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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나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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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9, 2020 21:04에 작성됨.

나, 요시오카 사키. 23살이다. 미시로에서 아이돌 생활만 5년차지만, 데뷔 이후 거의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개성이 부족하고 찾아주는 행사장도 거의 없다는 게 이유. 게다가 나보다 열심히 사는 애들도 많아 내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활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백수에 가까운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미시로의 기생충이 되기는 싫어 낮에는 트레이닝을 도와주고 시간이 나면 건물 근처에 있는 작업실에서 밤새 디자인 연습 하고 있다. 그래피티를 좋아하고 예술에 대한 관심도 꽤 있는 나인지라, 조금 힘든 이 삶이 꽤 재밌고 버틸만 하다. 그리고 가끔가다 상무님이니 프로듀서님이 직접 불러서 굿즈 제작 등을 문의하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쏠쏠한 성취감이 든다.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 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지금 내가 듣고 노래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옆 나라 한국에서 유명하다며 유진이라는 한국인 친구가 소개해준 노래다. 내가 한국어 공부를 한 건 아니라 가사는 잘 모른다. 자유로운 나비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노래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좋아서 노동요로 가끔씩 듣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일이 있어 유진이를 만나게 되었으니, 기분이기도 해서 한 번 틀어봤다. 근데 일본 밖을 나간 적 없는 내가 어떻게 유진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냐고? 사정을 말하자면 이렇다.

346이 한동안 해외 활동을 의욕적으로 계획한 시기가 있었다. 6년 전, 아이돌 산업이 한창 부흥하고 있던 한국에 지부를 두고, 한국인 친구 셋을 영입하여 일본에서 활동할 아이돌을 만들려는 계획도 그 중 하나. 해나, 주니, 유진, 이렇게 셋은 346 멤버 전원에게 소개받고, 1년 내 음악방송 데뷔를 목표로 열심히 연습했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결국 이 유닛은 해체되었다. 소위 혐한이라고 말하는 문제도 문제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차적인 문제다. 다만, 셋 다 개성이 뚜렷하지 않고 양국 모두 아이돌이 포화 상태여서 앞으로의 전망이 어둡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그들은, 꽃을 틔우지도 못하고 아이돌 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X년 4월, 현재 그 3인조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해나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 학원을 다니고 있고, 주니는 제니로 개명해서 미국에서 단역 배우를 전전하다 현재는 넷플릭스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유진이는 여기 미시로에 남았다. 아이돌 활동을 5년 동안 하지 않고, 346 소속 스태프가 된다는 조건으로.

처음에는 미오처럼 알바 하면서 버티겠다고 떼를 써 보기도 했었다만, 3개월 해보고 녹록치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알바로는 월세 내기도 벅찬데다, 아이돌 활동도 들어오지 않아 돈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지친 상태가 되었다. 갈수록 활발했던 유진이는 사라지고, 다크서클에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 나왔다. '내가 왜 아이돌을 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자책하고, 허무해하며 밤을 지새우다 결국 타케우치 P와 3시간 동안이나 상담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밤, 다 꺼진 사무실에서 잔업하던 미오와 나에게 다가와 346을 나가야 할 것 같다고 하며 서럽게 울었다. 쉬운 일 아닌데 잘 버텼다며, 등을 토닥여주는 미오와 울먹이며 어떻게든 346에서 활동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유진이를 보면서 괜히 가슴이 아팠다. 

"같이 빛나고 싶었는데..."

아이돌로 빛이 나는 건 쉽지 않은 일. 체질이 맞지 않기도 하고, 지치고, 우울해지기 쉽다는 걸 미시로의 연습생들은 잘 알고 있다. 또, 나와 미오처럼 행사에 자주 불려나가지 못하는 아이돌들은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가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과 좌절을 느끼는 날이 많다. 15개월 동안 일감 없이 연습만 했던 유진이는 어련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유진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머릿속으로, 팟, 하고 전구가 켜지게 되었다. 그거라면 유진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얘, 유진아. 너는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니, 아니면 미시로에 남고 싶은 거니?"

한참을 울먹이던 유진이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미오 역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면 다른 소속사를 찾아가면 돼. 거기도 물론 쉽지 않고, 지금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할 수 있어. 여긴 한국처럼 한 소속사에서 6-7년이나 투자해주지 않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지도 몰라. 나나 선배나 하트 선배처럼 20대 중반까지 버티다 늦깎이 데뷔를 하는 것도 각오해야 해, 그 정도 각오가, 아직 너의 마음에 남았니?"

유진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나도 일감 없이 5년 동안 연습하면서 막막한 기분에 밤새 울었거든. 미오도 한동안 그랬고. 하지만 나는 미시로라는 환경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남기로 결정했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열심히 지원해주고, 200명 가까운 친구들, 선배들과 함께 버틸 수 있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듣고 미오가 얼굴이 살짝 굳더니 유진이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키 언니, 설마 유진이가 아이돌 연습생을 계속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야? 걔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는데, 억지로 어르고 달래다가 탈진하면 나처럼 사고 치고 방황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 때 내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는 알고 있지? 그냥 차라리 그만두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아?"

"그런 거는 아니지, 아까 아이돌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럼?"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유진이까지 들리도록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다만, 유진이가 아이돌 활동보다 미시로에서의 생활을 하고 싶다면, 나처럼 스태프나 트레이너로 생활하는 걸 권유해 볼 생각이야. 거기서 경력을 쌓다가 다시 아이돌이나 아티스트의 삶을 도전해보는 게 유진이에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에?!" 둘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생각한 계획을 마저 털어놓았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유진이와 미시로와의 3개월 계약은 내일 자정에 끝나. 그러니, 유진이를 내일까지 상무님에게 데려가면 돼. 마침 촬영/영상 기획 스태프 보조를 모집해야 한다는 상무님 말을 며칠 전에 들었어. 초보여도 괜찮으니까 그냥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시던데, 그렇다면 유진이가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

"그렇다면, 명분은? 사키 언니가 그 상무를 설득해야 하는데?"

"내가 타케우치 프로듀서님을 설득하면 돼. 그간 상무님이 프로듀서님의 제안을 거절한 적은 없었거든. 게다가 상무님 입장에서는 수익이 나지 않는 연습생을 인력으로 전환할 수 있으니 손해 볼 이유도 없어."

유진이는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유진이 입장에서도 비자 연장도 되고, 확실한 수입원도 생기니 나쁘지 않은 제안일지도 몰라. 스케쥴만 맞으면 고등학교 생활도 계속할 수 있지. 아니면 검정고시라도 칠 수 있고."

나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유진이에게 강요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너가 결정할 일이야. 미시로가 좋아도 학업이 더 중요하면 당연히 고등학교에 집중하는 게 맞아. 학업이 아니더라도, 미시로가 너의 전부가 되는 것 보단 너가 너답게 사는 게 더 좋지. 아이돌이자 예술가 지망생인 내 입장에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미시로에 남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스태프로라도 남고 싶으면 이 제안도 한 번 생각해보고, 도전하기로 가닥이 잡히면 내일 오전 열 시까지 나나 타케우치 프로듀서님에게 문자를 보내줘, 알겠지?"

유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생각해볼게요, 사키 언니."

소속사 근처에 있는 숙소로 걔를 바래다 준 뒤, 미오랑 둘이서 사무실 불을 끄고 나가는 길이었다. 잠시 로손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사던 중, 미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언니,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촬영 스태프님들도 매일마다 힘들게 일하시는데, 거의 노베이스인 유진이가 버틸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어. 언니도 트레이너 일 병행하면서 많이 힘들어했잖아."

잠시 망설였다. 스태프가 되었다고 유진이가 원래대로 밝아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럴 지도 모르겠지. 난 유진이가 미시로에서 웃던 모습이 계속 밟히더라. 그리고 미시로에서 생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대견하게 힘든 연습을 버티고 수다 떨던 것도."

".."

"유진이는 지금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어. 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웬만한 아이돌들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이기도 해. 만일 유진이가 스태프 활동 하면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면, 그리하여 그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면, 다시 웃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나 역시 트레이닝 일 하면서 여러 음악들, 여러 춤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 때 받은 에너지로 한동안 손을 놨던 디자인 연구도 다시 시작했잖아?"

"... 하긴 언니도 그랬고, 나도 그랬어. 나도 방황하고 돌아오면서 이미지 깎이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돌이라는 게 뭔지 많이 생각해봤거든. 차분하게 미시로에서의 나를 돌아보면서, 그 때 내린 결론이 있어. 아이돌은 단순히 무대에서만 빛나는 게 아니라는 것. 그 동안 내가 걸어왔던 길, 무대에 오르기까지 준비했던 모든 발자국 하나하나 다 빛나는 순간이고, 그걸 나누면서 아이돌이 되는 거란 거지. 유진이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치?"

"그래도 뭐.. 이제 공은 유진이에게 있으니, 내일까지 지켜보게."

그렇게 우리 둘은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전화로 타케P님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프로듀서도 힘들어하는 유진이를 위해서라면 그 길도 나름 좋은 방법이라고 하며,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10년 같은 하루가 지나고, 출근 준비하던 8시 반에 유진이에게서 스태프에 합격했다는 문자가 왔다. 프로듀서에게도 이야기해봤고, 프로듀서가 상무께 말씀드리면서 미시로에 남게 되었다. 346 건물에 도착하고 나니 유진이는 프로듀서와 함께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이후, 유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10시까지 촬영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나의 작업실에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둘은 끊임 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개성을 꽃피울 수 있을까, 유진이만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그렇게 같이 고민한 끝에, 그 아이가 선택한 곳은 영상과 컨텐츠 제작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개성인데다, 굳이 아이돌이 되지 않아도 꿈을 펼칠 수 있는 직업. 그렇게 유진이의 장래희망이 정해졌다. 그 다음 날부터 유진이는 틈 날 때마다 영화와 카메라를 돌려보기 시작하더니, 아이디어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좋은 스토리나 아이디어가 잡히면 그걸 구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시나리오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시나 그림이 되었든 간에. 그리고 나를 비롯해 마키노 언니, 후미카 언니, 아스카, 히나, 유메 등과 자주 만나며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수정받고, 퇴고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 노트를 고치고 또 고쳤다. 그렇게 완성한 노트가 25권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언더 더 데스크의 촬영을 도와주고 쉬는 시간에, 유진이가 마유랑 쇼코을 주연으로 하는 저승세계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5분 정도 아이디어를 들려주었다. 평소에 내놓았던 아이디어들보다 세계관이 깊고 탄탄해서 많이 놀랐다. 단지 공상으로 멈추면 아까운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어, 이걸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 나랑, 언더 더 데스크, 유진 이렇게 다섯이 작업실에서 밤새 시나리오를 짰고, 완성본을 상무에게 직접 전달한 뒤 오늘 결과를 받으러 쇼코랑 유진이 둘이 사무실에 갔다. 아마 지금쯤이면 작업실로 들어올 것이리라.

"사키 선배!"

그리고 지금, 유진이와 쇼코가 내 작업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둘 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2초 정도 멍하게 있었던 나를 유진이가 꽉 껴안았다.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다 잘 된 것 같아... 후히힛"

"저희가 만든 콘티로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나는 떨리는 유진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같이 밤을 새던 날들이 떠올랐다. 정말 열심히 버티던 모습이, 스태프에게 혼 나면서 카메라 조작법을 배우고, 영화 콘티를 읽어내려가며 밤을 새우던 날이 떠올랐다. 5년 동안 고치 안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아이가 오늘 드디어 벚꽃에 앉은 나비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람으로써, 새삼스레 자랑스러웠다.

"수고했어.."

유진이의 어깨 너머로 푸른 4월의 하늘이 보인다. 햇살에 빛나는 먼지가 꼭 유진이의 등에 돋아난 날개 같았다. 


----+) 오타 수정했습니다. (2020-03-20 21:2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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