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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엽편> 팬레터, 카페 프렌드십, 어른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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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3, 2020 23:02에 작성됨.

1.팬레터

살면서 나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한 적은 꽤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의 없다는 소리도 숱하게 들어왔다. 그래도 난 나름 인간관계에서 줄타기에 능한 인간이라 자부했는데, 언제 한 번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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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덕션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문제의 발단이 된 팬레터를 받았다. 그런데 팬레터 치고는 내용 자체가 암울했다. 반짝일 수 없게 태어난 자신은, 동경하는 것 말고 뭔가 별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는 식이었다. 참 자존감이 낮은 팬이었다. 짜증이 돋았다. 난 적당히 답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반짝임만 봐도 모자랄 판에 거기서 등을 돌려 자신의 그림자만 보는 꼴이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걸 무시하고 돌아보기 위해 악을 써야 하는 것이다...참, 이런 식의 팬레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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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프로듀서가 내게 입을 열었다.

"팬 한 명 죽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내가 쓴 답문을 꺼낸 뒤 쥐고 마구 흔들었다. 보자마자 발밑이 꺼지는 듯했다.

"미키. 너 방금 속으로 무슨 생각 들었어? 혹시 내 탓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거야?"

도저히 변명할 수 없었다.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해. 이거, 유키호가 예전에 쓴 거야."
"뭐?"
"죽은 사람 없어."

아주 멀쩡하게 활동하는 아이돌이 왜 왕년에 이런 글을 썼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래 전 댄스 레슨 때 몸이 말을 안 듣는다길래, 내게 문자로 불평한 거야."
"프로듀서, 사람 놀리지 마!"
"유키호는 지금 이 답장 봤으면 좋다고 할 거야. 다만 사람은 이미 죽었어."
"아니, 죽은 사람 없다며?"

화내고 있던 나와 달리, 프로듀서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팬레터였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 얼굴도, 정신 상태도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 이런 반말로 써?"

이 말을 듣고도 빠져나갈 궁리부터 머리에 입력한 내 자신에게 더는 합리화의 손길을 건넬 수 없었다. 점점 외로움을 찾고 싶었다. 어쨌거나 옆에는 프로듀서가 지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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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페 프렌드십

밖에 나갈 일이 많은 여름엔 종종 카페를 들른다. 오늘도, 친구인 코사카 우미와 함께 듀오 댄스 레슨을 받고 근처 카페에 왔다. 날씨가 영상 35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우오! 플랫치노 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메뉴판을 보자마자 우미는 뭔가 끌어안듯 양팔을 모은 뒤 흔들고 있었다. 아주 의욕이 넘칠 때 나오는 포즈다.

"나오면 천천히 먹자. 얼음 갈아 만든 거니까."

아이스커피 하나와 딸기 플랫치노 하나에, 조각 초코 케이크를 시켰다.

"엥, 메구미가 사 주는 거야?"

지난 번 백반집에서 우미가 샀으니, 이번엔 당연히 내가 사야 했다. 하지만 카드를 든 우미는, 한쪽 입꼬리를 어색하게 꿈틀거렸다. 그걸 가방 한켠에 도로 꽂는 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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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다그쳤다.

"그렇게 살다간 네 손에 남는 거 없어."
"에이, 나도 알고 있어. 그냥 고마운 게 많으면 더 주는 거지, 뭐."

이 친구는 하도 활발하고 순수해서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멍청한 건 아니었다. 2인조 활동을 할 때마다 날 리더로 생각하고 대접하려는 것 같았다. 난 그게 불편했다.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우미, 사 주는 건 이제 그만해도 돼."
"그래도 네게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가래떡을 쉬지 않고 먹는 듯한 답답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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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는 플랫치노가 나오자마자 그냥 뱃속으로 털어 보내버렸다.

"춥지도 않나?"
"전혀."

그 순간 우미가 가볍게 기침했다. 그게 멎을 줄 알았는데, 점점 들썩거리더니 딸꾹질로 변해갔다.

"추운 것 맞잖아!"
"아냐. 잠시 바깥 공기 쐬고 올게."

그렇게 밖으로 나간 우미는 머지않아 무엇인가 들고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레슨실에 있었던 내 담요였다.

"둘러. 춥겠다."
"이걸 왜 갖고 와?"
"나보단 네가 더 추워 보여서. 빨리 다녀왔지!"

뛰어 온 우미의 얼굴은 더위를 먹어서 발그레 달아올랐다. 마냥 웃고 있었다. 아주 해맑게.

"우미, 여기서 나가면 돼."
"그래도 그게 말야. 서툴긴 하지만, 나도 표현하고 싶었어. 메구미가 내게 의지해도 된다는 걸..."

의지해도 된다라. 가슴 어디선가 뭉클함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가져온 담요를 덮었다. 햇살의 온기와 우미의 체온이 아직 남아서 내게 들어왔다.

밖으로 나간 뒤의 내 마음에선, 불편함의 흔적은 아주 사라지고 없었다. 카페의 추위도, 여름의 더위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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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른 노릇

후카가 의무실에서 찹쌀떡을 먹고 있었다. 그건 어제 카메라맨이, 장염 빨리 낫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녀에게 준 답례였다. 사실 전직 간호사였던 후카에겐, 수액 놓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고로 텅텅 비어있는 의무실에 가끔씩 가서 일하는 것 또한 익숙했다.

다만 오늘 온 환자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감기 달고 있던 상태에서 술을 꽤 들이킨 아이돌 동료 코노미였다. 취해서 거동을 제대로 못하는 데다가 마구 움직이는 바람에 완력을 써야 했다. 그렇지만 후카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코노미를 제압하자니, 참 껄끄러웠다.

코노미의 귀에 체온계를 잠시 대고 본 후카는 깊은 한숨을 지었다. 40도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소염제나 해열제는 술 때문에 모두 막혔다. 감기 잡자고 간을 박살낼 수 없었다. 겉옷을 벗기고 수액 놓는 방법이, 후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코노미는 겉옷을 벗길 때도 발버둥치더니, 주사 놓으려고 하니까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싫어!"
"언니, 애 맞네요."

나이를 스물 넷이나 먹었는데도 외모가 어린애처럼 생겨서 놀림 받는 코노미의 평소 콤플렉스를 건드린 작전이었다. 후카는 코노미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바로 단숨에 제압하고, 주사바늘을 그녀의 왼팔에 꽂아넣었다.

"끄아!"
"그러게, 왜 술 먹었어요?"

후카는 선풍기를 콘센트에 꽂았다. 그리고 누워 있는 코노미 쪽에 놓았다.

"몸에다가 떼 써봤자 좋을 거 없어요."
"알아! 안다고…"

꺼이꺼이 울고 있는 코노미의 모습을 보니, 후카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본디 다른 환자를 대할 때면 그냥 힘들다고 할 상황이었다. 허나 지금 후카는 살갖 어딘가 약하게 불쑥 튀어나온 상처를 주먹으로 세게 꾹 누르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뭐 때문에 살기 힘드나요?"
"별 건 아냐. 요즘은 초등학생이 나보다 우월한 것 같아서 말이지. 살 날도 나보다 더 많은데."

물수건을 짜는 후카의 손에 압력이 약간 더해갔다.

"언니는 어엿한 성인 아이돌이잖아요."
"아깐 애 맞다고 했으면서!"
"그렇다고 이렇게 술 먹는 건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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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는 코노미의 이마를 수건으로 문질러주면서 사건의 발단을 들었다.

그것은 지나가던 12세의 남자 초등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추운 날씨에 걷고 있는 자신을 보고 한 아주머니가 인사했는데, 옆의 걷고 있던 키 큰 초등학생 아들이 또래인 줄 알고 꼰대처럼 말했다고 했다. 어른 되려면 우유만 먹고서는 안 된다고.

거기서 많은 번뇌가 들었다고 했다. 나이를 반토막 밖에 안 먹은 인간에게서 왜 꼰대 짓을 받아야 했는가, 그리고 왜 그것에 상처받아야 했는가. 아주머니의 거듭된 사과에 흐지부지됐는데, 지나간 다음에 든 생각이 이거라고 한다. 거기 초등학생 너, 술도 안 먹어본 주제에…

"그래서 얼마 마셨어요?"
"몰라."
"…"

후카가 수액을 한 번 더 갈았다. 의무실에 온지 3시간이 지난 지금, 코노미의 체온은 38.2도까지 확 내려갔고 어느새 취기도 가라앉았다. 창문 너머를 잠시 응시하던 코노미가 말했다.

"어른 노릇을 드러내면 어른이 아닌 거야. 난 스스로 어른이라고 많이 광고하고 다니잖아. 이제 좀 알 것 같아. 내가 왜 애 같다는 소리를 듣는지. 그냥 묵묵히 할 일 하면 다 되는 건데."

돌변한 코노미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자신감이 뚝 떨어진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다 좋은 건가, 혹시 애라고 안 좋은 건가. 그러나 이것 또한 코노미에게 상처가 될까봐 잠자코 수건을 손으로 비볐다.

"넌 참 어른답네."

왠지 감사하다는 말도, 후카는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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