 계시던 자리에서 열심히 손가락 끝을 움직이고 계실 거야. 어쩌면 잠깐 기지개를 피고 계실지도 모르겠네. 그래. 그러는 도중에, 내가 딱 프로듀서 씨의 앞으로 와서, 그렇게 해서.....눈과 눈이 마주치는 거야. 그러면 좋을텐데.


공상을 거기까지 마치고, 유리코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힘차게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이 마음 속의 두근거림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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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시타에 공상문학소녀가 추가된 기념(?)으로 유리코 커뮤를 바탕으로 적당히 왜곡망상페스티벌했습니다. 노래가 좋아서 계속 듣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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