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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와 벚꽃을 향해서(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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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3, 2020 02:39에 작성됨.

호랑나비와 벚꽃을 향해서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왕벚나무 밑에 홀로 앉아서 벚꽃 구경을 하는데, 한 마리 호랑나비가 날아들더니 벚꽃 뭉치에 살며시 앉아 꿀을 빠는 꿈이었어요. 저는 그 호랑나비를 손을 뻗어 잡아보려고 했습니다.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을 깜빡였더니 이 다음 보였던 것은 제 침실의 천장이었습니다. 저는 힘없이 팔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꿈이어서 아침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이후에도 내용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가 다시 한 번 더 호랑나비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기 때문일까요.

  -비록 아직 어렸을 때라고는 하지만- 이미 한 차례 저를 지나치고 간 나비 때문에 눈물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다시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마음을 품게 된 대상은 저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이 저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저는 이 이상 마음을 가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대하는 그분을 볼 때마다 아직 제가 풋풋했을 시절에 짝사랑했던 호랑나비 같은 그 아이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학생이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이 저를 사랑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제 이름대로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와 같은 존재였어요. 늘 인기가 많았고, 친구도 많았고, 심지어 러브레터도 많이 받아봤어요.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저에게 오는 러브레터보다는, 제가 호랑나비를 위해 썼던 러브레터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 호랑나비 같은 친구는 고만고만한 외모라 남들 눈에는 잘 띄지 않았지만, 늘 자기 일에 성실하고 친절한, 그리고 많이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아서 점점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친구에게 가지는 관심과는 반대로, 그 친구는 제게 다른 사람과 확실히 비교가 될 만큼 제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제가 그 친구에게 저를 위한 러브레터를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 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해봤어요. 안 써보던 러브레터를 써서 그의 신발장에 넣어두기도 하고,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갖고 온 후 그를 붙잡아서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럽지만- 가슴골을 보이면서 그의 시선을 끌어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팔짱을 제멋대로 끼면서까지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다 소용이 없었어요. 제가 저런 짓을 다 해봤지만, 그는 저에게도 다른 친구에게 늘 보였던 반응을 보일 뿐 저에게만 특별하게 이 이상을 해 주지는 않았죠. 아. 정정하겠습니다. 딱 한번 제게 특별한 일을 해 줬으니까요. 진짜로 안 좋은 의미로.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납니다. 제 성격을 바꿔버린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벚꽃 철이 끝나갈 무렵, 그동안 저를 먼저 부르는 일이 없던 그 친구가 웬일로 저를 먼저 불렀습니다. 저녁에 학교 뒤편 언덕에 있는 큰 벚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마음속이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었죠. 드디어 내 마음이 그 친구에게 닿았나 보다 하고요. 그러나 그것은 제 착각이었을 뿐이었죠.

  저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벚나무에 다다랐었어요. 그 친구는 벚나무 아래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 후우. 불러줘서 고마워..!’

  ‘아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이 자리에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응. 무슨 얘긴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새로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해서. 너한테 물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 친구의 말을 들을수록 미소를 짓던 제 표정이 굳어진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이 끝나자, 어느 새 제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죠. 그의 말에 제 심경이 순식간에 바뀌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온갖 원망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겨우.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나를 부른 거였어...? 그럼 왜 굳이 여기서 그 말을 꺼낸 건데?!’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았어.’

  ‘그럼, 그동안 내가 해 줬던 것들은 왜 다 받은 건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좋은 게 아니었다면, 진작 부담된다고 말했으면 되었잖아!!’


  찰싹.

  저는 억울한 마음에 소리치며 그의 뺨을 찰싹 때리고는 그 자리를 뛰쳐나가며 뒤돌아보지 않았어요. 그 친구에게 가졌던 좋은 감정이 뿌리째 뽑혀나가고, 그 자리에 원망이 심어졌습니다. 나쁜 자식이 따로 없었어요. 내가 해준 호의는 곧이곧대로 다 받아먹으면서,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어디 있냐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침대로 파고든 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습니다. 울음을 터트릴 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아. 다는 내가 다른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면 안 되겠구나. 벚꽃 대신 절벽에 핀 꽃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음악교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돌을 돌보아주면서, 일부러 다른 남자들이 대시를 할 만한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리광부리고 싶은 모습, 귀여운 모습을 애써 숨기면서, 어른스럽게, 그러면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게 또 다른 호랑나비를 만나고 나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바로 흔들린 것은 아니었어요. 그분이 군악대에서 노래를 하는 저를 아이돌로 스카우트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의 그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아이돌 활동에 임했으니까요.

  처음 그분의 아이돌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이제 나도 충분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온실 속 화초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 나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용기를 주신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예전에 가졌던 그 마음이 또다시 고개를 치켜 들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전에 짝사랑했던 그 친구와 비슷하게 다정하고, 성실하고, 친절하지만. 그 태도가 저에게 직접 향하는 만큼 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차원이 달랐습니다. 동시에 마음 한쪽이 아려오는 것도 전보다 배 이상이었죠.

  그 근간은 또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을 가져야 할지 말지 지금도 엄청 갈등하고 있어요. 그분은 저와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저를 성심성의껏 챙겨주시는데, 저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같은 태도로 대하다 보니 기대를 하다가도, 안 될 것 같다는 체념에 빠지고 맙니다. 

  그분이 저를 대하는 것이 오직 저를 위한 특별한 것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래야 덜 헷갈릴 텐데. 아니.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직접 듣지 않는 이상 그분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피차일반이겠죠. 그렇게 저는 오늘 하루도 무거운 마음을 달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

  그분을 주로 보는 곳은 바로 이 극장에서입니다. 제가 먼저 도착해서 그분을 반길 때도 있고, 반대로 그분이 먼저 극장에 도착해서 저를 반길 때도 있죠. 오늘은 그분이 저를 반겨주셨어요. 그분의 다정한 미소를 볼 때마다 매우 설레지만, 애써 미소로 화답하고서 마음을 감췄습니다.

  드레스 업 룸에 가서 오늘 스케줄을 위한 의상을 매만지면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안 되겠지. 안 될 거야. 이래선 안 돼. 괜한 기대는 접어 두자. 

  그렇지만, 사랑받고 싶어. 그분의 마음에 들고 싶어. 그래선 안 되는 거야?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가끔은 무리해서라도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늘 저를 미소지으며 대할 때마다 겁이 나고 말문이 막힙니다. 오늘은 제가 첫 단독 무대에 섰을 때 입었던 의상을 다시 입게 되었습니다. 정기 공연이 있는 날이니까요. 옷감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그분이 들어오셨어요.

  “카오리 씨. 준비는 잘 돼가요?”

  “네?! 아. 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그분을 마주봤어요. 머릿속으로 생각이 마구 오갑니다. 지금 단 둘 뿐인데, 고백을 할까 말까. 일단은 그분을 불러 봤습니다.

  “저. 프로듀서 씨..!”

  “네. 무슨 일인가요..?”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좋아해요.’라는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아요. 결국 제가 그분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딴판인 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조. 조. 좋은 하루 되세요..!”

  “카오리 씨도 오늘 라이브 파이팅이에요.”

  그분은 제게 미소를 남기고 드레스 룸을 나왔습니다. 그분이 나가고 난 후 저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 탓인지, 아니면 전달하지 못한 마음에 대한 상심 때문인지 거울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을 손으로 감싸니 손바닥이 살짝 촉촉해졌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울면 안 돼요. 기껏 아침에 하고 온 화장이 지워질 테니까.

  저는 눈물을 뒤로 하고 화장대에 앉아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한 곡 들었습니다. 최근에 이 곡이 유난히 귀에 잘 들리네요. 포르노그라피티의 노래인 호랑나비. 멜로디는 정말로 흥겨운 반면 가사가 꽤나 애달픈 노래죠. 마치 지금의 제 모습 같아서 끌리는 것 같습니다.


  ♬그대를 만난 것만으로도 좋았어

  세상에 빛이 넘쳤지

  꿈속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사랑받고 싶다고 바라고 말았어

  세계가 표정을 바꿨지

  세상의 끝에서 하늘과 바다가 섞이네

  

  오늘 하루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였습니다. 아니, 정신이 온통 한 가지에 쏠렸던 하루라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이겠네요. 스케줄을 모두 마무리하고 퇴근을 할 즈음엔 그분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서 극장 문을 나와 계단 앞에서 우두커니 섰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에 잔뜩 취하고 싶었어요. 술에 취하면 적어도 오늘 하루는 이 가슴이 쓰린 것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요.

  코노미 언니와 리오에게 전화를 건 후 단골집 이자카야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퍼 마셨어요. 술이 달 때까지. 내가 아닐 때까지. 술 한 잔에 울고, 술 한 잔에 웃고, 술 한 잔에 그분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어느 새 집에 와 있었습니다. 시간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필름이 끊어져서 제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코노미 언니랑 리오가 택시를 잡아준 것인지, 아니면 억지를 부려서 무의식적으로 돌아간 건지. 핸드폰은 배터리가 간당간당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고 화면을 켜 보니 그분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어요. 오늘 저녁에 못 봐서 아쉽다고.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하는, 늘 제게 성심성의껏 보내는 인사. 

  술이 깨니까 머리가 무지 아팠습니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잠들기 힘들 것 같아요.

아아.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프로듀서 씨.


=====


  사시사철 피는 벚꽃을 처음 본 건 작년 가을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아이돌 및 여자들 중에서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특별함을 마주했다. 그 때 현지 촬영 스케줄 상 음악대의 공연 장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음악대 옆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비유를 들어도 설명하기 힘든 그녀의 노랫소리는 그녀를 놓친다면 프로듀서로서, 아니, 한 사람으로써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란 직업은 정말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누구보다 사람을 많이 대면하고 자신의 소신을 상대에게 전달하여 설득시켜야 하니까. 이것은 신인 아이돌을 발굴하기 위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프로듀서가 되기 전에는 여자에게 말을 잘 못 붙이는, 이른바 숙맥인 사람이었다. 이런 나 자신을 바꾸어 보고자 큰마음을 먹고 이 프로덕션에 입사 지원서를 내고, 운이 따라온 덕에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달게 되었다. 사무소 내의 사람들에게 늘 성실하고 일처리를 꼼꼼하게 잘 한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 칭찬이 밑바탕이 되어 사람을 마주할 때의 자신감이 되었다.

  물론 두려울 때가 종종 있다. 거절당할 경우 자신감이 다소 꺾이니까. 그러나 자신감이 꺾일 각오를 하고서라도 물러서서는 안 될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바로 그녀를 스카우트하기로 마음먹고 그녀에게 통성명을 했을 때처럼. 그때는 두려움보다 더욱 강한 영감이 나를 자극했을 때였다.

  봄바람 부는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정말로 잘 한 일이었다. 원석을 찾아내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기분이다. 처음에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인상이 굉장히 우아해서였을까, 아니면 귀한 집의 따님 이어서였을까. 마치 절벽 위에 핀 한 송이 하얀 꽃 같았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를 아이돌로 스카우트 할 수 있었냐면, 그녀에게 다가가 아이돌이 되어 보지 않겠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가 보인 반응에 있었다. 그녀는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과연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당신이라면 분명 멋진 아이돌이 될 수 있다고. 함께 나아가서 더 많은 것을 보자고. 그렇게 그녀는 나의 담당 아이돌이 되었다.

  정작 지금 와서 내가 용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받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내가 봄을 타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꽤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매일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녀의 말 한마디, 목소리 하나하나,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무척 신경이 쓰인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우아하면서, 다정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지금의 일을 즐기고,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때로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그 모습에 반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가 나만을 위해서 피는 벚꽃이 되기를 봄이 되면서부터 바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그녀 앞에서 할 수가 없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이라는 표면적 관계는 둘째치고서라도, 내가 연애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 그동안 여자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고, 여자 마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프로덕션에 있는 아이돌들이야 나를 잘 따라주지만 아직은 다 나이가 어리고, 몇몇 어른 아이돌이 있긴 있지만 이들마저도 직장 동료로만 의식했지, 그동안 한 여자로써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를 하필 한 여자로 의식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내 마음을 어떻게 그녀에게 전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전에 괜히 마음을 드러냈다가 그녀가 나를 거절한다면? 그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자칫하다가는 아이돌로써의 그녀마저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든다. 만약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렇다고 내 불안한 마음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나는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다. 그녀를 책임지고 받쳐줘야 한다. 그러자면 흔들리면 안 된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근데, 내 마음을 언제까지 그녀 앞에서 의연하게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부를 때면 속으로 심장이 철렁거린다. 처음 그녀를 프로듀싱 할 때만 해도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익숙했는데, 이상하게도 요즘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녀가 오늘 스케줄 준비를 잘 하고 있을지가 신경이 쓰여서 드레스 룸에 들렸다.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갔더니 룸 안에는 그녀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오리 씨. 준비는 잘 돼가요?”

  “네?! 아. 네!”

  단 둘이라는 상황이 무척 신경이 쓰인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녀에게 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둘끼리 있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봄철이 되자 각자 바빠지고 말았으니까. 

  “저. 프로듀서 씨..!”

  “네.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먼저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조. 조. 좋은 하루 되세요..!”

  그녀의 대답은 늘 내게 해주던 아침 인사였다. 나도 늘 그녀에게 하는 말을 건넸다.

  “카오리 씨도 오늘 라이브 파이팅이에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 드레스 룸을 나왔다. 문에서 나온 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만 복도 한복판에서 주저앉았다. 이게 아니야. 역시 방금 전에 그녀에게 말을 해야 했어. 내가 먼저 용기를 더 내서 그녀에게 확실하게 말을 해야 했다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슴이 괴롭다. 아차.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으면 혹시 누가 볼라.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섰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가 내 데스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까 왠지 노래 하나가 듣고 싶어졌다. 바로 포르노그라피티의 노래인 호랑나비였다. 예전에도 멜로디가 좋아서 자주 들었는데, 지금 와서 가사를 생각해보니 완전히 내 이야기였다. 특히 이 구절. 


  ♬황야 저편에 피었던 호랑나비

  흔들리는 그 풍경 저편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던 오아시스

  차가운 물을 줘

  가능하다면 사랑해 줘

  나의 어깨에 날개를 쉬어 줘


  그녀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오아시스 같다. 

  데스크의 서랍장에다 고이 넣어 두었던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열었다. 상자 안에는 가느다란 라인에 벚꽃 장식이 예쁘게 세공된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다. 올해 초에 그녀에게 주기 위해 구매한 반지였다. 나는 이 반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평소에 술은 입에 잘 안대지만, 오늘만큼은 속이 무척 타서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바에 들리기로 했다. 맞다. 그녀에게 늘 보내는 문자도 잊으면 안 되지.

  아아.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카오리 씨.


=====


  ‘프로듀서 씨와 단 둘이 드레스 룸에서 마주한 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났습니다. 지금이 벚꽃이 흐드러질 철이 맞는 모양인지 어느덧 거리에는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어요. 그날 저녁 코노미 언니랑 리오랑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조금 기억이 나요. 리오는 이번에 프로덕션 안의 인원 전부가 다함께 꽃놀이를 가기로 했다고 말했고, 코노미 언니는 그때가 분명 제 마음을 프로듀서 씨에게 전달할 절호의 기회라고 저를 다독여줬어요.

  비록 막 이야기를 꺼낼 즈음엔 둘 다 무척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그 대상이 다름 아닌 프로듀서 씨라는 것에서 또 한 번. 두 사람은 처음은 저에게 우려를 표했지만, 제가 우는 모습을 못 이기고 결국 조언을 해 주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두 사람에게 고맙고, 한편으로는 창피합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잖아요. 

  코노미 언니는 제게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건 간에 결코 창피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 이 마음을 담아두기만 하고 전달하지 못하면 나중에 분명 그 마음이 후회로 남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어요.

  리오는 감춰 두면 상대방은 알 수가 없다고. 차라리 마음을 드러내고 부딪쳐 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마음고생이 덜 할 것이니 용기를 내라고 응원했습니다.

  두 사람의 격려가 제 마음을 굳히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했습니다. 꽃놀이를 가는 날에 다시 한 번, 어린 날의 그 때처럼 용기를 내서 프로듀서 씨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겠다고. 꽃놀이를 가는 그날 밤, 벚나무 아래에서 프로듀서 씨를 기다리고 그분을 마주보겠다고. 설령 그 결과가 호랑나비를 끝내 놓치고 마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술을 마신 그날 이후 며칠이 흘렀다.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 잎은 봄이 무르익어 감을 알리고 있었다. 단체 꽃놀이가 예정된 날까지는 온통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하루 하루가 정신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내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혼자 고민해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술을 마신 그 다음날 사무원인 코토리 씨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다.

  내가 카오리 씨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털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숨겨야 할지. 나는 어떻게 해야 좋냐고 물었다. 이에 코토리 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우리 프로덕션에서 연애 금지 조항은 없는데 왜 그리 끙끙 앓고 있냐고. 하물며 그건 사내연애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코토리 씨의 말에 표면적인 관계에 대한 것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동안 남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에 코토리 씨가 대답하기를, 그녀를 붙잡고 싶으면 지금 붙잡으라고. 마음을 담아두기만 하고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 말라고. 한번 부딪쳐보고, 그 이후에 나오는 결과에 따라 계속 마음을 이어 나갈지 정리할 것인지 그때 가서 결정하라고.

  나는 코토리 씨가 해준 조언대로 따르기로 했다. 결정했다. 꽃놀이를 가는 날에 카오리 씨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고, 그 때 내 마음을 반드시 전달하겠다고.’

*

  ‘마침내, 프로덕션 단체 벚꽃놀이 날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복장은 평상복으로 입고 가지만, 특별한 날이 될 만큼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썼습니다. 옷에 주름은 없는지, 장식은 잘 되었는지. 화장은 잘 먹었는지.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응원을 하고 집을 나와 시어터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프로덕션 단체 벚꽃놀이 날이 되었다. 오늘은 꼭 카오리 씨에게 고백하고 말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그 누구보다도 가장 일찍 시어터 극장에 도착했다. 이유는 한 가지. 서랍장에 고이 넣어둔 선물 상자를 챙기기 위함이었다. 선물 상자를 품에 고이 넣어두고, 시어터 극장에 속속 도착할 아이돌들을 기다렸다. 카오리 씨는 내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평소대로의 모습인 것 같았지만, 좀 더 꾸미고 온 것 같았다. 오늘은 프로덕션 내의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날이 될 만큼 신경을 쓴 것일까.’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점심 즈음에 모두 함께 벚꽃으로 유명한 공원에 도착해 돗자리를 펴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꽃놀이를 즐겼습니다. 아이돌 친구 중에 아직 어린 아이들이 제 곁에 모여 앉아서 저에게 꽃을 머리에 달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반대로 저에게 벚꽃을 머리에 달아주기도 했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이 저보고 귀엽다고 말해줄 때는 쑥스러워지더라고요.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저는 프로듀서 씨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오늘 프로듀서 씨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틈틈이 프로듀서의 옆모습을 쳐다봤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코토리 씨랑 미사키, 그리고 올스타즈를 담당하는 프로듀서 씨와 함께 앉아 회포를 풀고 계셨어요. 그런데 어쩐지 오늘따라 프로듀서 씨도 저를 틈틈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는데. 기분 탓일까요?’


  ‘며칠만의 휴일이라 그런지, 오늘의 벚꽃놀이를 즐기는 시간이 참으로 각별했지만 내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과연 언제쯤, 아니 오늘 카오리 씨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도 프로듀서로서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니까. 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을 나와 미사키 씨가 전담해서 통솔해야 한다. 이 때문에 카오리 씨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카오리 씨에게 시선을 더 많이 보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모처럼 함께 즐기러 온 날인만큼 카오리 씨가 오늘 하루 웃으면서 보낼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슬슬 자리를 뜨고 하루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죠. 만일 이대로 자리를 뜬다면 프로듀서 씨와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놓치겠죠.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저는 오늘 마저 할 일이 따로 있어서, 여러분들은 먼저 가셔도 되요.”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저를 주목했고, 그 중 몇 명은 제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뒷정리를 할 겸 저녁 벚꽃을 마저 즐기고 가고 싶다고 적당히 구실을 붙여 대답했어요.’


  ‘이제 해산할 시간이다. 지금이 아니면 카오리 씨랑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핑계거리를 대서 카오리 씨를 따로 불러야되겠다 싶었던 찰나, 카오리 씨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하며 공원에 남아 있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저. 그럼 저도 카오리 씨랑 함께 남을게요!”

  ‘일부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양 손을 대고 싹싹 빌면서 양해를 구했다. 미사키 씨와 코토리 씨, 그리고 선배 프로듀서 씨에게 뒤를 맡겼다. 코토리 씨가 나서서 분위기를 중재해주셨다. 감사합니다. 코토리 씨.

  그렇게 모두가 공원을 뜨고 난 후, 뒷정리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검푸른 하늘이 깔리는 저녁이 되었다. 나와 카오리 씨는 뒷정리를 하는 동안 연거푸 손을 겹쳐 잡았지만, 그 때마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카오리 씨의 손이 참 부드럽고 따스하다는 느낌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서로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은 정리를 마치고 난 뒤였다.’


  “저, 카오리 씨.”

  “저, 프로듀서 씨.”


  ‘서로의 말이 손을 잡은 것처럼 겹쳐 나왔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습니다.’


  “저. 프로듀서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여기서 하기보다는, 저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카오리 씨는 손가락으로 공원에 있는 벚나무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벚나무를 가리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벚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더 물어보지 않고 카오리 씨의 뒤를 따랐다. 카오리 씨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진지한 이야기일 것이다.

  카오리 씨는 벚나무 밑에 다다르자, 몸을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돌리고 벚나무를 등지고는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지금 여기서 제대로 들어 주시겠어요?”

  “아. 네...! 말씀하세요...!”


  ‘그래요. 더는 담아두지 않을래요. 설령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 사실. 저. 저는.. 프로듀서 씨를. 사. 사. 사...”


  ‘카오리 씨가 나를 응시하고, 아주 힘겹게 입을 연다. 카오리 씨가 말을 더듬는 것에서부터 가슴이 울렁거렸다. 설마. 설마 나에게 말하고자 했던 말이, 내가 카오리 씨를 생각하는 마음과도 같은 말이었다고?’


  “사랑해요..!”

  

  ‘카오리 씨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 그 이상이 나왔다. 카오리 씨의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그 말을 듣자,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바람이 살짝 불고, 벚꽃잎이 카오리 씨 주변에 흩날린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멈춘 것은 내 심장인 것 같았다. 아니. 멈췄다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가슴이 빠르게 뛴다. 머리를 뭔가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넋을 놓고 카오리 씨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프로듀서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오리 씨의 다음 말에 정신이 들며 죄책감이 들었다. 비록 카오리 씨가 이제야 고백을 했지만, 왜 담당 프로듀서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카오리 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을까. 대답 대신 몸이 움직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카오리 씨를 향해 저절로 다가간다.’


  ‘아주 힘겹게, 프로듀서 씨에게 고백했습니다. 너무 떨리고, 너무 두근거려서, 긍정과 부정이 겹쳐서 서 있는 것이 힘에 부쳐요. 프로듀서 씨에게 물었습니다. 프로듀서 씨의 대답이 듣고 싶어서. 프로듀서 씨가 자신도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주길 바라면서. 그런데 눈가에 눈물이 고여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한 줄기 눈물이 그 때처럼 똑같이 흐르고 있었어요.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바람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보인 것은 바로 프로듀서 씨의 품이었습니다. 프로듀서가 저를 꼭 끌어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씨의 품에 안긴 것을 느낀 순간, 그동안 잠가 두었던 감정의 수도꼭지가 틀어져 프로듀서 씨의 품에서 아이처럼 소리 없이 울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도, 저도 카오리 씨를 사랑해요! 미안해요. 먼저 말하지 못해서, 카오리 씨가 괴로워하게 해서.”


  ‘카오리 씨를 품에 안고 나서, 나도 그동안 품고 있었던 카오리 씨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사랑이란 감정 때문에 많은 시간을 혼자 끙끙 앓고 있었으니까. 카오리 씨가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끙끙 앓았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울면서 다짐했다. 카오리 씨를 마음고생하게 한 만큼 앞으로는 카오리 씨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자고, 그리고 프로듀서로써 카오리 씨를 톱 아이돌의 자리에 올려놓자고.

  그전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소중히 간직해 온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다.’

  

  ‘프로듀서 씨는 포옹을 풀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제 앞에 보였습니다. 작은 선물 상자입니다.’

  “맞다. 이걸 열어보실래요?”

  ‘프로듀서 씨에게서 상자를 받고, 그 상자를 열어봤습니다. 안에는 벚꽃 장식이 달린 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로듀서 씨가 나를 위해서 이걸 준비하고 있었다니..!

  프로듀서 씨는 제 왼손을 살며시 잡고는, 약지에다가 반지를 끼워주셨습니다. 저도 보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저도 프로듀서 씨의 왼손에 제가 직접 반지를 끼웠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살며시 프로듀서 씨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카오리 씨와 입을 맞춘 그 순간이, 호랑나비가 벚꽃을 만나 살며시 앉은 순간이었다. 카오리 씨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렇게 카오리 씨의 손을 제대로 잡아본 것도 처음이다. 새삼 호랑나비 노래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 노래에서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네요.”

  ‘프로듀서 씨는 이어폰을 제 귀에 껴 주고는 호랑나비를 틀어주었습니다. 세상에, 프로듀서 씨도 이 노래를 즐겨 듣고 계셨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짝사랑하고 있던 것도 신기하면서도 기쁜데,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이 공감하고 있었다니.’

  “어머. 프로듀서 씨도 이 노래를 좋아하셨군요..!”

  “카오리 씨도 이 노래를 좋아하셨어요?”

  “네. 멜로디도 흥겹고...”

  “가사도 공감되고...”

  ‘아아. 어쩌죠. 오늘 밤은 그저 사랑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배기지 못할 것 같아요. 오늘 밤의 끝자락까지, 벚꽃에 머무르는 나비가 되어주세요. 프로듀서 씨.’


*


  “카오리 씨. 아침이에요. 일어나세요.”

  “으~으응~ 더 잘래에에에~~~”

  ‘카오리 씨랑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면서, 오늘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아침에 굉장히 약하다는 것과, 우아한 줄만 알았는데 무척 귀엽다는 것. 잠꼬대를 하는 카오리 씨의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지만, 이제는 정말로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카오리 씨를 깨우기 위해 호랑나비를 틀었다.’

  “펄럭펄럭 춤추며 노는 듯이 모습을 보인 호랑나비~”

  ‘세상에. 얼마나 이 노래를 좋아하면 잠꼬대를 하면서 가사를 흥얼거리시는 거지? 카오리 씨는 노래를 완창하고 나서야 겨우 잠에서 깼다. 다음에 카오리 씨에게 노래 커버를 부탁해볼까. 카오리 씨는 정신이 들자, 도로 이불에 콕 하고 들어가 버렸다.’


  “부. 부끄러워요...!!”

  ‘잠에서 깼을 때 프로듀서 씨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아주 제대로 보이고 말았네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프로듀서 씨랑 함께 아침을 보낼 수 있단 것에 마냥 행복할 따름이에요.’

*

  “이거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저는 프로듀서 씨가 옷을 챙겨 입을 때, 프로듀서 씨의 넥타이를 대신 매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침에 챙겨 주는 것에 로망이 있었으니까요.’

  “고마워요. 카오리 씨. 오늘 하루도 힘내죠!”

  “네.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려요. 프로듀서 씨!”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꿈이 이루어졌어요. 저라는 벚꽃에 호랑나비가 내려앉은 이 순간이 꿈은 아니겠죠? 호랑나비에게 조금 더 욕심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엇갈리는 호랑나비가 아닌, 벚꽃 필 때에 내려앉는 저만의 호랑나비가 되어 주세요. 저도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사시사철 피는 벚꽃이 되어 드리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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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에 창작이야기판에 말했던 대로 카오리X프로듀서의 연애물 작품을 싸그리 뜯어 고쳤습니다.

퇴고를 하고 나니 도리어 분량이 더 늘어났네요. 글자 수가 공백 포함 무려 1만 5681자. 원고지 환산 87매.

이 정도면 아예 단편 소설 하나를 작성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어째 지난해 써 냈던 졸업작품보다 훨씬 공을 들인 것 같아요. 팬픽에 이정도 정성을 들이는 제 인생이 레전드네요.

다소 부족했던 부분들을 대규모로 보완하고자 했더니 이렇게 분량이 잔뜩 늘어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제야 큰 거 하나를 겨우 끝마친 느낌이 드네요.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통해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많이 봐주시고 코멘트 남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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