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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 시키 「PAINK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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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13, 2020 22:09에 작성됨.

이치노세 시키의 프로듀서가 죽었다. 아무 특색 없는 비행기 사고였다. 저가 항공을 이용한 프로듀서의 탓이겠지, 시키는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굳이 그 비행기를 탄 프로듀서를 생각했다. 프로덕션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말단 사원을 저 먼 대륙까지 영업을 보낸 것뿐이다. 시키는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머나먼 이치노세의 나라에는 자그마한 소녀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소녀는 너무나도 자그마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마련해놓은 무인도에서 나올 수 없었다. 천천히 죽어가는 상자 안의 고양이. 소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치노세 시키라는 고양이는 그렇게 죽어갔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소녀는 잠시 무인도에서 벗어나 일탈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상자 안에 조그마하게 뚫린 구멍으로 세상 구경을 조금 할 수 있었다. 하얀색 가운이 아닌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플라스크와 무색무취의 화학합성물 대신 향긋한 꽃내음과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났다. 자신의 천국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세계가, 작게 난 구멍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이치노세 시키는 그 순간부터 체셔 고양이가 되었다. 자기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보라색 고양이가 되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며 자조하기도 했다. 가끔은 연구에 미쳐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를 마음껏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치노세 시키는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할 수 없었다. 웃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이치노세 시키라는 체셔 고양이는 만족할 수 없었다.

 

, 흥미로운 실험 재료를 발견♪」

 

그 무렵의 이치노세 시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한 만남에서의 발견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항에서의 마주침.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하던 이치노세 시키에게 발견된 순수한 결정체. 금방이라도 녹여서 실험하고 싶은 실험체.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싶은 단 하나의 샘플. 이치노세 시키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치노세 시키는 아이돌이 되었다.

 

상자에서 나온 고양이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향기로운 냄새뿐만 아니라 고약한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것마저도 즐거워했다. 그건 자신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신비한 일이었고, 상자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시키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하고 좋았다.

 

그래도 어쩌다 이치노세 시키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것을 마주치게 될 때면 어디선가에서 그가 다가와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시키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대답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위로해주었다.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치노세 시키는 어째서 그가 그런 반응을 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야 인생을 살다 보면 몇 번이라도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이치노세 시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치노세 시키에게 그는 샘플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처음에 만날 때부터 단 하나의 샘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 것 같았다. 감정. 이치노세 시키가 알 수 없던 또 다른 세계. 이치노세 시키는 그때부터 고양이이기를 거부하고 한 소녀가 되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 연기하는 것이 아닌 이치노세 시키 본연의 모습으로 탈태했다. 연기는 연기처럼 사라져야 하는 거야, 이치노세 시키는 그때부터 종종 중얼거리듯이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치노세 시키의 프로듀서가 죽었다. 아무 특색 없는 비행기 사고였다. 이치노세 시키는 험악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살아있어야 했다. 그래야 이치노세 시키의 샘플이고, 이치노세 시키의 치료제일 테니까. 하지만 그가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야 물리적인 폭발인걸, 몇 주가 지난 뒤의 이치노세 시키는 생기 없는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이돌 이치노세키 시키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중얼거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 탑승 비행기를 탄 이치노세 시키는 그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이치노세 시키에 대한 목격담을 늘어놓았지만, 그 누구도 일관된 진술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진술에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그 사람, 생기가 없는 눈으로 플라스크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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