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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4, 2020 02:18에 작성됨.

"시키, 이건 뭐야?"

건방진 니노미야 아스카. 4살 어리면서 꼬박꼬박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건방질 뿐, 딱히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건 아니다. 이름으로 불리고 또 부르는 것은 일상적이다. 아스카가 시키를 이름으로 부르게 된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므로. 아니, 그렇게 느껴진 것 뿐일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시간과 공간은 어차피 지극히 주관적인 지식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일기장이야. 유학 갔을 때 쓰던."

"네가 일기를 썼다고?"

또또또. 시키는 왜 평소에 무난히 넘어가던 것들이 갑자기 신경이 쓰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시키'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너'라고 칭해지는 것이 더 무례할지도 모른다. 일본에 다시 와서 살게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문화에 적응이 되어버린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온 몸은 사실 원래부터 일본에서 난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시키는 눈에 힘을 주어 아스카를 흘겨봤다. 그러나 시키는 자신의 피조물에 주목을 빼앗겨버렸다. 아스카의 집중은 온통 그 손 안의 일기장에밖에 없었다.

"아스카,"

"......'서머 타임'?"

"그러게, 그거 여름에 쓰던거였나. 아무튼 아스카쨩. 나 봐."

"3월은 여름이 아니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해?"

늘어지는 장난기가 빠진 말투에 아스카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눈은 시키를 향했어도 손은 일기장을 놓지 않았다. 

"얼른 짐 싸는거나 돕지그래. 도와주러 왔다면서, 거짓말쟁이."

"............."

"그거 놔. 얼른 놔."

결국 시키가 끝내 본심을 말하고 나서야 아스카는 일기장을 놓았다. 

같은 상자에 있던 다른 물건들과 달리 일기장에는 먼지가 한톨도 쌓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다른 물건들과 부딪혀서 조금 떨어진 거라면 모를까, 적어도 건드리지 않아 오래된 물건에 쌓이는 그런 먼지는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해가 일찍 지는군."

"그러게, 서둘러야겠네. 얼른 거기 있는 물건들 좀 넣어."

"시간을 한시간 앞당길 수만 있다면 조금 더 햇살을 즐길 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시키, 너도 아침의 냄새를 좋아하니까."

시키의 방은 창문이 넓은 편이었다. 기숙사의 좁은 방들과 면적은 비슷하지만, 창문만은 달랐다. 게다가 한켠에는 발코니가 있다. 종종 까마귀가 난간에 쉬었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도 하는 귀찮은 부속공간이지만, 아스카가 보기에 시키는 그 공간을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결코 나갈 때 발이 먼저 닿지도 않을 자리에, 밖에서 키울 애완동물도 없는 그 곳에 폭신한 러그를 두었으니. 건조대에 늘 담요가 걸려 있는 것도 아마 그 공간을 즐기기 위함일 것이다, 라고 아스카는 추측했다.

하늘은 석양이 지기 일보 직전이다. 석양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이라, 하늘이 보라색, 분홍색, 노란색이 섞인 묘한 색을 만들어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키는 보스턴백에 인형과 귀고리 상자 같은 잡동사니를 채워넣다가 지는 하늘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려 냉소를 지었다.

"댕댕. 틀렸어. 시키쨩은 밤을 더 좋아하니까."

"무언가를 더 좋아한다고 다른 하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건 아냐."

"그래, 아스카쨩이 시키쨩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그 일기장을 싫어하는건 아니지. 번거롭게 말이야. 그거 왜 다시 들고 있는거야? 응?"

어느새 아스카의 손에는 그 일기장이 다시 들려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펼쳐 보려고 한 것이 아니다.아스카는 시키의 변화를 조금 더 미세하게 관찰하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침묵을 고수했다.

"내려 놓으라고 했잖아."

"이거, 꽤 자주... 쓰는 것 같아서. 어디에 넣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보려는 것이 아니었어."

"괜찮아, 그거 전혀 안 써. 쓰레기봉투 쪽으로 분류해도 돼."

".....그런가."

"그래. 이제 안 필요할거야."

한동안 방에는 다시 침묵이 드리웠다. 그새 하늘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해는 하얗게 불타오르며 그늘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모두 어둠으로부터 도려내고 있었다. 지나치게 밝은 빛에 시키도 아스카도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가늘게 펼쳐진 시야조차 밝았다. 

"선글라스를 미리 넣지 않는거였는데."

시키는 그렇게 평소같은 단순한 푸념을 읊조렸을 뿐이었는데, 그리고 아주 잠깐의, 순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꽤나 놀라운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 아스카쨩 방금...."

".....방금 뭐?"

건방진 니노미야 아스카가,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흐'와 '허'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헛웃음? 어쩌면 입도 둥글게 말려있었을까. 아니, 확실히 말려있었을 것이다. 그거야 방금 되물었던 입술의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대화를 할 때 자연스럽게 웃는 그런 모양이다. 줄곧 봐왔으니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이를테면 프로듀서와 대화할 때도, 시키가 대화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도 지을 수 있는 표정. 그러나 시키와 있을 때에도 곧잘 짓는 표정. 작은 입에, 안면근육을 그렇게 쓰지도 않지만 시키는 안다.

문득 시키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이 따가운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지만 다시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라본 아스카는, 여전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에도,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를 한심하게 볼거야.'

"시키."

다시 이름을 불렸다. 아, 이상하게 평온했다.

"....왜?"

"네가,"

이렇게 부른다고 해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빛이 흐려져간다. 

곧 있으면 아스카의 형상도 흐려지고, 어두워질 것이다. 

그러면 아스카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켜야할 것이고, 불을 켠다면 이 곳에 남아야 할 것이다. 불을 켠 후, 다시 불을 꺼야할 때가 있다면 잠을 자기 위해서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키는 대답을 서둘러야했다.

대답이 있는 말이던가?

시키는 아스카의 말을 복기했다.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서 아까 전에 했던 말들까지도.

"역시 도와준다는 건 거짓말이었네."

"그걸 믿은 네 잘못이지."

"....뭐야, 나의 아스카쨩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당신 누구지? 조직의 스파이?"

"너, 조직의 일원인 적도 없었잖아."

"그걸 알다니.. 역시 진짜 아스카쨩인가."

"가짜일리가 없지 않은가."

"응......"

잡다하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실랑이하는동안, 해는 이미 져 있었다.

"있지, 그 일기장 좀 꺼내줄래."

"쓰레기가 묻었을지도 모르는데."

"더러워서 못하겠다는거야?"

"...그건 아니지만."

아스카는 순순히 맨손으로 일기장을 꺼냈다. 다행히 종이 쓰레기와 함께 있어 때가 타거나 훼손된 부분은 없었다.

시키는 일기장이 사라진 쓰레기봉투를 꽁꽁 묶어 들고, 오후 내내 바닥에 붙어있던 다리를 일으켰다.

"역시 저건 당분간 필요할 것 같아."

"왜?"

"왜냐고 묻는건 왜? 버리고 싶다면 아스카쨩이 떠나줄래?"

".........."

"냐하하~ 그럼 쓰레기 버리러 다녀올게. 모르는 사람이 와도 문 열어주면 안 돼. 엄마 없다고 하고 돌려보내, 알았지?"

"내가 어린 앤줄 알...!"

"어린 애 맞으면서."

쾅.

아스카가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이미 문은 닫힌 문이었....

"아참."

는데, 벌컥 열린 문이 되었다....

"저 발코니에 러그, 달이 잘 보이는 자리니까 일단 가서 앉아있어. 금방 올테니까, 쌀쌀하면 거기 있는 담요 덮고."

"야...."

"바이바이~"

가 다시 닫힌 문이 되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스카는 벌렁 드러누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손에 들린 일기장을 보고, 혹여 먼지같은게 묻었을까 바닥에 툭툭 털었다가 옆에 있는 상자를 끌어다 다시 넣었다. 누운 쪽의 머리는 창문 쪽이었기에 발코니를 슬쩍 볼 수 있었다. 시키의 말대로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달이 잘 보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좀 누워있고 싶어.


아스카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거짓말을 조금 했다.

그러니까, 다가올 여름의 시간은 한 시간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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